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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수의 만족 20160220

* 총선에서 국민의당이 광주에서 압승했던 것에 대한 글. 많은 사람들이 광주의 배반이라고 여겼던 기묘한 상황

 

국민의당과 더불어민주당이 갈라지면서 광주에는 드디어 야당이 생겼다. 민주당의 전통이 광주에 내려오는 동안, 다른 선택지를 찾을 수 없었던 사람들에게 다른 선택의 여지가 생겼다. 그렇다면, 지금 현재 새누리당을 지지하는 지역의 사람들은 진정 만족스러울까. 특히 대구. 

질문을 다시 던져야겠다. 보수와 진보. 이렇게 세상을 단순히 두가지로 바라볼 수 있나. 대답은 NO이다. 정치적 성향으로서 보수와 진보의 진영이 하나의 줄기로 위치하기에 정치적 경험이나 역사는 우리나라 정치인에게 불충분하다. 오히려 각자가 가지고 있는 계층의 영향이 훨씬 큰 현재이다. 정치는 보통 그를 지지하는 계층의 이익을 대변하는 것으로 연기를 하기 마련인데, 각자의 정치 영역에서 포용하는 계층의 스펙트럼이 지나치게 넓다. 

현재 수위에 올라오는 정치 세력은, 보수를 대변한다기보다 박정희시대에 만들어진 세력들의 경제적 이익을 대변하는, 극단적으로 재벌과 자본에 봉사하는 새누리와 그에 저항하는 연기 중인 민주당이 있었다. 그리고 그 연기에 반발하는 국민의당이 생겼다. 노조를 지원하거나 사회의 소외계층, 자본에서 배제된 중산층으로 믿는 사람들, 혹은 자본에서 배제된 하위층을 대변하는 정치 세력은 실상 존재하지 않는다. 수많은 계층은 자신들의 계층을 대변하지 않는 성향의 정치 세력을 지원하기도, 그 반대를 선택하는 것도 주저하며, 정치에 무관심한 중간 세력을 구성한다. 사실, 정치세력이 지지 세력의 이익을 대변한다는 환타지는 사라져야하는 생각이다. 정치적 게임의 정의는 자신에게 도움이 되는 세력을 지지하는 것이 아니다. 절대적인 권력의 탄생을 막고, 끊임없이 권력을 견제하는 것이 정치세력 선택의 의미이다. 

국민의당의 출연은 안철수라는 사업가 출신의 이질적인 존재가 젊은 계층의 불만족을 자극하며 등장하면서 시작된 것이다. 현재 현실적인 모양새가 동교동계가 합류하면서 지역당으로 보여지기는 한다. 하지만, 대의를 통해 협업을 할 수 없는 현재와 같은 우리나라의 정치적 현실에서 오히려 지역을 표방하는 당이 생기는 것은 고무적일 수도 있다. 실제적으로 사람들의 솔직한 생각을 표현한다면, 경북당과 경남당이 있는 것이 당연한 상황이다. 

그렇다면 보수를 대표한다는 새누리당. 현재 보수라고 표방하는 입장에서는 새누리의 모든 행보에 찬성을 던지고 있다. 불만이 있고 만족스럽지 못한 부분을 견디며 조직의 외부에 드러내지 않는 것은, 우리나라의 조직 혹은 사회의 속성이다. 그런 행위는 결국 조직을 강하게 만드는 것은 당연하다. 그렇다면 그 안에 존재하는 개인들은 그렇게 강력한 조직의 혜택을 받는가. 새누리당의 조직이 강화되는 것이 그들을 지지하는 사람들의 행복을 만들어내는가. 새누리라는 조직의 굳건함과 자신의 계층이 전혀 다르다는 것을 인지하지 못하는 것. 새누리를 지원하지 않으면 금방이라도 다른 세력에 자신의 기득권을 뺏길 것이라는 두려움. 새누리 지지하는 노인계층은 판단력을 종편에 맡긴 상태라 그렇다치고, 박정희 세대 이후의 세대는 현실을 어떻게 판단하고 있는가. 무엇을 두려워하는가. 정말 종편과 언론이 말하는 것처럼 새누리 이외의 정당에게 권력이 가면 세상이 망한다고 생각하는가. 현재 있는 정치세력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자신의 계층을 진정 대표한 중소정당을 만들어내는 것은 어떤가. 

