김만석(미술평론가)


1. 이미지 생태계


오용석의 회화는 밀림이다. 회화와 밀림을 등가로 놓았다고 해서 오해해서는 안 된다. 아니, 그의 회화를 밀림으로 은유했다고 해서 정말로 밀림이 아니거나, 회화는 회화일 뿐 오해하지 말자는 익숙한 농담으로 간주할 수 없다. 회화에 대한 반성이 회화에 깃든 환상을 걷어내는 데 있었다면, 오히려 오용석의 회화는 회화가 지닌 마법들을 보다 풍부하게 활용함으로써 이미지의 밀림을 정초하는 데 초점이 맞추어져 있기 때문이다. 잘 알다시피, 밀림이 갖은 초목들과 파충류, 갑각류, 포유류 등을 포괄하는 광범위한 생태계가 자유롭게 혹은 그 내적 원리에 따라서 균형을 이루고 있는 세계라고 할 수 있다면, 오용석의 회화를 밀림으로 간주해야 한다는 진술은 서로 다른 유적 질서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되는 각각의 이미지들이 화폭 위에서 균형과 조화를 이루고 있다는 것을 뜻한다. 물론 캔버스가 이미지의 서식지라고 하더라도 세상의 모든 이미지들이 자신의 존재론적 지평을 막무가내로 캔버스 위에 안착할 수 있다는 말은 아니다. 

즉, 오용석의 캔버스가 갖는 토양에 따라 서식할 수 있는 이미지의 ‘종-속-과-목-강-문-계’의 유형이 구성된다는 것이다. 물론 오용석의 캔버스에 등장하는 이미지들이 캔버스의 내적 논리에 의해 이미지의 계열이 형성된다고 해서, 그것이 반드시 유형화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이미지의 유형화가 이미지를 조직하는 방법을 알려준다고 하더라도, 오용석의 캔버스가 지배적이고 규율적인 이미지의 체계를 구성하는 시스템 아래에서 사물과 이미지가 특권적인 방식으로만 다루어지는 데 대한 비판이 내재하고 있음을 고려하는 것이 훨씬 중요하기 때문이다. 즉, 오용석의 캔버스는 사물과 이미지를 일의적으로만 존재하도록 만드는 방식으로부터 이탈하도록 만들면서 그 사물과 이미지를 다른 방식으로 살도록 만드는 데 더욱 관심을 갖기 때문에 이미지가 유형화되고 있다는 사실보다 다른 국면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아니, 사물과 존재가 지니고 있는 이미지를 다른 방식으로 성장시키는 오용석의 캔버스가 왜 중요한가?

현실의 사물이 갖는 이미지가 원래의 장소로부터 고착되어 특정한 방식으로 이해되기를 강제당하는 것은 일반적이다. 일상적인 사물이나 경험들은 ‘장소’에 고착되어 있는 탓이다. 하지만 장소는 지속적으로 상실되고 있고 사물의 이미지는 부박하기 짝이 없는 것이 오히려 더 현실적이다. 스타일을 통해서 삶과 정체성을 바꿀 수 있다고 믿는 현실이니, 사물과 존재의 고정된 이미지란 불가능하다고 할 수 있다. 주의해야 할 것은 스타일을 통해서 삶을 변경할 수 있다고 믿더라도 사회적 형식에서는 특정한 원리를 통해 정체성의 표지가 변경되는 것을 부정적으로 판단하고 있고 정체성이라는 경계의 표지를 넘는 것에 대한 강력한 금기가 형성되어 있음을 지적할 필요가 있다. 예컨대, 젠더나 국가, 민족, 인종, 섹슈얼리티와 같은 경계에는 ‘기요틴’이 드리워져 있어서 그것을 넘는 자의 목을 잘라버릴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그만큼 이를 넘는 것은 쉽지 않은 것이고 이 경계를 넘어서는 자의 삶은 고통으로 점철되어 있음을 눈여겨보지 않으면 안 된다.

