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일보 - 표현의 자유에 대한 암묵적 제약 비틀어보기

http://news.donga.com/3/all/20160705/79018453/1

 

서울경제 - "누가 예술을 심판하나" 사회의 경직성 편견을 드러내다

http://www.sedaily.com/NewsView/1KYWGOE05H

 

매일경제 - 경직된 시선을 던져버리다

http://news.mk.co.kr/newsRead.php?no=460522&year=2016

 

연합뉴스 - 누가 퇴폐를 규정하는가 퇴폐미술전

http://www.yonhapnews.co.kr/bulletin/2016/06/22/0200000000AKR20160622169800005.HTML?input=1195m

 

한겨레 - 젊은 남녀작가들의 퇴폐미술 실감나시는지

http://www.hani.co.kr/arti/culture/music/754841.html

 

CNB채널 - 80년전 나치의 퇴폐미술 서울에 재림

http://weekly.cnbnews.com/news/article.html?no=119099

 

 

 

 

[문화 현장] 퇴폐 예술과 말랑말랑한 미래

등록 :2016-07-28 18:34수정 :2016-08-09 14:33

 

박보나 / 미술인

한두 해 전에 인터넷 배달 음식 회사의 광고를 재밌게 봤다. 배우 류승룡이 명화를 패러디하는 콘셉트로, 명화 속 인물들이 인터넷 서비스를 이용해서 음식을 배달시켜 먹는 내용이었다. 그중에 19세기 프랑스의 인상주의 화가인 에두아르 마네의 그림 ‘풀밭 위의 점심 식사’(1863) 속의 인물들이 치킨을 배달시켜 먹는 장면이 있었는데, 치킨을 신나게 받아 먹는 여성의 여성스럽고 단정한 옷차림이 인상적이었다. 마네의 ‘풀밭 위의 점심 식사’는 두 쌍의 커플이 시내가 흐르는 숲속에서 한가롭게 피크닉을 즐기고 있는 모습을 그린 그림이다.

이 그림은 처음 발표되었을 때, 관객들과 비평가들에게서 매우 ‘퇴폐적’이라는 지적과 함께 큰 비난을 받았더랬다. 당시 관객들이 불편해했던 것은 그림 중앙에서 옷을 잘 차려입은 부르주아 남자들 사이에서 혼자 옷을 벗고 앉아 있는 여성의 모습과 그녀의 시선이었다. 이 여성은 당대의 실존 인물이었던 빅토린 뫼랑으로, 전혀 부끄러워하지 않는 표정으로 정면을 응시하며 관객과 또렷이 눈을 맞추고 있다. 이전의 회화에서 누드의 여성들은 대체로 신화 속 상상의 인물이었으며, 그녀들을 향한 관객의 욕망적 응시가 껄끄럽지 않게 적당히 수줍게 눈을 아래로 내리뜨고 있었던 것과는 상당히 다른 모습이었다. 당시 관객들은 자신들의 관음적 시선을 조롱하는 듯하며, 오히려 옷을 잔뜩 차려입고 옆에 앉아 있는 남자들을 위선적이고 우스워 보이게 만드는 뫼랑의 선명하고 선선한 시선을 불쾌해했고, 이 언짢은 그림을 ‘퇴폐적’인 졸작으로 낙인찍었다. 그러나 한 세기 반이 지난 지금, 마네의 ‘풀밭 위의 점심 식사’는 원근법을 파괴한 회화로서의 형식적 도전과 함께, 여성의 주체적 응시를 표현한 ‘좋은’ 미술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도덕적, 형식적 관습의 범주를 깨려는 예술적 시도는 자주 퇴폐로 폄하되어 억압받고 비난받았다. 하지만 마네의 ‘풀밭 위의 점심 식사’처럼, 익숙함을 깨트리는 작업들이 세상에 좀 더 유연하고 훨씬 더 흥미로운 ‘미래적’ 관점을 제시한다. 20여년 전, 가부장적 제도에 저항하는 자유분방한 여대생을 주인공으로 한 소설 <즐거운 사라>로 인해 음란물 유포죄로 구속된 마광수 교수는, 그의 또 다른 소설 <자궁 속으로>에서 ‘퇴폐’소설을 쓴 죄목으로 구속되는 주인공 박민우의 입을 빌려 말한다. “혐오스러운 것을 보여주는 것은 문학의 중요한 목표 중 하나입니다. (…) 아름다운 것만 그리면 실체를 파악할 수 없습니다. (…) 혐오스러운 것을 보여주는 것이 죄가 될 수 없습니다. 오히려 아름답지 않은 것을 아름답게만 포장하는 것은 위선입니다. 소설의 목적은 금지된 것을 파헤치는 것이고, 과거에 대한 끊임없는 회의요, 미래에 대한 끊임없는 꿈꾸기입니다.”

