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희(미술비평)

 

석양이 지는 해변에 서있는 소년의 모습을 바라보는 한 노인이 있다. 해변인데도 흰색 중절모에 흰색 양복에 흰색 구두를 신고 의자에 누워있다. 땀을 흘리고 있고, 좀 더 젊게 보이려고 한 회분이 땀에 지워져 내리고 있다. 태양은 수평선 아래에 걸쳐 사라지기 전, 가장 아름다운 빛을 내뿜고 있고, 소년은 그 빛을 모두 한 몸에 받아 눈부시게 빛나고 있다. 그가 페스트가 창궐하기 시작하는 베니스를 빠져나가지 않은 것은 오직 그 소년 때문이다. 이미 자신의 몸이 수명이 다해간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조금이라도 가까이 젊음의 광휘를 맛보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어두컴컴한 뒷골목을 따라가면서도, 긴장과 동시에 행복감을 느꼈던 것을 기억한다. 기침할 때마다 손수건에 묻어나는 선혈을 보면서도, 오히려 자신의 얼굴에 안하던 화장을 한다. 이 순간에도 자신에게 이런 욕망이 남아 있다는 것 자체가 놀랍게 느껴진다. 그래서 더더욱 소년을 계속 바라보고 싶어진다. 이야기를 하거나 몸을 만지고 싶다는 욕망은 존재하지 않는다. 금빛으로 빛나는 해변에서 소년이 발광하는 것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그는 만족스럽다. 몸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리는 데도 불구하고 해변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마치 마법에 걸린 것처럼 소년의 주위를 방황한다. 조금이라도 젊어 보이려고 염색한 머리카락에서 검은 물이 식은땀을 따라 흐른다. 시야는 서서히 흐려진다.

---- 오용석, 기사들의 춤, [Tu], 2011





  인물들은 "환희에 가득 찬 듯" 발광하는 색채들에 휘감겨있다. 그의 두루마리 그림 <성스러운 밤, (2012)>을 포함하여 최근 작품들을 보면, 빛으로 변모하는 색들에 사로잡힌 몸들이 회화가 되고, 색이 되고 있다. 그런데 그간 오용석이 주로 소재로 삼아온 그 몸들은 한때 잔혹한 폭력의 무기력한 희생양이기도 했고, 조롱거리였으며, 볼거리였다. 또 한때 그 몸들은 젊고 싱싱하고 매끈하여 격렬하게 성애의 눈길에 휘감기고, 손길에 주물러지며, 어루만져지고, 성욕의 게걸스런 탐욕의 혀로 핥아졌던 몸들이다.   실제 우리 삶에서 발생하는 폭력과 사랑의 관계, 그것이 작동하는 방식은 매우 닮아있다. 욕망의 관계에서 벌어지는 모든 행위들은 어찌보면 사도-마조히즘적인, 주인과 노예의 지극히 탐욕스러운 변주들인지도 모른다. 오용석의 페인팅에서의 몸들은 얼핏 보면 매우 건강하고 섹시한 남성-모델들처럼 보인다. 그것은 볼거리-대상의 역할에 비교적 충실하다. 그런데 사실 오용석의 몸들에는 비하인드 스토리가 있다. 그들은 여태껏 자유롭지 않은 사랑의 관계 혹은 모종의 관계, 주인-노예, 가해자-피해자, 사도-마조히즘적 페티시의 관계에 얽힌, 결박당한 몸들이었다.

 