정작 현재의 문제는 모든 이권을 떠나서 권력이 너무 한군데로 모이는 것에 있다. 하나로 모아진 권력은 괴물이 된다. 항상 변함없이. 수천년간의 역사가 그것을 반영한다. 이미 견제되지 않는 권력은 그것을 지지하는 계층의 삶과 무관하게 돌아가며, 그 계층의 지반까지 잡아먹는다. 서울에서 십억이 넘는 아파트를 구매하고 BMW를 몰고 다니며 중산층이라고 믿는 계층들은 정신을 차려야한다. 권력은 그런 정도의 자본에 봉사하지 않는다. 물론 더 심각한 것은 새누리를 지지하는 소외계층과 하위층이다. 현실의 삶이 삶의 대부분을 차지해버릴 때, 변화를 시도할 수 있는 여지는 거의 없어진다. 눈가리개를 한 말처럼 이미 시야의 외부가 차단되어 버렸다. 

현재 보수라 분류되는 계층은 만족스러워 보인다. 그 만족에 의문을 갖는다. 삶을 유지하기 위해서 노동하지 않아도 되는 계층은 정말 적을 것이고, 삶을 유지시키기 위해서는 정년 혹은 정년이전까지 미친 듯이 뛰어야하는 사람들에게 질문을 던지고 싶어진다. 정녕 만족스러운가. 수명이 거의 80세이상으로 이동한 현재에. 더 이상 일할 수 없는 시기. 60세 이후. 시스템과 조직에 끊임없이 봉사하고 버려질 그 시기를 상상해보았으면 한다. 현재의 정권, 보수의 화신이라는 새누리는 그 이후의 삶을 지속적으로 척박하게 만들고 있다. 현재 아무리 재산이 많든 적든, 인간은 늙으면 늙을 수록 소외된다. 정치적 성향과 관련없이 우리가 쉽사리 망각하는 것은, 10년 후에도 30년 후에도 자신이 지금과 같지 않을 것이라는 것이다. 조금만 더 생각한다면 새누리로 대변되는 권력이 시도하고 있는 모든 정책들이, 자신들의 삶 지반을 결국 파괴할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으리라. 온전히 도태되지 않는 삶을 상상한다면, 지금 고민해야한다. 시덥잖은 보수와 진보의 논쟁이 아니라, 자신의 삶, 다시 오지 않을 자신의 삶 혹은 가족의 삶을 상상해보아야 할 때다. 현재 100만원의 세금을 아끼고, 얼마 남지 않은 삶의 퇴화를 경험하든지, 아니면 좀더 현명해져서 너욱 풍족한 삶을 꿈을 꾸던지. 그 선택은 다시 반복되지 않는다. 영화에서 말고 삶을 두번 사는 사람은 본 적이 없다. 정말 자신이 보수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만족의 질을 좀 더 높힐 때이다. 밥먹어서 행복해진 시기는 이미 지났고, 집과 차를 지녔다고 행복해지는 시기도 이미 지났다. 더 만족스러운 삶을 상상하는 것, 그것은 남을 위한 것이 결코 아니다. 흔히 잘못 상상하는 것처럼. 

유권자가 부릴 수 있는 가장 큰 권력은 권력을 견제하는 것이다. 이 지구상에서 단 한번도 권력은 개인을 우선시 한 적이 없다. 개인이 개인으로 건강하게 살아남는 방법은, 권력이 본연의 권력적 속성을 드러낼 수 없는 견제의 기구를 마련하는 것이다. 민주주의를 위해 수많은 피가 뿌려진 것은 그것 때문이다. 누가 지니고 있든 권력은 폭력적이다. 그 폭력성을 줄이는 것. 그것이 선거라는 어마어마한 이벤트의 유일한 목적이다. 보수인지 진보인지의 대결이 아니라, 권력과 힘을 가지지 못한 개인의 경기이다. 우리는 가끔 선거가 새누리당과 민주당의 싸움이라고 착각한다. 아니다. 둘 중 어떤 쪽이 더 나을 것이라고 상상할 수 없을 때는, 힘의 균형을 맞추는 방향으로 진행되어야한다. 그런 균형감각만이 개인이 개인으로 존재할 수 있는 지반을 만들어줄 것이다. 지속적으로 권력에 힘을 부여하면 할수록, 힘의 균형을 무너뜨리는 방향으로 진행될 수록, 결국 정치와 자본에 의해 우리의 삶을 피폐해질 뿐이다. 바보같은 정치세력들은 그 결과가 자신에 대한 굳건한 지지라고, 맘대로 해도 되는 것이라고 쉽사리 착각한다. 그래서 누가 정치게임에서 승리하든 그 게임을 항상 박빙으로 몰고 가는 것. 그 감각이 우리에게 필요하다. 난 당신이 진보인지 보수인지 관심이 없다. 당신도 나같은 평범한 개인이라고 생각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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