 

<퇴폐 미술전> 전시작_ 오용석, 빛나는/빛 Shining 91×65㎝ oil on canvas 2016.
<퇴폐 미술전> 전시작_ 오용석, 빛나는/빛 Shining 91×65㎝ oil on canvas 2016.
티브이 속에서 여성스럽게 옷을 입고 배달 치킨을 받는, 빅토린 뫼랑에 대한 자체 검열된 패러디가 있다면, 지금 티브이 밖의 한국 미술판에서는 <퇴폐 미술전>이 열리고 있다. 서울 구기동 아트 스페이스 풀에서 열리는 이 전시는 1937년 독일의 나치 정당이 사회 비판적인 작업들이나, 형식적 파괴를 시도한 아방가르드 예술을 억압하고 퇴출시키기 위해 열었던 <퇴폐 미술전>을 패러디한다. 검열과 예산 삭감, 기관장의 경질 등이 심심치 않게 일어나는 현재 한국 예술계의 상황에서, 나치의 <퇴폐 미술전>의 패러디라니, 영리하다. 우리 사회의 현재 모습에 대한 불편한 거울 보기를 시도하며, 동시에 그 거울 속에 비친 나 자신부터, 개인이자 작가로서 새로운 도전에 게으르지 않았는지, 검열과 억압에 길들여져버린 것은 아닌지, 되돌아보게 하는 전시이다. 9명의 작가와 협업팀이 낯선 감각과 신비화되지 않은 신체, 사회 비판적 태도 등이 담긴 작업들을 선보인다. 새삼 ‘퇴폐적’이라 분류된 이 미술 작업들을 통해 그들이 꿈꾸는 말랑말랑한 미래를 엿보고 싶다면 관람을 추천한다. 전시는 8월14일까지이다.



원문보기: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754323.html#csidx5f067d6c3e2301191080fa928846455

