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AGE 1-2 : 블랙리스트, 관료제

 

 

적폐 청산이란 무엇을 하는 것일까? 청산해야 할 적폐들은 수없이 많지만, 최근 며칠 동안 선거와 관련된 뉴스를 보면서 떠오른 것은 유신헌법의 잔향이었다. 1972년에 제정되어 유신체제의 근간이 된 유신헌법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1조 2항에 나온 주권자에 대한 규정이다.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국민은 그 대표자나 국민투표에 의하여 주권을 행사한다” 이후 대통령 긴급조치를 통해 이 헌법에 대한 부정적인 의견을 표출하는 것 자체가 범죄로 규정된 것처럼, 주권자인 국민은 직접 정치에 대해 이야기할 수도 없고, 오직 투표나 청탁을 통해서만 정치에 관여할 수 있게 되었다. 즉, 누구를 지지하느냐 어느 줄에 서느냐가 ‘정치’가 된 셈이다. “

 

“올해 1월, <한겨레>가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더 나은 민주주의 사회를 위해 필요한 것으로 시민들이 검찰 개혁에 이어 두번째로 꼽은 것이 시민의 직접 정치 참여였다. 이는 꼭 대의제를 부정하자는 이야기는 아니다. 선거과정을 통해 더 다양한 의견들이 드러날 수 있게 하는 것도 우리가 할 수 있는 직접 정치 참여의 한 방법이며, 성소수자들의 행동이 바로 그런 것이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투표뿐이라는 생각에서 벗어나지 않는 한, 유신시대는 끝나지 않는다.”

 

[세상 읽기] 선거는 어떻게 민주주의를 파괴하는가 / 후지이 다케시

2017.4.30일자 한겨레 칼럼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792898.html

 

 

대통령 선거가 있기 전 2017년 4월 30일자의 이 컬럼을 보며, 한줄기 단비를 느꼈다. 탄핵이 이루어지고, 대통령 선거 전까지의 기간은 그야말로 다른 의미로 아수라였다. 모든 정치인들은 국민과 촛불에서 비롯된 힘이 위대함을 역설하며, 자신들이 그 촛불의 대변인이 되겠다고 부르짖었던 시기였다. 누구를 대통령으로 찍겠냐는 것이 여론몰이와 토끼잡이의 이유가 되기도 하고, 서로의 반대세력들과의 충돌들도 있었다. 인터넷은 서로와 서로를 향한 방어와 공격으로 열심히 달아올랐다. 아마도 일반 국민이 정치에 직접적으로 도달할 수 있는 유일한 기회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후지이 타케시의 칼럼은 문재인의 ‘동성애 반대’ 발언에 대한 항의로 문재인 연설때 시위를 했던 성소수자 단체를 향해 발현했던 비난의 분위기를 언급하기도 한다. 대통령 선거와 둘러싼 그 열광과 열망 사이에서 사람들의 생각이 극명하게 드러나는 순간을 관찰하게 되는 기회들이었다.

 

다행히 정권은 바뀌었다. 그리고 나서, 갑자기 찾아든 편안함이 있었다는 것은 부정하지는 못하겠다. 정말 어려웠던 탄핵정국이 지나고 대선을 거치면서 세상은 이제 조금 편안해진 것처럼 보인다. 여전히 새 정권은 분투중이지만, 문재인 대통령이 취임한 일주일간의 경험은 이전 정권이 보여준 몰상식에 비하면, 너무나 상식적이어서 이상했다. 가슴을 쓸어내리고 정말 이번에는 사람을 잘 뽑았구나하는 안도의 한숨을 쉰 사람들이 많았을 것이다. 갑자기 나라가 나라같아진 것같다는 평도 많았다. 사람들이 대통령이라면 갖추어야한다고 생각하는 행위와 이미지를 보여주는 것만으로도 보는 이의 마음은 너무 편해졌다. 문재인 대통령의 행보는 석 달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아직은 조심스러운 순항중이다.

