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용석의 그림이 위험한 것은 '회화에 대한 고민'을 앞세워 동성 간의 밀애나 신체에 대한 은밀한 탐닉으로 유도하기 때문이다. 어두운 바탕 위에 섬세한 결을 드러낸 얇은 베일의 노랑, 흘러내린 노랑, 흩뿌려진 노랑에 홀려 무심코 따라가다 보면 우리의 눈은 어느새 나뒹구는 신체의 근육, 성기, 엉덩이, 체액에서 헤매고 있다.

 

이런 부류들이 욕망의 탐닉을 적절히 은폐하기 위해 흔히 쓰는 수법은 자신들에게 중요한 것은 대상의 재현보다는 '순수한 감각'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서동진이 오용석의 그림에 대해 쓴 글이 전형적인 예이다.. "나는 그가 선호하느 색채들이 궁금하다. 그가 집요하리만치 모든 그림 속에 집어넣고 있는 흰색과 검은색의 밀도가 아름답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것이 재현하는 대상들을 다른 감각적 체험의 대상으로 운반하는 요구 앞에 멈추어 서게 된다.[...] 그것이 그에게 검붉은 혹은 혼탁한 잿빛의 실루엣으로 등장할 때 나는 흥미롭다. 그 장면을 평범한 관능적인 쾌감에서 분리시키는 것은 바로 이러한 감각적인 자질, 혹은 이미지에 추상적인 잉여를 부여하는 힘이라고 생각한다." (1. 서동진, "당신의 아름다운 주관성", [Tu](오용석 개인전 자료집), 푸른커뮤니케이션, 2011, p139-140)

 

오용석이 즐겨 그리는 대상이 아닌 그의 색과 형태에만 관심이 있다고 말하는 것은 어리석을 뿐만 아니라 기만적인 짓이다. 마찬가지 부류인 롤랑 바르트는 바로 그런 어정쩡한 상태, 숨은이해관계가 있는 것은 알지만 노골적인 속임수라고 생각하지는 않는, 다시 말해 의미와 형식을 분리하지 않는 애매한 지점에서 비로소 이데올로기가 작동한다고 실토하지 않았던가?! (2. 롤랑 바르트, <현대의 신화>, 이화여자대학교 기호학 연구소 옮김, 동문선, 1997, p293)

 

그들은 조형에 대한 우리의 순수한 탐닉을 악용해 자신들의 변태적 탐닉으로 몰아간다. 이것이 결코 우연이 아니라는 것은 오용석이 우리를 데려가려고 설정한 목표가 얼마나 정교하고 치밀한지 보여주는 그의 글에 잘 나타나 있다. 우리를 이런 섬세함 자체에도 매혹되지 않도록 항상 경계해야 한다.

 

"페티시는 대부분의 경우 성적인 용어로 사용되곤 한다. 보통 도착적 욕망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우리는 이 단어를 언급한다. 하지만, 욕망과 도착의 범주보다 페티시의 더욱 흥미로운 부분은 표피와 경계에 대한 것이다. 경계는 대상의 본질을 통해 결정지어지는 것이 아니라, 보통 표피와 표피 사이에서 만들어진다. 옷과 살같 사이의 그 미묘한 틈을 통해 우리는 타자를 구별하려고 노력한다. 우리의 주된 욕망 중에 하나는 경계를 시각화하려는 것이다. 페티시는 경계의 문제에서 아주 흥미로운 논점을 제공한다. 본질을 덮어쓰는 표피, 레이어를 넘어서는 레이어. 일상성을 넘어서는 감각. 불완전한 경계. 경계를 통해 구분되지 않는 여분. 나의 페인팅들은 그 어는 지점에서 자신들의 자리를 잡는다." - 오용석, "옷과 살갗의 사이" (3. 오용석, "옷과 살갗의 사이", <우리를 위한 셋>, 2015, p70

"결국 내가 진정 원하는 것이 신체의 표피가 아니라는 것을 자주 까먹어요. 이미지에는 이미 관능이 남아 있지 않죠. 이미 관능이 휘젓고 난 뒤 흔적만 남아 있는데 그것도 까먹을 때가 많아요. 관능은 신체의 아름다움이 아니라, 신체가 발아시킨 아름다움에 대한 기억이라는 것을. 그것은 찰나에 가깝고 시간에 대한 이야기나 감각 같은 것이라고 생각해요." (작가 에세이, '사랑에는 이름이 없다' 중)


