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현장] 퇴폐 예술과 말랑말랑한 미래

등록 :2016-07-28 18:34수정 :2016-08-09 14:33

 

박보나 / 미술인

한두 해 전에 인터넷 배달 음식 회사의 광고를 재밌게 봤다. 배우 류승룡이 명화를 패러디하는 콘셉트로, 명화 속 인물들이 인터넷 서비스를 이용해서 음식을 배달시켜 먹는 내용이었다. 그중에 19세기 프랑스의 인상주의 화가인 에두아르 마네의 그림 ‘풀밭 위의 점심 식사’(1863) 속의 인물들이 치킨을 배달시켜 먹는 장면이 있었는데, 치킨을 신나게 받아 먹는 여성의 여성스럽고 단정한 옷차림이 인상적이었다. 마네의 ‘풀밭 위의 점심 식사’는 두 쌍의 커플이 시내가 흐르는 숲속에서 한가롭게 피크닉을 즐기고 있는 모습을 그린 그림이다.

이 그림은 처음 발표되었을 때, 관객들과 비평가들에게서 매우 ‘퇴폐적’이라는 지적과 함께 큰 비난을 받았더랬다. 당시 관객들이 불편해했던 것은 그림 중앙에서 옷을 잘 차려입은 부르주아 남자들 사이에서 혼자 옷을 벗고 앉아 있는 여성의 모습과 그녀의 시선이었다. 이 여성은 당대의 실존 인물이었던 빅토린 뫼랑으로, 전혀 부끄러워하지 않는 표정으로 정면을 응시하며 관객과 또렷이 눈을 맞추고 있다. 이전의 회화에서 누드의 여성들은 대체로 신화 속 상상의 인물이었으며, 그녀들을 향한 관객의 욕망적 응시가 껄끄럽지 않게 적당히 수줍게 눈을 아래로 내리뜨고 있었던 것과는 상당히 다른 모습이었다. 당시 관객들은 자신들의 관음적 시선을 조롱하는 듯하며, 오히려 옷을 잔뜩 차려입고 옆에 앉아 있는 남자들을 위선적이고 우스워 보이게 만드는 뫼랑의 선명하고 선선한 시선을 불쾌해했고, 이 언짢은 그림을 ‘퇴폐적’인 졸작으로 낙인찍었다. 그러나 한 세기 반이 지난 지금, 마네의 ‘풀밭 위의 점심 식사’는 원근법을 파괴한 회화로서의 형식적 도전과 함께, 여성의 주체적 응시를 표현한 ‘좋은’ 미술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도덕적, 형식적 관습의 범주를 깨려는 예술적 시도는 자주 퇴폐로 폄하되어 억압받고 비난받았다. 하지만 마네의 ‘풀밭 위의 점심 식사’처럼, 익숙함을 깨트리는 작업들이 세상에 좀 더 유연하고 훨씬 더 흥미로운 ‘미래적’ 관점을 제시한다. 20여년 전, 가부장적 제도에 저항하는 자유분방한 여대생을 주인공으로 한 소설 <즐거운 사라>로 인해 음란물 유포죄로 구속된 마광수 교수는, 그의 또 다른 소설 <자궁 속으로>에서 ‘퇴폐’소설을 쓴 죄목으로 구속되는 주인공 박민우의 입을 빌려 말한다. “혐오스러운 것을 보여주는 것은 문학의 중요한 목표 중 하나입니다. (…) 아름다운 것만 그리면 실체를 파악할 수 없습니다. (…) 혐오스러운 것을 보여주는 것이 죄가 될 수 없습니다. 오히려 아름답지 않은 것을 아름답게만 포장하는 것은 위선입니다. 소설의 목적은 금지된 것을 파헤치는 것이고, 과거에 대한 끊임없는 회의요, 미래에 대한 끊임없는 꿈꾸기입니다.”

 

<퇴폐 미술전> 전시작_ 오용석, 빛나는/빛 Shining 91×65㎝ oil on canvas 2016.
<퇴폐 미술전> 전시작_ 오용석, 빛나는/빛 Shining 91×65㎝ oil on canvas 2016.
티브이 속에서 여성스럽게 옷을 입고 배달 치킨을 받는, 빅토린 뫼랑에 대한 자체 검열된 패러디가 있다면, 지금 티브이 밖의 한국 미술판에서는 <퇴폐 미술전>이 열리고 있다. 서울 구기동 아트 스페이스 풀에서 열리는 이 전시는 1937년 독일의 나치 정당이 사회 비판적인 작업들이나, 형식적 파괴를 시도한 아방가르드 예술을 억압하고 퇴출시키기 위해 열었던 <퇴폐 미술전>을 패러디한다. 검열과 예산 삭감, 기관장의 경질 등이 심심치 않게 일어나는 현재 한국 예술계의 상황에서, 나치의 <퇴폐 미술전>의 패러디라니, 영리하다. 우리 사회의 현재 모습에 대한 불편한 거울 보기를 시도하며, 동시에 그 거울 속에 비친 나 자신부터, 개인이자 작가로서 새로운 도전에 게으르지 않았는지, 검열과 억압에 길들여져버린 것은 아닌지, 되돌아보게 하는 전시이다. 9명의 작가와 협업팀이 낯선 감각과 신비화되지 않은 신체, 사회 비판적 태도 등이 담긴 작업들을 선보인다. 새삼 ‘퇴폐적’이라 분류된 이 미술 작업들을 통해 그들이 꿈꾸는 말랑말랑한 미래를 엿보고 싶다면 관람을 추천한다. 전시는 8월14일까지이다.



원문보기: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754323.html#csidx5f067d6c3e2301191080fa928846455

나에게 페인팅은 잘 만들어진 이미지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사고를 응축하는 프로세스의 절정이며, 결정적인 순간들의 환희, 클라이막스 같은 것이다. 나는 여전히 마를렌 뒤마가 ‘페인팅은 전위가 아니라, 후위다’라고 이야기한 그녀의 자신감을 신뢰한다. 전위가 아니라 후위이기 때문에 좀 더 사색적이고 그만큼 복잡하고 깊이를 가질 수 있다고 믿는다. 내가 생각하는 페인팅은 미학적으로 완성된 스타일의 반복이 아니다. 끊임없이 사고를 재정립하는 조합과 해체의 과정이며 그것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것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미지를 재구축 재편집하는 것은 언제부터인가 일종의 유행처럼 치부된다. 하지만, 이미지를 재구축하는 것은 사고를 재구축하는 것이다. 이미지의 영역은 결과의 영역이 아니라, 작업 안에서 과정의 영역이다. 과정의 영역이라는 의미는 이미지 안에서 새로 구성되는 레이어들은 지워지거나 수정되는 대신 그 시간의 겹처럼 겹겹이 쌓이게 된다는 것이다. 물론 이런 좌충우돌을 산만함으로 이해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산만함이야말로 내가 생각하는 작업의 본질, 그리고 내가 세상을 흡수하고 재표현하는 방식이라고 생각한다.

 

과정성을 보여준다는 것은 과정성이 있다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과정성의 유의미함을 증명하는 것이다. 나에게 이 프로세스는 언어와 이미지를 넘나들며, 그 사이의 이합집산과 편집, 수집과 버림의 반복적인 과정이다. 그리고 그 끝에 페인팅이라는 이미지가 존재한다. 사람에 대해, 사랑에 대해, 관계에 대해, 욕망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싶어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작업의 결과물들은 온통 복잡하고 난해할 수밖에 없다. 나는 자주 신화적 형상, 실존 인물, 도상적 재현 등 사회에서 익숙하게 통용되는 코드들을 채집하여 만들어 내는 이미지 속에 기입해 놓는다. 강한 상징적 코드를 다시 뒤집어 구축한 환상은 오히려 익숙한 코드의 생경함을 산출해낸다. 사실, 이 생경함은 오히려 솔직한 것이다. 내가 바라보는 세상은 단순한 사물조차 전혀 단순하지 않다. 내가 상상하는 전시는 그 복잡함들이 서로 간섭하면서, 그 복잡다단한 과정의 필요성 혹은 그 과정에서 작가를 괴롭히는 어쩔 수 없는 과정의 에너지 그 자체이기를 바란다. 사랑에 대해 어떤 사람은 ‘사랑한다’는 한마디로 표현할 수 있지만, 어떤 사람은 한 권의 책을 써도 표현하기 힘들다. 내 작업은 표현의 불가능성 혹은 어려움을 인지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속적으로 수행함으로써 얻어지는 어떤 것들에 대한 서사시이다.