 

다 좋은 데 무슨 또 잡소리를 하냐고 할 사람들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후지이 다케시의 컬럼은 중요한 질문을 다시 던지도록 한다. ‘적폐’는 단순히 정치적으로 반대세력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 ‘적폐’를 청산한다는 것은 그냥 다시 줄을 서는 것이 아니라, 생활의 양식을 변화시키는 것이라는 것.

 

 

성城 : 끊임없이 소환되는 중세 中世

 

1.

임금님의 사건수첩 (2017 문형선 감독)은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코믹 추리극이다. 조선명탐정 시리즈와 좀 다른 점이라면, 주인공이 왕이라는 것. 이 영화에서 흥미로운 부분은 예종(이선균)이 조선의 권력 구조를 이야기하는 장면이다. 나라를 건국할 때 도움을 준 개국공신들, 그리고 온갖 결혼과 조직으로 엮어진 관료조직으로 촘촘하게 구성된 관료사회를 이야기하면서, 왕이라고 해도 모든 것을 관여하거나 뜻대로 하지 못한다고 이야기를 한다. 영의정 역시 조선은 사대부의 나라라고 이야기하면서, 자신들의 말을 따르지 않는 왕을 탐탁치 않게 여기며, 왕을 제거할 계획을 짠다. 물론 자신의 손을 통해서가 아니라, 뛰어난 무술실력으로 천민에서 발탁된 병조판서를 통해서 말이다. 이러한 설정은 사극에서 너무나 전형적이어서 다시 언급하는 것 조차 진부하다. 하지만, 예종이 말하는, 친인척, 소개와 발탁, 학연을 통해 만들어진 관료체계란 현재의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하게 다가와서, 오히려 현재의 이야기에 대한 비유로 들린다. 그 역시 자신이 제어할 수 없는 관료체계에 맞서서 환관과 학자에 둘러싸인 자신의 비밀조직을 구성한다. 종국에 예종(이선균)이 권력을 유지할 수 있었던 유일한 방법은 그가 만든 조직이 아니라, 희극적이게도 ‘조선제일검’이라는 그의 농담 같은 진실 때문이었다.

여기서 왕은 권력의 정점에 있으면서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존재이다. 예종(이선균)은 그 관료제에 대항함과 동시에 진정한 왕으로 거듭나고자 한다. 진정한 왕의 필수 조건이란, 위에서 아래로의 상명하달의 완벽한 관료제를 완성한다는 것이다.

 

2.

촛불집회에 반하던 지난 태극기 집회는 대단히 기괴한 상징체계를 제시했었다. 태극기, 성조기, 십자가가 거대하게 함께 하는 광경을 기억한다. 기독교와 정치와 미군정시절의 추억이 결합한 기묘한 광경이었다. 근래에 들어 엠블렘이 그렇게 강렬하게 작동한 때를 찾기가 힘들 정도이다. 그 상징체계 안에서는 애국 = 친미 = 기독교 = 박근혜의 공식으로 이어지면서, 현재 우리의 정치가 왕정과 신정의 어느 지점에 있었음을 각인시켰다. 박근혜 전 대통령은 단순히 왕 = 독재자의 딸이 아니라, 왕 = 구원자의 지점에 있었던 것이다. 다른 표현으로 하면, 그녀는 모든 것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공화국에서 투표로 뽑힌 대통령임에도 불구하고 그녀를 둘러싼 이미지는 극도로 그로테스크하다.

