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현 (미술평론가)


현대문화에서 B급 정서 또는 '오타쿠'는 이중적으로 소비된다. 하나는 주류문화를 거부하는 하위문화의 주체로서의 특권으로 나타나고 다른 하나는 반사회적인 고립된 인물들이 모인 '나쁜 취향'의 공동체로 인식되는 경우다. 그러나 자본주의는 이러한 하위문화의 이중성을 상품화하고 유행의 전위로 출격시킨다. 엽기적이고 괴기한 '하위문화적 이미지'가 하이패션의 일부와 꼴라쥬되는 현상은 모든 것을 욕망화 하는 트랜드의 힘을 과시한다. 결국 트랜드란 여러 의미로 다수의 논리에 속하는 것이다. 물론 하위문화라고 여기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다. 그들도 더 이상 소수로 불리는 희생양만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런 유행이 비단 상품의 세계에만 머물지는 않는다. 현대미술에서도 엽기, 비이성, 광기, 괴물, 부조리, 악몽과 같은 자극적인 주제, 소수 취향의 세계관, 프란시스 베이컨의 '기관 없는 신체'와 타카시 무라카미의 '귀여운 요괴'는 전세계적으로 순수/응용의 경계를 넘어 여전히 많은 젊은 창작자들에게 영감을 주는 세련된 괴물들이다. 그리고 이 세련된 괴물의 이미지들은 탄생의 신비가 없이 전지구적으로 복제되고 증식되고 있다. 지나친 시각 중심적 탐닉이 낳은 폐해가 아닐 수 없다. 망막주의적 감각의 의존에서 벗어나 몽상적인 이미지의 기원은 억압적인 체제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예술가의 시적 몸부림이었다는 것을 되새길 필요가 있다. 


카프카적 웃음

권순영의 회화는 부조리극을 재현한 것처럼 인간의 광기와 잔인함이 동화적 상상력으로 펼쳐진다. 귀엽게 웃고 있는 미키와 인형들은 내면이 없는 기관 없는 신체, 들뢰즈 식으로 말하자면 탈영토화 된 얼굴을 가진 것들의 이야기다. 전시제목 "뭇웃음"은 작가가 만든 조합어로 그에 따르면 덧없는 웃음, 그러니까 흔해빠진 웃음으로 해석할 수 있다. 어쩌면 뭇웃음은 기계적으로 웃는 자동인형의 표정과 다르지 않다. 그것은 친절함도 무례함도 아닌 비인격화 된 '카프카적 웃음'이다. 그의 회화 속 인물은 대부분 눈빛을 잃어버린 채로 웃고 있다. "오르골"에서는 팔이 절단되거나 눈알이 빠진 토끼 얼굴에 여성의 몸을 가진 인형들을 일본 망가의 여주인공을 닮은 (개인적으론 캔디를 닮은) 소녀들이 기계장치를 조정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인형들은 무표정하게 기계적으로 웃고 있으며 수많은 캔디는 슬퍼도 괴로워도 절대 미소를 잃지 않는 것처럼 빈 웃음을 날린다. "수태고지"는 성모의 무염시태를 괴기스럽게 제시하고 있다. 마치 중성화된 나팔관처럼 보이는 내장기관이 괴물처럼 화면 오른쪽 하단을 차지하고 수많은 뭇웃음들이 그것 주변을 맴돌고 있는 장면은 아마도 여전히 여성에게 강요되는 사회적 가치관에 대한 풍자일 것이다. 이 회화들은 미디어에 등장하는 수많은 사건들의 일부를 발췌하여 서로 섞어놓은 것으로 방법론적으로 본다면 초현실주의적 꼴라쥬에 가깝다. 하지만 권순영은 서로 관련이 없는 사건들을 조합하면서 이 회화 속 인물들의 표정에 빈 웃음을 담아낸다. 표현할 수 없는 슬픔의 패러독스로서의 뭇웃음을 작가는 "수많은 연약한 희생자에게 보내는 애도"라고 표현했다. 카프카의 미완성작 "성"은 현실의 부조리를 드러내는 것은 권력기관의 통제로부터 나약한 인간상을 보여주고자 했다고 해석되곤 한다. 카프카적 세계란, 판타지적 요소로 포장되어 있지만 사실상 그것은 현실에 대한 은유로 전체주의적 이념과 그것으로부터 영향을 받는 개인의 관계를 보여주기 위한 일종의 위장의 장치였다. 그렇다면 권영순의 판타지 속에 녹아있는 공포와 슬픔 그리고 웃음은 고전적 의미의 자기정화라기보다는 사도-마조히즘적인 현실의 이중성으로 보아도 무방할 듯하다. 


관계의 재구성

주로 오용석의 작업은 범죄사건으로부터 시작되곤 했다. 사건 현장은 그에게 매우 중요한 출발점이다. 제도적 관점에서 범죄란, 몇 개의 단서만으로 육감과 지식으로 사건을 재구성해 '법의 테두리 안에서 풀려야만 하는 진실'이라면, 오용석은 범죄로부터 인간관계 속에 스며있는  지배의 욕망에 관해 묻는다. 초기작에서는 이러한 욕망이 폭력에 의한 희생자를 애도하는 모습을 그려졌다면 이번 금호미술관에서의 전시에서는 감정적 충동보다는 빈-의미의 이미지들이 혼재된 상태로 전개된다. 이미지보다는 이미저리에 가까운 전시의 배후엔 그만의 세계가 편린으로 흩뿌려져 있다. 감정이 사라진 육체의 매커니즘만으로 작동하는 포르노그래피, 파졸리니나 대릭 저먼과 같은 광기로 가득한 영화감독의 영상들, 아비정전과 같이 잃어버린 모성을 찾아 떠나는 열대림의 무거운 공기와 막막함, 19세기-20세기 초 미국   개척기의 남자 동성 간의 사진집 Dear Friends: American Photographs of Men Together 1840-1918,  이상과 같은 상상력의 원천은 작가의 일상을 엿볼 수 있는 단서들이다. 다시 말해 이 전시는 작품들의 관계에 의해 완성되는 (무한의) 퍼즐이며 또 다른 관점으로 보면 이곳은 하나의 사건 현장이 된다. 전시제목[Tu]가 불어의 이인칭 '너'를 지시하면서도 발음기호로 영어의 Two를 동시에 연상할 수 있는 것은 "나와 너"라는 자아의 실존의 위한 절대조건인 타인의 존재에 대한 물음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사실 오용석의 작업은 지속적으로 서로 연결되어 있다. 그 바탕에는 폭력이라는 절대적 타자의 존재가 숨어있다. 광주 출신인 그에게 폭력은 광주항쟁이란 사건으로부터 시작되지만 민중미술이란 이즘을 따르는 것은 아니다. 이후 그의 작업은 인간관계 속에 숨어있는 사도-마조히즘 적 욕망을 회화적 주제로 건드린다. 지배자와 피지배자, 권력과 희생. 욕망은 이중적이다. 타인을 내 것으로 만들기도 하지만 스스로 자아를 버리고 타인에게 귀속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욕망은 권력을 생산하고 권력은 대개 획일화의 함정에 빠진다. 카프카의 소설 또한 이런 함정에 빠진 세계를 그린다. 그래서 카프카적 세계는 환상적일 수 있다. 즉 카프카적 판타지란 인간조건과 유령과 같은 권력(관청)이 등장하는 것처럼 말이다. 


시적 판타지

판타지 미학의 흥미로움은 비현실적인 유토피아나 일차원적인 풍자나 조롱에 있지 않다. 카프카의 소설이 매력적인 까닭을 밀란 쿤데라는 비시적인 주제를 시적 소설을 이끌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권순영과 오용석의 회화가 흥미로운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들의 판타지에는 인간과 인간조건에 대한 물음이 녹아있다. 담백한 화풍과 유머 속에 배어있는 상실의 아픔을 그린 권순영이나 오용석 회화의 크리미한 질감과 어두운 색채가 발산하는 비밀스러운 매노로그(Man-a-logue: 남자의 독백) 모두 그 바탕에는 맹목적인 삶의 강령을 추구할 수밖에 없는 전지구적 현상의 빛과 그림자를 담아내려는 시도였다. 시적 몽상은 예술가의 특권이다. 하지만 그것은 또한 현실에서는 일어날 수 없는 불가능한 세계, 비이성적인 광기에 대한 꿈이기도 하다. 이런 예술가의 몽상은 단순히 미지의 세계를 구축하는 상상력의 소산만은 아니다. 그것은 현실과 깊은 관계를 맺고 있으며 현실에서의 부조리를 시적 몽상의 세계로 펼쳐 보일 때에만 가능한 것이다. 예술로의 도피란, 부조리한 현실에 대한 비꼬기이며 인간이란 무엇인가를 묻는 실존적 질문의 장이 된다. 카프카의 글쓰기도 그랬다. 차라리 하룻밤 악몽에 가까운 그의 소설 속 인물들은 기계적으로 묘사된다. 자아보다는 제도에 의해 규정되는 등장인물들의 부조리함을 훗날 ‘카프카적 (Kafkaesque)'라고 부른다. "변신"의 그레고르도 "성"의 K도 자신의 실존을 스스로 인식하지 못한 채  제도에 의한 존재를 인정받기만을 원한다. 거대한 곤충이 되어서도 그레고르는 직장만을 염려하고 K는 권력의 중심인 성 주변에서 영원히 맴돌면서 지배자의 부름을 기다린다. 밀란 쿤데라는 '카프카적'이란 현재 전지구가 겪고 있는 비인격화와 관료주의화의 과정과 다르지 않다고 지적한다. 그는 "카프카의 소설은 이러한 세계에 대한 몽환적이고 상상적인 과장이다. 전체주의 국가는 그것의 산문적이고 물질적인 과장이다“라고 말했다. 판타지가 무엇으로부터 생성되는지 다시 한 번 진지하게 묻게 되는 말이다.  


<아트인컬처 2011.5>





                                                김만석(미술평론가)


1. 이미지 생태계


오용석의 회화는 밀림이다. 회화와 밀림을 등가로 놓았다고 해서 오해해서는 안 된다. 아니, 그의 회화를 밀림으로 은유했다고 해서 정말로 밀림이 아니거나, 회화는 회화일 뿐 오해하지 말자는 익숙한 농담으로 간주할 수 없다. 회화에 대한 반성이 회화에 깃든 환상을 걷어내는 데 있었다면, 오히려 오용석의 회화는 회화가 지닌 마법들을 보다 풍부하게 활용함으로써 이미지의 밀림을 정초하는 데 초점이 맞추어져 있기 때문이다. 잘 알다시피, 밀림이 갖은 초목들과 파충류, 갑각류, 포유류 등을 포괄하는 광범위한 생태계가 자유롭게 혹은 그 내적 원리에 따라서 균형을 이루고 있는 세계라고 할 수 있다면, 오용석의 회화를 밀림으로 간주해야 한다는 진술은 서로 다른 유적 질서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되는 각각의 이미지들이 화폭 위에서 균형과 조화를 이루고 있다는 것을 뜻한다. 물론 캔버스가 이미지의 서식지라고 하더라도 세상의 모든 이미지들이 자신의 존재론적 지평을 막무가내로 캔버스 위에 안착할 수 있다는 말은 아니다. 

즉, 오용석의 캔버스가 갖는 토양에 따라 서식할 수 있는 이미지의 ‘종-속-과-목-강-문-계’의 유형이 구성된다는 것이다. 물론 오용석의 캔버스에 등장하는 이미지들이 캔버스의 내적 논리에 의해 이미지의 계열이 형성된다고 해서, 그것이 반드시 유형화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이미지의 유형화가 이미지를 조직하는 방법을 알려준다고 하더라도, 오용석의 캔버스가 지배적이고 규율적인 이미지의 체계를 구성하는 시스템 아래에서 사물과 이미지가 특권적인 방식으로만 다루어지는 데 대한 비판이 내재하고 있음을 고려하는 것이 훨씬 중요하기 때문이다. 즉, 오용석의 캔버스는 사물과 이미지를 일의적으로만 존재하도록 만드는 방식으로부터 이탈하도록 만들면서 그 사물과 이미지를 다른 방식으로 살도록 만드는 데 더욱 관심을 갖기 때문에 이미지가 유형화되고 있다는 사실보다 다른 국면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아니, 사물과 존재가 지니고 있는 이미지를 다른 방식으로 성장시키는 오용석의 캔버스가 왜 중요한가?