 

20140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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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주 현실처럼 느껴지지 않는 공백을 느낀다

정지된 순간에 파고드는 미묘한 감정선

환타지같은 그 순간을 포착하고 싶다

 

내가 말하는 공백은 완전히 무엇이 비어있다는 것보다는, 모든 것은 존재하는데 결계처럼 또 다른 세상이 존재하는 것에 더 가깝다. 엄밀히 말하면 그 공백은 사이나 틈에 가깝다. 들뢰즈의 주름일수도 있다. 그것은 명확하게 나에게 보여지는 것이 아니라, 단지 희미하게 느껴지는 것이다. 그 공백은, 내가 느끼는 순간, 존재하는 것이며, 시간이 정지한 것같은 그 순간에 나는 일종의 묘한 감정, 평온함, 혹은 슬픔, 애조를 느낀다. 나는 새로운 것을 보는 것은 아니다. 단지 무형의 어떤 것에 지배를 받는다. 오시이 마모루의 애니메이션에서 가끔 나오는 슬로우의 순간들. 뭔가를 보고 있으나, 다른 것을 보고 있을 때. 공백은 외부에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내 안에서 생긴다. 아니면 나와 사물 사이에 생기는 것일지도 모른다. 여하튼 그런 상태에 도달하는 순간, 많은 감정과 오만가지 생각이 교차하면서 나는 세상과 격리되어 환각에 빠진다. 나는 그런 개인적인 순간을 포착하고 싶어 하며, 그 순간을 같이 경험할 수 있기를 원한다. 환타지의 순간, 세상과 내가 분리되는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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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용석의 그림이 위험한 것은 '회화에 대한 고민'을 앞세워 동성 간의 밀애나 신체에 대한 은밀한 탐닉으로 유도하기 때문이다. 어두운 바탕 위에 섬세한 결을 드러낸 얇은 베일의 노랑, 흘러내린 노랑, 흩뿌려진 노랑에 홀려 무심코 따라가다 보면 우리의 눈은 어느새 나뒹구는 신체의 근육, 성기, 엉덩이, 체액에서 헤매고 있다.

 

이런 부류들이 욕망의 탐닉을 적절히 은폐하기 위해 흔히 쓰는 수법은 자신들에게 중요한 것은 대상의 재현보다는 '순수한 감각'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서동진이 오용석의 그림에 대해 쓴 글이 전형적인 예이다.. "나는 그가 선호하느 색채들이 궁금하다. 그가 집요하리만치 모든 그림 속에 집어넣고 있는 흰색과 검은색의 밀도가 아름답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것이 재현하는 대상들을 다른 감각적 체험의 대상으로 운반하는 요구 앞에 멈추어 서게 된다.[...] 그것이 그에게 검붉은 혹은 혼탁한 잿빛의 실루엣으로 등장할 때 나는 흥미롭다. 그 장면을 평범한 관능적인 쾌감에서 분리시키는 것은 바로 이러한 감각적인 자질, 혹은 이미지에 추상적인 잉여를 부여하는 힘이라고 생각한다." (1. 서동진, "당신의 아름다운 주관성", [Tu](오용석 개인전 자료집), 푸른커뮤니케이션, 2011, p139-140)

 

오용석이 즐겨 그리는 대상이 아닌 그의 색과 형태에만 관심이 있다고 말하는 것은 어리석을 뿐만 아니라 기만적인 짓이다. 마찬가지 부류인 롤랑 바르트는 바로 그런 어정쩡한 상태, 숨은이해관계가 있는 것은 알지만 노골적인 속임수라고 생각하지는 않는, 다시 말해 의미와 형식을 분리하지 않는 애매한 지점에서 비로소 이데올로기가 작동한다고 실토하지 않았던가?! (2. 롤랑 바르트, <현대의 신화>, 이화여자대학교 기호학 연구소 옮김, 동문선, 1997, p293)

 

그들은 조형에 대한 우리의 순수한 탐닉을 악용해 자신들의 변태적 탐닉으로 몰아간다. 이것이 결코 우연이 아니라는 것은 오용석이 우리를 데려가려고 설정한 목표가 얼마나 정교하고 치밀한지 보여주는 그의 글에 잘 나타나 있다. 우리를 이런 섬세함 자체에도 매혹되지 않도록 항상 경계해야 한다.

 

"페티시는 대부분의 경우 성적인 용어로 사용되곤 한다. 보통 도착적 욕망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우리는 이 단어를 언급한다. 하지만, 욕망과 도착의 범주보다 페티시의 더욱 흥미로운 부분은 표피와 경계에 대한 것이다. 경계는 대상의 본질을 통해 결정지어지는 것이 아니라, 보통 표피와 표피 사이에서 만들어진다. 옷과 살같 사이의 그 미묘한 틈을 통해 우리는 타자를 구별하려고 노력한다. 우리의 주된 욕망 중에 하나는 경계를 시각화하려는 것이다. 페티시는 경계의 문제에서 아주 흥미로운 논점을 제공한다. 본질을 덮어쓰는 표피, 레이어를 넘어서는 레이어. 일상성을 넘어서는 감각. 불완전한 경계. 경계를 통해 구분되지 않는 여분. 나의 페인팅들은 그 어는 지점에서 자신들의 자리를 잡는다." - 오용석, "옷과 살갗의 사이" (3. 오용석, "옷과 살갗의 사이", <우리를 위한 셋>, 2015, p70

* 총선에서 국민의당이 광주에서 압승했던 것에 대한 글. 많은 사람들이 광주의 배반이라고 여겼던 기묘한 상황

 

국민의당과 더불어민주당이 갈라지면서 광주에는 드디어 야당이 생겼다. 민주당의 전통이 광주에 내려오는 동안, 다른 선택지를 찾을 수 없었던 사람들에게 다른 선택의 여지가 생겼다. 그렇다면, 지금 현재 새누리당을 지지하는 지역의 사람들은 진정 만족스러울까. 특히 대구. 

질문을 다시 던져야겠다. 보수와 진보. 이렇게 세상을 단순히 두가지로 바라볼 수 있나. 대답은 NO이다. 정치적 성향으로서 보수와 진보의 진영이 하나의 줄기로 위치하기에 정치적 경험이나 역사는 우리나라 정치인에게 불충분하다. 오히려 각자가 가지고 있는 계층의 영향이 훨씬 큰 현재이다. 정치는 보통 그를 지지하는 계층의 이익을 대변하는 것으로 연기를 하기 마련인데, 각자의 정치 영역에서 포용하는 계층의 스펙트럼이 지나치게 넓다. 

현재 수위에 올라오는 정치 세력은, 보수를 대변한다기보다 박정희시대에 만들어진 세력들의 경제적 이익을 대변하는, 극단적으로 재벌과 자본에 봉사하는 새누리와 그에 저항하는 연기 중인 민주당이 있었다. 그리고 그 연기에 반발하는 국민의당이 생겼다. 노조를 지원하거나 사회의 소외계층, 자본에서 배제된 중산층으로 믿는 사람들, 혹은 자본에서 배제된 하위층을 대변하는 정치 세력은 실상 존재하지 않는다. 수많은 계층은 자신들의 계층을 대변하지 않는 성향의 정치 세력을 지원하기도, 그 반대를 선택하는 것도 주저하며, 정치에 무관심한 중간 세력을 구성한다. 사실, 정치세력이 지지 세력의 이익을 대변한다는 환타지는 사라져야하는 생각이다. 정치적 게임의 정의는 자신에게 도움이 되는 세력을 지지하는 것이 아니다. 절대적인 권력의 탄생을 막고, 끊임없이 권력을 견제하는 것이 정치세력 선택의 의미이다. 