 

영웅, 지도자, 구원자의 신화는 뿌리 깊은 믿음이긴 하다. 헐리우드의 영웅들이 아니더라도, 현재의 문제를 해결해 줄 누군가, 나를 보살펴줄 누군가를 무의식으로 원한다. 현실에서는 새로운 사람이 권력자로 있으면 모든 것이 바뀔 수 있을 것이라는 일종의 신앙과 같은 열광이 대통령선거 때마다 보여지는 것도 사실이다. 보통 그러한 열광은 대통령을 선출할 때, 후보자들이 보여주는 이미지에 대한 열광일 뿐일 경우가 많다. 박근혜 전 대통령 또한 온전한 개인이라기보다는 개인으로 이미지화하는 정치세력의 큰 덩어리이다. 그의 지지자와 그는 분리된 존재들이지만, 이미지로서의 정치 안에서 하나로 구성된다. 그들이 함께 구성하는 이미지는 형언하기 힘든 광기가 격렬한 욕망과 함께 뒤범벅되어 나타난다. 신앙과 군신의 관계로 엮어진 끈끈함은 주술적 동질감으로 똘똘 뭉쳐있다. 그것은 심지어 그들만의 헤테로토피아처럼 보인다.

 

3.

검사들의 이야기를 희극적으로 만들어낸 ‘더킹 2017’은 박태수(조인성)이 어떻게 정치검사의 반열에서 내부고발자가 되는지, 그래서 어떻게 정치인으로 다시 태어나는지를 희극적으로 보여준다. 검사의 세계는 옳고 그름의 세계가 아니라는 단순한 진리에서부터, 우리나라의 현재에서 용인하는 권력의 세계가 가감없이 보여진다. 박태수(조인성)이 전라도 출신에 백도 없이 사법고시를 통해 권력의 핵심으로 다가가는 중에 한강식(정우성)을 만나게 된다. 한강식(정우성)은 이미 정치 검찰로 성공한 위치에 있으며, 정권이 바뀌는 시기마다, 정치세력들 사이에서 적절히 행동하면서 자신의 권력과 부를 유지하는 인물이다. 이 영화 안에는 진실이나 시시비비에 대한 고민이나 번뇌는 담지 않고, 시종일관 가볍다. 그 와중에 대선을 앞두고, 검사들이 용하다는 무당과 굿을 하면서 같이 뽈짝뽈짝 뛰는 장면이 기억에 남는다. 정말 어이없는 줄서기구나 하는 생각과 동시에, 저 말할 수 없는 가벼움이 진실과 가장 근접한다는 것 때문이다. 후지이 다케시가 언급한 줄서기가 자신들의 생존과 함께, 처절한 희극의 형태로 발현한다.

이 영화의 가장 큰 장점은 우리가 말하는 관행 혹은 적폐가 놀랄 만한 비리가 아니라, 우리 사회에 정말 한없이 가까이 밀착되어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광기는 주술과 결합해서 더 이상은 유머스럽지 않다. 왜곡된 디오니소스의 축제는 관찰자에게 마치 멈출 수 없는 웃음처럼, 제어할 수 없는 피곤함으로 다가온다.  

 

사법체계에서 가장 이성적인 집단이어야할 검찰이 가진 비이성적 행태가 너무도 당연하게 다가오는 것은 그만큼 현재 우리가 얼마나 비틀어져 있는 곳에 위치해 있는가를 인식하게 만든다. 검찰은 돼지발정제에 대한 글을 책에 쓰고도 대선후보로 나올 수 있는 뻔뻔함이 용인될 수 있는 관료제에 불과했던 것이다. 그것은 후안무치가 아니고서야 그 조직에서 살아남을 수 없다는 것을 반증하기도 한다.  

 

 

블랙리스트 BLACKLIST

 

2017년 7월 27일 블랙리스트와 관련된 첫번째 선고가 있었다. 김기춘 전 비서실장은 직권남용과 위증으로 징역 3년, 조윤선 전 문체부장관은 징역 1년, 집행유예 2년을 받았다.

재판부는 김 전 실장에 대해선 블랙리스트 실행의 '정점'에 있었다며 유죄를 인정했지만, 조 전 수석에게는 직접 지시하거나 보고받은 사실이 인정되지 않는다며 무죄 판단을 내렸다.’  

