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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현 : 몽상, 카프카의 세계로 ARTINCULTURE 2011

정현 (미술평론가)


현대문화에서 B급 정서 또는 '오타쿠'는 이중적으로 소비된다. 하나는 주류문화를 거부하는 하위문화의 주체로서의 특권으로 나타나고 다른 하나는 반사회적인 고립된 인물들이 모인 '나쁜 취향'의 공동체로 인식되는 경우다. 그러나 자본주의는 이러한 하위문화의 이중성을 상품화하고 유행의 전위로 출격시킨다. 엽기적이고 괴기한 '하위문화적 이미지'가 하이패션의 일부와 꼴라쥬되는 현상은 모든 것을 욕망화 하는 트랜드의 힘을 과시한다. 결국 트랜드란 여러 의미로 다수의 논리에 속하는 것이다. 물론 하위문화라고 여기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다. 그들도 더 이상 소수로 불리는 희생양만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런 유행이 비단 상품의 세계에만 머물지는 않는다. 현대미술에서도 엽기, 비이성, 광기, 괴물, 부조리, 악몽과 같은 자극적인 주제, 소수 취향의 세계관, 프란시스 베이컨의 '기관 없는 신체'와 타카시 무라카미의 '귀여운 요괴'는 전세계적으로 순수/응용의 경계를 넘어 여전히 많은 젊은 창작자들에게 영감을 주는 세련된 괴물들이다. 그리고 이 세련된 괴물의 이미지들은 탄생의 신비가 없이 전지구적으로 복제되고 증식되고 있다. 지나친 시각 중심적 탐닉이 낳은 폐해가 아닐 수 없다. 망막주의적 감각의 의존에서 벗어나 몽상적인 이미지의 기원은 억압적인 체제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예술가의 시적 몸부림이었다는 것을 되새길 필요가 있다. 


카프카적 웃음

권순영의 회화는 부조리극을 재현한 것처럼 인간의 광기와 잔인함이 동화적 상상력으로 펼쳐진다. 귀엽게 웃고 있는 미키와 인형들은 내면이 없는 기관 없는 신체, 들뢰즈 식으로 말하자면 탈영토화 된 얼굴을 가진 것들의 이야기다. 전시제목 "뭇웃음"은 작가가 만든 조합어로 그에 따르면 덧없는 웃음, 그러니까 흔해빠진 웃음으로 해석할 수 있다. 어쩌면 뭇웃음은 기계적으로 웃는 자동인형의 표정과 다르지 않다. 그것은 친절함도 무례함도 아닌 비인격화 된 '카프카적 웃음'이다. 그의 회화 속 인물은 대부분 눈빛을 잃어버린 채로 웃고 있다. "오르골"에서는 팔이 절단되거나 눈알이 빠진 토끼 얼굴에 여성의 몸을 가진 인형들을 일본 망가의 여주인공을 닮은 (개인적으론 캔디를 닮은) 소녀들이 기계장치를 조정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인형들은 무표정하게 기계적으로 웃고 있으며 수많은 캔디는 슬퍼도 괴로워도 절대 미소를 잃지 않는 것처럼 빈 웃음을 날린다. "수태고지"는 성모의 무염시태를 괴기스럽게 제시하고 있다. 마치 중성화된 나팔관처럼 보이는 내장기관이 괴물처럼 화면 오른쪽 하단을 차지하고 수많은 뭇웃음들이 그것 주변을 맴돌고 있는 장면은 아마도 여전히 여성에게 강요되는 사회적 가치관에 대한 풍자일 것이다. 이 회화들은 미디어에 등장하는 수많은 사건들의 일부를 발췌하여 서로 섞어놓은 것으로 방법론적으로 본다면 초현실주의적 꼴라쥬에 가깝다. 하지만 권순영은 서로 관련이 없는 사건들을 조합하면서 이 회화 속 인물들의 표정에 빈 웃음을 담아낸다. 표현할 수 없는 슬픔의 패러독스로서의 뭇웃음을 작가는 "수많은 연약한 희생자에게 보내는 애도"라고 표현했다. 카프카의 미완성작 "성"은 현실의 부조리를 드러내는 것은 권력기관의 통제로부터 나약한 인간상을 보여주고자 했다고 해석되곤 한다. 카프카적 세계란, 판타지적 요소로 포장되어 있지만 사실상 그것은 현실에 대한 은유로 전체주의적 이념과 그것으로부터 영향을 받는 개인의 관계를 보여주기 위한 일종의 위장의 장치였다. 그렇다면 권영순의 판타지 속에 녹아있는 공포와 슬픔 그리고 웃음은 고전적 의미의 자기정화라기보다는 사도-마조히즘적인 현실의 이중성으로 보아도 무방할 듯하다. 