국민의당의 출연은 안철수라는 사업가 출신의 이질적인 존재가 젊은 계층의 불만족을 자극하며 등장하면서 시작된 것이다. 현재 현실적인 모양새가 동교동계가 합류하면서 지역당으로 보여지기는 한다. 하지만, 대의를 통해 협업을 할 수 없는 현재와 같은 우리나라의 정치적 현실에서 오히려 지역을 표방하는 당이 생기는 것은 고무적일 수도 있다. 실제적으로 사람들의 솔직한 생각을 표현한다면, 경북당과 경남당이 있는 것이 당연한 상황이다. 

그렇다면 보수를 대표한다는 새누리당. 현재 보수라고 표방하는 입장에서는 새누리의 모든 행보에 찬성을 던지고 있다. 불만이 있고 만족스럽지 못한 부분을 견디며 조직의 외부에 드러내지 않는 것은, 우리나라의 조직 혹은 사회의 속성이다. 그런 행위는 결국 조직을 강하게 만드는 것은 당연하다. 그렇다면 그 안에 존재하는 개인들은 그렇게 강력한 조직의 혜택을 받는가. 새누리당의 조직이 강화되는 것이 그들을 지지하는 사람들의 행복을 만들어내는가. 새누리라는 조직의 굳건함과 자신의 계층이 전혀 다르다는 것을 인지하지 못하는 것. 새누리를 지원하지 않으면 금방이라도 다른 세력에 자신의 기득권을 뺏길 것이라는 두려움. 새누리 지지하는 노인계층은 판단력을 종편에 맡긴 상태라 그렇다치고, 박정희 세대 이후의 세대는 현실을 어떻게 판단하고 있는가. 무엇을 두려워하는가. 정말 종편과 언론이 말하는 것처럼 새누리 이외의 정당에게 권력이 가면 세상이 망한다고 생각하는가. 현재 있는 정치세력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자신의 계층을 진정 대표한 중소정당을 만들어내는 것은 어떤가. 

정작 현재의 문제는 모든 이권을 떠나서 권력이 너무 한군데로 모이는 것에 있다. 하나로 모아진 권력은 괴물이 된다. 항상 변함없이. 수천년간의 역사가 그것을 반영한다. 이미 견제되지 않는 권력은 그것을 지지하는 계층의 삶과 무관하게 돌아가며, 그 계층의 지반까지 잡아먹는다. 서울에서 십억이 넘는 아파트를 구매하고 BMW를 몰고 다니며 중산층이라고 믿는 계층들은 정신을 차려야한다. 권력은 그런 정도의 자본에 봉사하지 않는다. 물론 더 심각한 것은 새누리를 지지하는 소외계층과 하위층이다. 현실의 삶이 삶의 대부분을 차지해버릴 때, 변화를 시도할 수 있는 여지는 거의 없어진다. 눈가리개를 한 말처럼 이미 시야의 외부가 차단되어 버렸다. 

현재 보수라 분류되는 계층은 만족스러워 보인다. 그 만족에 의문을 갖는다. 삶을 유지하기 위해서 노동하지 않아도 되는 계층은 정말 적을 것이고, 삶을 유지시키기 위해서는 정년 혹은 정년이전까지 미친 듯이 뛰어야하는 사람들에게 질문을 던지고 싶어진다. 정녕 만족스러운가. 수명이 거의 80세이상으로 이동한 현재에. 더 이상 일할 수 없는 시기. 60세 이후. 시스템과 조직에 끊임없이 봉사하고 버려질 그 시기를 상상해보았으면 한다. 현재의 정권, 보수의 화신이라는 새누리는 그 이후의 삶을 지속적으로 척박하게 만들고 있다. 현재 아무리 재산이 많든 적든, 인간은 늙으면 늙을 수록 소외된다. 정치적 성향과 관련없이 우리가 쉽사리 망각하는 것은, 10년 후에도 30년 후에도 자신이 지금과 같지 않을 것이라는 것이다. 조금만 더 생각한다면 새누리로 대변되는 권력이 시도하고 있는 모든 정책들이, 자신들의 삶 지반을 결국 파괴할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으리라. 온전히 도태되지 않는 삶을 상상한다면, 지금 고민해야한다. 시덥잖은 보수와 진보의 논쟁이 아니라, 자신의 삶, 다시 오지 않을 자신의 삶 혹은 가족의 삶을 상상해보아야 할 때다. 현재 100만원의 세금을 아끼고, 얼마 남지 않은 삶의 퇴화를 경험하든지, 아니면 좀더 현명해져서 너욱 풍족한 삶을 꿈을 꾸던지. 그 선택은 다시 반복되지 않는다. 영화에서 말고 삶을 두번 사는 사람은 본 적이 없다. 정말 자신이 보수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만족의 질을 좀 더 높힐 때이다. 밥먹어서 행복해진 시기는 이미 지났고, 집과 차를 지녔다고 행복해지는 시기도 이미 지났다. 더 만족스러운 삶을 상상하는 것, 그것은 남을 위한 것이 결코 아니다. 흔히 잘못 상상하는 것처럼. 

유권자가 부릴 수 있는 가장 큰 권력은 권력을 견제하는 것이다. 이 지구상에서 단 한번도 권력은 개인을 우선시 한 적이 없다. 개인이 개인으로 건강하게 살아남는 방법은, 권력이 본연의 권력적 속성을 드러낼 수 없는 견제의 기구를 마련하는 것이다. 민주주의를 위해 수많은 피가 뿌려진 것은 그것 때문이다. 누가 지니고 있든 권력은 폭력적이다. 그 폭력성을 줄이는 것. 그것이 선거라는 어마어마한 이벤트의 유일한 목적이다. 보수인지 진보인지의 대결이 아니라, 권력과 힘을 가지지 못한 개인의 경기이다. 우리는 가끔 선거가 새누리당과 민주당의 싸움이라고 착각한다. 아니다. 둘 중 어떤 쪽이 더 나을 것이라고 상상할 수 없을 때는, 힘의 균형을 맞추는 방향으로 진행되어야한다. 그런 균형감각만이 개인이 개인으로 존재할 수 있는 지반을 만들어줄 것이다. 지속적으로 권력에 힘을 부여하면 할수록, 힘의 균형을 무너뜨리는 방향으로 진행될 수록, 결국 정치와 자본에 의해 우리의 삶을 피폐해질 뿐이다. 바보같은 정치세력들은 그 결과가 자신에 대한 굳건한 지지라고, 맘대로 해도 되는 것이라고 쉽사리 착각한다. 그래서 누가 정치게임에서 승리하든 그 게임을 항상 박빙으로 몰고 가는 것. 그 감각이 우리에게 필요하다. 난 당신이 진보인지 보수인지 관심이 없다. 당신도 나같은 평범한 개인이라고 생각할 뿐이다.