 

연합뉴스 2017년 7월 27일자 <‘블랙리스트' 함께 기소…김기춘 유죄·조윤선 무죄는 왜?>

http://www.yonhapnews.co.kr/bulletin/2017/07/27/0200000000AKR20170727170800004.HTML?input=1195m

 

분노한 사람들은 김기춘의 3년과 라면을 훔친 도둑에게 부여되는 3년을 비교한다. 노희찬 의원은 조윤선의 위증은 유죄, 직권남용은 무죄라는 판결을 보고 그녀를 투명인간에 비유했다. 사법부가 가진 정의와 관련된 형량은, 너무나 전형적인 유전무죄, 무전유죄를 구현한다. 화이트칼라 범죄는 블루칼라 범죄보다 훨씬 우아하고 용서받을만한 것이다.

 

이 판결을 보면서, 예전에 조영남 위작사건과 관련된 글을 쓰던 때, 느꼈던 사법부의 무지를 다시 느꼈다. 사법의 범주에서 바라보는 예술과 관련된 시선은 항상 예술과 무관하다고 생각하는 시민의 사고 이상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그들이 사회의 엘리트층을 구성한다고 스스로 자부함에도 불구하고 문화예술에 대한 이해와 지식이 전혀 없다는 것을 줄곧 확인하게 된다. 무지하다고 느낄 때에는 좀 더 신중해야하는 것이 맞지만, 보통은 더욱 과감할 따름이다.

 

예술가는 표현하는 것을 업으로 한다. 어떤 단체나 조직의 이득을 대변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으로서의 자신의 의지와 생각을 자유롭게 표출하는 것 자체가 가장 중요한 일이다. 그래서 블랙리스트는 정부지원을 받고, 받지 않음의 단순한 경제적인 문제가 아니다. 블랙리스트는 검열이다. 검열은 헌법 상에 포함된 표현의 자유, 국민의 기본권을 제한하는 것이다. 특히나, 표현 자체를 직업으로 삼는 예술가에게는 일종의 사형선고같은 것이다. 예술의 사회적 역할은 국가공무원이 지정하고 요청하는 것처럼, 시민의 문화활동을 고양하고, 사회를 아름답게 꾸미는 것이 아니다.

 

항상 문화 현장에서도 가장 많이 듣던 소리 중 하나는 본인은 어쩔 수 없다는 것이었을 것이다. 수많은 실무자는 조직에 책임을 넘기며, 자신은 지금 이상의 다른 것을 할 수 없다는 이야기를 종종 한다. 예술은 조직과 조건에서 비롯된 그 불가능함에 대해서 발언할 수 있는 공식적인 창구이다. 그것은 아주 사적인 이야기에서부터, 아주 공적이고 정치적인 이야기까지 포함한다. 예술 혹은 예술가는 바로 말 못하는 당신을 위한 사회적 여분인 것이다. 아마 문화관련 국가공무원이면서도 이러한 기본적인 기반에 대한 이해가 전혀 없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그럼에도 그들은 항상 전문가로서 군림하려고 한다. 특검조차도 블랙리스트가 헌법상의 권리를 침해한다고 보지 않았다. 특검 역시 김기춘과 조윤선을 단순히 일반적인 관료의 일인으로 파악한 것이다. 그들 역시 그 거대한 관료조직의 일부이기 때문에 가지는 한계일지도 모르겠다.