  특히, 최근 2012-2013년의 오용석의 그림들을 보면, 이 몸들은 어딘지 무게, 육신의 덩어리란 느낌이 소거되어있다. 아니 무엇인가로부터 풀려난 듯 보인다. 이 몸들이 아무리 과거 한때 고문당하고, 살해당해 난자당했을지라도, 혹은 욕망의 게걸스럽고 탐욕스런 손길에서 결국 비극적인 운명을 겪었을지라도 지금의 그 몸들은 어떠한 비하인드 스토리도 갖지 않는다. 어떠한 관계, 그것이 폭력적인 것이건, 성애적인 것이건 간에 그 여타의 관계들로부터 초연하다. 이제 몸들은 단지 색으로부터 배어 나온다. 얼굴만 둥실 떠 있거나, 색-자연 배경에 배어버렸다. 여전히 실루엣만으로 그 흔적만을 남긴다. 불분명한 몸들의 제스처들은 체위만으로, 포즈만으로, 표정만으로 엉켜있다. 즉 쾌락의 대상으로서의 제한된 육신을 벗어난 껍데기 혹은 탈주체화된 이 몸들은 육체를 떠나고 관계를 떠나버린 채 행위만을 반복하고 있다. 이제 몸들은 망각한 자들의 껍데기가 되어버렸다.  제스처들만 남은 몸들은 기억의 찌꺼기인지도 모르고, 자유로운 새로운 대상들인지도 모른다. 어쩌면 색들이 밝게 발광할수록 그 역할은 "승화"의 책임을 떠맡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고 보니 몸들은 한결 편안해졌다. 그리고 이제 폭력의 흔적들이 많이 지워졌다. 가령 발광하는 색채들에 휘감겨 색채가 되고 있는 이 몸들이 과거 폭력적인 관계와의 단절이거나 지극한 망각에 의해 자유로워진 몸들이라면, 당연 그 단절과 망각은 쓰디쓴 고통스러운 상실을 겪었어야 했을 것이다. 그 상실에 대한 애도의 과정에서, 몸들, 추억들, 이미지들, 오브제들은 지속적으로 반복해서 등장해왔다. (나는 지금 오용석이 그간 그려온 전체 그림들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런데 여태 반복되어온, 다시 말해 유령처럼 계속 불려 나온 오용석의 몸-소재들은 <성스러운 밤> (2012)에서 드디어 장례를 치르고 한 번의 푸닥거리로 영원한 굿바이를 하게 되는 것이 아닌가싶다. 이번 전시의 특징, 밝은 색, 아니 밝다못해 발광하며 빛이 되려고 하는 색들은 큰 변화이고 시도이다. 나는 거기에 감히 몸들에게 단절과 망각과 "승화"의 계기를 부여하려는 것이다.  이것이 만일 승화의 계기라면 위에서 인용한 오용석의 묘사(그것은 영화 <베니스에서의 죽음>의 장면을 보는 듯 하다)에서처럼 그것은 치명적인 탐욕의 운명이 치닫는 마지막 장면에서부터 출발한다. 어떠한 대상에 결박된 이 욕망의 운명이 그 쾌락의 정도를 모두 탕진하였을 때 새로운 욕망은 새로운 대상을 찾을때까지 끊임없는 림보와도 같은 죽음충동의 상태에 머문 채로 좀비의 상태로 유지될 수 밖에 없다. 그런데 그것이 바로 사실 현대의 고민하는 주체들의 초상이다. 쾌락도 우울함 조차도 작동하지 않고 욕망의 기능이 바닥을 쳤는데, 습관적인 유희와 거래만이 지속되면서 '생명' 차원을 고집해야하는 것. 그 자체가 고민이다. 즉 반-죽음 상태의 고요 속에서 죽음충동만이 소리없는 춤판을 벌이고 유령들만이 난무하는 마당에 도무지 할 것이 없다는 것이다.  망각하지 못하는 자는 듬성 듬성 벌어진 기억의 틈새에 매달려 산다. 그러고 보니, 벌써 오용석의 첫번째 개인전 <Blow Up>(갤러리정미소, 2007)으로 인연을 맺은 것이 벌써 6년 전이다. 지금 얼핏 기억에 남는 것은 그가 채집한 소재였던 실제 인물들(나진스키, 엘리자베스 쇼츠, 조이 스테파노)의 잔인하고 비극적인 스토리와 그것을 회화라는 사치스러운 매체로 그리면서 작가가 뱉어내던 이야기들이었다. 전시장에서 이 이야기들은 물컹한 페니스들과 더불어 강한 색채의 물감으로 반죽되고, 짓이겨져 캔버스에 그려졌다. 법의 차원에서는 도저히 다스릴 수 없는 인간 욕망의 사악하고도 고혹적인 사도마조히즘적 폭력의 양상들, 그 폭력의 과정에 어쩔 수 없이 눈길을 사로잡히는 공범자이자 쾌락주의자로서의 관람자. 그 관람을 당시 전시를 하면서 우리는 같이 무대에 세웠고, 새로운 볼거리로 내세웠었다. 그 관람의 시선이란 언제나처럼 폭력의 결과에 무기력하고 무책임한 자리에서 지극히 잔인한 관람을 지속한다. 폭력의 현장과의 관람의 거리는 아슬아슬하게 가깝지만 안전하다. 그 관람은 그렇기에 점점 더 자극적인, 쾌락적인 차원을 추구할 수 있다. 그렇지만 그 쾌락의 운명은 쾌락이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 어떤 욕망의 궁색한 바닥을 치는 것으로 치닫는다. 그 순간 쾌락은 매혹된 대상들과의 관계를 새로 설정하여야만 되살아나는 새로운 운명의 길로 접어든다. 그리고 오용석의 전시는 시작되었다.  