 

20160220 네이버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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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수의 만족 20160220  (0) 2017.03.29

Untitled 1-6, Photomontage & Oil Painting, 241x234cm, 2016

 

이미지로 폭력에 대항하는 것이 가능한가. 혹은 폭력성을 정확하게 재현한 이미지로 폭력에 대항하는 것이 가능한가. 이런 질문을 던졌을 때, 그의 작업에서 그 역할을 가장 성공적으로 수행하는 작업은 ‘Untitled’ 시리즈이다. 그가 줄곧 다루어오던 폭력성이 거의 추상적인 수준에까지 밀어붙여져 있다. ‘분노하라’의 형상이 역사의 기억을 건드리면서 관객에게 과거를 소환하게 하거나 ‘해처리’가 군인이라는 인간적인 모습을 유지하고 있는 것과는 전혀 다른 방식이다. ‘Untitled’ 시리즈에서 대상들은 순수하게 폭력적인 가해자의 형상으로 태어난다. 다른 작업들이 가까이 다가갔을 때, 원래의 형상이 사라지면서 콜라주한 세밀한 형상으로 시선을 옮기게 만드는 것에 비해, ‘Untitled’ 시리즈는 관객이 작업과 일종의 거리를 두도록 밀어낸다. 이미 우리가 일반적으로 폭력과 죽음을 연상시키는 늑대, 해골, 피부가 벗겨진 고깃덩이와 결합하여, 끔찍함과 혐오를 증폭시킨다. ‘Untitled’ 시리즈에서 신체는 사라져버리고, 그들에게 더 이상 얼굴과 피부는 불필요하며 존재하지 않는다. 그들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것은 제복이며, 제복은 피부를 대체하는 표피이다. 더 이상 그들은 구체적인 인물의 형상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들은 일반적인 인간을 지칭하는 군인이 아니며, 인간 안에 내재된 순수한 폭력성 혹은 그것을 표출하고 있는 ‘괴물 Monster’이다. 그들의 표피를 통해 그들은 자신이 누구인지 드러낸다. 그 과정에서 표피가 그들의 본질을 지시한다. 폭력성의 진원지는 개인이라기보다, 그의 작업에서는 군복 그 자체 혹은 제복이다. 낫을 들고 있는 해골이 죽음의 의인화이듯, 이미 그들은 이름붙일 수 없는 어떤 것들의 엠블렘 Emblem이다.

 生, Photomontage & Oil Painting, 117x80cm, 2016

 

성기와 피부가 없는 신체는 인체도감에 나올 법한 무성적이면서 남성을 지칭하는 근육의 형상을 지니고 있다. 거기서 재현된 대상 역시 사람이 아니다. ‘간인기고’와 ‘生’은 그런 의미에서 ‘Untitled’ 시리즈 묘한 짝을 이룬다. ‘Untitled' 시리즈에서 신체는 신체가 아닌 것들로 대체되어 있다. 그 신체의 부재를 채우고 있는 것은 늑대나 뱀이나 해골이나 짐승 같은 것들이다. 반면, ’生‘에서는 제복 안에 담긴 추상적이면서 폭력적인 존재들 마저 사라지고, 남아있는 것은 얼굴을 지니지 않은 고깃덩이와 같은 근육이다. 마치, 그것은 'Untitled'에서 배제된 신체만 따로 재현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혹은 폭력을 상징하는 군복과 제복을 벗어버리고 난 이후 존재가 보편적인 고기의 신체로 다시 재현된 것처럼도 보인다. 마치 제복 자체가 피부였던 것처럼, 얼굴이 사라진 남성적인 근육이 아주 메마르게 남아 있다.

 

Hatchery, Photomontage & Oil Painting, 360x200cm, 2015

 

그에 비해, 다른 작업인 ‘해처리’는 일종의 원형 原形 같은 작업이다. 그의 작업 속에 계속적으로 등장하는 군인의 존재를 기념사진 형식으로 이 작업은 보여준다. 하지만 '해처리'는 다른 작업들에 비해 훨씬 복합적이다. 군인들은 아직 5.18민주화항쟁에서 사람들을 구타하거나 죽이는 군인들이 아니다. ‘Untitled'에서 보이는 극도의 추상적 폭력성을 지니고 있지도 않다. 그들은 여전히 20대의 뽀송뽀송한 앳된 얼굴을 지니고 있으며, 기념사진 안에 같은 포즈로 통제되어 보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사람으로 존재한다. 좀 더 가까이 다가가 바라보면, 획일적으로 보이는 군복 또한 각기 다른 형식과 이미지로 구성되어 있다. 그의 콜라주적 방법론이 여기서 제시하는 흥미로운 지점은 가까이 다가갔을 때는 오히려 처음의 단순한 형상들이 사라지고 좀 더 사적인 이미지로써 관찰하게 한다는 것이다. 군복들 안에 놓여있는 이미지들 사이에서 군복의 획일적인 이미지와 상충하는 이미지를 동시에 발견할 수 있다. 그 사이에서 인물 각자에 대한 일종의 개인성 Personality이 발현한다. 얼굴은 서서히 분열되고 있지만, 아직은 우리가 알아볼 수 있는 누군가의 얼굴을 지니고 있다. 이제 부화된, 아직은 완성체가 아닌, 그래서 좀 더 그들은 불완전한 인간에 가깝다. 그들은 콜라주된 존재이지만, 아직 해체되지 않았다.

 

The Phenomenal World, Collage, 200x244cm, 2016

 

B-CONE이 폭력성에서 시작해서 특유의 비아냥 혹은 유희적인 전환을 보이는 반면, 최요안은 좀 더 사색적이다 못해 이미지적으로는 회귀한다. 마치 영화의 마지막에서 카메라가 뒤로 쭈욱 빠지면서 광활한 미장센을 보여주는 것처럼 전시는 조금은 급작스러운 롱샷으로 마무리된다. 바짝 말라버린 대지와 그 안에서 탐욕스럽게 푸른 거대한 나무는 언뜻 보기에는 조용한 풍경화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것을 맴도는 헬리콥터들은 평화스러움 보다는 영화 ‘아바타 Avatar 2009’ 에서 회사가 에이와 나무를 폭격하기 전 같은 불안한 긴장감을 연상시킨다. 단지 다른 점이 있다면, ‘The Phenomenal World’의 나무는 생명이 아니라, 파괴되어야 할 것들로 만들어져 있다.

그의 이번 전시 ‘Phenomenal World’는 솔직히 꽤나 혼돈스럽다. 이 혼돈스러움은 각각의 작업들이 각자 방향성이 다른 이야기를 하는 데서 비롯된다. 그 안에서 작가의 관찰하는 위치도 미묘하게 어긋나 있다.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각 작업 시리즈들에서 이미지를 사용하는 방식이 다르면서 정확하지 않은 것도 그 혼돈스러움을 증폭시킨다. 그가 바라보는 ‘Phenomenal World 현상계 또는 경이로운 세계’에서, 시스템은 근본적으로 사악하다. 그러면서 ‘Phenomenal World’는 온전히 남성의 세계일 뿐이다.

 

가장 근작인 ‘The Phenomenal World’에서 작가의 관찰지점은 특히나 모호한 시점을 유지한다. ‘해처리’에서 보여주는 일말의 동정과 같은 눈빛, ‘Untitled'에서 보여준 격렬한 비난과 동시에 보이는 동화 同化, ’生‘에서 보이는 관조나 자기배려 등과 같이 감정적으로 읽히는 지점이 없으며, 태도에 있어서 유보적인 위치에 있다. 모든 것을 조망하는 듯한 그의 관찰지점이, 영화 ‘지옥의 묵시록 Apocalypse Now 1979'에서 윌라드 대위가 커츠 대령의 왕국에서 나가면서 타는 헬기에서 바라보는 시선인 것인지, 혹은 그들을 구출하러 들어오는 구원자들의 헬기에서 바라보는 시선인 것인지, 혹은 커츠 대령 자신이 세계를 바라보는 시선인 것인지 정확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새삼스레 ‘이미지의 정치성은 어디에서 발현하는가’와 같은 본원적인 질문을 던져야 하는 시점은 항상 귀환한다. 특히나, 광주에 관한 가장 강한 이미지로 작업하는 최요안의 작업들에서 정치성은 가장 중요한 부분이다. 그의 탐구가 피해자의 입장에서 서정적인 방향으로, 혹은 그것을 관찰하는 입장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가해자를 바라보며 그들을 관찰하는 것이 흥미롭다. 군인출신이었던 그의 개인적인 이력 탓일 수도 있지만, 그의 시선은 ‘군인-가해자’에 오랜 시간 포커스가 맞추어져 있었다. 이번 전시의 혼돈스러움에서 발견한 중요한 것은 그 시선들의 미묘한 변화이다. ‘군인-가해자’, 혹은 ‘군인-피해자’, 혹은 ‘군인-폭력’, 혹은 ‘제복-폭력’, 그리고 아직 결정하지 않은 시선까지.