 

 

적폐 積弊 : 오랫동안 쌓이고 쌓인 관행, 부패, 비리 등의 폐단

 

관료제의 가장 큰 특징은 피라미드식 구조이면서 상명하달이 쉽게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하는 중앙집권적 구조이다. 정책이나 행정처리에 있어서 일관성을 유지하고 신속하게 시행하는 것이 본래 관료제의 이상적인 목적이다. 이 구조 안에서는 당연히 피라미드의 상위 구조에 있는 관료가 훨씬 많은 책임을 가져야하는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심지어 나라의 수뇌부 조차 ‘어쩔 수 없었다’라고 이야기를 한다.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정무수석, 혹은 대통령이 어떤 행위에 책임이 없다면 과연 누구에게 있는가? 우리나라 조직의 구조에서는 그것을 담당한 하위 실무자에게 책임을 묻는 것이 비일비재하다. 피라미드 구조의 견고한 조직에서는 당연히 아무도 판단할 수 없으며, 아무도 책임질 수 없다. 피라미드 구조에서 하위 실무자가 책임을 지는 조직이라면, 그 조직은 이미 존재의 가치를 잃어버리고 무너져버린 조직이다. 관료제의 이상적인 장점을 잃어버린 조직은 기생수처럼 조직의 생존을 악착같이 추구하기 마련이다.

  

조윤선은 보고받지 않았기 때문에 무죄이며 책임이 없다고 사법부는 판결했다. 청와대에서 나와서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을 하면서 김기춘의 명령을 그대로 따른 죄밖에 없다. 문화체육관광부의 수장이었던 그녀는 여기서만 김기춘의 똘마니로 역할을 한다. 그녀는 장관이었지만, 스스로 공적인 책임을 질 능력이 없는 것으로 법원은 판결했다. 이 판단기준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정권들이 끊임없이 바뀌지만, 유지되어온 국가공무원으로 대변되는 조직이 얼마나 썩어버렸는지를 관찰해야한다. 조윤선에게 적용된 현재 재판의 기준은 박근혜 전 대통령의 재판에서도 똑같이 인용될 가능성이 크다. 이번 판결은 그 견고한 국가공무원 조직이 정권의 변화나 흐름의 변화에 저항하는 것처럼 보인다. 국정교과서를 계속 추진하려고 했던 교육부의 사소한 반란은 귀여울 정도이다. 정확히 이야기하면, 사법부가 김기춘과 조윤선은 남의 일이 아니며, 선례로 작용할 것임을 알고, 고추가루를 뿌린 것이다. 사법부가 공직자에 대한 뒷문을 열어두는 것은 지옥문을 여는 것이다. 우리는 그 폐단을 꽤 오랫동안 보아 왔다. 사실 그 자체가 우리나라 정치, 공직의 역사이다. 본인들이 열어둔 지옥문을 다시 닫아야하는 상황에서 그들은 다시금 비상구를 만들고 있다. 항상 정치 검찰로 명성을 날려온 사람들이, 이런 결정적인 순간에는 사법의 형평성에 대해 언급하며, 자신의 정치적 미래를 담보를 받으려 한다. 법률의 구체적인 조항은 모르지만, 그 주변을 싸고 도는 루틴은 정말 진부하고도 진부할 따름이다.

 

블랙리스트 관련되어 많은 사람들이 묵인했음에도 불구하고, 사고를 할 수 있는 개인으로 행동하고 어려운 결정들을 해 온 사람들은 분명 있었다. 하지만, 내부고발자들은 항상 조직에서 처절하게 추출된다. 이미 블랙리스트 관련되어 많은 사람들이 조직의 부조리에 대항했을 것이며, 불이익을 받은 것으로 알고 있다. 그들에 대해서는 과연 누가 책임을 질 것인가.

 

그렇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그 조직 안에는, 이 순간 이 문제에 대해서 여전히 아무 것도 판단하지 않는 누군가 분명 있을 것이고, 그 수는 대부분, 다수일 것이다. 그 이유가 동의이든, 두려움이든, 용기없음이든, 무관심이든.