현실의 사물이 갖는 이미지가 원래의 장소로부터 고착되어 특정한 방식으로 이해되기를 강제당하는 것은 일반적이다. 일상적인 사물이나 경험들은 ‘장소’에 고착되어 있는 탓이다. 하지만 장소는 지속적으로 상실되고 있고 사물의 이미지는 부박하기 짝이 없는 것이 오히려 더 현실적이다. 스타일을 통해서 삶과 정체성을 바꿀 수 있다고 믿는 현실이니, 사물과 존재의 고정된 이미지란 불가능하다고 할 수 있다. 주의해야 할 것은 스타일을 통해서 삶을 변경할 수 있다고 믿더라도 사회적 형식에서는 특정한 원리를 통해 정체성의 표지가 변경되는 것을 부정적으로 판단하고 있고 정체성이라는 경계의 표지를 넘는 것에 대한 강력한 금기가 형성되어 있음을 지적할 필요가 있다. 예컨대, 젠더나 국가, 민족, 인종, 섹슈얼리티와 같은 경계에는 ‘기요틴’이 드리워져 있어서 그것을 넘는 자의 목을 잘라버릴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그만큼 이를 넘는 것은 쉽지 않은 것이고 이 경계를 넘어서는 자의 삶은 고통으로 점철되어 있음을 눈여겨보지 않으면 안 된다.

이런 점에서 경험과 기억이 상실되는 자본주의적 현실에서 장소에 특권적인 힘을 부여하고 삶이 추상화되는 현실을 비판적으로 논의하는 다양한 사유들은 새삼 문제적일 수도 있다. 사물이나 존재의 정체성을 고정화하는 이런 전략들은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비판적 논점은 제공할 수 있지만 궁극적으로 사물과 존재의 가능성과 다양성 자체를 제한하고 폐쇄적으로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이 시스템에서의 삶이 자신이 거주할 삶의 장소를 지속적으로 상실하는 데에 있는 것이 사실이라고 해도, 장소 그러니까 고향으로의 회귀를 배면에 깔고 있는 정체성의 정치는 다분히 위험한 지점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즉, 이미지를 다루는 데에는 고착화와 해방이라는 주제가 놓여 있으며 모더니즘 미학이 신화화했던 바, ‘새로움’이라는 ‘미적인 것’은 자명한 것이 아니라 갈등적인 상태의 명제로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사물과 존재를, 그것이 처해 있는 ‘컨텍스트로’부터 해방시키고 사물과 존재를 ‘텍스트화’하는 과정이 근대적 예술이 취해왔던 방식이었다는 것을 잘 알려져 있다. 그러니까, 캔버스로 사물과 존재를 옮김으로써 사물과 존재가 맺고 있는 세계 내에서의 흐름을 차단하고 고립적으로 다룰 수 있었기 때문에 사물과 존재는 그 장소로부터 ‘해방’될 수 있었음과 동시에 원천적으로 추상화된 관계 속으로 존재론적인 비약을 감행해야만 했다. 즉, 이 때 캔버스로 걸어 들어간 사물과 존재는 익명의 관객과의 관계로 나아가야만 했다는 것이다. 캔버스가 해방시킨 사물과 존재는 그런 점에서 다시 캔버스라는 토양 위에서 자신의 운명을 감내해야만 했다. 그것을 우리는 재현이 아니라 표현이라고 불렀지만, 캔버스 위에 등장하는 세계는 기본적으로 ‘재현’을 부정하기는 쉽지 않았다. 그런 점에서 현대예술이 이 재현의 마력으로부터 탈주하고 회화 자체가 가지는 원리를 궁구했던 것도 우연일 수 없다.

오용석은 이러한 재현의 문제를 다루는 것을 애초에 사고하지 않는다. 그것은 재현이 아니라 부재하는 세계를 정초하려는 차원에서 사물과 존재를 캔버스 위에 가지고 온다는 것을 주목해야 한다. 사물의 이미지를 다른 방식으로 생존하도록 만드는 것이 오용석의 캔버스라는 토양이라고 할 수 있는 셈이다. 이 때문에 그의 캔버스가 갖는 토양의 성질과 그가 자주 생장시키는 이미지의 속성들에 대해 주의 깊게 성찰해야만 한다. 이는 단순히 캔버스의 생태 상태가 어떤 것인지를 사회적 조건을 통해서만 탐구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캔버스가 세상의 모든 이미지를 자라게 만들 수 있는 지평이라면, 그 지평 속에서 과연 어떤 이미지들이 생장되는가를 더 밀도 있게 질문해야만, ‘비가시적인 세계’로 내몰리는, 그러나 바로 그러한 방식을 통해서 숙성되고 있는 삶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을 뜻한다. 달리 말해, 정돈되고 규범적인 형식으로 매끄럽게 다듬어진 세계에서 사물-이미지들의 가능성이 최소한으로 제한되고 있지만, 그 사물-이미지가 다른 방식으로 생장하기 위해서는 당연히 캔버스의 토양 자체가 달라져야만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PIEDMONT, 130cmx194cm, Oil on Canvas, 2011 PRIVATE COLLECTION



2. 밀림에서의 외침 : ‘미싱’이라는 형식


그러나 그가 ‘타잔’은 아니라는 것은 미리 말해두어야겠다. 이미지 밀림에서 그가 큰 소리를 외쳐서 입맛대로 달려오는 참한 생명은 없다는 뜻이다. 오히려 그가 큰 소리로 외칠 때 응답하는 이미지들이 과연 무엇인가, 그리고 그 이미지들이 어떤 방식으로 변용되는가의 문제도 중요하다. 캔버스로 안착시킨 이미지들의 원본이 있다고 가정해서는 안 될 뿐만 아니라 역설적이지만 이미지의 밀림에서 큰 소리로 외칠 때 응답하는 사물-이미지들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은 그리 중요한 일이 아니다. 캔버스에 등장한 이미지는 이미 변경된 이미지이고 캔버스라는 토양을 통해서 숙성된 이미지라는 점에서 그것은 현실과 대조해서 얻어질 수 있는 상태로 존재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가 웹을 통해서 수많은 이미지를 수집하거나 갖은 대중문화의 이미지들을 경유해서 작업할 때, 그것들이 갖는 이미지의 기원(고향)은 없으며 뿌리 없는 그 이미지들의 뿌리와 근육을 갖도록 해 준다는 점에서 그의 캔버스는 ‘없는 세계’를 구성하는 ‘이종의 서식지’라고 할 수 있다. 물론 타잔처럼 그가 이미지를 힘차게 외칠 때, 캔버스로 모든 이미지들이 다 온다고 해서 그 이미지들이 무조건 캔버스에 발을 들여놓을 수 있지는 않다. 이종이 탄생하는 데도 일종의 독특한 원리가 작동하기 때문이다. 

이 원리를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영원히 이어붙일 수 있는 천이고 다른 하나는 사진 이미지이다. 이 양자의 원리는 ‘미싱’이라는 매개적 방식을 통해 이질적인 두 사물이 결합할 수 있으며 이를 통해 새로운 종이 생성된다. 그렇다면 오용석에게 회화는 ‘미싱’이라는 ‘기술’이 아닐까? 예술이 오래전부터 ‘기술’(techne)로 간주되어 왔다는 것을 떠올려 보자. 희랍철학에 따르면 기술은 세계를 조화롭게 구성하는 원리로 이해되고 있었고 곧 예술은 폴리스[도시]에서의 삶 혹은 생명들이 맺는 관계를 형성하게 하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마치 정보통신기술이 거리[관계]를 이어주는 방식이듯이, 예술 역시 삶 혹은 생명 사이를 연결하는 것으로 간주되었다는 것이다. 예술가들이 일종의 기술자이고 이들이 사멸해버린 세계나 현존하는 세계로 인정받을 수 없는 세계를 관람객들과 접속하게 만드는 (간혹 귀신들린) 존재들이었던 셈이다. (따라서 오용석의 캔버스가 결합하도록 만드는 세계와 그것을 바라보는 관객들이 결합되는 방식은 분별해서 사고할 필요가 있을지 모른다. 오용석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만 해도 충분히 힘겨운 일이니 후자는 다른 방식으로 질문해야 할 터이다.)

천-사물-존재-사진-이미지들의 결합과 미싱이라는 원리는 다음의 두 절을 통해서 살피는 것이 필요할 듯하다. 


미싱은 잘도 도네, 돌아가네 : 식구들이 모두 일을 찾아 어디론가 사라지고 집에는 아이와 엄마가 남아 비오는 오후를 견디고 있다. 슬레이트 지붕에 떨어지는 비를 보며 막 김치전을 함께 만들어 먹던 모자는 겨울 내내 견딘 이불 호청을 새로 갈기 위해 마루에 미싱을 요란하게 꺼낸다. 아이는 엄마의 요청에 이불을 가지런히 펴고 가위로, 조심스레 잘 박음질된 이불의 안팎을 분리한다. 짧은 아이의 탄성. 위쪽 천을 뜯자 속에는 하얀 솜으로 가득하다. 저 붉고 화려한 천속에 저렇게 하얀 솜이 가득 들어 찰 수 있다니, 엄니, 와, 신기해요. 신기한 건 그것만이 아니란다. 보렴, 천은 버릴 것이 하나도 없으니, 미싱만 있다면 여러 가지 천들이 더 큰 천으로, 더 큰 천은, 그보다 더 큰 천으로 이어 붙일 수 있단다. 그러니, 속에 든 것만큼 껍질이야말로 얼마나 중요한 것이냐. 엄니, 그럼 세상은 온통 껍질들이네? 그럼, 이 땅위에 있는 건 모든 게 연결되어 있단다. 

팔과 다리, 몸통을 보렴. 쓰이는 데가 모두 다른 데도, 이어 붙인 흔적을 찾을 수 없이, 한 몸이듯, 세상은 서로 다른 여러 몸들이 이렇게 저렇게 붙어 있는 거야. 나는 엄니 몸과 붙어 있는 거야? 붙어 있기도 하고 떨어져 있기도 해. 잘 모르겠다, 엄니. 붙어 있다가 떨어졌다, 다시 붙은 거라고 해야 할까? 떨어져서 붙은 거라고 해도 될 거야. 아니지. 그렇다고 모든 천들이 함께 붙는 건 아니란다. 이어붙이는 방법은 붙이는 사람들에 따라 모두 다르니, 방법도 한이 없고 모양도 한이 없다고 해야 바르다고 해야 할지 모른단다. 너를 보렴. 너야말로 이어 붙여 태어난 아이란다. 누구나 다 이어 붙여 태어나니, 너는 온 몸이 이어 붙은 채로 태어난 게지. 엄니도 이어 붙은 거니까, 나는 언제부터, 어떻게, 누구들의 이어 붙음일까? 엄니, 이어 붙으면서 찢어지기도 해야만 하는 건 뭐 때문인 거야? 그건 ‘사랑’ 때문이란다. ‘사랑’이 이어 붙이고 사랑이 떼어 놓는단다.

엄니, 근데, 어제 지갑에서 십 원짜리 동전 다섯 개 훔쳐 ‘깐도리’ 아이스크림 사먹은 거 알고 있겠네? 알다마다. 그런데 왜 누이들을 야단친 거야? 네가 이미 그 순간에 야단을 맞고 있었기 때문이란다. ‘죄’는 결백한 자에게 한 없이 가벼운 거란다. 천을 이어붙일 때, 잘 이어 붙이려면 한쪽 천과 한쪽 천이 평평하게, 나풀거리지 않게 잘 놓여 있어야 하는 게야. 그것이 죄라는 걸 알려면 누이들이 혼나는 게 네게 더 큰 죄가 되지 않겠니? 누이들의 이유 없는 꾸지람은 네게 죄의 무거움과 너와 네 누이들이 모두 저 천처럼 묶여 있다는 걸 알려주고픈 엄니의 마음이란다. 엄니의 찢어지는 마음이야? 마음까지 이어 붙은 건가봐. 다시는 엄니 주머니에서 십 원짜리 동전 꺼내지 않을게. 비가 후드득 떨어지고 미싱이 덜덜덜 돌아간다. 빗소리 미싱 바늘과 실에 실려 천과 천 사이에 부드럽게 스며든다. 천 하나의 세계가 다른 천과 만나 무한이 된다. 하나는 이미 여러 개다. 


추억은 방울방울 : 오용석에게 사진첩은 작업의 밑거름이다. 그러나 제의와 의례적 관습에서나, 그러니까 결혼식과 같은 형식 아래에서 생산되는 사진첩을 제외한다면, 사진첩은 요즘 거의 볼 수 없다. 그래서 그가 작업에서 사진첩을 사용한다고 할 때, 그는 세계 전체를 하나의 사진첩으로 간주하고 있다고 판단하는 것이 옳다. 왜냐하면 그에게 세계는 시간의 순간적 정지와 사물의 국부적 형태의 종합이기 때문에 그러하고 이미지의 누적적 체계로 판단하고 이해하고 있어서이다.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그의 작업이 사진첩을 밑거름으로 활용한다고 할 때, 일반적으로 풍경의 재현이나 인물의 표현을 위해 사진을 활용하는 방식과는 거리가 멀고 대상을 정확하게 재현하기 위해서 활용되는 보조적인 수단으로서도 이용되지 않는다. 오히려 사진이 말하기를 그친, 그렇다고 바르트의 용어법에서의 ‘풍크툼’(punctum)처럼 사진 이미지가 관람자-주체의 고요한 내면에 상처를 내는 방식과는 달리, 사진에 등장한 이미지가 말하지 않는 가능성을 캔버스 위에서 가능하도록 만든다. 