옷과 살갗 사이 Between Gewant und Skin


지난 달 열린 작가 오용석의 개인전<사랑에는 이름이 없다> 전시장 한쪽 벽면에는 회화작품들과 낱장의 출력물들이 뒤섞여 있었다. 각종 미디어에서 수집한 이 이미지와 자료들을 훑어보며 작가의 감정과 마주하는 것 같은 내밀한 느낌을 받았다. 도착적인 게이 포르노 이미지들, 영화 용어 해설 텍스트, '40년 동거한 여고 동창생의 비극적인 죽음'에 관한 기사등 작가에 대한 단서 같은 자료들이 흩어져 있다. 그 사이사이에는 형광 보랏빛 얼굴을 그린 <XXX : Masquerade>, 흘러내리다가 굳은 반투명한 연분홍빛 액체의 흔적에서 두 남자의 형체가 엿보이는 <XXX : Tattoo>, 열대우림 같은 수풀 위에 샛노란 물감이 분출된 <쾌락 시퀀스 프롤로그 #2> 등 감정과 욕망이 덩어리지거나 폭발하는 듯한 회화 작품들이 걸려 있다. 작가 오용석은 자신의 회화 작업이 "옷과 살갗 사이"와 같다고 말한다. 야릇한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이 '사이'는 일상에서 우리 피부와 가장 맞닿아 있으면서도 그렇다고 늘 인지하는 것은 아닌 미묘한 경계다. 그의 회화는 이처럼 쉽게 선 그을 수 없는 경계와 관계성에 관해 '이야기'한다. 이 '이야기'는 작가의 단편 소설들에서 더욱 확장된다. 탄탄한 서사를 갖고 있다기보다 자신의 작품에 쌓아 놓은 감각을 언어로 풀어놓은 것 같아 사뭇 이미지적이다. 이번 개인전 제목과 동명의 소설에서 "관능은 신체의 아름다움이 아니라, 신체가 발아시킨 아름다움에 대한 기억이라는 것을. 그것은 찰나에 가깝고 시간에 대한 이야기나 감각 같은 것이라고 생각해요."라고 쓴 것처럼, 그의 회화와 소설은 물리적 신체를 호출하지만 더 나아가 그 신체가 기억하는 추상적인 감각을 깊이 파고든다. 그의 초기 작업은 약물 과다 복용으로 사망한 게이 포르노 배우 조이 스테파노, 희대의 살인 사건 피해자 엘리자베스 쇼츠등의 인물을 소재로 삼아, 미지의 문제적 사건이 벌어질 법한 분위기의 장면들을 담았다. 이후 대작 <Holy Night>에 그간 사용했던 이미지들을 어둠 속에서 내파시키듯 응축해 놓고, 죽음과 사건에 대한 풍경에서 관계성에 관한 이야기로 화제를 전환했다. 작가는 현재의 작업을 이렇게 이야기한다. "아직 터널 안에 있지만, 앞에 보이는 환한 빛을 향해 이 터널을 뚫고 나가는 것 같아요." 


탁영준 기자 아트인컬처 2015.9월호




XXX : TATTOO, 24cmx33cm, Oil on Canvas, 2015







정현 (미술평론가)


현대문화에서 B급 정서 또는 '오타쿠'는 이중적으로 소비된다. 하나는 주류문화를 거부하는 하위문화의 주체로서의 특권으로 나타나고 다른 하나는 반사회적인 고립된 인물들이 모인 '나쁜 취향'의 공동체로 인식되는 경우다. 그러나 자본주의는 이러한 하위문화의 이중성을 상품화하고 유행의 전위로 출격시킨다. 엽기적이고 괴기한 '하위문화적 이미지'가 하이패션의 일부와 꼴라쥬되는 현상은 모든 것을 욕망화 하는 트랜드의 힘을 과시한다. 결국 트랜드란 여러 의미로 다수의 논리에 속하는 것이다. 물론 하위문화라고 여기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다. 그들도 더 이상 소수로 불리는 희생양만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런 유행이 비단 상품의 세계에만 머물지는 않는다. 현대미술에서도 엽기, 비이성, 광기, 괴물, 부조리, 악몽과 같은 자극적인 주제, 소수 취향의 세계관, 프란시스 베이컨의 '기관 없는 신체'와 타카시 무라카미의 '귀여운 요괴'는 전세계적으로 순수/응용의 경계를 넘어 여전히 많은 젊은 창작자들에게 영감을 주는 세련된 괴물들이다. 그리고 이 세련된 괴물의 이미지들은 탄생의 신비가 없이 전지구적으로 복제되고 증식되고 있다. 지나친 시각 중심적 탐닉이 낳은 폐해가 아닐 수 없다. 망막주의적 감각의 의존에서 벗어나 몽상적인 이미지의 기원은 억압적인 체제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예술가의 시적 몸부림이었다는 것을 되새길 필요가 있다. 