여기 욕망이 있다. 그리고 그 욕망의 표피를 감싸 안은 고독이 있다. 욕망은 구체적인 형체가 없기 때문에 형태를 그리려다 보면 어렴풋한 느낌마저 손가락 사이로 허무하게 사라진다. 마찬가지로 글도, 회화도, 막연하게 떠오르는 이미지를 지면에 옮기거나 캔버스에 물감을 묻히는 행위에서 그 생명력은 상상력에 미치지 못하는 모양으로 박제되어 버리는 것이다. 작업의 대부분의 시간을 상상을 통한 전희(forepleasure)의 과정으로 보낸다는 오용석에게 회화는 차곡차곡 쌓아놓은 욕망과 고독의 밀도라기 보단 한순간의 분출에 가깝게 보인다. 비밀과 정액은 동일한 것이라 간직하면  고통을 받고 배출하면 잃게 된다는 파스칼 키냐르의 문장처럼 오용석의 그림을 호모아트 혹은 동성애 코드로 풀어내는 순간 인간 본연의 고독과 쓸쓸함이 빚어낸 3류 통속 미학이 그 특유의 빛을 잃는다. 하지만 작가의 작업실 가득 스크랩된 사내들의 신체와 포르노그래피 장면들을 보고 있자니 관음증 환자처럼 자연스레 그 욕망의 전희와 고독의 변주과정이 궁금해진다.


처음 오용석의 그림을 접했던 2011년 가을 즈음부터 나는 언젠가 그에 대한 글을 쓰고 있을 내 모습을 그려보았다. 적당히 농염하고 적당히 고통스럽고 적당히 해학적으로. 그가 마주한 한국의 현실과, 그가 처해진 사회적인 관계와, 또한 그의 개인적인 성정을 종로3가 이발소에 걸린 플라스틱 차양 사이에서 관조하듯이 설명해 보려했던 것은 아마 내 개인적인 욕망의 발로였다. 오용석은 '혼자서는 선뜻 용기를 내기 힘든 엉뚱한 일들, 조그만 설렘이라도 부추길 말동무'를 필요로 하는 소녀적 감수성과 더불어 문신이 가득한 육덕한 몸뚱이를 탐닉하는 욕정이 복잡하게 섞여있는 인물이다.


노란색의 신체를 가진 포르노그래피 주인공과 더불어 그의 그림에 종종 등장하는 –싸구려 관광온천이나 동네 목욕탕에서 보았을법한- 야자수는 영화 아비정전의 시작과 끝에 등장하는 열대우림의 그것과는 달리 그 앙상한 줄기와 얼마 되지 않은 개체수 때문에 더더욱 그 쓸쓸함이 극대화 되는데, 오용석은 때로 그 앙상한 화폭에 마저 불을 놓아 그 자신의 황량한 유토피아와 내면의 고독에 점멸등을 내린다. 그리고 우리는 앙상하게 타다 남았을 그 가여운 야자나무와 그 장면을 그리고 있을 화가의 모습을 상상해보게 된다. 종로 구석진 뒷골목에 이름도 없이 존재하는 여인숙의 벽지를 더듬는 심정으로 끝 간 데 없는 고독을 가늠해 본다. 이러한 과정은 시간을 두고 바라볼수록 빛이 나는 모종의 미학을 발견하게 되는 이치와도 같은 것이라서(나는 이것을 벽지의 미학이라고 말하곤 한다) 내밀하고 은밀하게 그의 감수성을 곁눈질로 지켜봐야한다(그리고 그것은 인내를 필요로 한다). '사랑에는 이름이 없다'라는 납득이 어려운 문장을 전시제목으로 선정한 작가를 위해 궁리하다 오랜만에 파스칼 키냐르의 '은밀한 생'을 집어들었다. 그리고 우연히 한 문장을 읽게 됐는데 그 문장은 아래와 같다.