이런 점에서 경험과 기억이 상실되는 자본주의적 현실에서 장소에 특권적인 힘을 부여하고 삶이 추상화되는 현실을 비판적으로 논의하는 다양한 사유들은 새삼 문제적일 수도 있다. 사물이나 존재의 정체성을 고정화하는 이런 전략들은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비판적 논점은 제공할 수 있지만 궁극적으로 사물과 존재의 가능성과 다양성 자체를 제한하고 폐쇄적으로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이 시스템에서의 삶이 자신이 거주할 삶의 장소를 지속적으로 상실하는 데에 있는 것이 사실이라고 해도, 장소 그러니까 고향으로의 회귀를 배면에 깔고 있는 정체성의 정치는 다분히 위험한 지점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즉, 이미지를 다루는 데에는 고착화와 해방이라는 주제가 놓여 있으며 모더니즘 미학이 신화화했던 바, ‘새로움’이라는 ‘미적인 것’은 자명한 것이 아니라 갈등적인 상태의 명제로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사물과 존재를, 그것이 처해 있는 ‘컨텍스트로’부터 해방시키고 사물과 존재를 ‘텍스트화’하는 과정이 근대적 예술이 취해왔던 방식이었다는 것을 잘 알려져 있다. 그러니까, 캔버스로 사물과 존재를 옮김으로써 사물과 존재가 맺고 있는 세계 내에서의 흐름을 차단하고 고립적으로 다룰 수 있었기 때문에 사물과 존재는 그 장소로부터 ‘해방’될 수 있었음과 동시에 원천적으로 추상화된 관계 속으로 존재론적인 비약을 감행해야만 했다. 즉, 이 때 캔버스로 걸어 들어간 사물과 존재는 익명의 관객과의 관계로 나아가야만 했다는 것이다. 캔버스가 해방시킨 사물과 존재는 그런 점에서 다시 캔버스라는 토양 위에서 자신의 운명을 감내해야만 했다. 그것을 우리는 재현이 아니라 표현이라고 불렀지만, 캔버스 위에 등장하는 세계는 기본적으로 ‘재현’을 부정하기는 쉽지 않았다. 그런 점에서 현대예술이 이 재현의 마력으로부터 탈주하고 회화 자체가 가지는 원리를 궁구했던 것도 우연일 수 없다.

오용석은 이러한 재현의 문제를 다루는 것을 애초에 사고하지 않는다. 그것은 재현이 아니라 부재하는 세계를 정초하려는 차원에서 사물과 존재를 캔버스 위에 가지고 온다는 것을 주목해야 한다. 사물의 이미지를 다른 방식으로 생존하도록 만드는 것이 오용석의 캔버스라는 토양이라고 할 수 있는 셈이다. 이 때문에 그의 캔버스가 갖는 토양의 성질과 그가 자주 생장시키는 이미지의 속성들에 대해 주의 깊게 성찰해야만 한다. 이는 단순히 캔버스의 생태 상태가 어떤 것인지를 사회적 조건을 통해서만 탐구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캔버스가 세상의 모든 이미지를 자라게 만들 수 있는 지평이라면, 그 지평 속에서 과연 어떤 이미지들이 생장되는가를 더 밀도 있게 질문해야만, ‘비가시적인 세계’로 내몰리는, 그러나 바로 그러한 방식을 통해서 숙성되고 있는 삶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을 뜻한다. 달리 말해, 정돈되고 규범적인 형식으로 매끄럽게 다듬어진 세계에서 사물-이미지들의 가능성이 최소한으로 제한되고 있지만, 그 사물-이미지가 다른 방식으로 생장하기 위해서는 당연히 캔버스의 토양 자체가 달라져야만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PIEDMONT, 130cmx194cm, Oil on Canvas, 2011 PRIVATE COLLECTION



2. 밀림에서의 외침 : ‘미싱’이라는 형식


그러나 그가 ‘타잔’은 아니라는 것은 미리 말해두어야겠다. 이미지 밀림에서 그가 큰 소리를 외쳐서 입맛대로 달려오는 참한 생명은 없다는 뜻이다. 오히려 그가 큰 소리로 외칠 때 응답하는 이미지들이 과연 무엇인가, 그리고 그 이미지들이 어떤 방식으로 변용되는가의 문제도 중요하다. 캔버스로 안착시킨 이미지들의 원본이 있다고 가정해서는 안 될 뿐만 아니라 역설적이지만 이미지의 밀림에서 큰 소리로 외칠 때 응답하는 사물-이미지들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은 그리 중요한 일이 아니다. 캔버스에 등장한 이미지는 이미 변경된 이미지이고 캔버스라는 토양을 통해서 숙성된 이미지라는 점에서 그것은 현실과 대조해서 얻어질 수 있는 상태로 존재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가 웹을 통해서 수많은 이미지를 수집하거나 갖은 대중문화의 이미지들을 경유해서 작업할 때, 그것들이 갖는 이미지의 기원(고향)은 없으며 뿌리 없는 그 이미지들의 뿌리와 근육을 갖도록 해 준다는 점에서 그의 캔버스는 ‘없는 세계’를 구성하는 ‘이종의 서식지’라고 할 수 있다. 물론 타잔처럼 그가 이미지를 힘차게 외칠 때, 캔버스로 모든 이미지들이 다 온다고 해서 그 이미지들이 무조건 캔버스에 발을 들여놓을 수 있지는 않다. 이종이 탄생하는 데도 일종의 독특한 원리가 작동하기 때문이다. 