달리 말해, 그는 사진 이미지가 탈프레임화한 세계를 새로운 프레임으로 재구축하려고 시도한다. 이는 사진 이미지를 이중적인 방향으로 활성화한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먼저 단순히 사진 이미지에 포착된 형상 바깥의 세계를 포착하는 게 아니라 프레임화하는 시선을 굴절하고 왜곡하는 방식을 채택함으로써 이루어진다. 즉 상식적이고 정상적이라고 간주된 시선이 이른 바 합법적 시선으로 통용되고 있다면 이 시선이 갖는 폭력적이고 강제적인 시선권력을 자연화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세계를 보는 방식 자체가 결정되어 사건/사물을 바라보는 입장이 몇 가지로 제한되고 있는 현실에서 오용석이 사진 이미지를 변경시키는 것은 필연적일 수 있다. 가령, ‘말’과 관련된 이미지들은 종과 동물로써 말로 더 이상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그러니까, 사진이 장소로부터 떼어 낸 이미지를 오용석은 캔버스를 통해서 다른 세계에 이어 붙인다는 것이다. 물론 그 때 캔버스는 완결된 세계일 수 없고 하나의 접속점으로 기능한다.  


‘미싱’이라는 방법은 작가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중대한 캔버스의 생장 원칙이다. (주의하자. 성장이 아니라 생장이다.) 미싱이 떨어져 있는 사물과 존재를 결합시키는 방법, 더 정확하게 말해 ‘기계’라고 한다면, 이전의 오용석의 작업에서 볼 수 있었던 신체적 뒤틀림이나 살의 혼융을 거듭한 이후에 등장한 존재론적인 결합관계를 의미하는 이미지들에서 수행했던 방법과는 궤를 달리하는 것처럼 보인다. 달리 말해, 이미지를 특정한 주제와 소재에 적합하도록 캔버스에 옮겨오기는 했지만, 그 이질적 이미지들이 결속되지 않았으며 이미지의 중첩은 실질적으로 일어나지 않았다는 말이다. 이번 전시에서 오용석은 다양한 이미지를 동시적으로 존재하도록 만드는 기계를 회화에 도입했다는 것. 거기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이나 사물들은 모두 박음질된 상태이며 그들 혹은 그것들은 항상 이미 ‘여러 가지’로 절합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3. 캔버스의 두께 : 외로움의 밀도


결속은 하나가 되는 것이지만, 그보다 우선 이질적인 두 존재가 엮일 때 결속이라고 부를 수 있다는 점에서 하나가 되었다는 것보다 이질적인 두 존재라는 차이가 근본적이라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캔버스가 작가와 관객을 매개하는 미디어라고 할 때, 관객/작가가 한 몸이 된다고 하더라도 근원적으로 이 양자가 지닌 차이가 있듯이, 캔버스가 관객/작가의 결속을 도모하더라도 이 양자가 동일하게 묶일 수 없듯이 말이다. 이질적인 두 이미지가 뒤섞이고 이미지가 누적적으로 캔버스 위에 도입된다고 해도, 이들은 서로 분별되기 때문에 결합될 수 있는 것이고 바로 이런 사정 때문에 오용석의 캔버스에서 이미지는 하나이면서 항상 여러 개로 포옹하고 있는 상태이다. 

그러나 여기서 더 근본적으로 질문해야 할 것은 이미지들의 결속이 대체 왜 필요한가이다. 왜 단독적인 이미지보다 이미지들의 결속을 초래해야 하는가. 캔버스가 왜 이미지들을 불러 모으는가. 이 격렬한 호출과 호흡은 외로움/상실의 문제이며 동시에 애도 불가능성의 문제와 관계된다. 내 이웃이나 내가 이웃이라고 간주하지 않았던 존재의 상실이 나에게 고통을 구성할 때, 놀랍게도 내 이웃이나 내가 이웃이라고 여기지 않았던 존재들이 ‘나’를 구성하고 있었다는 것을 뜻한다. 이는 ‘나’라는 단독적인 의식이 실은 언제나 나 이외의 요소들과의 관계에서만 성립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며 한 존재는 항상 나 이외의 존재가 처하는 상실에 매우 취약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좌이다. 우리는 이를 외로움이라고 부르며 이 외로움에 탓에 반복적인 결속을 요구/요청한다. 

그런 점에서 하나이면서 여러 개인 이미지는 완전히 하나로 포개지는 거울 이미지가 아니다. 이 이미지는 한 개별적 존재가 여러 개로 결속되어 있는 사태를 지칭하고 있다. 이 결속이 와해되는 순간을 흔히 상실이라고 부르며 보통 이 사태에 직면해서 성공적인 애도를 수행하고 상실을 의례와 제의로 처리하지만, 오용석은 성공적인 애도를 수행하기보다 그것에 실패함으로써 외로움을 저지한다. 말하자면, 애도에 성공하는 순간 우리는 상실되어 버린 존재와 영원히 결속할 수 없는 외로움에 직면하게 되므로, 애도를 불가능하게 만듦으로써 외로움이라는 사태에 응답하고, 오히려 이 때문에 더 많은 결속들을 수행하게 된다. 그렇다고 외로움이 소멸하는 것은 아니지만, 바로 이러한 감각이 ‘이웃’과 더불어 ‘나’의 존립가능성을 확인하게 만들어주는 만큼, ‘이웃 혹은 대상’은 지배하고 통치할 수 있는 존재일 수 없다. 아니, 오용석의 캔버스는 이미지/존재들의 상실에 저항하는 존재론적인 보살핌의 장이라고 할 수 있다. 마치, 재앙과 파국이 새로운 삶, 그러니까 다른 방식의 사랑과 연애를 구성하도록 만드는 것처럼 말이다. 그의 사랑이 외로움과 더불어 ‘수행’된다는 것은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닌 것일까? 2011


<[Tu] 2011> 수록


 



I forget to remember to forget1 (le sommeil éveillé du monstre) 1


Luc  Jeand'heur(작가) 

번역 : 정현

 

나는 망각을 기억하는 것을 잊어버렸다. ( 잠에서 깨어난 괴물)

 

« 장치들이 포획한 사용법의 가능성을 그 장치들로부터 매번 빼앗아야만 한다. 남용할 수 없음의 남용이야말로 다가올 세대의 정치적 숙제다. »

지오르지오 아감벤, 모독, 2005

 

한국은 물론 서양에서도 20세기란 우울함이 깃든 재앙의 감정을 시대 뒤에 남겨두었다. 개개인은 그만의 방법으로 이 역사의 광기와 죽음을 밀어내겠지만, 신세기의 요동 속에서도 의식을 지닌 젊은 예술가들은 동시대성 속에 내재된 (역사적) 연속성에 현혹되지만은 않는다. 오용석은 이런 시대적 상실과 방황을 확신하고 있는 세대에 속한다. 이 세대는 공허함을 채우길 거부하고 되려 공허함을 « 도려낸다 »2.그리고 그들은 전시주의도 크로노포비(연대기혐오증, 역주)도 없이 예술을 통해 « 세상을 믿는다 »는 힘을 실어준다. 무소유로 산다는 것 역시 소유하며 사는 것이다란 문구처럼 (시대적) 유산과 대결한다는 것은 오늘날에도 관념적 사유를 의미한다. 오용석의 회화가 결핍, 부재, 몰이해 그리고 공허함과 같은 야만족의 신화로부터 얼룩지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요소들은 작가의 공간을 활성화된 의지로 수놓아진다. 이처럼 강렬한 추상화의 영역은 작가가 개척한 공간을 형상화하며 이 공간들은 회화성으로 가득 채워진다.

 

« User's guide : 1. Follow the leaders. 2. Kill the past. 3. Load the weapons. 4 Destroy the machines. 5. Kill the leaders. »

Mathieu Kleyebe Abonnenc, RIOT,2000

“ 사용자 설명서: 1.리더를 따라가라. 2. 과거를 제거하라. 3. 무기를 옮겨라. 4. 기계를 파괴하라. 5. 리더를 제거하라.”

 마튜 클레이비 아본넥, RIOT, 2000

 

인터넷이 새롭게 느껴지는 세대의 예술가들에게 이 매체는 현실 속에서 필름 위에 음영화를 그리는 대신 수많은 환영을 무한복제하기위한 새로운 가능성을 제공했다. 이 거대한 소통과 기억의 망조직은 장소, 정보, 시간과 정체성의 공식적이고 일상적인 기술일 것이다.3인터넷기술은 공공연하게 일상을 통해 거대하고 전지구적인 무의식을 스스로 습득하고 있으니 말이다. 늑대가 먹이감을 찾기 위한 흔적들을 수집하기 위한 것처 오용석은 숲을 거닐 듯 인터넷을 산책한다. 그는 그 속에서 범죄현장의 이미지, 증거품, 시각적인 증언과 폭동의 사진을 발견한다. 그것은 마치 운명의 기층처럼 형상을 그려내는 신체와 장소들이다. 그것들은 사라지지 않는다. 페테 슬로터다이크에 의하면, «  범죄현장은 지식에 의한 공범자와 같고 행위 속에 공범자를 내포하고 있는 기괴한 총합적 영역이다. »4오용석은 그 현장에 정시에 도착한다. 그의 작업은 알리바이를 제시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는 현장도 신체도 내버려두지 않는다. 현장으로의 회귀와 회화적 몸짓은 마치 나는 여기 있어, 실제로 말이야, 바로 살인에 의해 세척된 그 얼굴들 안에서, 버려진 현장 안에서 라는  고백을 들을 수 있기 때문이다.

 

« L'humanité est peuplée de plus de morts que de vivants. »

Auguste Comte, Coursdephilosophiepositive,1839

« 인류는 점점 더 산 자들보다 사자들로 채워져간다. »

오귀스트 꽁트, 긍적적 철학 수업, 1839

 

마치( 남성적인 여성처럼 보이는) 몸짓의 이미지는 개인적으로 우리들을 따라다니고 집단적으로 우리를 포획한다. 돈 디릴로의 삶의 명상처럼, «  존재는 예리한 의식의 절대적인 원천으로부터, 집착의 틀을 너머, 공포의 단계와 깊이를 통해 자족하려는 경향이 있다. ». 오용석의 전작 « 블로우-업 » 시리즈는 회화를 통해 일종의 살풀이를 수행한다. 인간세상 속에 드리워진 암흑으로부터 작가는 자신이 창조한 인물들의 신화로부터 차용한 서술적인 퍼즐을 통해 대답한다. 관객은 작가의 « 정신적인 작은 영화 »를 완성시키기 위해 초대되었다. 그의 신체는 마치 (영화의) 검수작업이나 몽타쥬, 스토리보드를 위한 편집작업재료처럼  그의 시선을 작은 영화 속으로 이동시킨다. 이런 과정은 알레고리와 메타포로 연동하는데, « 암흑의 중심 »5으로 인도하는 수많은 길 속에서 만난  니진스키, 엘리자베스 쇼트 그리고 조이 스테파노는 그의 영웅인 말로우 Marlow의 언어로 이렇게 말한다 : « 우리는 오로지 꿈꾸듯 살고 있다. »

 

« Fabriquer de l'histoire est l'équivalent athée d'une prière. » 

Paul Veyne, interview pour le magazine Lire,2005/2006

«  역사를 만드는 것은 무신론자의 기도와 동등하다. »

폴 벤느, Lire 월간지와의 인터뷰, 2005/2006

 

그의 최근작은 흰색의 가치만이 유일한 것이 아니라는 점을 증명해준다. 왜냐하면 « 검정 » 역시 모든 색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그의 회화를 처음 대면하게 되면 무엇보다 죽음에 대한 공포와 포르노그래피 그리고 이미지에 대한 매혹과 같은 반복적인 테마와 마주하게 되면서 조금은 당황하게 될지도 모른다 (이 역시 인터넷의 성격이다). 오용석은 그 지점에서 이런 이미지를 바라보는 방법과 어떻게 «  이미지들이 우리를 바라보는가 »를 질문한다. 프랑켄슈타인의 지시로 완성된 예술가처럼, 그는 이미 존재하는 사진들과 관련된 이야기를 해부한다. 이런 행위는 남겨진 이미지와 이미지를 남기는 무엇인가에 의해 구축되는 예술이다.  그것은 소비될 수 없거나 소화될 수 없는 것과 같다. 실제의 이야기는 회화라는 우회로, 그 손길에 의해 스스로 변화할 수 있는 황홀한 권리와 자신만의 다른 시간성을 지닌 길을 차용한다. 격정이 사라진 후 캔버스 표면 위엔 유화의 기름만이 남아있다. 이미 예견된 « 회화의 죽음 »6이 실제 벌어지지는 않았지만, 이 죽음은 언제나 작가의 작품 안에서 탐욕스러운 현재형의 신화를 그려내고 있다.

