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ZINES

합체 B-CONE (2016.4.8 - 28 뽕뽕브릿지)

 

‘분리 Seperation’ 송아지에서 분리된 한쪽 다리가 전시장에 걸려있고, 그 앞에는 다리가 하나 없는 송아지가 절룩거리며 걷고 있는 영상이 있다. ‘합체 Combination - Triptych’ 분리되어 있던 고깃덩이의 일부들이 천천히 결합하여 부자연스럽게 서있는 송아지와 비슷한 형상이 영상 밖의 관객을 응시한다. 두 개의 작은 방에는 쓰러져 있는 의문스런 고깃덩이가 서서히 일어나 송아지와 고라니처럼 보이더니, 급작스레 해체되며 앵글의 밖을 향해 힘차게 날아가 버린다.

 

분리와 합체는 서로에 반대되는 단어이면서, 동시에 하나의 프로세스 위에 있는 단어이다. 좀 더 기술적으로 발전한 근미래에서는 이 단어를 신체와 생명에 사용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현재로서는 아주 기계적 프로세스에 적합한 언어이다. 작업의 제목 자체가 작가가 스스로 설정한 위치를 짐작해볼 수 있게 한다. 하지만 두 작업은 명확하게 다른 맥락에 위치한다.

‘분리 Seperation’에서 작가는 대상에 관여하지 않고 관찰자의 위치에 머문다. 일종의 차가움을 유지한다. 그래서 실제로 작업을 보았을 때, 전시에 대한 글에서 언급하는 ‘폭력적 상황’이 훨씬 강렬하게 전달된다. 살아있는 송아지와 잘라내어져 박제된 송아지 신체의 일부는 극명하게 대립을 이루면서 제시하는 상황이 가지는 폭력성을 폭발적으로 드러낸다.

반면 ‘합체 Combination - Triptych’에서 작가는 대상에 지나치다 싶을 만큼 적극적으로 개입한다. 고깃덩이를 분해하고, 그것을 분해하는 과정을 사진으로 기록하고, 영상으로 재조립하고, 전시한다. 작업 안에서 이미 대상은 송아지와 고라니가 아니라 단순히 시체이며 고기이다. ‘분리 Seperation’에서 작가는 관찰자이지만, ‘합체 Combination - Triptych’에서 작가는 개입자이며 새로운 의미의 생명을 부여하는 신적인 위치를 가진다. 작가가 베이컨이 종종 차용하던 삼면화라는 부제를 가져온 것도 그런 의미라 짐작해본다. 합체의 과정은 역설적이게도 해체의 기록이다. 해체과정의 기록이 시간적으로 역류하면서 합체의 과정이 된다. 영상에서 가장 흥미로운 부분은 마지막에 고라니와 송아지가 느닷없이 앵글을 빠져나가는 부분이다. 합체라는 작업의 제목을 역행하면서 송아지 혹은 고라니 형상을 한 고깃덩이는 어디론가 사라진다. 마치 지금까지는 또 다른 결합을 위한 준비과정인 것처럼.

 

‘합체 Combination - Triptych’에서 이미 작가는 폭력, 생명, 죽음 혹은 불안과 공포라는 부정적인 감정에 대한 감각을 다루지 않는다. 대상이 송아지 혹은 고라니, 시체임을 제외하고 관찰한다면 작가가 제시하는 상황은 단순한 폭력적인 상황이 아니라, 다른 생명체로의 변신의 과정이다. 영상에 찍힌 대상들은 더 이상 송아지의 시체, 고라니의 시체, 혹은 고깃덩이가 아니다. 기묘한 인형처럼 천천히 다시 붙여지거나, 해체되면서 콜라주 되는 대상은 작가에 의해 만들어지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이질적인 존재이다. 그 안에는 서커스와 같은 위험한 유희의 감각이 있다.