이 원리를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영원히 이어붙일 수 있는 천이고 다른 하나는 사진 이미지이다. 이 양자의 원리는 ‘미싱’이라는 매개적 방식을 통해 이질적인 두 사물이 결합할 수 있으며 이를 통해 새로운 종이 생성된다. 그렇다면 오용석에게 회화는 ‘미싱’이라는 ‘기술’이 아닐까? 예술이 오래전부터 ‘기술’(techne)로 간주되어 왔다는 것을 떠올려 보자. 희랍철학에 따르면 기술은 세계를 조화롭게 구성하는 원리로 이해되고 있었고 곧 예술은 폴리스[도시]에서의 삶 혹은 생명들이 맺는 관계를 형성하게 하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마치 정보통신기술이 거리[관계]를 이어주는 방식이듯이, 예술 역시 삶 혹은 생명 사이를 연결하는 것으로 간주되었다는 것이다. 예술가들이 일종의 기술자이고 이들이 사멸해버린 세계나 현존하는 세계로 인정받을 수 없는 세계를 관람객들과 접속하게 만드는 (간혹 귀신들린) 존재들이었던 셈이다. (따라서 오용석의 캔버스가 결합하도록 만드는 세계와 그것을 바라보는 관객들이 결합되는 방식은 분별해서 사고할 필요가 있을지 모른다. 오용석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만 해도 충분히 힘겨운 일이니 후자는 다른 방식으로 질문해야 할 터이다.)

천-사물-존재-사진-이미지들의 결합과 미싱이라는 원리는 다음의 두 절을 통해서 살피는 것이 필요할 듯하다. 


미싱은 잘도 도네, 돌아가네 : 식구들이 모두 일을 찾아 어디론가 사라지고 집에는 아이와 엄마가 남아 비오는 오후를 견디고 있다. 슬레이트 지붕에 떨어지는 비를 보며 막 김치전을 함께 만들어 먹던 모자는 겨울 내내 견딘 이불 호청을 새로 갈기 위해 마루에 미싱을 요란하게 꺼낸다. 아이는 엄마의 요청에 이불을 가지런히 펴고 가위로, 조심스레 잘 박음질된 이불의 안팎을 분리한다. 짧은 아이의 탄성. 위쪽 천을 뜯자 속에는 하얀 솜으로 가득하다. 저 붉고 화려한 천속에 저렇게 하얀 솜이 가득 들어 찰 수 있다니, 엄니, 와, 신기해요. 신기한 건 그것만이 아니란다. 보렴, 천은 버릴 것이 하나도 없으니, 미싱만 있다면 여러 가지 천들이 더 큰 천으로, 더 큰 천은, 그보다 더 큰 천으로 이어 붙일 수 있단다. 그러니, 속에 든 것만큼 껍질이야말로 얼마나 중요한 것이냐. 엄니, 그럼 세상은 온통 껍질들이네? 그럼, 이 땅위에 있는 건 모든 게 연결되어 있단다. 

팔과 다리, 몸통을 보렴. 쓰이는 데가 모두 다른 데도, 이어 붙인 흔적을 찾을 수 없이, 한 몸이듯, 세상은 서로 다른 여러 몸들이 이렇게 저렇게 붙어 있는 거야. 나는 엄니 몸과 붙어 있는 거야? 붙어 있기도 하고 떨어져 있기도 해. 잘 모르겠다, 엄니. 붙어 있다가 떨어졌다, 다시 붙은 거라고 해야 할까? 떨어져서 붙은 거라고 해도 될 거야. 아니지. 그렇다고 모든 천들이 함께 붙는 건 아니란다. 이어붙이는 방법은 붙이는 사람들에 따라 모두 다르니, 방법도 한이 없고 모양도 한이 없다고 해야 바르다고 해야 할지 모른단다. 너를 보렴. 너야말로 이어 붙여 태어난 아이란다. 누구나 다 이어 붙여 태어나니, 너는 온 몸이 이어 붙은 채로 태어난 게지. 엄니도 이어 붙은 거니까, 나는 언제부터, 어떻게, 누구들의 이어 붙음일까? 엄니, 이어 붙으면서 찢어지기도 해야만 하는 건 뭐 때문인 거야? 그건 ‘사랑’ 때문이란다. ‘사랑’이 이어 붙이고 사랑이 떼어 놓는단다.