 

« C'est tranquille comme un corps, comme un organe qui bouge à peine, qui respire rêveusement jusqu'au moment des périls, mais c'est plein de secrets, de ripostes latentes, d'une fureur et d'une rapidité biologiques, comme une anémone de mer au fond d'un pli de granit... »

Paul Nizan, Laconspiration,1938

«  마치 신체처럼, 마치 위급한 상황까지 꿈꾸듯 숨쉬는 고작 움찔하는 장기처럼 고요하지만 그것은 마치 화강암의 굴곡 깊숙한 곳에 숨어있는 말미잘처럼 비밀과 잠재된 반격, 분노와 생물학적 속도로 가득차 있다… »

폴 니잔, 음모, 1938

 

회화적 원천은 질료적으로 숭배해야하거나 정치적으로 올바른 것도 아니며 성스럽거나 그렇다고 귀족적인 것도 아니다. 바로 이 그림자 부분7은 걱정스럽고 식어버린 불안한 역사로부터 유래되었다. 그럼에도 오용석의 작업은 회화가 지닌 정제과정을 거친 매혹과 유혹의 힘을 지니고 있다. 마치 극단적인 경험처럼, 마치 악몽이나 망상처럼, 마치 사람들이 되돌아와야만 하는 꿈처럼, 고독과 고립 속에 위치한 각 작업은 복합적인 드러냄과 감춤, 외적 연상과 내적 연상, 구상과 추상, 내부의 공간-사물과 외부의 공간-사물 그리고 진실게임을 형상화한다. 작가가 선사한 세계는 지옥의 풍경이 아니다. 그의 작업은 군중 속의 한 개인의 예견된 죽음에 대해 니체적인 개인권력의지를 지시하는 듯한 죽음이미지를 통해 저항 속에서 어떤 중요한 진리를 발견할 수 있음을 의미하고 있다. 오직 예술작품만이 동시대적임을 제시할 수 있는 시간의 질서 속에서 추출된 어떤 한 순간을 통해 죽은 자와 죽음 사이의 상징적 균형을 이끌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그의 회화는 바로 이런 사유를 구체화한다. 괴물은 비인간이 아니다. 화가는 그만의 방법으로 열정적이고 야만적이기까지한 폭력성을 지닌 채 반대의 관계를 공유한다. 어두운 터널 끝은 우리의 인류와 같은 그들의 감정의 빛이 떠오르기 때문이다. “ 나는 망각을 기억하는 것을 잊어버렸다”는 “나는 기억을 기억하는 것을 기억한다”로 바꿀 수 있을 것이다..

 

 « 2. Les saints parlent aux oiseaux mais seuls les fous obtiennent des réponses. » 

Don DeLillo, Americana,1971

« 2. 성인은 새에게 말하지만 오직 광인들만이 대답을 들을 수 있다 »

돈 드릴로, 아메리카나, 1971

 

 하지만 혼동하지 말자. 왜냐하면 오용석에게 죽음에 대한 욕망이나 사랑따위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오용석에게 표출되는 « 황무지 »8(wild는 광기로 해석될 수 있다) 는 이마쥬리(수집된 이미지들의 모음)의 반추를 위한 초석이다. 이런 광기어린 동요는 재현의 의미 안에서만 펼쳐진다. 재현할 수 없는 것을 재현한다는 것은 질료 이전으로서의 회화성이 무엇보다 정신적 이미지이기 때문이다. 그의 주제들은 재위치되고 회전하거나 방향을 바꾸고 흔들리고 위장되거나 까발려진다. 형상은 생경한 표현주의적인 타박상이나 신체의 뒤틀림의 세밀함에 복종한다. 신체의 외곽선은 흐릿해지고 색은 검거나 하얀 구멍, 공간들, 가면과 신체의 용솟음처럼 느껴진다. 전체적으론 초현실주의적 경험과 유사해 보이지만, 회화의 소재로서 바라본 이미지의 해체는 관람객에겐 그림의 표면 극단까지의 탐험을 요구한다. 우선, 과거도 미래도 없는 밀도감을 통해 회화적 경험을 발견한 후 형태와 함께 울림이 퍼져나오는 총체적 사유가 드러날 수 있도록 흩어진 이야기의 조각들, 증거물과 힌트를 가늠할 수 있는 혼란스러운 읽기를 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이런 현상이 낯선 내적 회화성과 자아의 외적 주관 사이의 유기적인 융해를 이끌어낸다. 괴물성 혹은 세상의 단잠을 깨우는 스탕달 신드롬9처럼 말이다. 어쩌면 추락에 이를 때까지. 2008

 

 

1 titre d'une chanson d'Elvis Presley, 1955

엘비스 프레슬리의 노래제목, 1955

2 citation approximative de Jacques Derrida, SpectresdeMarx,1993

자크 데리다, 마르크스의 환영, 1993

3  En dépit de son origine militaire qui n'est pas le moule à cire perdue que l'on voudrait croire. Chacun y bâtit sa libre part d'éternité tant qu'il paye la caution de son abonnement. 

인터넷이란 군대로부터 출발했기 때문에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 출발점은 지워지지 않는다. 그 대신 우리가 보증금과 월정액을 지불했기 때문에 불멸의 자유를 그 공간 속에 건설할 수 있다.

4 Peter Sloterdijk, l'heureducrime etletempsdel'oeuvred'art,2001

피터 슬로터다이크, 예술작품의 시간성과 범죄의 시간, 2001

5 titre d'une nouvelle de Joseph Conrad, 1899

조셉 곤레드의 새로운 제목

6 en Occident dans les années 1960-70

서구의 1960-70년대

7 James Ellroy, Mapartd'ombre,1999

제임스 엘로이, 그림자 속 내 몫, 1999

8 état de nature et de sauvagerie paradoxal jeté vers l'avenir et presque révolu ingrédient traditionnel du « romance » roman romanesque américain

미래로 향하는 역설적인 야만성과 인간본질 및 이미 폐기된 미국의 낭만적인 « 로맨스 »소설의 전통적인 소재

9  le syndrome de Stendhal est une maladie psychosomatique qui provoque des accélérations du rythme cardiaque, des vertiges, des suffocations voire des hallucinations chez certains individus exposés à une surcharge d'œuvres d'art. Cette perturbation est assez rare et touche principalement des personnes trop sensibles. Ce syndrome fait partie de ce qu'on peut appeler les troubles du voyage ou syndromes du voyageur. Wikipédia.

스탕달 신드롬은 심장박동의 가속을 야기하는 정신신체의학적 질명이다. 일부 사람들에게는 예술작품의 벅찬 감동 때문에 현기증, 호흡곤란및 환각증상까지 야기시킬 수 있다. 이런 혼돈은 드문 현상이며 특별히 예민한 사람들에게만 일어난다. 스탕달 신드롬은 여행자가 겪는 신드롬 또는 여행이 주는 혼란함을 일컬을 수 있다. 위키페디아 백과사전.

 

<[Tu] 2011> 수록



RELATED TEXT : 망각 OBLIVION 2010



 




I forget to remember to forget1 (le sommeil éveillé du monstre)


Luc  Jeand'heur 

  

« Il faut arracher à chaque fois aux dispositifs la possibilité d'usage qu'ils ont capturée. La profanation de l'improfanable est la tâche politique de la génération qui vient. » 

Giorgio Agamben, Profanations,2005

 

Que ce soit en Occident aussi bien qu'en Corée, le XXe siècle a laissé derrière lui un sentiment de désastre avéré teinté de mélancolie. Chacun possède sa façon de refouler cette histoire de mort et de folie et il n'est pas étonnant de rencontrer de jeunes artistes qui, conscients du basculement du nouveau millénaire, ne sont pas dupes pour autant d'une continuité dans le présent. Yong-Seok Oh appartient à cette génération mondiale qui croit en une mémoire vive de la perte et de l'errance. Elle refuse de combler les vides ou de les « évider encore plus »2  et donne à l'art le pouvoir de « croire au monde » sans présentisme ni chronophobie. Affronter cet héritage implique aujourd'hui la pensée : vivre sans est vivre avec. Quand bien même les tableaux de Yong-Seok sont entachés du mythe de la barbarie, les manques, les absences, les incompréhensions, les vides y sont une volonté activée. Des zone d'abstraction intenses qui figurent les espaces conquis. Ils sont tous intégralement remplis de peinture.

 

« User's guide : 1. Follow the leaders. 2. Kill the past. 3. Load the weapons. 4 Destroy the machines. 5. Kill the leaders. »

Mathieu Kleyebe Abonnenc, RIOT,2000

 

Internet offre aux artistes qui lui sont contemporains de nouvelles possibilités de gratter les négatifs pour multiplier le nombre de fantômes dans le présent. Ce vaste réseau de communications et de mémoires est aujourd'hui une technologie ordinaire agrégative des lieux, des informations, des temps et des identités3.Elles'appréhendeégalementauquotidiencommeunvasteinconscientglobalàcielouvert. Yong-Seok se promène sur Internet comme dans un bois, pendant que le loup... pour y collecter son matériel initial. Il y puise des images de scènes de crime, des pièces à conviction, des témoignages visuels et des clichés d'émeute. Ce sont les lieux et les corps de l'après qui figurent comme des substrats de destins. Ce qui n'a pas disparu. Selon Peter Sloterdijk, « le lieu du crime est le périmètre de ce monstrueux global qui inclut ses complices par l'action et ses complices par le savoir. »4Yong-Seokestunartisteàl'heure.Sontravailneproposepasd'alibis.Ilnelaissenilescorpsnileslieuxàl'abandon.L'aveudugestepictural,dudétournementduréelest:jesuislà,pourdevrai,danslesvisageslavésdumeurtre,dansleslieuxdésertés.  

 

« L'humanité est peuplée de plus de morts que de vivants. »

Auguste Comte, Coursdephilosophiepositive,1839

 

Il y a des images comme des gestes (au féminin comme au masculin) qui nous obsèdent individuellement et nous possèdent collectivement. Comme des méditations sur la vie. Don DeLillo parle de « l’existence tend à se nourrir des profondeurs, du niveau de la peur, du plan de l’obsession, de l’absolue source de conscience aiguë ». La précédente série de toiles de Yong-Seok , Blowup,fonctionnaitcommeunesorted'exorcismepictural.Alanoirceurdumondedeshommes,ilrépondaitparunpuzzlenarratifempruntés à la légende de ses personnages. Le spectateur était invité à mettre en oeuvre son « petit cinéma mental ». Son corps y déplace son regard comme instrument de dérushage, de storyboard, de montage, de visionnage. Allégories et métaphores. Autant de routes pour nous conduire Aucoeurdesténèbres5 où Vaslav Nijinski, Elizabeth Short et Joey Stephano parlent avec les mots de Marlow, son héros : « Nous vivons comme nous rêvons, seuls ».

 

« Fabriquer de l'histoire est l'équivalent athée d'une prière. » 

Paul Veyne, interview pour le magazine Lire,2005/2006

 

Ses travaux récents nous font encore la preuve que ce n'est pas la seule vertu du blanc : le « noir » contient lui aussi toutes les couleurs. L’abord de ses toiles peut sembler déroutant dans le face à face répété avec des thèmes récurrents tels que l'angoisse de la mort, la pornographie et la fascination pour l'image (également caractéristiques d'Internet). Yong-Seok y interroge la façon dont nous regardons ces images et comment « elles nous regardent ». Un artiste de l'ordre de Frankenstein. Il dissèque les photographies déjà existantes et les récits associés. L'art de construire avec les images qui restent et ce qui reste des images. Ce qui ne peut être consommé, ce qui ne peut être digéré. Une histoire vraie emprunte les détours de la peinture, son temps Autre et sa formidable faculté de transformer en elle-même tout ce qu'elle touche. Après l'incendie ne demeure sur la toile que de l'huile. La « mort de la peinture » annoncée6  n'a pas lieu, elle incarne toujours dans les oeuvres de Yong-Seok  une mythologie du présent dévorante. 

 

« C'est tranquille comme un corps, comme un organe qui bouge à peine, qui respire rêveusement jusqu'au moment des périls, mais c'est plein de secrets, de ripostes latentes, d'une fureur et d'une rapidité biologiques, comme une anémone de mer au fond d'un pli de granit... »

Paul Nizan, Laconspiration,1938

 

Les sources picturales ne sont donc ni nobles ni sacrées ni révérence au médium ni politiquement correctes. Cette partd'ombre7 provient d'une histoire intranquille, refroidie, inquiétante. Les tableaux de Yong-Seok possèdent pourtant un pouvoir de séduction, de fascination qui est celui du filtre de la peinture. 

Chaque tableau figure un jeu confessionnel et complexe d'apparition et d'effacement, évocation et invocation, figuration et abstraction, espace-chose du dedans et espace-chose du dehors. Comme une expérience des limites, comme une hallucination, un cauchemar, comme un rêve, sur lequel on revient, dans la solitude et l’isolement. Les visions offertes par Yong-Seok ne sont pas des scènes d'enfer. Elles signifient qu’il y a sans doute là quelque vérité essentielle à découvrir dans la résistance à ces images de mort qui affichent la volonté de pouvoir nietzschéenne de la mort annoncée de l'individu par les masses. Seule l'oeuvre d'art permet d'atteindre cet équilibre symbolique entre la mort et le mort dans un instant arraché à l'ordre du temps qui le rend terriblement contemporain. Sa peinture se précise dans cette pensée. Le monstre n'est pas inhumain. Le peintre partage à sa manière une lointaine affinité avec sa violence sauvage et passionnée. Au bout du tunnel sombre se révèle la lumière du sentiment de leur humanité pareille à la nôtre. « I forget to remember to forget » devient ainsi « I remember to remember to remember ».