카프카적 웃음

권순영의 회화는 부조리극을 재현한 것처럼 인간의 광기와 잔인함이 동화적 상상력으로 펼쳐진다. 귀엽게 웃고 있는 미키와 인형들은 내면이 없는 기관 없는 신체, 들뢰즈 식으로 말하자면 탈영토화 된 얼굴을 가진 것들의 이야기다. 전시제목 "뭇웃음"은 작가가 만든 조합어로 그에 따르면 덧없는 웃음, 그러니까 흔해빠진 웃음으로 해석할 수 있다. 어쩌면 뭇웃음은 기계적으로 웃는 자동인형의 표정과 다르지 않다. 그것은 친절함도 무례함도 아닌 비인격화 된 '카프카적 웃음'이다. 그의 회화 속 인물은 대부분 눈빛을 잃어버린 채로 웃고 있다. "오르골"에서는 팔이 절단되거나 눈알이 빠진 토끼 얼굴에 여성의 몸을 가진 인형들을 일본 망가의 여주인공을 닮은 (개인적으론 캔디를 닮은) 소녀들이 기계장치를 조정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인형들은 무표정하게 기계적으로 웃고 있으며 수많은 캔디는 슬퍼도 괴로워도 절대 미소를 잃지 않는 것처럼 빈 웃음을 날린다. "수태고지"는 성모의 무염시태를 괴기스럽게 제시하고 있다. 마치 중성화된 나팔관처럼 보이는 내장기관이 괴물처럼 화면 오른쪽 하단을 차지하고 수많은 뭇웃음들이 그것 주변을 맴돌고 있는 장면은 아마도 여전히 여성에게 강요되는 사회적 가치관에 대한 풍자일 것이다. 이 회화들은 미디어에 등장하는 수많은 사건들의 일부를 발췌하여 서로 섞어놓은 것으로 방법론적으로 본다면 초현실주의적 꼴라쥬에 가깝다. 하지만 권순영은 서로 관련이 없는 사건들을 조합하면서 이 회화 속 인물들의 표정에 빈 웃음을 담아낸다. 표현할 수 없는 슬픔의 패러독스로서의 뭇웃음을 작가는 "수많은 연약한 희생자에게 보내는 애도"라고 표현했다. 카프카의 미완성작 "성"은 현실의 부조리를 드러내는 것은 권력기관의 통제로부터 나약한 인간상을 보여주고자 했다고 해석되곤 한다. 카프카적 세계란, 판타지적 요소로 포장되어 있지만 사실상 그것은 현실에 대한 은유로 전체주의적 이념과 그것으로부터 영향을 받는 개인의 관계를 보여주기 위한 일종의 위장의 장치였다. 그렇다면 권영순의 판타지 속에 녹아있는 공포와 슬픔 그리고 웃음은 고전적 의미의 자기정화라기보다는 사도-마조히즘적인 현실의 이중성으로 보아도 무방할 듯하다. 


관계의 재구성

주로 오용석의 작업은 범죄사건으로부터 시작되곤 했다. 사건 현장은 그에게 매우 중요한 출발점이다. 제도적 관점에서 범죄란, 몇 개의 단서만으로 육감과 지식으로 사건을 재구성해 '법의 테두리 안에서 풀려야만 하는 진실'이라면, 오용석은 범죄로부터 인간관계 속에 스며있는  지배의 욕망에 관해 묻는다. 초기작에서는 이러한 욕망이 폭력에 의한 희생자를 애도하는 모습을 그려졌다면 이번 금호미술관에서의 전시에서는 감정적 충동보다는 빈-의미의 이미지들이 혼재된 상태로 전개된다. 이미지보다는 이미저리에 가까운 전시의 배후엔 그만의 세계가 편린으로 흩뿌려져 있다. 감정이 사라진 육체의 매커니즘만으로 작동하는 포르노그래피, 파졸리니나 대릭 저먼과 같은 광기로 가득한 영화감독의 영상들, 아비정전과 같이 잃어버린 모성을 찾아 떠나는 열대림의 무거운 공기와 막막함, 19세기-20세기 초 미국   개척기의 남자 동성 간의 사진집 Dear Friends: American Photographs of Men Together 1840-1918,  이상과 같은 상상력의 원천은 작가의 일상을 엿볼 수 있는 단서들이다. 다시 말해 이 전시는 작품들의 관계에 의해 완성되는 (무한의) 퍼즐이며 또 다른 관점으로 보면 이곳은 하나의 사건 현장이 된다. 전시제목[Tu]가 불어의 이인칭 '너'를 지시하면서도 발음기호로 영어의 Two를 동시에 연상할 수 있는 것은 "나와 너"라는 자아의 실존의 위한 절대조건인 타인의 존재에 대한 물음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사실 오용석의 작업은 지속적으로 서로 연결되어 있다. 그 바탕에는 폭력이라는 절대적 타자의 존재가 숨어있다. 광주 출신인 그에게 폭력은 광주항쟁이란 사건으로부터 시작되지만 민중미술이란 이즘을 따르는 것은 아니다. 이후 그의 작업은 인간관계 속에 숨어있는 사도-마조히즘 적 욕망을 회화적 주제로 건드린다. 지배자와 피지배자, 권력과 희생. 욕망은 이중적이다. 타인을 내 것으로 만들기도 하지만 스스로 자아를 버리고 타인에게 귀속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욕망은 권력을 생산하고 권력은 대개 획일화의 함정에 빠진다. 카프카의 소설 또한 이런 함정에 빠진 세계를 그린다. 그래서 카프카적 세계는 환상적일 수 있다. 즉 카프카적 판타지란 인간조건과 유령과 같은 권력(관청)이 등장하는 것처럼 말이다. 