 

 

남들에게 동조하기

 

아이히만은 나치시절 평범한 중간간부였다. 그는 전쟁 패전 이후에 아르헨티나로 도망가 숨어 살다가 모사드에 납치되어 이스라엘에서 전범재판을 받는다. 그는 평범한 공무원이었지만, 그의 통제하에 수십만의 유대인들이 이송되었고, 그 중 많은 수는 생명을 잃었다. 아이히만의 전범재판은 납치라는 그 과정에서부터 세계의 주목을 받았고, 한나 아렌트는 그의 재판장면을 기록하고 책을 발간하였다. 유대인 커뮤니티의 고위층에 대한 비난도 포함한 그 책 역시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아이히만은 그 재판에서 유죄를 선고받았고 처형되었다. 한나 아렌트의 기록에 의하면, 아이히만은 수십만의 유대인 이송정책을 승인한 것에는 죄의식이 없었다고 한다. 그는 자신의 위치에서 본분을 다했을 뿐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한 유대인의 뺨을 때린 것에 대해서는 죄의식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그에 대한 한나 아렌트의 인터뷰 발췌로 글을 마치려고 한다.

 

그게 정말로 새로운 유형의 범죄라는 점에는 동의하지만 단서를 달고 싶어요. 우리는 어떤 범죄자를 떠올릴 때 범행 동기가 있는 사람을 상상해요. 그런데 아이히만을 살펴보면 실제로는 아무 범행 동기가 없었어요. 우리가 일상적으로 범행 동기라고 이해할 만한 게 없었다는 거죠. 그는 나머지 사람들에게 동조하기를 원했어요. 그는 우리라고 말하고 싶어했는데, ‘나머지 사람들에게 동조하기’와 ‘우리라고 말하고 싶어 하기’만으로도 역사상 가장 극악한 범죄가 자행되게 만들기에 충분했죠. 사실 히틀러 지지자들은 결국 이런 종류의 상황에 전형적인 사람들이 아니에요. 그 사람들은 타인의 지지가 없다면 무력해질 거예요.

 

나는 아이히만에게만 집중하고 싶어요. 그를 잘 아니까요. 내가 우선 말하고 싶은 것은, 남들에게 동조하는 것 - 많은 사람이 함께 행동하는 데 끼고 싶어 하는 것 - 이 권력을 낳는다는 거예요. 혼자 있을 때는 당신이 얼마나 강한 사람인지 여부와는 상관없이 늘 무력해요. 함께 행동하는 데서 유발되는 이런 권력의 느낌은 그 자체로는 절대로 그릇된 게 아니에요. 그건 인간이 느끼는 일반적인 감정이에요. 그렇다고 선한 감정도 아니에요. 그냥 중립적인 감정이에요. 그건 단순히 하나의 현상이라고 기술할 필요가 있는 보편적인 인간적 현상이에요. 그런 식으로 행동하면 극도의 쾌감이 느껴지죠.

 

기능하기 funtioning는 정말로 변태적인 행위 양식이고, 이런 기능하기에는 항상 쾌감이 따른다는 말을 하고 싶네요. 그렇지만 행위에서 중요한 것은 남들과 함께 행동하기, 즉 함께 상황을 논의하기, 어떤 의사 결정에 도달하기, 책임을 받아들이기, 우리가 하는 일에 대해 사유하기 등이 있는데, 이 모든 것이 기능하기에서는 제거돼요. 당신이 거기서 얻는 것은 그저 관성대로 굴러가는 것일 뿐이죠. 이런 단순한 기능에서 얻는 쾌감이, 이런 쾌감이 아이히만에서 꽤나 눈에 잘 띄었어요. 그가 권력에서 특별한 쾌감을 얻었느냐고요?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그는 전형적인 공무원이에요. 그런데 공무원 이상도 이하도 아닌 존재일 때 정말이지 대단히 위험한 신사예요. 여기에서 이데올로기는 그다지 큰 역할을 수행하지 않았다고 봐요. 내 눈에는 이게 결정적인 요인으로 보여요.

 

한나 아렌트, <한나 아렌트의 말>, 마음산책, p76

1964년 <다스 테마 DAS THEMA>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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