 

« 2. Les saints parlent aux oiseaux mais seuls les fous obtiennent des réponses. » 

Don DeLillo, Americana,1971

 

Il ne faut surtout pas se méprendre. Il n'y a ni amour ni désir de la mort. Chez Yong-Seok , cette « wilderness »8 qui s'exprime (qui est aussi « wild », folie) est  fondamentale dans la réflexion de l'imaginaire de son travail d'artiste. Le basculement n'a lieu que dans le sens de la représentation. Représenter l'irreprésentable. Avant d’être un médium, la peinture est donc une image mentale. Les sujets sont recadrés, combinés, déplacés, floutés, camouflés, dévoilés... La figuration soumet les détails aux contorsions et contusions d'un expressionnisme singulier. Les contours des masses sont estompés. La couleur comme un jaillissement de corps et de masques, d'espaces et de trous noirs ou  blancs. L'ensemble apparaît parfois proche d'une expérience surréaliste. La dissolution de l'image dans la matière-même de la peinture exige du spectateur d'aller lui aussi dans un au-delà, celui de la surface du tableau. En premier lieu, l'intensité sans passé et sans avenir de l'expérience picturale puis une trouble lecture mesurant  les indices, les pièces à convictions et les éléments épars des récits pour qu’apparaisse l'intégralité de la pensée qui est en résonance avec la forme. La fusion organique d'une picturalité intérieure singulière et d'une subjectivité extérieure à soi. Peut-être jusqu'à la chute, le syndrome de Stendhal9 qui nous éveille au sommeil du monstre/du monde. 2008


 

1 titre d'une chanson d'Elvis Presley, 1955

2 citation approximative de Jacques Derrida, SpectresdeMarx,1993

3  En dépit de son origine militaire qui n'est pas le moule à cire perdue que l'on voudrait croire. Chacun y bâtit sa libre part d'éternité tant qu'il paye la caution de son abonnement. 

4 Peter Sloterdijk, l'heureducrime etletempsdel'oeuvred'art,2001

5 titre d'une nouvelle de Joseph Conrad, 1899

6 en Occident dans les années 1960-70

7 James Ellroy, Mapartd'ombre,1999

8 état de nature et de sauvagerie paradoxal jeté vers l'avenir et presque révolu ingrédient traditionnel du « romance » roman romanesque américain

9  le syndrome de Stendhal est une maladie psychosomatique qui provoque des accélérations du rythme cardiaque, des vertiges, des suffocations voire des hallucinations chez certains individus exposés à une surcharge d'œuvres d'art. Cette perturbation est assez rare et touche principalement des personnes trop sensibles. Ce syndrome fait partie de ce qu'on peut appeler les troubles du voyage ou syndromes du voyageur. Wikipédia.


 


서동진(문화평론가)


어느 미술평론가는 게이미술(혹은 그의 표현을 빌자면 호모아트(homoart))을 크게 두 갈래로 나눌 수 있다고 말한다. 요컨대 그것은 프리아포스(Priapus)의 계보와 아도니스(Adonis)의 계보이다. 이 두 명의 원(原)신화적인 인물이 게이미술의 역사를 종합한다고 말하는 것은, 물론 과장이다. 그것은 몇 가지 단서가 붙은 한에서 인정될 수 있을 것이다. 근대사회에 접어들며 동성 간의 친밀성과 성애적인 관계를 별개의 종(성의 인구학)으로 묶게 되었을 때, 그리고 바로 그런 분류에 따라 자신을 인식하고 체험하고자 발버둥쳤던 이들이 등장한 연후에, 우리는 자신의 환상을 대표할 무엇을 찾게 되었다고 말해야 옳을 것이다. 


그러므로 남성적인 욕정과 강건함의 화신인 프리아포스와 양성적인 혹은 남성의 여성적 아름다음의 권화인 아도니스가 각기 동성애적인 환상이 끊임없이 회귀하는 근원적 형상이라고 말하기 위해서는, 오직 우리의 세기, 근대적인 시대가 도래 했어야 한다고 말할 수 있다. 물론 그것이 굳이 프리아포스이거나 아도니스이어야 할 필요는 없다. 우리는 그들을 대신할 수 있는 숱한 신화적인 형상을 추가할 수 있다. 또한 적어도 20세기 후반 이후 즉 근대적인 동성애자사회가 출현한 이후, 우리는 더 이상 그런 신화적 형상에 호소할 필요가 없다. 미국의 쇼핑몰이나 번화한 쇼핑가 어디에서 마주칠 수 있는 애버크롬비 앤 핏치(A & F)라는 의류 브랜드의 쇼핑백에서 우리는 브루스 웨버(Bruce Weber)의 사진들을 손쉽게 만날 수 있다. 그리고 그가 찍은 사진들은 아마 우리 시대의 호모에로틱한 도상의 표준일 것이다. 그것은 눈부시게 아름다운 캘리포니아 청년들이고, 그를 주시하는 동성애적 욕망으로 충만한 카메라의 눈길이다. 


그러나 그 사진을 관능적인 매혹으로 받아들이기 위해 우리는 1960년대의 전설적인 우편 사진 잡지들, 흔히 피지크 픽토리얼(Physique Pictorial)이라는 잡지들이 만들어놓은 이미지들을 전제해야 한다. 그 잡지들은 남성 누드 사진을 제공하였고 그 사진들은 은밀하게 고전적인 고대의 신화들을 상연하는 척 하였다. 즉 그 사진 속에 등장하는 남자들은 프리아포스이거나 아도니스를 재연하였다. 그런 작위는 동성애적 관능을 은폐하기 위한 가장의 몸짓이었을 수도 있고, 아니면 그 사진을 소비하는 이들이 공유하던 동성애적 환상의 무대를 제공하기 위하여 정교하게 연출된 미장센이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제 부르스 웨버의 사진에서 우리는 고대 신화를 참조하는 도상들의 흔적을 발견하기가 불가능하다. 


그렇지만 그것을 조금만 주의 깊게 추적하면 우리는 그 안에서 동성애적 욕망을 시각적으로 재현하는 역사적 실천들이 매개되어 있음을 찾아볼 수 있다. 웨버의 사진은 더 이상 고대의 제전과 신화에 등장하는 레슬러와 미소년의 모습이 아니라 눈부신 캘리포니아의 태양 아래에서 윈드서핑을 즐기는 서퍼의 모습을 제시할 따름이다. 그러나 웨버의 사진이 있을 수 있기 위해서는 전 시대의 남성 누드 사진의 동성애적 미장센이 불가피하다. 그런 점에서 웨버의 사진이 웃통을 벗은 관능적인 젊은 남자를 응시하는 시선을 제공하기에 동성애적인 것이 아니다. 그의 사진적 도상이 동성애적 욕망을 투사하는 장막이 될 수 있는 것은 전 시대의 남성 누드 사진의 동성애적 미장센을 모방하기 때문이다. 


오용석의 페인팅 역시 바로 그런 환상의 궤적 안에 놓이지 않을까. 자신의 동성애적인 욕망은 나라는 주어에게 속한 것으로 머물 때, 즉 비규정적인 환상이 될 때 그것은 광기가 되고 만다. 따라서 동성애적 욕망을 품고 살아가는 이는 자신의 욕망을 자신이 소속된 어떤 정체성의 연장이자 표현으로 고정시키지 않고서 살아가지 않을 수 없다. 그렇지 않다면 그는 우연적으로 동성인 어떤 누구를 사랑하는 것이지 동성이 가진 일반적인 특성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동성애적 욕망을 자신의 무한한 광기 속으로 빠트리지 않고 공통된 욕망의 표현으로 길들이는 것은 모든 게이 예술의 일차적인 사명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즉 미치지 않기 위하여, 나의 이 욕망이 나의 바깥의 세계에도 존재하며 그 세계 안에서 순환하는 것임을 선언하기 위하여 게이들은 언제나 자신의 욕망을 모방된 욕망, 이미 존재하는 어떤 대상을 향한 욕망으로 만들어낸다. 


그래서 게이 미술은 언제나 모방의 욕망에 속한다는 점에서 도상적인 예술이 되어버릴 수 있다. 물론 그것을 나쁘다고 말할 수는 없다. 당신은 데이빗 호크니의 그림에서 무엇을 보는가. 우리가 그의 70년대의 대표적인 작품들, 이를테면 그의 대표적인 작품들, <비벌리 힐스의 샤워하는 사내>나 <어느 예술가의 초상>같은 작품을 볼 때, 사적인 전기를 식별하고 멜랑콜리한 동일시를 투입할 수 있다. 비록 그 그림을 보는 이가 그 그림들이 호크니의 연인이었던 피터이거나 그레고리 아니면 이언이며, 그가 사랑했던 금발의 아름다운 청년들과 맺은 사적인 관계와 감정을 서사적으로 제시하는 것임을 알고 있거나 모르거나, 그의 그림은 그를 보는 이(물론 게이)의 시선을 통해 게이화되고, 또한 도상화된다. 그렇지만 알다시피 도상적 재현의 규범으로부터 이탈하고 그것을 끊임없이 변형하려는 열정적인 현대 회화의 장인이자 연금술사야말로 호크니를 따라다니던 꼬리표 아니던가. 


그렇다면 게이적인 욕망을 도상화하는 예술가로서의 호크니와 반도상적인 나아가 반재현적인 현대 미술가로서의 호크니라는, 우리는 양립 불가능한 두 명의 호크니를 만난다. 나는 오용석의 작업에서 그런 이중화된 게이 미술가의 정체성을 찾아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가 “블로우 업”이라고 이름붙인 연작 작업이나, “파우누스” 연작, 나아가 “실마리를 찾아서” 작업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그런 게이 작가 혹은 게이적인 도상(양식화된 서구의 게이 포르노그라피, 조이 스테파노, 그리고 심지어 게이적인 욕망을 의인화하기 위한 신화적인 형상으로서 인용된 파우누스(!)에 이르기까지)을 수집하고 모방하는 관람자로서의 작가의 모습을 찾아볼 수 있다. 그렇지만 그런 도상적인 재현을 위한 충동을 조직하는 욕망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예컨대 다시 호크니로 돌아가자면 왜 그는 욕실에서 샤워를 하는 그의 연인 피터를 그와 같이 그려야 했던가. 수도꼭지에서 떨어지는 저 유명한 물줄기, 샤워를 하는 피터의 등을 굽힌 모습, 그것의 배경이 되는 타일벽면의 비원근법적인 평면화된 배치를 구성하는 그의 회화적 스타일은 과연 무엇에 의해 규정되는 것일까. 그리고 알다시피 우리는 그것에 주목함으로써만 호크니의 그림에서 얻을 수 있는 고유한 쾌락을 확보할 수 있다. 그렇지 않다면, 왜 우리가 굳이 호크니의 그림에서 눈길을 떼지 못할 것인가. 


나는 오용석의 작업에서 그런 흥미로운 역설적인 긴장을 찾아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그가 선호하는 색채들이 궁금하다. 그가 집요하리만치 모든 그림 속에 집어놓고 있는 흰색과 검은색의 밀도가 아름답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것이 재현하는 대상들을 다른 감각적 체험의 대상으로 운반하는 요구 앞에 멈추어 서게 된다. 그리고 그런 것들은 그의 그림에서 얻는 도상적인 쾌락보다 멀리 나를 나아가게 한다. 예를 들어 그가 그리는 클로즈업된 애널 섹스의 장면은 포르노그라피적인 것이면서 또한 게이 미술가들이 허다하게 반복적으로 인용하여온 지표적인 이미지이다. 그러나 그것이 그에게 검붉은 혹은 혼탁한 잿빛의 실루엣으로 등장할 때 나는 흥미롭다. 그 장면을 평범한 관능적인 쾌감에서 분리시키는 것은 바로 이러한 감각적인 자질, 혹은 이미지에 추상적인 잉여를 부여하는 힘이라고 생각한다. 그 때문에 게이적 도상을 제시하는 작품과 그로부터 벗어나 있는 대상들을 제시하는 작품들 사이를 관련지우는 방식을 궁금해 하게 된다. 나는 그의 소라 그림과 꽃 그림들이 아름답고 또 그것에서 점진적으로 매혹을 느껴간다. 그리고 나는 그것이 그의 주관성, 그가 시도하는 주관화의 몸짓에 다가서는 것이라고 믿는다.