엄니, 근데, 어제 지갑에서 십 원짜리 동전 다섯 개 훔쳐 ‘깐도리’ 아이스크림 사먹은 거 알고 있겠네? 알다마다. 그런데 왜 누이들을 야단친 거야? 네가 이미 그 순간에 야단을 맞고 있었기 때문이란다. ‘죄’는 결백한 자에게 한 없이 가벼운 거란다. 천을 이어붙일 때, 잘 이어 붙이려면 한쪽 천과 한쪽 천이 평평하게, 나풀거리지 않게 잘 놓여 있어야 하는 게야. 그것이 죄라는 걸 알려면 누이들이 혼나는 게 네게 더 큰 죄가 되지 않겠니? 누이들의 이유 없는 꾸지람은 네게 죄의 무거움과 너와 네 누이들이 모두 저 천처럼 묶여 있다는 걸 알려주고픈 엄니의 마음이란다. 엄니의 찢어지는 마음이야? 마음까지 이어 붙은 건가봐. 다시는 엄니 주머니에서 십 원짜리 동전 꺼내지 않을게. 비가 후드득 떨어지고 미싱이 덜덜덜 돌아간다. 빗소리 미싱 바늘과 실에 실려 천과 천 사이에 부드럽게 스며든다. 천 하나의 세계가 다른 천과 만나 무한이 된다. 하나는 이미 여러 개다. 


추억은 방울방울 : 오용석에게 사진첩은 작업의 밑거름이다. 그러나 제의와 의례적 관습에서나, 그러니까 결혼식과 같은 형식 아래에서 생산되는 사진첩을 제외한다면, 사진첩은 요즘 거의 볼 수 없다. 그래서 그가 작업에서 사진첩을 사용한다고 할 때, 그는 세계 전체를 하나의 사진첩으로 간주하고 있다고 판단하는 것이 옳다. 왜냐하면 그에게 세계는 시간의 순간적 정지와 사물의 국부적 형태의 종합이기 때문에 그러하고 이미지의 누적적 체계로 판단하고 이해하고 있어서이다.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그의 작업이 사진첩을 밑거름으로 활용한다고 할 때, 일반적으로 풍경의 재현이나 인물의 표현을 위해 사진을 활용하는 방식과는 거리가 멀고 대상을 정확하게 재현하기 위해서 활용되는 보조적인 수단으로서도 이용되지 않는다. 오히려 사진이 말하기를 그친, 그렇다고 바르트의 용어법에서의 ‘풍크툼’(punctum)처럼 사진 이미지가 관람자-주체의 고요한 내면에 상처를 내는 방식과는 달리, 사진에 등장한 이미지가 말하지 않는 가능성을 캔버스 위에서 가능하도록 만든다. 

달리 말해, 그는 사진 이미지가 탈프레임화한 세계를 새로운 프레임으로 재구축하려고 시도한다. 이는 사진 이미지를 이중적인 방향으로 활성화한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먼저 단순히 사진 이미지에 포착된 형상 바깥의 세계를 포착하는 게 아니라 프레임화하는 시선을 굴절하고 왜곡하는 방식을 채택함으로써 이루어진다. 즉 상식적이고 정상적이라고 간주된 시선이 이른 바 합법적 시선으로 통용되고 있다면 이 시선이 갖는 폭력적이고 강제적인 시선권력을 자연화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세계를 보는 방식 자체가 결정되어 사건/사물을 바라보는 입장이 몇 가지로 제한되고 있는 현실에서 오용석이 사진 이미지를 변경시키는 것은 필연적일 수 있다. 가령, ‘말’과 관련된 이미지들은 종과 동물로써 말로 더 이상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그러니까, 사진이 장소로부터 떼어 낸 이미지를 오용석은 캔버스를 통해서 다른 세계에 이어 붙인다는 것이다. 물론 그 때 캔버스는 완결된 세계일 수 없고 하나의 접속점으로 기능한다.  