'사랑의 순수성, 그것은 침묵하는  초라한 나체가 맨 앞쪽으로 떠오르는 것이다. 순수성이 필연적으로, 억제할 수 없게, 우스꽝스럽게 , 멋지게, 고집불통으로  우뚝 선다. 사랑이란 이미 피할 수 없는 뻔뻔스러움이다. 사랑이란 언어에 선행하는 것의 벌거벗음, 언어가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으며  사회가 망각하고자  하는 –그토록 나체는 자연스럽고 수치스러우며 비사회적인 근원을 가리킨다. - 벌거벗음이다, 선적인 것은 명명될 수 없는것이다. 모든 사랑은 이름붙일 수 없는 것의 비밀에 헌신한다. 사랑은 위선적이고 수다스럽고 선명하지 못한 인간의 사회에서는 표현할 길이 없는 동물적인 순수성이다. 두 다리 사이에 몸통을 처박고 있던 늙은 은자가 내미는 얼굴이다 그러나 언어의 수다스러움이 현실을 비틀어서 조금씩 뿌리째 뽑아내고는 잊어버린다'


고독에 이미지를 입히고 사랑을 명명하여 잠시 곁에 붙잡아 두려 노력하지만 사실 우리는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다. 사랑에는 이름이 없다. 언어 이전의 삶을 갈망했던 키냐르에게 언어로 사랑을 표현하는 일은 경멸에 가까운 일이었다. 습득된 언어가 감정을 재단하고 섹스를 재미없게 만든다. 자가당착에 빠지고 자기모순을 즐기는 언어를 구원할 길은 세상의 모든 이름 없는 것들을 지각하는 것이리라. 2015




이병희(미술비평)

 

석양이 지는 해변에 서있는 소년의 모습을 바라보는 한 노인이 있다. 해변인데도 흰색 중절모에 흰색 양복에 흰색 구두를 신고 의자에 누워있다. 땀을 흘리고 있고, 좀 더 젊게 보이려고 한 회분이 땀에 지워져 내리고 있다. 태양은 수평선 아래에 걸쳐 사라지기 전, 가장 아름다운 빛을 내뿜고 있고, 소년은 그 빛을 모두 한 몸에 받아 눈부시게 빛나고 있다. 그가 페스트가 창궐하기 시작하는 베니스를 빠져나가지 않은 것은 오직 그 소년 때문이다. 이미 자신의 몸이 수명이 다해간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조금이라도 가까이 젊음의 광휘를 맛보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어두컴컴한 뒷골목을 따라가면서도, 긴장과 동시에 행복감을 느꼈던 것을 기억한다. 기침할 때마다 손수건에 묻어나는 선혈을 보면서도, 오히려 자신의 얼굴에 안하던 화장을 한다. 이 순간에도 자신에게 이런 욕망이 남아 있다는 것 자체가 놀랍게 느껴진다. 그래서 더더욱 소년을 계속 바라보고 싶어진다. 이야기를 하거나 몸을 만지고 싶다는 욕망은 존재하지 않는다. 금빛으로 빛나는 해변에서 소년이 발광하는 것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그는 만족스럽다. 몸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리는 데도 불구하고 해변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마치 마법에 걸린 것처럼 소년의 주위를 방황한다. 조금이라도 젊어 보이려고 염색한 머리카락에서 검은 물이 식은땀을 따라 흐른다. 시야는 서서히 흐려진다.