시적 판타지

판타지 미학의 흥미로움은 비현실적인 유토피아나 일차원적인 풍자나 조롱에 있지 않다. 카프카의 소설이 매력적인 까닭을 밀란 쿤데라는 비시적인 주제를 시적 소설을 이끌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권순영과 오용석의 회화가 흥미로운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들의 판타지에는 인간과 인간조건에 대한 물음이 녹아있다. 담백한 화풍과 유머 속에 배어있는 상실의 아픔을 그린 권순영이나 오용석 회화의 크리미한 질감과 어두운 색채가 발산하는 비밀스러운 매노로그(Man-a-logue: 남자의 독백) 모두 그 바탕에는 맹목적인 삶의 강령을 추구할 수밖에 없는 전지구적 현상의 빛과 그림자를 담아내려는 시도였다. 시적 몽상은 예술가의 특권이다. 하지만 그것은 또한 현실에서는 일어날 수 없는 불가능한 세계, 비이성적인 광기에 대한 꿈이기도 하다. 이런 예술가의 몽상은 단순히 미지의 세계를 구축하는 상상력의 소산만은 아니다. 그것은 현실과 깊은 관계를 맺고 있으며 현실에서의 부조리를 시적 몽상의 세계로 펼쳐 보일 때에만 가능한 것이다. 예술로의 도피란, 부조리한 현실에 대한 비꼬기이며 인간이란 무엇인가를 묻는 실존적 질문의 장이 된다. 카프카의 글쓰기도 그랬다. 차라리 하룻밤 악몽에 가까운 그의 소설 속 인물들은 기계적으로 묘사된다. 자아보다는 제도에 의해 규정되는 등장인물들의 부조리함을 훗날 ‘카프카적 (Kafkaesque)'라고 부른다. "변신"의 그레고르도 "성"의 K도 자신의 실존을 스스로 인식하지 못한 채  제도에 의한 존재를 인정받기만을 원한다. 거대한 곤충이 되어서도 그레고르는 직장만을 염려하고 K는 권력의 중심인 성 주변에서 영원히 맴돌면서 지배자의 부름을 기다린다. 밀란 쿤데라는 '카프카적'이란 현재 전지구가 겪고 있는 비인격화와 관료주의화의 과정과 다르지 않다고 지적한다. 그는 "카프카의 소설은 이러한 세계에 대한 몽환적이고 상상적인 과장이다. 전체주의 국가는 그것의 산문적이고 물질적인 과장이다“라고 말했다. 판타지가 무엇으로부터 생성되는지 다시 한 번 진지하게 묻게 되는 말이다.  


<아트인컬처 20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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