 

작업들을 처음 보았을 때는 폭력과 죽음에 대한 경고 혹은 비판을 위해서 더욱 강렬한 폭력을 재현하는 것이 미술적으로 정당한 것인가에 한참을 생각했고, 다시 한번 글을 쓰기 위해 작업을 곱씹어보다가는 작가가 ‘합체 Combination - Triptych’에서 드러내는 행위자로서의 유희에 고민하게 되었다. 작가가 컨셉으로 전달하려는 폭력성은 오히려 ‘분리 Seperation’에서 아주 효과적으로 전달된다. 그 뿐 아니라, ‘분리 Seperation’는 미술이 재현하거나 퍼포먼스하는 지점에 대한 위험한 경계에서 아주 효과적으로 줄타기를 하고 있다. 반면, ‘합체 Combination - Triptych’는 더 복잡한 상황을 제시한다. B-CONE이 보여주는 영상의 세계는 그가 말하는 폭력에 대한 경고와 응시가 아니라, 초반의 당혹스러움이 사라지면 고깃덩이로 변해버린 생명이 전혀 다른 어떤 것으로 변신하는 과정을 경건하게 혹은 코믹하게 지켜보게 된다. 희화화된 그 과정은 그 자체가 ‘분리 Seperation’와는 다른 폭력성을 지니고 있으며, 작가가 비판하는 시스템과 작가는 심지어 일체화되기까지 한다.

우리가 사는 시스템이 송아지에게 연민을 가지면서도 동시에 살육하는 이유는 그 송아지에게서 제거될 살점, 고기에 있다. 송아지가 죽어야하는 이유는 바로 그 살점이다. 작가의 관심은 막상 노동을 통해 재단한 살점에 있지 않다. 오히려 그 살점을 제거해서 드러나는 혹은 해체되는 혹은 절단되는 뼈와 구조에 있다. 이 부분에서 작업 자체가 훨씬 복잡해지고 혼란스러워진다. 작가는 인간의 잔혹한 폭력성에 대한 비판하고 싶어 하면서, 동시에 생명과 뼈의 구조를 탐닉하고 그것을 비틀어 교란하고 재생산하는 것을 욕망한다.

 

B-CONE의 작업은 물성에서 혈액을 이용한 조각이나, 선천적인 기형의 거대한 조각, 고기 페인팅들을 만든 마크 퀸 MARC QUINN의 작업을 연상시킨다. 마크 퀸 MARC QUINN의 작업들은 조각으로서 관객이 그의 작업을 대면하는 순간의 당혹스러움 혹은 전통적으로 예찬되는 가치에 대한 전복을 노린다. 하지만 B-CONE은 작업 안의 모든 조각적인 요소를 영상으로 전환해 버린다. 작업의 결과물로서 우리가 보는 것은 작가가 행위자로 개입한 실물콜라주의 시간적 나열이다. 모든 입체적인 행위를 평면으로 전환해버렸을 때, 그것들이 본래 가지고 있는 힘은 삭감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B-CONE이 영상을 통해 얻고 싶은 것이 무엇일까 상상해 본다면, 이미 정지한 것들을 다시 부활시키는 영상의 동적 속성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해체된 순간은 다시 붙인다고 해서 해체 이전의 순간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그리고 작가는 되돌릴 수 없는 순간에 대해 정확하게 인지하고 있다. 그렇기에 B-CONE의 작업들은 단순히 대상을 이전의 대상과 닮은 어떤 것이 아니라, 이전의 대상과 전혀 다른 어떤 것을 재현하고자 한다. B-CONE이 다시 만들어내는 송아지와 닮은, 영상 안의 대상에게서 엉뚱하게도 숀더쉽 SHAUN THE SHEEP이라는 클레이애니메이션의 숀 SHAUN의 포즈와 발투스 BALTHUS의 그림에서 심드렁하게 관객을 쳐다보는 소녀들의 응시를 떠올리게 한다. 가장 처참한 모습으로 보여주는 순진함과 해맑음, 무기력과 함께 드러나는 위험함과 기괴함, 그 복합적인 형상의 응시는 우리가 자주 접하는 미술작업들이 보여주는 응시와 다른 어떤 것이다.


출처 : 웹진 전: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