---- 오용석, 기사들의 춤, [Tu], 2011





  인물들은 "환희에 가득 찬 듯" 발광하는 색채들에 휘감겨있다. 그의 두루마리 그림 <성스러운 밤, (2012)>을 포함하여 최근 작품들을 보면, 빛으로 변모하는 색들에 사로잡힌 몸들이 회화가 되고, 색이 되고 있다. 그런데 그간 오용석이 주로 소재로 삼아온 그 몸들은 한때 잔혹한 폭력의 무기력한 희생양이기도 했고, 조롱거리였으며, 볼거리였다. 또 한때 그 몸들은 젊고 싱싱하고 매끈하여 격렬하게 성애의 눈길에 휘감기고, 손길에 주물러지며, 어루만져지고, 성욕의 게걸스런 탐욕의 혀로 핥아졌던 몸들이다.   실제 우리 삶에서 발생하는 폭력과 사랑의 관계, 그것이 작동하는 방식은 매우 닮아있다. 욕망의 관계에서 벌어지는 모든 행위들은 어찌보면 사도-마조히즘적인, 주인과 노예의 지극히 탐욕스러운 변주들인지도 모른다. 오용석의 페인팅에서의 몸들은 얼핏 보면 매우 건강하고 섹시한 남성-모델들처럼 보인다. 그것은 볼거리-대상의 역할에 비교적 충실하다. 그런데 사실 오용석의 몸들에는 비하인드 스토리가 있다. 그들은 여태껏 자유롭지 않은 사랑의 관계 혹은 모종의 관계, 주인-노예, 가해자-피해자, 사도-마조히즘적 페티시의 관계에 얽힌, 결박당한 몸들이었다.

 