슬프지만 애도하지 못하는 자는 도저히 과거의 기억을 떨쳐낼 수 없는 불구자이다. 망각하지 못하기에, 슬픔이 치유되지 않고, 애도가 완결되지 않는다. "회화"라는 행위가 소극적으로, 혹은 개인적으로나마 어떤 애도의 작업이 된다면 어떨까. 아니, 다시 말하자. 애도하지 못하는 자의 초상을 통해서 애도를 무대화한다면 편이 낫겠다. 사실 오늘날에는 그 누구도 제대로 "애도"할 수 없다. 온갖 상실들, 가령 개인적인 차원에서 사랑하는 사람이나 가족과 헤어졌거나 잃고 나서 그 상실에 대해 슬퍼하고 극복하고 새로운 대상을 찾을 때까지의 그 과정을 겪을 수가 없다. 아니 그럴 겨를이 없거나 아니면 애도의 방식이 이미 프로그래밍이 되어 있기 때문에 애도는 너무 완벽하게 끝나는 듯 보인다. 마치 슬픔의 정도와 애도의 방식 혹은 기간은 비례적으로 계산되는 듯 치뤄지고 정작 애도의 주체는 정신만 혼미해지고 만다.  집단적인 차원으로 확장하여보면, 국가적 사명을 달성코자 하는 과정에서 역사의 자취들은 쉽게 지워지고, 없어지고, 부셔지고, 잊혀졌다. 그 과정에서 상실된 그 무엇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 무엇(도대체 무엇인지 이젠 정말 잊어버렸나보다)들을 매장시키고 그 매장-상실에 대해서 그리워하거나 애도하고자할 때 무엇이 그 자리를 차지했는가? 대부분은 그 상실의 책임을 묻기만 하거나, 혹은 그 상실의 값이 얼마 얼마로 매겨지는 식으로 처리되고 말았다. 조금 서설이 길었지만, 애도는 단지 개인적인 차원에서 머무는 것이 아니며 그 수행은 절대 완벽할 수 없다. 애도는 완벽하게 끝나는 것이라기보다는 다른 차원으로 승화되는 과정이라고 하여야할 것이다.  그간 줄곧 봐온 오용석의 작업을 보자면, 수차례에 걸친 반복적인 행위들 속에 애도의 과정이 담지된 것이 느껴진다. 작품들에는 항상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어떤 이미지들이 있고, 그 안에 관능적이면서 동시에 차갑게 느껴지는 몸들이 있다. 채집된 이미지들은 지속적으로 반복, 왜곡되어 등장한다. 여기에 지배적인 정서는 비극적이고 외롭고 스산하고 우울한 느낌들이다. 그런데 항상 그렇듯 이 느낌들은 '대상'들의 주변을 서성이기만 한다. 만남은 어긋나고, 관계는 절단되며, 대상과의 거리는 좁혀지지 않는다. 아무리 그림에서 몸들이 서로 엉키어있거나 붙어있는 듯 보여도 말이다. 이 느낌들은 주로 그의 작업 노트에서 지배적이다. 근데 이 서성이는, 소유되지 않고, 소유하지 않고, 항상 이별이 예견되는 이 느낌은 우리에게 익숙한 느낌이다. 즉 뭔가를 소유하지 못하였기에 한 번도 제대로 상실해본 적도 없고, 그래서 애도해 본적도 없는… 단지 뭔가 갑자기 항상 들이닥쳐 뭔가를 앗아가서 허망한 그런 느낌이다.  2011년의 개인전 <Tu>(금호미술관)는 어떤 불가능한 관계와 그것의 비가시성, 그 때문에 더욱더 절망적인 정서에서 비롯된 듯 보인다. 군상(기사들의 춤 : 카우보이 댄스 스태그, 2011)에서 인물들은 집단적으로 어울려있지만 제각각이고, 떠난, 사라진, 사라질 것들에 대한 애절한 정서가 가득하다. 실루엣만으로 암시되는 어떤 대상의 자취들. 그런데 이는 단지 개인의 경험에서 비롯된 것이라기보다는 집단의 기억이 전이된 것이라고 하는 편이 낫다. 그런데 집단의 기억은 반복된 상실들에 무감각하여 도대체 무엇을 잃었는지조차 모른 채 불감증에 걸려버렸다. 그리하여 헤어짐-상실-망각은 무감각하게 반복된다. 쾌락이 그것의 작동기제가 멈추었을 때 새로운 대상들을 찾고 새롭게 관계를 만들어야 한다면, 상실에 대한 슬픔의 눈물이 메말랐을 때 대상은 어떻게 거듭 날 수 있을까, 그리고 어떤 새로운 관계가 형성될 수 있을까. 오용석의 2012년 개인전 전시 제목<제 8장 성스러운 밤_그리하여 밤이 밤을 밝히었다>에서처럼  어둠은 밤을 밝히는 유일한 배경이다. 마찬가지로 우울하고 곤혹스럽고 고통스럽고 잔혹하며 탐욕스러운 배경을 갖는, 노랑, 흰색, 블루, 검정, 퍼플로 묘사된 몸들은 이제는 발광하는 노랑, 흰색, 블루, 검정, 퍼플이 되어서 새롭게 빛처럼 밝혀지고 있다. 색이 색을 밝혀주고, 우울은 우울을 밝혀주고, 몸들은 육신을 떠나 다시유령이 되었거나, 아니면 빛-색의 무덤이라는 안식처를 찾았다. 이들은 이제야 편안해졌나보다. 그래서인지 몸들은 화사하게 빛나는 춤을 추고 있다. 2013


<라운드업 2013> 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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