하나의 이미지가 세상을 바꿀 수 있을 것이라고 믿어서 작가가 이미지를 생산하는 것은 아니다. 만약 그럴 수 있는 순진함을 아직도 가질 수 있다면, 일종의 축복일 수도 있겠다. 사명감에 사로잡혀 강력하게 작업을 할 에너지를 유지할 수 있을 것이니 말이다. 하지만, 보통은 항상 흔들림을 지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군가가 생산하는 이미지가 유의미할 수 있는 것은, 하나의 이미지에 세계에 대한 태도와 의지를 기록할 수 있기 때문이 아닐까하는 생각을 한다. 보통 의지는 굉장히 사적인 발화이다. 공적이고 정치적인 소재에서 작업이 발현하더라도, 가장 사적인 작가의 생각이 격렬하게 묻어날 때, 작업은 그때서야 관객들의 사유에 하나의 작은 시작점으로 안착할 수 있는 힘을 지닌다. 그의 유보와 흔들림이 과연 앞으로 어떻게 전개될지 조심스레 예의주시할 필요가 있다.

 

 

 

* 오용석은 현재 미술작가로 활동 중이며, 주요활동으로는 2014 광주신세계미술상, 2013 SeMA 신진작가, 2012 국립현대미술관 고양스튜디오, 2010 금호미술관 영아티스트 등이 있으며, 주요전시로는 ‘퇴폐미술전’ (아트스페이스풀 2016), ‘Made in Seoul' (메이막아트센터 2016), ‘사이렌’ (갤러리 조선 2016), ‘우리를 위한 셋’ (광주신세계갤러리 2015), ‘사랑에는 이름이 없다’ (플레이스막 2015), ‘XXX' (갤러리 버튼 2015), ’라운드업‘ (서울시립미술관 2013), ’롤랑의 노래‘ (갤러리 버튼 2013) 등이 있다.



출처 : 웹진 전:달

 

‘분리 Seperation’ 송아지에서 분리된 한쪽 다리가 전시장에 걸려있고, 그 앞에는 다리가 하나 없는 송아지가 절룩거리며 걷고 있는 영상이 있다. ‘합체 Combination - Triptych’ 분리되어 있던 고깃덩이의 일부들이 천천히 결합하여 부자연스럽게 서있는 송아지와 비슷한 형상이 영상 밖의 관객을 응시한다. 두 개의 작은 방에는 쓰러져 있는 의문스런 고깃덩이가 서서히 일어나 송아지와 고라니처럼 보이더니, 급작스레 해체되며 앵글의 밖을 향해 힘차게 날아가 버린다.

 

분리와 합체는 서로에 반대되는 단어이면서, 동시에 하나의 프로세스 위에 있는 단어이다. 좀 더 기술적으로 발전한 근미래에서는 이 단어를 신체와 생명에 사용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현재로서는 아주 기계적 프로세스에 적합한 언어이다. 작업의 제목 자체가 작가가 스스로 설정한 위치를 짐작해볼 수 있게 한다. 하지만 두 작업은 명확하게 다른 맥락에 위치한다.

‘분리 Seperation’에서 작가는 대상에 관여하지 않고 관찰자의 위치에 머문다. 일종의 차가움을 유지한다. 그래서 실제로 작업을 보았을 때, 전시에 대한 글에서 언급하는 ‘폭력적 상황’이 훨씬 강렬하게 전달된다. 살아있는 송아지와 잘라내어져 박제된 송아지 신체의 일부는 극명하게 대립을 이루면서 제시하는 상황이 가지는 폭력성을 폭발적으로 드러낸다.

반면 ‘합체 Combination - Triptych’에서 작가는 대상에 지나치다 싶을 만큼 적극적으로 개입한다. 고깃덩이를 분해하고, 그것을 분해하는 과정을 사진으로 기록하고, 영상으로 재조립하고, 전시한다. 작업 안에서 이미 대상은 송아지와 고라니가 아니라 단순히 시체이며 고기이다. ‘분리 Seperation’에서 작가는 관찰자이지만, ‘합체 Combination - Triptych’에서 작가는 개입자이며 새로운 의미의 생명을 부여하는 신적인 위치를 가진다. 작가가 베이컨이 종종 차용하던 삼면화라는 부제를 가져온 것도 그런 의미라 짐작해본다. 합체의 과정은 역설적이게도 해체의 기록이다. 해체과정의 기록이 시간적으로 역류하면서 합체의 과정이 된다. 영상에서 가장 흥미로운 부분은 마지막에 고라니와 송아지가 느닷없이 앵글을 빠져나가는 부분이다. 합체라는 작업의 제목을 역행하면서 송아지 혹은 고라니 형상을 한 고깃덩이는 어디론가 사라진다. 마치 지금까지는 또 다른 결합을 위한 준비과정인 것처럼.

 

‘합체 Combination - Triptych’에서 이미 작가는 폭력, 생명, 죽음 혹은 불안과 공포라는 부정적인 감정에 대한 감각을 다루지 않는다. 대상이 송아지 혹은 고라니, 시체임을 제외하고 관찰한다면 작가가 제시하는 상황은 단순한 폭력적인 상황이 아니라, 다른 생명체로의 변신의 과정이다. 영상에 찍힌 대상들은 더 이상 송아지의 시체, 고라니의 시체, 혹은 고깃덩이가 아니다. 기묘한 인형처럼 천천히 다시 붙여지거나, 해체되면서 콜라주 되는 대상은 작가에 의해 만들어지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이질적인 존재이다. 그 안에는 서커스와 같은 위험한 유희의 감각이 있다.

 

작업들을 처음 보았을 때는 폭력과 죽음에 대한 경고 혹은 비판을 위해서 더욱 강렬한 폭력을 재현하는 것이 미술적으로 정당한 것인가에 한참을 생각했고, 다시 한번 글을 쓰기 위해 작업을 곱씹어보다가는 작가가 ‘합체 Combination - Triptych’에서 드러내는 행위자로서의 유희에 고민하게 되었다. 작가가 컨셉으로 전달하려는 폭력성은 오히려 ‘분리 Seperation’에서 아주 효과적으로 전달된다. 그 뿐 아니라, ‘분리 Seperation’는 미술이 재현하거나 퍼포먼스하는 지점에 대한 위험한 경계에서 아주 효과적으로 줄타기를 하고 있다. 반면, ‘합체 Combination - Triptych’는 더 복잡한 상황을 제시한다. B-CONE이 보여주는 영상의 세계는 그가 말하는 폭력에 대한 경고와 응시가 아니라, 초반의 당혹스러움이 사라지면 고깃덩이로 변해버린 생명이 전혀 다른 어떤 것으로 변신하는 과정을 경건하게 혹은 코믹하게 지켜보게 된다. 희화화된 그 과정은 그 자체가 ‘분리 Seperation’와는 다른 폭력성을 지니고 있으며, 작가가 비판하는 시스템과 작가는 심지어 일체화되기까지 한다.

우리가 사는 시스템이 송아지에게 연민을 가지면서도 동시에 살육하는 이유는 그 송아지에게서 제거될 살점, 고기에 있다. 송아지가 죽어야하는 이유는 바로 그 살점이다. 작가의 관심은 막상 노동을 통해 재단한 살점에 있지 않다. 오히려 그 살점을 제거해서 드러나는 혹은 해체되는 혹은 절단되는 뼈와 구조에 있다. 이 부분에서 작업 자체가 훨씬 복잡해지고 혼란스러워진다. 작가는 인간의 잔혹한 폭력성에 대한 비판하고 싶어 하면서, 동시에 생명과 뼈의 구조를 탐닉하고 그것을 비틀어 교란하고 재생산하는 것을 욕망한다.