  특히, 최근 2012-2013년의 오용석의 그림들을 보면, 이 몸들은 어딘지 무게, 육신의 덩어리란 느낌이 소거되어있다. 아니 무엇인가로부터 풀려난 듯 보인다. 이 몸들이 아무리 과거 한때 고문당하고, 살해당해 난자당했을지라도, 혹은 욕망의 게걸스럽고 탐욕스런 손길에서 결국 비극적인 운명을 겪었을지라도 지금의 그 몸들은 어떠한 비하인드 스토리도 갖지 않는다. 어떠한 관계, 그것이 폭력적인 것이건, 성애적인 것이건 간에 그 여타의 관계들로부터 초연하다. 이제 몸들은 단지 색으로부터 배어 나온다. 얼굴만 둥실 떠 있거나, 색-자연 배경에 배어버렸다. 여전히 실루엣만으로 그 흔적만을 남긴다. 불분명한 몸들의 제스처들은 체위만으로, 포즈만으로, 표정만으로 엉켜있다. 즉 쾌락의 대상으로서의 제한된 육신을 벗어난 껍데기 혹은 탈주체화된 이 몸들은 육체를 떠나고 관계를 떠나버린 채 행위만을 반복하고 있다. 이제 몸들은 망각한 자들의 껍데기가 되어버렸다.  제스처들만 남은 몸들은 기억의 찌꺼기인지도 모르고, 자유로운 새로운 대상들인지도 모른다. 어쩌면 색들이 밝게 발광할수록 그 역할은 "승화"의 책임을 떠맡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고 보니 몸들은 한결 편안해졌다. 그리고 이제 폭력의 흔적들이 많이 지워졌다. 가령 발광하는 색채들에 휘감겨 색채가 되고 있는 이 몸들이 과거 폭력적인 관계와의 단절이거나 지극한 망각에 의해 자유로워진 몸들이라면, 당연 그 단절과 망각은 쓰디쓴 고통스러운 상실을 겪었어야 했을 것이다. 그 상실에 대한 애도의 과정에서, 몸들, 추억들, 이미지들, 오브제들은 지속적으로 반복해서 등장해왔다. (나는 지금 오용석이 그간 그려온 전체 그림들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런데 여태 반복되어온, 다시 말해 유령처럼 계속 불려 나온 오용석의 몸-소재들은 <성스러운 밤> (2012)에서 드디어 장례를 치르고 한 번의 푸닥거리로 영원한 굿바이를 하게 되는 것이 아닌가싶다. 이번 전시의 특징, 밝은 색, 아니 밝다못해 발광하며 빛이 되려고 하는 색들은 큰 변화이고 시도이다. 나는 거기에 감히 몸들에게 단절과 망각과 "승화"의 계기를 부여하려는 것이다.  이것이 만일 승화의 계기라면 위에서 인용한 오용석의 묘사(그것은 영화 <베니스에서의 죽음>의 장면을 보는 듯 하다)에서처럼 그것은 치명적인 탐욕의 운명이 치닫는 마지막 장면에서부터 출발한다. 어떠한 대상에 결박된 이 욕망의 운명이 그 쾌락의 정도를 모두 탕진하였을 때 새로운 욕망은 새로운 대상을 찾을때까지 끊임없는 림보와도 같은 죽음충동의 상태에 머문 채로 좀비의 상태로 유지될 수 밖에 없다. 그런데 그것이 바로 사실 현대의 고민하는 주체들의 초상이다. 쾌락도 우울함 조차도 작동하지 않고 욕망의 기능이 바닥을 쳤는데, 습관적인 유희와 거래만이 지속되면서 '생명' 차원을 고집해야하는 것. 그 자체가 고민이다. 즉 반-죽음 상태의 고요 속에서 죽음충동만이 소리없는 춤판을 벌이고 유령들만이 난무하는 마당에 도무지 할 것이 없다는 것이다.  망각하지 못하는 자는 듬성 듬성 벌어진 기억의 틈새에 매달려 산다. 그러고 보니, 벌써 오용석의 첫번째 개인전 <Blow Up>(갤러리정미소, 2007)으로 인연을 맺은 것이 벌써 6년 전이다. 지금 얼핏 기억에 남는 것은 그가 채집한 소재였던 실제 인물들(나진스키, 엘리자베스 쇼츠, 조이 스테파노)의 잔인하고 비극적인 스토리와 그것을 회화라는 사치스러운 매체로 그리면서 작가가 뱉어내던 이야기들이었다. 전시장에서 이 이야기들은 물컹한 페니스들과 더불어 강한 색채의 물감으로 반죽되고, 짓이겨져 캔버스에 그려졌다. 법의 차원에서는 도저히 다스릴 수 없는 인간 욕망의 사악하고도 고혹적인 사도마조히즘적 폭력의 양상들, 그 폭력의 과정에 어쩔 수 없이 눈길을 사로잡히는 공범자이자 쾌락주의자로서의 관람자. 그 관람을 당시 전시를 하면서 우리는 같이 무대에 세웠고, 새로운 볼거리로 내세웠었다. 그 관람의 시선이란 언제나처럼 폭력의 결과에 무기력하고 무책임한 자리에서 지극히 잔인한 관람을 지속한다. 폭력의 현장과의 관람의 거리는 아슬아슬하게 가깝지만 안전하다. 그 관람은 그렇기에 점점 더 자극적인, 쾌락적인 차원을 추구할 수 있다. 그렇지만 그 쾌락의 운명은 쾌락이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 어떤 욕망의 궁색한 바닥을 치는 것으로 치닫는다. 그 순간 쾌락은 매혹된 대상들과의 관계를 새로 설정하여야만 되살아나는 새로운 운명의 길로 접어든다. 