그런데 덧붙일 점은 여기서 내가 말하는 주관성이나 주관화란 자유주의적 세계관에서 찾아볼 수 있는 사적인 인물의, 혹은 심리적 개인과는 전연 거리가 먼 것이다. 주관화한다는 것(subjectiviation)은 자아라는 환영적인 실체를 만들어내고 그것에 일관성을 부여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기존의 감각의 질서와 다툼을 벌이며 새로운 감각적인 세계가 실존함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를테면 우리가 열정적으로 사랑했던 호크니나 베이컨의 작업들은 온전히 바로 그 주관화의 영역에 놓여있다. 그들은 게이로서의 자신의 욕망을 제시하였지만 우리가 그들의 그림에서 보는 것은 그들이 창출한 새로운 미적 주관성에 있다. 우리가 오용석의 작업에 관심을 기울인다면 그 역시 바로 그것에 있을 것이다. 


따라서 그로부터 우리가 새로운 감각적 세계로 입장할 수 있기를 기대할 때 우리는 그가 제시한 혹은 훗날 우리에게 제공할 작품들이 주는 쾌락과 온전히 해후할 수 있을 것이다. 그의 작품을 게이적인 도상의 또 다른 사례로, 그리고 그 도상을 통해 자신의 사적인 이야기를 건네는 행위로 환원할 때, 우리는 금방 피곤해질 것이다. 이미 우리는 “미니홈피”를 통해, “나(Me)”-세대의 질식할 듯한 나의 이야기를 통해, 그리고 이를 반복하는 현대 미술의 또 다른 지루한 몸짓을 통해, 이미 지쳐있기 때문이다. 희귀한 것은 결국 또 한 번의 재현이 아니라 그 이야기를 전연 다르게 체험하도록 하는 감각적 충격일 것이다. 그것이 굳이 그가 여전히 회화를 통해 자신의 게이적 욕망을 다루어야 했던 이유이자, 이번 전시를 마련한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2007


'BLOW UP' 갤러리 정미소


<[Tu] 2011> 수록






이병희(미술평론가)


예전에 제 2회 광주비엔날레에서, 생성파트의 커미셔너였던 베르나르 마르카데의 글에는 아주 긴 제목이 있었다. 그것은 <분할, 가면, 비굴함, 무의미, 변장, 이민, 브리콜라주, 배설물, 분자적인 것, 증식에 대한 고찰, 그리고 예술에서 여성, 아이, 동물, 사물 되기와 반성>이란 것이었다. 여기서 브리콜라주라는 것은 레비스트로스가 여러 가지 특성이 잘 결부되어있는 하나의 전체라고 정의한 그것이다. 

최근의 이러한 혼성은 온갖 미디어(대중 문화 매체 인 영화, 생활 매체인 인터넷 뿐 만이 아니라 심지어 예술까지도) 속에서 가속되거나, 아니면 적어도 받아들일만한 것으로 재영토화되고 있다. 사실 그러한 ‘재영토화’는 비교적 기분 좋은 일은 아니다. 불쾌한 것, 역겨운 것, 폭력적인 것, 낯선 것, 조화롭지 않은 것, 외설적인 것, 무의식적인 것, 소수적인 것 등이 귀환하기는 하는데, 미디어를 통해서‘받아들일 만한 것’으로 귀결된다는 것은 정말 환영할 만한 일인 것인지는 의문의 여지가 있다. 그것은 정말 우리 사회의 가치 기준을 근본적으로 바꿔놓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아니면 단지 무관심의 확대의 증거일 뿐인가? 


오용석의 작품들은 바로 이러한 지점들 사이에 있다. 미디어로 재현되고 심지어 소비되는 어떤 실존했던 인물들을 채집하여, 페인팅한 오용석의 그림들은 그것의 향유가 어느 지점에서 부유하고 있는 것인지를 곰곰이 생각케한다. 

오용석 그림의 소재중 하나인, 포르노 배우였던 조이 스테파노Joey Stefano(1968-1994)는 여태껏 포르노 비디오 속에서 반복적으로 소비되어온 바로 그 자이다. 그러한 미디어 소비는 영화 <링>이 경고했던 바로 그와 같이 복제되고 있는 불쾌한 것이다. 오용석이 페인팅하는 행위가, 조이에 대한 어떤 향유인지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적어도 우리가 바라보는 오용석의 그림 속에 ‘부재하는 조이’의 흔적들은 어쩌면 포르노 비디오 속의 조이의 “실재”라고, 혹은 “실재적인” 조이라고도 불러봄직 할 것이다.

엘에이 어딘가에서 입이 찢어진 채로 발견된, 연쇄살인 사건의 피해자중의 하나인 엘리자베스 쇼츠Elizabeth Shorts(1924-1947)의 신체 부분들(정확히 말하면, 없어진 장기들)을 그린 그림들은 마치 매우 심각한 지경의 페티시를 그린 것처럼 느껴진다. 수많은 연쇄살인자들을 소재로 한 영화 속에서(예를 들면, <양들의 침묵>) 살인자들은 대부분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는 남자인데 그들은 여자들을 매우 정교한 수법과 나름대로의 법칙 속에서 서서히 살해해간다. 그들에게 여자들은 페티시 자체가 된다. 마찬가지로 엘리자베스 쇼츠 또한 비슷한 연쇄살인사건의 피해자였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보는 것은 보는 것은, 사건이 증발된 피해자의 텅 빈 이미지일 뿐이다. 반복적으로 미디어 속에서 재생산되는 이미지를 보면서, 우리는 미결인 사건 자체보다는 이제는 그 살해된 사람의 이미지, 입이 찢어지고 장기가 없어진 그 시체의 이미지를 지속적으로 소비하고 있는 것이다. 오용석의 그림은 오늘날 우리가 자신도 모르게 하고 있는, 그 무의식적 향유의 방식을 고스란히 제시함으로써 우리가 스스로에 대해 수치심을 느끼게 하고 있다.

오용석의 그림에서 목신Faunus을 소재로 한 그림들은 게이 코드들을 가시화시키거나, 아니면 게이 코드 자체를 의문시 하는 작업들이라고 볼 수 있다. 목신(木神)은 주로 남성 욕망에 대한 은유 혹은 상징으로 많이 쓰인다.(심지어는 발기가 지속되는 병적 상태(목신(木腎))를 일컫기도 한다). 물론 오용석이 사용하는 파우너스의 소재는 욕망에 관한 것이다. 게이 코드 중에서 흔히 말하는 레인보우(색깔)에 따른 일련의 상징 혹은 은유들을 그린 그림 속에서 오용석은 익숙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 사이의 어떤 경계들을 가시화시킨다. 그 속에서 사회의 익숙한 코드들, 관습들 같은 차원이 무대화되는데, 그것을 통해서 우리는 시각적, 지적, 관습적 대상에 대한 우리 자신의 폭력적 시선들을 감지하게 되고, 욕망조차도 어느 정도는 익숙함과 통제되는 것 사이에서 훈육되는 것은 아닌가에 대해서 생각하게 된다. 

   

사실, 개인적으로 더 관심이 있는 오용석의 그림은, 죽은 자들인 엘리자베스 쇼츠와 조이 스테파노를 소재로 한 일련의 채집과 추적의 과정 속에서 그려진 그림들이다. 엘리자베스 쇼츠를 소재로 한 그림들은 비교적 ‘예쁘다’. 시체 쇼츠의 도난당한 장기들은 맛깔나는 어떤 달콤한 음식물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게다가 그녀의 시체 또한 풍경속의 한 장면처럼 보인다. 조각난 그녀의 몸뚱아리는, 이제 오용석의 페인팅으로 다시 그려지고 있는 것이다. 오용석은 이미지를 제대로 소비하는 새로운 방법을 제시하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어떠한 이미지라도 향유해버리거나 심지어 쾌락의 대상으로 삼는 현대인들의 게걸스러운 습성을 그대로 재현함으로써 어떤 최소한의 자기-반성을 촉구하는 것일까? 

오용석이 조이 스테파노를 그리게 된 계기는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쾌락을 위하여 포르노 비디오를 보지만, 그것을 보는 자기 자신이 낯설게 느껴지는 그 순간, 욕구차원은 멀어지고 실재적인 인물에 대한 궁금증이 생기는 바로 그 순간, 조이 스테파노는 오용석의 소재가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게이 포르노 장면의 성기들은 지극히 물컹한 육질만 느껴진다. 과연 조이는 어떤 인물이었을까. 물론 그가 다녔던 장소들을 그린 그림은 단지 풍경화처럼 보인다. 그렇지만, 조이의 흔적들은 그 곳들 어딘가에 남아있을 것이다. 일련의 생각 속에서 그림들을 보고 있노라면, 이상하고 껄끄러운 느낌이 엄습해온다. 지극히 관객의 시선과 그것의 소비를 의식하게 하는 그림들이다. 우리는 조이가 약물과다로 죽고 난 지금에도, 다양한 매체를 통해서, 그를 소비하고 있다. 이런 소비는 도대체 무엇일까. 그 불편함과 어떤 폭력적인 느낌들 속에서 만나게 되는 오용석의 그림들은 어느 지점에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인가. 어떤 부활, 혹은 구원 즉 그 사건과의 조우 그 자체를 구원하려고 했던 것일까? 


일상에서 맞이하는 어떤 낯선 틈새들은 불쾌함을 내포한다. 그리고 이는 우리의 외설적 향유에 대한 반성의 순간이 될 수도 있다. 그리고 그러한 순간은 별안간 주체로 하여금 실재적인 것을 향하도록 하기도 한다. 그러한 제스처가 만일 정신분석적 의미에서의 ‘행위’라는 계기라면, 그것은 윤리적인 것으로서의 행위이다. 물론 오용석의 페인팅이 어떤 차원에 있는 행위인지는 다소 애매하다. 그렇지만 적어도 오용석의 페인팅이라는 행위는, 그것의 특징, 이를테면(오용석이 자주 쓰는 접속사이다) 수작업적이라든가, 상상적 개입이 가능하다던가, 색채의 표현적 상징성을 마음대로 이용할 수 있다던가, 완성과 미완성 사이에서 즐길 수 있다던가 등등의 특징들을 지극히 향유하면서, 하나의 물질로 완결시켜버리고 마는 그런 행위이다. 그것은 사진이나 비디오처럼 현실의 이미지와 구성 사이에서 노출되는 간극을 향유하는 것과 전혀 다르다. 자율성과 퍼포먼스성, 그리고 장식성과 구상-추상성 사이에서 오용석은 마음대로 페인팅을 주무르고 싶어한다. 

이번 오용석의 작업들은 어쩌면 미디어 속에서 소비되는 이미지, 그것도 잔혹하고 불쾌하고 역겨운 비체들(abject), 베르나르 마르카데가 이야기했던 바로 그러한 것들을 소비하는 행위자체에 대한 어떤 간섭들을 내포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것을 만일 페인팅이라는 행위로 구원하기라고까지 칭한다면, 오늘날의 예술이 해야하는 어떤 역할에 대해서 오용석은 감지하고 있는 것인가. 아니면, 또 다시 페인팅이라는 다른 방식으로 수집, 반복 소비하고 있는, 즉 현대인의 페티쉬적 수집과 소비를 계속하고 있을 뿐인가? 이 물음에 어떤 대답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면 그 대답을 구체화하는 일은 바로 비평과 관객의 몫으로 남아 있을 것이다. 2007


'BLOW UP' 갤러리 정미소


<[Tu] 2011>수록




아픔은 ‘청춘’에서 비롯되지 않았다

 

‘...Don't make me sad. Don't make me cry. Sometimes love is not enough and the road gets tough. I don't know why...’ 아침부터 라나 델 레이 Lana Del Rey의 노래 가사가 혀끝에 빙빙 맴돈다. 독일의 바트엠스 Bad Ems라는 낯선 도시에 도착한 지 이제 거의 한 달이 되어 간다. 만 명 남짓한 사람들이 살고 있는 이 도시는 울창하게 우거진 숲으로 둘러싸여 있다. 음악을 틀지 않는 다면, 매 시간 마다 울리는 교회의 종소리와 하루 종일 다양한 새의 지저귐만 들을 수 있을 뿐이다. 유일하게 정적을 깨는 것은 한 시간에 한 번씩 지나가는 기차의 금속성 소리다. 대부분의 주민들은 60세 이상의 노인들이고, 가끔 스파에 요양하러 오는 관광객을 만날 수 있다. 도시를 가로지르는 란강 Lahn R.에는 청둥오리가 놀고 있고, 지난 토요일에는 백조를 실제로 보았다. 조용함, 고즈넉함, 여유로움, 아름다움, 혹은 지루함이 여기를 정의할 수 있는 말들이다. 시끄러운 대도시에서라면 누구나 꿈꾸는 평온함과 안정감으로 그득하다. 도스토엡스키가 요양하러 왔었다는 유명한 스파가 있는 호텔이 있고, 어제는 그 호텔에 ‘마리아 브라운의 결혼’에 출연했던 노년의 배우가 왔었다는 소리를 전해 들었다. 지금 있는 슐로스 발모랄의 앞에는 번쩍이는 금빛 돔을 지닌 러시아 정교회의 교회가 마치 시공간을 가로질러 온 듯 자신의 위용을 자랑하고 있다. 온통 이국적인 주변에서 추상적이고 문어적인 ‘청춘’이라는 말은 정말 낯설게 내게 다가온다. ‘젊음’의 육체와 욕망에 대해 이야기한다면 훨씬 더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을 텐데. 나와 내 작업에는 부재와 상실에 대한 감각만 있을 뿐. 머리 안이 한정 없이 복잡해진다. 하지만 문득, 어쩌면 노년의 안식과 요양의 이미지로 가득 찬 이 도시가 ‘청춘’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는 가장 적합한 장소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스친다.