 

B-CONE의 작업은 물성에서 혈액을 이용한 조각이나, 선천적인 기형의 거대한 조각, 고기 페인팅들을 만든 마크 퀸 MARC QUINN의 작업을 연상시킨다. 마크 퀸 MARC QUINN의 작업들은 조각으로서 관객이 그의 작업을 대면하는 순간의 당혹스러움 혹은 전통적으로 예찬되는 가치에 대한 전복을 노린다. 하지만 B-CONE은 작업 안의 모든 조각적인 요소를 영상으로 전환해 버린다. 작업의 결과물로서 우리가 보는 것은 작가가 행위자로 개입한 실물콜라주의 시간적 나열이다. 모든 입체적인 행위를 평면으로 전환해버렸을 때, 그것들이 본래 가지고 있는 힘은 삭감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B-CONE이 영상을 통해 얻고 싶은 것이 무엇일까 상상해 본다면, 이미 정지한 것들을 다시 부활시키는 영상의 동적 속성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해체된 순간은 다시 붙인다고 해서 해체 이전의 순간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그리고 작가는 되돌릴 수 없는 순간에 대해 정확하게 인지하고 있다. 그렇기에 B-CONE의 작업들은 단순히 대상을 이전의 대상과 닮은 어떤 것이 아니라, 이전의 대상과 전혀 다른 어떤 것을 재현하고자 한다. B-CONE이 다시 만들어내는 송아지와 닮은, 영상 안의 대상에게서 엉뚱하게도 숀더쉽 SHAUN THE SHEEP이라는 클레이애니메이션의 숀 SHAUN의 포즈와 발투스 BALTHUS의 그림에서 심드렁하게 관객을 쳐다보는 소녀들의 응시를 떠올리게 한다. 가장 처참한 모습으로 보여주는 순진함과 해맑음, 무기력과 함께 드러나는 위험함과 기괴함, 그 복합적인 형상의 응시는 우리가 자주 접하는 미술작업들이 보여주는 응시와 다른 어떤 것이다.


출처 : 웹진 전:달


«'소돔120일‘은 피에르 파올로 파졸리니의 영화 ’살로, 소돔의 120일‘에 영감을 주었다. 이 영화는 합의하지 않은 희생자들에게 가해지는 공포와 잔혹을 생생하게 그려 내고 있다. 이 영화가 지닌 예술적 가치와는 무관하게, ’살로, 소돔의 120일‘을 본다는 것은 관객에게는 일종의 사디즘적인 공격이 되어, 관객은 영화를 보는 동안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합의한 희생자로 변모한다.»

 

에스텔라 V. 웰든, 사도마조히즘, 2002

 

관객이 사디즘에 공격되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관객이 합의한 희생자로 변모한다고 지적하지만, 사실은 동화를 통해 합의하지 않은 가해자, 공범자, 목격자로 전환된다. 관객이 느낄 수 있는 혐오감이나 죄의식은 희생자 혹은 피해자가 느낄 수 있는 감정이나 정서가 아니다. 희생자가 느꼈을 것은 오히려 공포, 불안, 복수심이다. 그것은 완전히 다른 변모이며, 해석의 여지도 완전히 달라진다. ‘합의된’이라는 수식어가 붙는 것은 그 안에서 피해자와 가해자의 관계가 둘 사이의 상호계약에 기초한다는 가정에서 비롯된 것이다. 반대로 ‘합의하지 않은’은 ‘계약의 범주에 들어있지 않은’, ‘예측되지 않은’이라는 의미이다. 도착이 쌍방이 필요하지 않고 극도로 개인적인 성향을 띠고 있다면 사도마조히즘은 오히려 사회적인 룰을 지닌다. 하지만 관객 자체는 항상 관찰자의 위치에 있으며, 동시에 계약의 내부에 존재하지 않는다. 즉, 피해자에 대한 연민을 느낄 수 있지만, 폭력적인 시선의 주인인 가해자, 공범자, 목격자일 수 밖에 없다. 폭력적인 것에 대한 학습이 희생자의 경험으로 이어질 것이라는 지적은 잘못된 것이다. 오히려 폭력의 경험은 가해자의 가상경험으로 연결되며, 그 보다 더 복잡한 동시경험의 상태에 빠진다. 그것은 순간적인 자아의 상실 혹은 간접적인 타자성의 사적인 경험이다. 혐오의 정서는 타자성의 경험에 대한 거부에 가깝고, 죄의식의 정서는 이러한 유사경험에 대한 동화의 측면이 강하다.

 

그들의 말대로 계약이 성립되어야 혹은 계약에 대한 믿음이 존재해야지 성립될 수 있는 관계라면, 사도마조히즘 안의 쾌락은 이미 예측가능한 것이며, 예측불허의 사고로 발전하지 않는다. 이러한 생각은 사회적 시스템을 바라보는 입장에서도 같은 것이며, 그것은 시스템의 혹은 계약의 완결성에 대한 믿음이 선행하는 것이다. 사도마조히즘의 룰 안에서는 희생자와 가해자의 관점이 아니라, 오히려 성적인 연극의 개념이 도입된다. 그 안에서 진정한 의미의 피해자와 가해자는 도출되지 않는다. 그렇게 만드는 것은 계약인데, 그것은 시스템으로 전이되서 모두 참여자로 변모시킨다. 다른 말로 하면 계약에 합의를 하였기 때문에 참여자로서의 책임을 동반하게 하는 것이다. 이것은 자본주의의 논리 안에서 사람들을 옭아매는 계약과 같은 속성을 지닌다. 그 계약에 참여하는 자는 그 안에서 발생하는 스트레스와 불이익을 감당하는 것으로 간주한다. 이런 상황에서는 무대와 무대에 참여하는 배우와 관객으로 모든 심각한 논의의 쟁점이 변질된다.

 

가해자의 역할과 피해자의 역할은 학습되어야 한다. 쾌락을 위한 학습은 실제의 욕망을 분출하는 무대이며, 실제의 욕망을 컨트롤하는 무대이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쾌락의 무대 안에서는 욕망을 분출시키기 않도록 하는 억제기제가 발동한다. 이 안에서는 죄의식은 없다. 단지 자기파멸의 방어기제가 작동하며, 단지 계약에 의한 학습의 기제가 발동한다. 아이러니 하게도 쾌락의 행위를 하도록 장려하는 한편, 그것을 멈출 수 있는 기제를 제공하는데, 그것은 가해자의 역할을 하는 사람의 개인적인 의지에 맡겨져 있다. 즉 욕망에 극도로 윤리적인 상황 안에서 기존의 도덕율을 따라하는 분열적인 상황을 창출한다.

 

예측되는 쾌락은 향유의 단계로 급격히 전환된다. 즉, 룰을 파기할 수 있는 상태, 반복의 정점에 금방 다다르게 한다는 것이다. 반복이 나선적이라는 가정 하에서 이러한 향유의 반복은 다른 설정과 상황으로 전이를 요구하게 된다.

 

작가가 표현할 수 있는 것이 관능을 쾌락을 즐기는 자기 자신의 자화상에 불과하다면, 그것을 노출함으로써 관객은 그것과 동일시하게 되고 죄의식을 느끼게 하는 구조가 성립하는데, 그것은 사실 어떻게 보면, 도덕률의 부활을 원하는 것인데, 온전히 그 대상이 쾌락의 개념으로 정의되었을때, 선택이 항상 가장 쉬운 쪽으로 흐른다는 것을 가정을 하면, 제시된 이미지는 내가 원하는 억제의 기제나 주저함의 기제로 사용될 수 없다.

 


왼쪽 마지막 집

 

이 영화의 흥미는 초반기에 피해자의 위치에 머물러 있다가 생존을 목적으로 급격하게 가해자로 변모하는 것이다. 본래의 가해자들에 대한 인과응보적인 폭력 혹은 생존을 위한 폭력은 호러 무비 안에서 지속되는 고전적인 반전이지만, 이 영화 안에서는 보다 적극적이고, 치밀하다.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생존본능과 자식에 대한 사랑이다. 더더욱 흥미로운 인물은 데이빗인데, 그는 가해자로서의 아버지에 마지막에 반기를 든다. 그를 추동하는 것은 생물학적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에 반하는 어떤 것이다. 반대로 어떤 심각한 트라우마적 경험을 통해서 스스로 자립하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정신적 트라우마를 자신에게 준 대상을 제거하는데 동참하는 입장이다. 트라우마적 대상을 제거하는 행위는 그리스 신화에서부터 비롯되는 굉장히 신화적인 행위이다.