‘미싱’이라는 방법은 작가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중대한 캔버스의 생장 원칙이다. (주의하자. 성장이 아니라 생장이다.) 미싱이 떨어져 있는 사물과 존재를 결합시키는 방법, 더 정확하게 말해 ‘기계’라고 한다면, 이전의 오용석의 작업에서 볼 수 있었던 신체적 뒤틀림이나 살의 혼융을 거듭한 이후에 등장한 존재론적인 결합관계를 의미하는 이미지들에서 수행했던 방법과는 궤를 달리하는 것처럼 보인다. 달리 말해, 이미지를 특정한 주제와 소재에 적합하도록 캔버스에 옮겨오기는 했지만, 그 이질적 이미지들이 결속되지 않았으며 이미지의 중첩은 실질적으로 일어나지 않았다는 말이다. 이번 전시에서 오용석은 다양한 이미지를 동시적으로 존재하도록 만드는 기계를 회화에 도입했다는 것. 거기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이나 사물들은 모두 박음질된 상태이며 그들 혹은 그것들은 항상 이미 ‘여러 가지’로 절합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3. 캔버스의 두께 : 외로움의 밀도


결속은 하나가 되는 것이지만, 그보다 우선 이질적인 두 존재가 엮일 때 결속이라고 부를 수 있다는 점에서 하나가 되었다는 것보다 이질적인 두 존재라는 차이가 근본적이라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캔버스가 작가와 관객을 매개하는 미디어라고 할 때, 관객/작가가 한 몸이 된다고 하더라도 근원적으로 이 양자가 지닌 차이가 있듯이, 캔버스가 관객/작가의 결속을 도모하더라도 이 양자가 동일하게 묶일 수 없듯이 말이다. 이질적인 두 이미지가 뒤섞이고 이미지가 누적적으로 캔버스 위에 도입된다고 해도, 이들은 서로 분별되기 때문에 결합될 수 있는 것이고 바로 이런 사정 때문에 오용석의 캔버스에서 이미지는 하나이면서 항상 여러 개로 포옹하고 있는 상태이다. 

그러나 여기서 더 근본적으로 질문해야 할 것은 이미지들의 결속이 대체 왜 필요한가이다. 왜 단독적인 이미지보다 이미지들의 결속을 초래해야 하는가. 캔버스가 왜 이미지들을 불러 모으는가. 이 격렬한 호출과 호흡은 외로움/상실의 문제이며 동시에 애도 불가능성의 문제와 관계된다. 내 이웃이나 내가 이웃이라고 간주하지 않았던 존재의 상실이 나에게 고통을 구성할 때, 놀랍게도 내 이웃이나 내가 이웃이라고 여기지 않았던 존재들이 ‘나’를 구성하고 있었다는 것을 뜻한다. 이는 ‘나’라는 단독적인 의식이 실은 언제나 나 이외의 요소들과의 관계에서만 성립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며 한 존재는 항상 나 이외의 존재가 처하는 상실에 매우 취약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좌이다. 우리는 이를 외로움이라고 부르며 이 외로움에 탓에 반복적인 결속을 요구/요청한다. 

그런 점에서 하나이면서 여러 개인 이미지는 완전히 하나로 포개지는 거울 이미지가 아니다. 이 이미지는 한 개별적 존재가 여러 개로 결속되어 있는 사태를 지칭하고 있다. 이 결속이 와해되는 순간을 흔히 상실이라고 부르며 보통 이 사태에 직면해서 성공적인 애도를 수행하고 상실을 의례와 제의로 처리하지만, 오용석은 성공적인 애도를 수행하기보다 그것에 실패함으로써 외로움을 저지한다. 말하자면, 애도에 성공하는 순간 우리는 상실되어 버린 존재와 영원히 결속할 수 없는 외로움에 직면하게 되므로, 애도를 불가능하게 만듦으로써 외로움이라는 사태에 응답하고, 오히려 이 때문에 더 많은 결속들을 수행하게 된다. 그렇다고 외로움이 소멸하는 것은 아니지만, 바로 이러한 감각이 ‘이웃’과 더불어 ‘나’의 존립가능성을 확인하게 만들어주는 만큼, ‘이웃 혹은 대상’은 지배하고 통치할 수 있는 존재일 수 없다. 아니, 오용석의 캔버스는 이미지/존재들의 상실에 저항하는 존재론적인 보살핌의 장이라고 할 수 있다. 마치, 재앙과 파국이 새로운 삶, 그러니까 다른 방식의 사랑과 연애를 구성하도록 만드는 것처럼 말이다. 그의 사랑이 외로움과 더불어 ‘수행’된다는 것은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닌 것일까? 2011


<[Tu] 2011> 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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