관계의 재구성

주로 오용석의 작업은 범죄사건으로부터 시작되곤 했다. 사건 현장은 그에게 매우 중요한 출발점이다. 제도적 관점에서 범죄란, 몇 개의 단서만으로 육감과 지식으로 사건을 재구성해 '법의 테두리 안에서 풀려야만 하는 진실'이라면, 오용석은 범죄로부터 인간관계 속에 스며있는  지배의 욕망에 관해 묻는다. 초기작에서는 이러한 욕망이 폭력에 의한 희생자를 애도하는 모습을 그려졌다면 이번 금호미술관에서의 전시에서는 감정적 충동보다는 빈-의미의 이미지들이 혼재된 상태로 전개된다. 이미지보다는 이미저리에 가까운 전시의 배후엔 그만의 세계가 편린으로 흩뿌려져 있다. 감정이 사라진 육체의 매커니즘만으로 작동하는 포르노그래피, 파졸리니나 대릭 저먼과 같은 광기로 가득한 영화감독의 영상들, 아비정전과 같이 잃어버린 모성을 찾아 떠나는 열대림의 무거운 공기와 막막함, 19세기-20세기 초 미국   개척기의 남자 동성 간의 사진집 Dear Friends: American Photographs of Men Together 1840-1918,  이상과 같은 상상력의 원천은 작가의 일상을 엿볼 수 있는 단서들이다. 다시 말해 이 전시는 작품들의 관계에 의해 완성되는 (무한의) 퍼즐이며 또 다른 관점으로 보면 이곳은 하나의 사건 현장이 된다. 전시제목[Tu]가 불어의 이인칭 '너'를 지시하면서도 발음기호로 영어의 Two를 동시에 연상할 수 있는 것은 "나와 너"라는 자아의 실존의 위한 절대조건인 타인의 존재에 대한 물음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사실 오용석의 작업은 지속적으로 서로 연결되어 있다. 그 바탕에는 폭력이라는 절대적 타자의 존재가 숨어있다. 광주 출신인 그에게 폭력은 광주항쟁이란 사건으로부터 시작되지만 민중미술이란 이즘을 따르는 것은 아니다. 이후 그의 작업은 인간관계 속에 숨어있는 사도-마조히즘 적 욕망을 회화적 주제로 건드린다. 지배자와 피지배자, 권력과 희생. 욕망은 이중적이다. 타인을 내 것으로 만들기도 하지만 스스로 자아를 버리고 타인에게 귀속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욕망은 권력을 생산하고 권력은 대개 획일화의 함정에 빠진다. 카프카의 소설 또한 이런 함정에 빠진 세계를 그린다. 그래서 카프카적 세계는 환상적일 수 있다. 즉 카프카적 판타지란 인간조건과 유령과 같은 권력(관청)이 등장하는 것처럼 말이다. 


시적 판타지

판타지 미학의 흥미로움은 비현실적인 유토피아나 일차원적인 풍자나 조롱에 있지 않다. 카프카의 소설이 매력적인 까닭을 밀란 쿤데라는 비시적인 주제를 시적 소설을 이끌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권순영과 오용석의 회화가 흥미로운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들의 판타지에는 인간과 인간조건에 대한 물음이 녹아있다. 담백한 화풍과 유머 속에 배어있는 상실의 아픔을 그린 권순영이나 오용석 회화의 크리미한 질감과 어두운 색채가 발산하는 비밀스러운 매노로그(Man-a-logue: 남자의 독백) 모두 그 바탕에는 맹목적인 삶의 강령을 추구할 수밖에 없는 전지구적 현상의 빛과 그림자를 담아내려는 시도였다. 시적 몽상은 예술가의 특권이다. 하지만 그것은 또한 현실에서는 일어날 수 없는 불가능한 세계, 비이성적인 광기에 대한 꿈이기도 하다. 이런 예술가의 몽상은 단순히 미지의 세계를 구축하는 상상력의 소산만은 아니다. 그것은 현실과 깊은 관계를 맺고 있으며 현실에서의 부조리를 시적 몽상의 세계로 펼쳐 보일 때에만 가능한 것이다. 예술로의 도피란, 부조리한 현실에 대한 비꼬기이며 인간이란 무엇인가를 묻는 실존적 질문의 장이 된다. 카프카의 글쓰기도 그랬다. 차라리 하룻밤 악몽에 가까운 그의 소설 속 인물들은 기계적으로 묘사된다. 자아보다는 제도에 의해 규정되는 등장인물들의 부조리함을 훗날 ‘카프카적 (Kafkaesque)'라고 부른다. "변신"의 그레고르도 "성"의 K도 자신의 실존을 스스로 인식하지 못한 채  제도에 의한 존재를 인정받기만을 원한다. 거대한 곤충이 되어서도 그레고르는 직장만을 염려하고 K는 권력의 중심인 성 주변에서 영원히 맴돌면서 지배자의 부름을 기다린다. 밀란 쿤데라는 '카프카적'이란 현재 전지구가 겪고 있는 비인격화와 관료주의화의 과정과 다르지 않다고 지적한다. 그는 "카프카의 소설은 이러한 세계에 대한 몽환적이고 상상적인 과장이다. 전체주의 국가는 그것의 산문적이고 물질적인 과장이다“라고 말했다. 판타지가 무엇으로부터 생성되는지 다시 한 번 진지하게 묻게 되는 말이다.  


<아트인컬처 201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