 

사도마조히즘적 쾌락은 그 집 밖에서 관찰하는 관객으로서 언급하는 것.




포르노그라피 안에서는 사도마조히즘.


쾌락을 느낄 수 있는 기본 전제에는 계약이 있다. 계약은 안전핀과 같은 역할을 한다. 죽음에 대한 공포를 경감시키는 역할. 약속된 상해의 한도를 넘지 않을 수 있다는 전제에서 쾌락의 무대 안으로 타자를 끌어들이게 된다. 계약은 무대가 생성되게 하는 가장 큰 조건이다. 하지만 무대의 단계에 이르러 계약에 대한 신뢰와 의심 사이에서 또다른 공포 불안요소가 등장한다. 그것의 가장 큰 축은 행위자들의 욕구, 욕망이다. 그것 또한 무대를 생성하게 하는 중요한 요인이다. 하지만 계약이 쾌락을 성립시킴과 동시에 쾌락의 한계를 조절하는 반면, 욕망은 그 한계에 대한 갈증으로 쾌락을 증폭시키는 역할을 한다. 계약이 온전히 행위자, 참여자의 의지에 의존하기 때문에, 욕망과 사이에서 갈등을 유발한다. 금기 앞에서 욕망은 불만족을 불러오지만, 동시에 금기 앞에서, 그 경계에 머문다는 것때문에 쾌락은 증폭된다. 행위자의 내적으로는 안전하다는 사실이 쾌락을 불러일으키지만, 본질적인 욕망에 대해서는 행위자의 입장에서 비윤리적인 제어장치로 작동한다. 사디스트와 마조히스트 사이에서는 근본적인 태도의 차이가 존재하게 된다. 마조히스트의 쾌락기제인 계약은 반대로 사디스트의 쾌락강도를 삭감시킨다. 이것을 상보하기에 계약에 기반하지 않는 또다른 이중적인 무대가 발생한다. 그것은 사디스트와 마조히스트와 그들을 바라보는 관객들 사이에서 만들어진다. 행위자의 행위는 보여진다는 사실, 관객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통해, 보다 강력한 쾌락의 단계로 끌어진다. 관객은 마조히스트에게는 수치심을 증폭시키고, 그 역시 마조히스트에게 쾌락을 강화하는 역할을 한다. 그리고 사디스트에게는 힘과 권위에 대한 과시의 장으로 행위의 무대를 전환시킨다. 사디스트와 마조히스트 사이의 계약은 관객을 제어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행위자들에게 자신 내부의 의지와 무관한 콘트롤하기 힘든 변수이다. 변수의 존재를 통해 행위자의 쾌락은 영향을 받는다.

현대는 분명하게 극장 안의 극장, 무대안의 무대로 이루어져 있다. 극악스러운 행위와 음란한 행위도 직접적으로 전달되지 않는다. 미디어를 통해 여과된 형태의 간접경험은 오히려 그러한 대상들이나 행위들에 대한 왜곡된 쾌락을 장려한다. 반면, 이러한 경험들이 직접적인 경험으로 다가올 때, 그것을 접한 대상은 트라우마적 징후에 노출된다. 그것은 안전하지 않으며, 안전한 세상이 거짓임을 증명하는 단서가 된다. 그것의 소스는 단순히 잔혹한 경험이나, 선정적인 장면들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역사적인 사실에서 비롯되기도 한다. 아주 드물게 역사적 사실과 이미지, 그리고 그 이미지에 대한 전적인 쾌락과 죄의식이 부적절하게 결합할 때 발생하기도 한다. 그것들이 만나는 가상적인 공간을 나는 무대라고 부른다. 그 무대가 흥미로운 것은 그 무대가 아주 광범위한 형태를 지니고 있으며, 각각의 참여자가 서로 다른 입장을 분열감없이 공유하는 데이빗 린치의 영화같은 무대라는 것이다.

발투스의 그림들은 대상을 바라보는 쾌락에 대해 아주 안정적인 형태를 보여준다. 그 안에는 이미 즐김에 대한 죄의식이나 공범자로서의 죄의식은 녹아들어있지 않다. 그 안에는 온전한 즐김의 태도가 녹아 있다. 거기에는 어떤 공포나 불안감이 없다. 대상은 오히려 보는 관객보다 당당하며, 자신들에 대한 쾌락의 정당성을 부여한다. 그들은 피해자도 아니며, 순진한 꼬마도 아니다. 발투스가 포착한 순간은 아이들이 하나의 개체로서 상대를 응시하는 순간이며, 그 순간들은 쾌락의 원천이 전적으로 그들에서 비롯됨을 강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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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화는 어렵다는 이야기를 큐레이터들 혹은 비평가들의 입을 통해 쉽게 듣는다. 사람을 자주 만나는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몇 년 사이에 꽤나 여러 번 같은 이야기를 들었던 기억이 난다. 얼마 전에 전시서문을 부탁하려 했던 사람에게도 같은 이야기를 들었다. 작가의 입장에서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 꽤나 머리가 복잡해진다. 회화가 어렵다는 말은 회화를 읽기 어렵다는 것인가, 회화를 통해서 글을 쓰기 어렵다는 말인가. 회화가 어렵다는 말은 회화를 읽기 싫다는 이야기인가. 혹은 회화를 현대적으로 읽기 어렵다는 이야기인가. 회화가 어렵다는 말은 회화라는 매체가 이미 예술적인 의미에서 현대적 추동력을 잃어버렸다는 이야기인가. 회화가 어렵다는 말은 회화를 통해 그럴 듯하고 좋은 글을 쓰기 어렵다는 것인가. 회화가 어렵다는 말은 회화가 자신들이 생각하는 예술적 지평과 다르다는 이야기인가. 아니면 말 그대로 나의 회화가 어렵다는 것인가. 모든 상상은 어느 정도 맞을 것이다.

 

회화가 어렵다고 이야기하는 사람을 만날 때마다 하는 이야기가 있다. 회화를 이미지로 바라보라고. 사진과 영상과 영화를 볼 수 있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회화 역시 볼 수 있다. 작업하는 입장에서는 거대한 회화의 역사가 작업을 하고 보는데 짐이 될 때가 많다. 하지만 관객과 관찰자의 입장이라면 좀 더 편하게 바라볼 수 있다. 본인이 볼 수 없는 것은 그 안에 들어 있지 않다. 회화를 제외한 다른 매체를 보면서 사람들은 어렵다는 말 대신 보통 재미가 없다, 있다, 좋다, 싫다의 표현을 쓴다. 작업을 바라보는 본인의 주관성을 믿지 못한다면 회화뿐만 아니라 다른 어떤 예술 작업도 볼 수 없다.

 

회화처럼 수많은 검증의 반복을 거친 매체도 없을 뿐더러, 단호하게 스스로 종말을 고한 매체도 없다. 미국을 중심으로 벌어진 치열한 평면매체에 대한 실험과는 또 다른 방식으로 유럽에서는 이미지 실험이 진행되었다. 프란시스 베이컨(Francis Bacon), 게르하르트 리히터(Gerhard Lichter), 마를렌 뒤마(Marlene Dumas)와 뤽 타이먼(Luc Tuymans)에 이르는 계보는 사진과 회화 그리고 내러티브와 역사, 구상과 추상 사이의 고민을 이미지의 영역에서 구현한다. 사진과 이미지를 해석하고 재해석하는 커다란 흐름, 회화를 평면적 물성의 문제로 치환시킨 70년대 미국 추상회화와는 다른 방향의 흐름이다. 이미 회화의 역사 안에서 회화는 이미지로 전환되어 있거나 그 간극에 존재한다. 다른 이미지 혹은 이미지의 해석 도구로서 회화가 존재하고 있다. 그 곳에서 회화의 현대성은 발현된다. 다른 매체를 재해석하고 재구성하는 거의 유일한 매체로서 말이다. 나는 마를렌 뒤마(Marlene Dumas)가 ‘회화는 전위가 아니라 후위이다’라고 이야기한 그녀의 자신감을 믿는다. 전위가 아니라 후위이기 때문에 좀 더 사색적이고 그만큼 복잡하고 동시에 깊이를 가질 수 있다고 믿는다.