‘청춘’은 ‘젊음’과는 나에게 전혀 다른 말이다. ‘젊음’과 ‘늙음’은 현상에 대한 객관적인 표현에 가깝다면, ‘청춘’이나 ‘황혼’이라는 말에는 거기에서 한 발짝 떨어져 있다고 믿는 이의 회상적인 낭만이 깃들어 있다. 불안정함, 격렬함, 아픔. 관찰하는 이는 보통 이런 것들이 ‘청춘’에서 비롯된다고 상상하곤 한다. 마치 일정한 시간이 지나면 그것들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처럼. 마치 하나의 이야기가 영화 안에서 일단락될 수 있는 것처럼. 하지만, 영화의 이야기가 삶의 단편이라면 우리는 길게는 백년 이상 연속되는 이야기 안에서 살고 있다는 것을 무의식적으로 알고 있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자신이 지나왔다고 생각하는 터널을 다시 걷고 있는 상대를 바라보면서 끊임없이 동정하거나 동경하는 것을 멈추지 못한다. 터널의 끝에 도달했다고, 그 긴 터널의 바깥에 있다고 상상하면서. 경험을 통해 무언가를 말해줄 수 있고, 강요할 수 있다고 상상한다. 하지만, 그 사이에서 뭔가 달라져 있다면 천천히 익사하듯 둔해져가는 감각뿐. 혹은 둔감함에 비례해서 정교해지는 선택의 태도 정도. 어쩌면 예찬하거나 그리워하는 것보다 침묵하는 것이 ‘청춘’에 대한 가장 존경어린 태도일지도 모른다. 특별히 아프고, 특별히 아름다운 지나버린 과거로 만들면 만들수록, 푸른 빛깔은 점점 탁하고 어두운 색깔로 변해간다. 오히려 가끔은 ‘청춘’이 여전히 희미하게 삶 안에 살아있음을 상상하는 것은 어떨까. 며칠 전에 산책하다가 만난 노부부가 떠오른다. 서로 허리를 감싸고 길을 산책하는 일흔이 넘은 커플을 바라보면서, 부러움과 동시에 신선함을 느꼈다. ‘...Come and take a walk on the wild side. Let me kiss you hard in the pouring rain...’ 만약에 늙어가는 것이, 청춘의 감각을 잃는 것이, 황혼이 다가오는 것이, 군더더기를 벗고 본질에 좀 더 다가가는 것이라면, 그저 기분 좋게 늙어 보겠다고 생각한다. ‘...Choose your last words. This is the last time. Cause you and I, we were born to die. We were born to die. We were born to die...’ 여전히 라나 델 레이의 노래를 흥얼거리며 커피를 한 모금 마신다. (오용석 20120521)

수탉들의 싸움 - 생존의 방식으로 번역된 사랑

 

연극을 자주 보는 편이 아니라서, 어쩌다 보게 될 기회가 생길 때마다 긴장이 된다. 미술전시처럼 그냥 편할 때 들어가서 휘익 돌아보고 나오는 것이 아니라, 시간에 맞춰서 기다려야하고 극장 안에 들어가서도 이미 설치된 무대를 미리 경험하게 되서 일지도 모른다. 전희 같은 순간들이 있다. ‘스페이스 111을 찾아주신 관객여러분 감사합니다....’ 낭랑한 남자의 목소리가 곧 연극이 시작됨을 알린다. 암전.

 

존(John)은 오랜 연인 사이였던 한 남자(M)와의 관계를 정리했다. 언제까지나 자신을 아이처럼 대하는 M의 태도를 참을 수 없었던 것. 그러던 어는 날, 통근 길에서 자주 마주치던 한 여자(W)가 존에게 말을 걸어온다. 존은 자기도 모르게 얼마 전 헤어진 M과의 관계에 대해 털어놓게 되고, W도 자신이 겪은 이혼의 아픔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한다. 짧은 대화 속에 서로를 이해하기 시작한 두 사람은, 존이 이전에는 한 번도 여자와 사랑을 해본 적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멋진 하룻밤을 보내게 된다. 하지만 M을 완전히 잊지 못하는 존은 불쑥 M에게 W와 사랑에 빠졌음을 고백한다. M은 갑자기 존과의 사이에 끼어든 W의 존재가 거북하고 싫지만, 그녀를 저녁식사에 초대하기로 한다.

존과 M,그리고 W의 저녁식사. 어색하고 불편한 상황을 만든 존을 끊임없이 비난하는 M과 달리, W는 존을 감싸며 위로한다. 존은 이런 W와 함께라면 자신도 평범하고 행복하게 살 수 있을지 모른다는 희망을 품게 된다. 그런데 갑자기 이들의 저녁식사에 M의 아버지(F)가 들이닥친다. M의 지원군을 자처한 F는 존에게 자신의 정체성을 되찾으라며 설교하기 시작한다. 각각 자신을 선택하라고 종용하는 M과 W, 그리고 M에게 돌아가라고 독촉하는 F, 이들 사이에서 존은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계속 망설이는데...과연 존은 어떤 선택을 하게 될까?

 

수탉들의 싸움(리플렛), p14-p15

  

잘 정리된 줄거리가 아니어도, 레슬링이나 복싱의 링을 연상시키는 무대에서는 이미 전운이 감돌고 있었다. ‘수탉들의 싸움’이라는 제목 덕분에도 그다지 어렵지 않게 연출자의 의도를 읽었다. 하지만 1시간 30분 가까이 되는 그들의 싸움을 지켜보면서, 연극의 끝을 알리는 암전을 만날 때까지, 극본과 연극이 끊임없이 충돌했다.

원제는 ‘COCK’. 수탉이라는 의미도 있지만, 흔한 말로 남자 성기의 의미도 있다. 사실 원제는 후자의 의미에 가깝지 않을까 짐작한다. 수탉의 의미라면 극작가 Mike Bartlett는 'COCKS'라고 제목을 붙이지 않았을까 짐작해본다. 번역의 어려움. 다른 나라의 언어를 다시 우리나라 언어로 바꾸어 표현하는 것 자체가 사실 굉장히 힘든 일이다. sarcastic의 감수성은 부정적인 위트에 더 가깝다. 극본의 구조는 시니컬이 아니라 sarcastic의 감각에서 비롯된 것으로 그만큼 미묘하다. ‘수탉들의 싸움’이란 제목으로 공연된 이번 연극은 아쉽게도 그러한 미묘함을 끌어들이지 못했다. 전체적인 연출기조가 싸움에 맞추어진 탓에 모든 감정은 격앙되어 있고 그 목소리 톤에서 발생하는 대사들은 애증 대신 분노의 대사로 전환된다. 사실 극작가의 의도를 충실히 살리는 것이 나은 것인지, 연출가의 새로운 연출 의도를 따르는 것이 나은 것인지는 대해서는 논쟁의 여지가 있다.

이 연극이 흥미로운 것은, 드물게 정체성(특히 성정체성)에 대해 정면으로 다루기 때문이다. 동성애는 요즘 소재로 많이 다루어진다. 이제 온갖 매체를 통해 양념처럼 나온다. 좀 더 치열하게 정체성을 다룬다는 것 자체가 오히려 진부하게 여겨질 정도이다. 하지만, 추상적인 동성애의 환상 혹은 막연한 정의감에서 비롯된 인정하는 대신, 현실 안에서 다름과 차이에 대해 우리가 얼마나 극단적인지를 기억한다면, 타자에 대한 이야기는 여전히 유효하다. 그런 면에서 ‘수탉들의 싸움’은 꽤나 많은 기대를 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연극이 마쳤을 때, 여러 면에서 아쉬웠다. 부끄럽게도, 차례차례 인사를 하는 배우들이 인사할 때, John을 연기한 배우에게는 박수를 보내지 않았다. 아니, 보낼 수 없었다. 그의 잘못만은 아니지만, 가장 아름다운 캐릭터를 망가뜨린 배우에게 경의를 표할 수가 없었다. John의 캐릭터에는 좀 더 추상적인 순수함이 필요했다. 그는 남자라기보다 이상적이고 낭만적인 사랑을 지향하는 소년의 캐릭터에 더 가까우며, 한없이 갈등하는 일종의 순수감성과 같은 인물이다. 그래서 그의 우유부단한 행위는 책임감이 없어 보이는 대신 반대로 한없이 아름다워 보여야 했다. 적어도 내게는.

 

‘수탉들의 싸움’의 연출자는 정체성을 생존의 범주에 위치시켰다. 연출가에게 그것은 일종의 투쟁이며, 일종의 생존방식이다. 4명의 인물은 각자의 터전에서 각자의 영역 안에서 그것을 지키기 위해 1시간이 넘도록 투쟁한다. 게이인 한 남성이 오랜 동안 사귄 애인 대신 한 여성을 만나면서 사건은 벌어진다. 그 여성과의 만남은 아직 관계의 영역 안에 들어오지는 않았다. 주인공 John은 이 모든 상황에서 어떤 선택을 하지 않는다. 하지 않는다기보다 하지 못한다. 그의 캐릭터를 일상에서 만난다면, 정말 때려주고 싶을 정도로 결단력 없다. 등장인물들은 복싱링의 벨이 울리면, 마치 싸움하는 것처럼 대사를 뱉어낸다. 마치 막장드라마 같다. 막장드라마의 본질은 카타르시스를 제공하는 것이다. 막장드라마 안에서 모든 등장인물들은 특정 사건으로 인해 파국을 향해 치닫는다. 그 곳에서는 현실적인 결말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파국을 향해 달리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갈등의 에너지 양이 중요하다. 등장인물들은 미친 듯이 싸우고, 자신들의 욕망의 한계와 도덕의 한계를 끊임없이 뛰어넘는다. 그러한 일탈의 에너지들을 관찰하면서 우리는 관음증적인 쾌락을 얻는다.

하지만, 이 연극의 극본은 그렇지가 않다. 극작가는 마지막에서도 어떤 선택을 하느냐를 보여주는 것이 대신, 선택이라는 것 자체가 억압적인 것이라고 이야기하려고 한다. John은 실제적으로 아무런 선택을 하지 않으며, 고뇌하는 모습보다는 슬퍼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렇지만, 싸움이라는 틀을 놓고 해석된 연극 안에서 애정. 혹은 애증의 카테고리는 소멸되어 버리고, 갈등의 언어에 포커스가 맞게 됨으로서 극본의 결말은 엉뚱하게 따라붙은 사족으로 변해버린다.

 

극작가의 서사구조와 캐릭터의 구조에서 특이한 것은 개인 혹은 특정인에게 고유한 이름을 부여하기보다 무명 혹은 익명에 가까운 이름을 부여했다는 것이다. 남자 애인을 M 여자 애인을 W. 각각 남성 여성의 약자로 표시한다. 주인공 John 역시 가장 일반적인 영어이름(John Doe를 연상시키는)으로 제시한다. M의 아버지는 이전 세대의 남성성 F로 등장한다. 극본의 의도는 한 개인의 캐릭터를 구성하기보다 오히려 정체성을 주변의 구조를 제시한다. 이 극본에서 등장인물을 명명하는 방식은 등장인물의 캐릭터 자체보다 더 중요한 포인트이다. 등장인물은 그 자체가 어떤 상징적인 축이다. 구체적인 이름을 부여하지 않았다는 것은 극의 갈등을 추상적으로 만들고 싶었던 의지라고 생각한다. 즉, 각각의 강렬한 개인으로 환원시키는 대신, 어떤 일반론 혹은 추상적이지만 일반적인 갈등으로 만들고 싶었다는 것이다. 구체적인 형상을 다루는 페인팅이 오히려 추상적이듯이(추상화는 추상적인 형상을 보여주면서 반대로 물성 자체에 집중하게 한다. 이 때, 보통 물성은 극단적인 구체성을 획득한다), 극작가가 구체적인 대사를 통해 추상성을 구현하려는 시도 자체가 흥미롭다.