가끔 불쑥불쑥 영상을 해보는 것은 어떠냐라는 이야기도 듣는다. 평면에서 영상의 속성을 부여하려는 시도보다는 차라리 영상을 하는 것이 쉽지 않느냐, 낫지 않겠냐는 의미라고 짐작된다. 하지만, 평면이 영상적 속성을 함유하며 영상을 오마주하면서 재구성되는 이미지는 영상의 이미지가 아니라, 영상에 대한 이미지이다. 즉 영상을 통해서 발현될 수 있는 이미지가 아니다. 결국, 우리가 읽고 있는 이미지와 다른 이미지를 재구성하려는 시도보다, 형식에서 주어지는 쉬운 이득을 취하라는 이야기에 불과하다. 형식이 내용보다 훨씬 강력한 파괴력을 지닐 수 있는 것은 사실이나, 퍼포먼스나 영상이 과연 현재 그러한 형식적 파괴력을 가지고 있는가를 다시 한 번 물어봐야하지 않을까 싶다(개인적으로는 3D 프린터가 로봇과 결합하여 작은 다리를 만들어내는 영상이 그 어떤 액티브한 예술 영상보다 나를 더 심각한 고민으로 빠뜨렸다). 비물질 미술에 대한 환영은 언제쯤 재해석될지 궁금하다. 영상을 구현하기 위해 동원되는 에너지와 물질은 결과물이 비물질적이기 때문에 그 매체 자체를 비물질이라고 봐야하는가? 이런 단순한 질문에 대해서도 아직 제대로 된 미술적 논의를 들은 적이 없다. 영화가 성취한 영상미학에 대한 논의와 결과물은 많지만, 미술적 영상의 성취에 대해 재평가된 것은 참으로 찾기가 힘들다. 단순히 미술의 역사에서 다음단계의 역사이기 때문에 무의식적으로 영상과 퍼포먼스의 가능성에 대해 차용하거나 언급하고 있는 것이 아닌지 의심이 갈 때가 있다.

 

회화는 이미지의 역사를 다룬다. 회화가 현실에 개입하는 방법은 예나 지금이나 구체적인 현상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다. 동시에 회화는 개념을 다루는 추상적인 매체이며, 가장 아날로그한 매체이다. 가장 아날로그하다는 것은 반대로 가장 쉬운 매체라는 의미도 된다. 또한 가장 가능성이 많은 매체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예술의 범주가 아닐 수도 있지만, 처음으로 사람들이 미술적 경험을 하는 행위는 크레파스로 그림을 그리는 것이다. 그렇게 손쉽게 접하는 매체가 왜 읽기가 어려운 매체로 인식되는 것일까. 그것도 그냥 지나치는 일반 관객이 아니라, 미술관계자들에게 말이다. 우리가 취향으로 말할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인 소양에 대해서 어렵다니. 솔직히 그 말을 정확히 해석한다면, 진부한 매체이므로 읽을 가치를 느끼지 못한다 혹은 회화나 이미지에 대해 미술적 가치를 부여할 수 없다라고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소외당한 타자가 다른 타자를 소외시키는 이 기묘한 상황을 맞이하게 된다. 안타깝게도 사회적 범주에서 미술 역시 아날로그하고 진부하다. 환영의 위험함, 스펙타클의 위험함은 현재 미술이나 예술의 내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바깥에 있다. 현재, 회화를 포함한 미술은 오히려 그 반대편에 위치한다. 매체들 사이에서 바라보자면 환영과 스펙타클에 가장 적극적으로 반응하는 매체는 실상 설치와 영상이다. 하지만 매체와 상관없이 우리가 예술가로서 견지해야하는 부분은 얼마나 현실을 디테일하게 관찰할 것인가이다. 선동적으로 보이고 그럴 듯해 보이는 것들이 미술의 역사 안에서 어떻게 다르게 전용되었는지를 다시 한 번 상기시키면서 말이다. 쉬운 분류와 배제의 방식은 예술의 가장 중요한 장점, 경계를 흩뜨릴 수 있는 흔들림을 위협하는 것이다. 내가 생각하는 예술의 역할은 귀찮고 어려운 것들을 만들어내는 것이고 그 잉여를 통해 사회적 시스템이 보지 않는 가치에 대해 되도록 많은 레퍼런스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그러면서 동시에 설명적이지 않으면서 폐부를 깊이 타고 들어오는 감동을 주거나 메세지를 전달할 수 있다면 정말 좋은 작업일 것이다. 나는 여전히 고든 마타클락(Gordon Matta-Clark)의 작업 사진을 볼 때마다 등줄기를 타고 흐르는 전율이 있다. 명쾌하지만 명쾌하지 않은, 보편적이지만 보편적이지 않은, 수많은 이야기가 담겨있지만 이야기하지 않는, 그것을 온전히 가로지르는 작가의 의지와 행위에 대해. 


출처 : 웹진 전:달

바벨 BABEL

 

바벨이라는 이름은 순전한 우연으로 'babble(말을 더듬거리다)'이라는 영어 단어와 발음이 거의 같은데, 공교롭게도 뜻마저 비슷하다. 바벨은 신이 사람들을 혼란시켜 제각기 다른 말을 쓰도록 한 장소다. 바벨이라는 명칭은 히브리어로 '신의 문'이라는 뜻이다. 창세기 10장에는 '세상의 첫 용사'인 님로드(니므롯)가 세운 도시라고 되어 있다. 또 창세기 11장은 "온 땅의 언어가 하나요 말이 하나였더라"고 말한다.

사람들은 '시날 평지'를 정해 탑을 건설하기로 했다. "그 탑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신은 그 탑을 내려다보고 인간의 오만함을 드러내는 상징이라고 여겼다. 그래서 신은 "그들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여" 서로 말을 알아듣지 못하게 했다. 결국 사람들은 탑을 끝까지 쌓지 못하고 온 세상에 흩어졌다.

 

[네이버 지식백과] 바벨 [Babel] (『바이블 키워드』, 2007. 12. 24., 도서출판 들녘)

 

 

창세기의 ‘바벨’과 우리가 땅을 딛고 있는 ‘서울’이 맞물린 이 조합은 이상하게도 매혹적이다. 서울을 기반으로 활동중인 예술 플랫폼 총 17개 팀과 그들과 관련된 70여명의 기획자와 작가가 이 전시에는 참여한다. 그 규모와 에너지는 사실상 작은 비엔날레를 연상시킨다. 혼란스런 불협화음을 기대한 사람이나, 어수선할 것이라고 상상했던 사람들은 막상 전시를 보면 실망할지도 모를 정도로 디스플레이는 자리를 잘 잡고 있다. 각 예술플랫폼은 일종의 부스 개념의 공간에서 각자의 플랫폼과 관련된 작가들을 다시 디스플레이 되는 방식으로 전시는 구성되어 있다. 흥미롭게 바라본 것은 플랫폼과 플랫폼 사이의 경계가 상당히 오픈되어 있다는 점이다. 가벽이나 단들도 폐쇄적인 부스 대신 관람할 수 있는 하나의 오브제로 설치된 부분에서 기획자의 섬세함이 엿보인다.

 

전시장의 초입에서는 콜레라마 WITH 굿판의 경쾌한 몸짓이 시선을 잡는다. 입구부터 설치된 큰 스크린과 그 앞에 놓인 녹색 우유박스 관람석들은 처음부터 관람객에게 미술 작업을 보는데 너무 심각하지 말라고 최면을 거는 것 같다. 그 영상을 보고 동선을 천천히 따라가다 보면, 각 예술플랫폼에서 보여주는 다양한 작업들을 만날 수 있다.

 

서울바벨은 머뭇거리거나 웅얼거리지 않는다. 작업하는 입장에서는 작업들이 발산하는 무겁지 않은, 무게에 짓눌리지 않은 에너지를 묘한 질투의 시선으로 바라보게 된다. 한국에서 벌어지는 미술적 젊음을 느껴보고 싶다면 꼭 봐야할 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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