John을 갈등이 전부인 인격체로 만들고, 남성 여성 그리고 가족으로 대변되는 구조 안에서, 암묵적으로 부여되는 선택의 압박, 선택의 억압에 대한 것들이 이 연극의 골격을 만든다. 그의 남자 애인 M이 G나 H가 아닌 것도 흥미로운 부분이다. 극작가는 M의 캐릭터에서 게이로서의 정체성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남성성을 본다. John의 갈등은 자신이 게이이냐 아니냐의 부분이 아니라, M과 소통할 수 없음에서 비롯된다. John은 처음부터 끝까지 M의 억압적인 부분을 지적하지만, M은 결코 그것에 동의하지 않는다. M이 John을 비난할 때 사용하는 언어는 흥미롭게도 많은 이성애자 남성이 여성에게 말하는 것과 흡사하다. M은 John의 남자답지 못함 혹은 무능력에 대해서 끊임없이 비판한다. 게이커플이라는 다른 카테고리의 정체성 안에서도, 역시 이성애자 사이의 남성 혹은 여성의 억압적인 관계가 재반복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 역시 이 극본의 주요한 포인트이다. M의 정반대편에는 W가 있다. 그들이 정반대에 있는 것은 성 자체가 아니라, 그들의 직업, 그들의 사고방식 등 전혀 다른 라이프스타일 때문이다. M과 W가 대화를 잘 살펴보면, 상대가 남성이어서 혹은 여성이어서 대립하는 것이 아니다. 사랑의 방식, 사랑하는 상대를 대하는 방식에서 역시 둘은 극단의 지점에 있다. M은 게이임에도 불구하고 강한 경제력을 지니고 있으며, 마초적인 사고를 지니고 있다. M은 John을 자신이 원하는 방식으로 사랑한다. 마지막에서 M이 꺼내든 마지막 카드(John이 가장 좋아하는 음식, 치즈케익을 만든다)는 연극 전체를 통틀어 M이 처음으로 John의 입장에서 무언가를 준비한 유일한 것이었다. John이 W를 좋아하는 큰 이유는 섹스(보통 게이도 여자랑 잘 수 있다. 일반적인 오해와 달리)가 아니라, M이 가지고 있지 않은 섬세함과 따스함, 자신에 대한 이해, 그것들을 기반한 소통가능함 같은 것이다. 이 작품은 기본적으로는 성정체성을 배경으로 하기에, 별 수 없이 미묘한 사랑의 차원에 있다. 연극을 보는 내내 힘들었던 것은 작품이 발현하는 갈등의 근본적인 기반이 ‘사랑’임에도 불구하고, ‘수탉들의 싸움’에는 그것이 전혀 표현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자극적인 리플렛의 문장처럼 사실 게이 스트레이트의 구분은 중요하지 않다. 하지만 영국과 우리나라의 배경은 완전히 다르다. 영국에서 동성애자는 보다 일반적이다. 커밍아웃을 하고 일반적인 직장생활이나 사교생활을 하는 것이 우리나라에서 쉽지 않음을 인지한다면 그 차이는 분명하다. 우리나라에선 조직 안에서 동성애 정체성을 드러낸다는 것은 여전히 어려운 일이다. 또, 기혼게이의 비율 역시 생각보다 많다.

연출가의 의도를 좀 더 충실히 따르고, 우리나라의 현실에 좀 더 부합되게 연극을 각색을 한다면, 다음과 같다. John은 W와 선을 본 사이이다. 하지만, 결혼하기 전부터 사귀던 남자애인 M이 있다. 가족을 대변하는 아버지 F가 있다. 문제의 갈등은 John이 7년간 사귄 M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W와 선을 보고 주기적으로 만나게 되면서 발생한다. John은 M과 엄청 싸우게 된다. W를 만나게 되면서 M에게 없는 다른 장점들을 발견하게 되고, 결혼을 해야 하느냐 말아야하는지 고민하게 된다. 우연히 아들 John이 게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아버지 F는 자신도 역시 젊을 때는 그랬지만, 결국 사람은 여자를 만나 결혼해서 사회에 편입해야 한다고, 노후를 생각해야한다고 설득한다. John은 결국 결혼하기로 결정한다. 그리고 결혼 이후에도 M과는 꾸준히 만난다. 완벽한 막장드라마의 극본이 된다. 어이없는 극본이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내가 생각하기에 이것이, 정체성을 생존의 방식으로 치환한 현실에 가까우며, 보다 명쾌하게 연출가의 의도를 보여줄 수 있을 것이다.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저런 상황을 만들고 있고, 놀랍게도 상황은 계속적으로 재생산된다.

극작가는 강요된 선택에 대해 이 극본에서 건드린다. 극작가의 문제의식을 추상적으로 수긍하기에 앞서, 우리는 지나치게 선택을 관성적으로 하는 문제를 건드려야 할 듯 싶다. 극본에서 보여 지는 John의 고민은 우리의 문제에 비하면 너무나 순수하다. 그 순수한 갈등이 우매한 우유부단함으로 보여 지고, 마지막에 결국 M에 남는 그의 뒷모습에서 떠나지 못하는 유약함을 봐야하는 것이 참 가슴이 아팠다. 번역된 이 연극을 보면서, 나는 아직 우리가 극작가가 보여주고자 하는 섬세한 선택을 하기에 여전히 거칠고 투박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오용석 20140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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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을 보면서 미장센에 대해서 생각하게 된다는 것이 사실 꽤나 독특한 경험이었다. 서사에 집중하지 않으면서 볼 수 있다는 것, 이미지를 즐길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서 흥미롭기도 했다. 마지막에 있었던 연출가와의 대화는 오히려 보는 즐거움을 방해했다. 연출가는 주인공 두 명이 하나의 캐릭터라고 이야기했다. 어떤 양면성 혹은 양면성이 결합하는 어떤 방식에 대해 이야기를 했다. 아주 거시적으로 바라보았을 때는 연출가의 말이 그다지 틀린 이야기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작업의 디테일들에 숨어있는 순수한 쾌락적 측면들은 연출가가 말한 것들만을 표현한다고 했을 때는 과도한 것들이다. 우선 두 명의 캐릭터는 하나의 분리된 모습이라기 보기에 각각 생명력과 너무 많은 서사가 함축되어 있다. 공연을 보는 도중, 내가 생각했던 것은 연출가 혹은 누군가가 경험한 캐릭터들이 각각의 인물에 복합적으로 결합된 것처럼 보였다. 처음에는 연출가의 상상적 공간 혹은 경험의 공간에서 일어난 일상들의 파편들이 좀 더 적극적으로 공연에 결합되지 않았을까하는 상상을 하기도 했었다.

 

공연을 보는 내내 즐거웠던 것은 육체 혹은 신체에 대한 기본적인 관능이 소거되지 않았던 까닭이다. 오히려 관음을 자극하는 형태를 따른다. 인물들은 보는 이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자신의 신체를 숨기지는 않으나, 조심스럽게 감춘다. 결과적으로는 포르노그라피와 다른 형태의 관능을 전달한다. 초반과 후반부의 미장센과 다르게, 보다 역동적인 과정으로 보여지는 면도의 과정 혹은 살인의 과정은 역설적이게도 관능의 절정에 이른다. 살해 혹은 절단되는 인물은 처음에 등장할 때부터 신체를 분절하는 패티쉬적인 복장으로 등장한다. 옷을 벗는 그의 행위는 일종의 의식과 같으며, 그 혹은 상대에 대한 관능을 자극하기 위한 고착된 동작을 한다. 그의 행위는 자신의 만족과 더불어 보는 이의 응시를 충족시켜야하는데, 여기서 그 상대는 인도인이라고 짐작한다. 면도의 과정은 인도인이 그에 상응하는 리액션을 하는 것이라 보여진다. 인도인의 마사지 혹은 면도는 단순하게 또다른 나를 파괴하는 과정이 아니다. 단순히 파괴하는 과정이라기에는 너무나 많은 과정을 가지고 있고, 인도인의 캐릭터는 모든 과정을 순수하게 즐긴다. 개인적으로 볼때 극에서 인도인은 그의 살가죽을 벗겼고, 거기에 다시 화장을 하고 다시 살아나기 위한 의식과 더불어 자신이 상상하는 이상적인 포지션을 하고 있는 상대를 재창조한다. 그것이 실현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인도인은 상대의 육체를 파괴한다. 개인적으로 심하게 오독했을지도 모르겠지만, 인도인이 실행하는 행위의 패턴은 내가 생각하는 연쇄살인범의 집착과도 너무나 닮아 있다.

 

덕분에 마지막의 긴 미장센은 나에게 좀더 우울한 풍경이었다. 그들의 포즈는 우울했으며, 그것은 살아있는 사람으로서 관객에게 던지는 시선이 아니라, 죽은 자의 관조에 가깝게 느껴졌다. 마지막 미장센이 너무나 길었던 까닭에 연출가가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 무엇인지 잠시 사고하게 만들었다. 강렬하고 미술적인 퍼포먼스 이후에 마치 정리된 애도의 사진처럼 한명씩 자리잡는 모델들은 각각의 의지에 의해 위치한다기보다는 그 곳을 컨트롤하는 사람, 인도인 혹은 다른 권위자에 의해 위치지워지는 것처럼 보인다. 인도인이 신체의 일부를 원하는 자리에 위치 지움과 같은 방식으로 모델들은 각각의 자리를 잡는다. 그래서 전체적인 맥락 안에서 그들이 앞에 있었던 퍼포먼스의 다른 희생자인 것처럼 보여진다. 마지막 말미에서 사보이 사우나는 디스토피아적 세계로 변한다.

 

이미지적 서사가 완성되기 이전의 순간까지가 ‘사보이 사우나’는 아주 흥미롭다는 생각을 했다. 서사를 완성시키려는 욕구는 이미지 사이의 당위성과 개연성을 찾게 하고, 결국 내가 내린 결론은 음울한 살인의 추억같은 것이 되었다. 물론 그 안에서 발현하는 쾌락이 내가 그림을 그리면서 접하는 육체에 비해 훨씬 더 자유롭다는 것이어서 나름 즐길만한 것이었다. 연출가의 말처럼 단순한 층위에 있다고 보기에는 ‘사보이 사우나’는 좀 더 복잡한 구조를 지니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혹은 내가 바라보는 일종의 숨겨진 내러티브가 온전히 의도된 것은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든다.

 

하지만, 신체 특히 남성의 신체에 대한 이야기가 이런 방식으로 다루어질 수 있다는 것 자체, 주인공이 인도인인 탓에 언어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시점. 그래서 연극 혹은 공연의 언어적인 차원이 배제되면서 이미지화하는 과정 같은 것은 미술하는 입장에서는 신선한 자극같은 것이었다. (오용석 2013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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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돔120일‘은 피에르 파올로 파졸리니의 영화 ’살로, 소돔의 120일‘에 영감을 주었다. 이 영화는 합의하지 않은 희생자들에게 가해지는 공포와 잔혹을 생생하게 그려 내고 있다. 이 영화가 지닌 예술적 가치와는 무관하게, ’살로, 소돔의 120일‘을 본다는 것은 관객에게는 일종의 사디즘적인 공격이 되어, 관객은 영화를 보는 동안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합의한 희생자로 변모한다.»

에스텔라 V. 웰든, 사도마조히즘, 2002

 

관객이 사디즘에 공격되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관객이 합의한 희생자로 변모한다고 지적하지만, 사실은 동화를 통해 합의하지 않은 가해자, 공범자, 목격자로 전환된다. 관객이 느낄 수 있는 혐오감이나 죄의식은 희생자 혹은 피해자가 느낄 수 있는 감정이나 정서가 아니다. 희생자가 느꼈을 것은 오히려 공포, 불안, 복수심이다. 그것은 완전히 다른 변모이며, 해석의 여지도 완전히 달라진다. 결국에 관객은 냉혹한 관찰자의 위치를 지킬 수밖에 없다. 2009


<[Tu] 2011>중에서




양자역학에서 한 현상을 설명하는 데는 어느 범위 내에서는 입자의 측면에서 보고, 다른 범위 내에서는 파동의 측면에서 본다. 여러 물리적 양을 측정한 결과가 반드시 확정된 값을 가지는 것이 아니며, 서로 다른 여러 값이 각각 정해진 확률을 가지고 얻어진다고 이야기한다. 양자역학이 기본적으로 제시하는 룰은 불확정성의 원리(Uncertainty Principle)이다. 이런 전제 안에서 획득할 수 있는 진실은 오직 불확정적이라는 것이다. 쾌락과 죄의식, 불안과 공포, 죽음과 폭력은 상보적임과 동시에 대립적인 것이다. 작업을 통해서 계속적으로 드러내려고 하는 것은 지독한 의심 속의 불안, 불안의 쾌락, 죽음이나 폭력에 대한 공포, 공포에 대한 쾌락, 쾌락에 대한 죄의식, 죄의식에 대한 쾌락 뿐은 아니다. 그런 것들은 이미 체홉의 소설이나 고다르의 영화 속에서 더욱 적나라하고 정확하게 드러난다. 결국 드러나는 것은, 그것들을 다시 운반하고, 그 안에서 느끼는 혼돈스러우면서도 일관된 태도, 일관되지만 분열적인 태도, 그 자체, 확신할 수 없음, 혹은 확정적일 수 없음 사이에서 방황하는 모습이다. 혹은 지속적으로 움직이며 한계점으로 이동하는 나의 동선이다. 2009


<[Tu] 2011>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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