그리고 오용석의 전시는 시작되었다.  슬프지만 애도하지 못하는 자는 도저히 과거의 기억을 떨쳐낼 수 없는 불구자이다. 망각하지 못하기에, 슬픔이 치유되지 않고, 애도가 완결되지 않는다. "회화"라는 행위가 소극적으로, 혹은 개인적으로나마 어떤 애도의 작업이 된다면 어떨까. 아니, 다시 말하자. 애도하지 못하는 자의 초상을 통해서 애도를 무대화한다면 편이 낫겠다. 사실 오늘날에는 그 누구도 제대로 "애도"할 수 없다. 온갖 상실들, 가령 개인적인 차원에서 사랑하는 사람이나 가족과 헤어졌거나 잃고 나서 그 상실에 대해 슬퍼하고 극복하고 새로운 대상을 찾을 때까지의 그 과정을 겪을 수가 없다. 아니 그럴 겨를이 없거나 아니면 애도의 방식이 이미 프로그래밍이 되어 있기 때문에 애도는 너무 완벽하게 끝나는 듯 보인다. 마치 슬픔의 정도와 애도의 방식 혹은 기간은 비례적으로 계산되는 듯 치뤄지고 정작 애도의 주체는 정신만 혼미해지고 만다.  집단적인 차원으로 확장하여보면, 국가적 사명을 달성코자 하는 과정에서 역사의 자취들은 쉽게 지워지고, 없어지고, 부셔지고, 잊혀졌다. 그 과정에서 상실된 그 무엇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 무엇(도대체 무엇인지 이젠 정말 잊어버렸나보다)들을 매장시키고 그 매장-상실에 대해서 그리워하거나 애도하고자할 때 무엇이 그 자리를 차지했는가? 대부분은 그 상실의 책임을 묻기만 하거나, 혹은 그 상실의 값이 얼마 얼마로 매겨지는 식으로 처리되고 말았다. 조금 서설이 길었지만, 애도는 단지 개인적인 차원에서 머무는 것이 아니며 그 수행은 절대 완벽할 수 없다. 애도는 완벽하게 끝나는 것이라기보다는 다른 차원으로 승화되는 과정이라고 하여야할 것이다.  그간 줄곧 봐온 오용석의 작업을 보자면, 수차례에 걸친 반복적인 행위들 속에 애도의 과정이 담지된 것이 느껴진다. 작품들에는 항상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어떤 이미지들이 있고, 그 안에 관능적이면서 동시에 차갑게 느껴지는 몸들이 있다. 채집된 이미지들은 지속적으로 반복, 왜곡되어 등장한다. 여기에 지배적인 정서는 비극적이고 외롭고 스산하고 우울한 느낌들이다. 그런데 항상 그렇듯 이 느낌들은 '대상'들의 주변을 서성이기만 한다. 만남은 어긋나고, 관계는 절단되며, 대상과의 거리는 좁혀지지 않는다. 아무리 그림에서 몸들이 서로 엉키어있거나 붙어있는 듯 보여도 말이다. 이 느낌들은 주로 그의 작업 노트에서 지배적이다. 근데 이 서성이는, 소유되지 않고, 소유하지 않고, 항상 이별이 예견되는 이 느낌은 우리에게 익숙한 느낌이다. 즉 뭔가를 소유하지 못하였기에 한 번도 제대로 상실해본 적도 없고, 그래서 애도해 본적도 없는… 단지 뭔가 갑자기 항상 들이닥쳐 뭔가를 앗아가서 허망한 그런 느낌이다.  2011년의 개인전 <Tu>(금호미술관)는 어떤 불가능한 관계와 그것의 비가시성, 그 때문에 더욱더 절망적인 정서에서 비롯된 듯 보인다. 군상(기사들의 춤 : 카우보이 댄스 스태그, 2011)에서 인물들은 집단적으로 어울려있지만 제각각이고, 떠난, 사라진, 사라질 것들에 대한 애절한 정서가 가득하다. 실루엣만으로 암시되는 어떤 대상의 자취들. 그런데 이는 단지 개인의 경험에서 비롯된 것이라기보다는 집단의 기억이 전이된 것이라고 하는 편이 낫다. 그런데 집단의 기억은 반복된 상실들에 무감각하여 도대체 무엇을 잃었는지조차 모른 채 불감증에 걸려버렸다. 그리하여 헤어짐-상실-망각은 무감각하게 반복된다. 쾌락이 그것의 작동기제가 멈추었을 때 새로운 대상들을 찾고 새롭게 관계를 만들어야 한다면, 상실에 대한 슬픔의 눈물이 메말랐을 때 대상은 어떻게 거듭 날 수 있을까, 그리고 어떤 새로운 관계가 형성될 수 있을까. 오용석의 2012년 개인전 전시 제목<제 8장 성스러운 밤_그리하여 밤이 밤을 밝히었다>에서처럼  어둠은 밤을 밝히는 유일한 배경이다. 마찬가지로 우울하고 곤혹스럽고 고통스럽고 잔혹하며 탐욕스러운 배경을 갖는, 노랑, 흰색, 블루, 검정, 퍼플로 묘사된 몸들은 이제는 발광하는 노랑, 흰색, 블루, 검정, 퍼플이 되어서 새롭게 빛처럼 밝혀지고 있다. 색이 색을 밝혀주고, 우울은 우울을 밝혀주고, 몸들은 육신을 떠나 다시유령이 되었거나, 아니면 빛-색의 무덤이라는 안식처를 찾았다. 이들은 이제야 편안해졌나보다. 그래서인지 몸들은 화사하게 빛나는 춤을 추고 있다. 2013


<라운드업 2013> 수록

 

장파 (아티스트)


과잉된 사랑

Excessive Love

                             

그의 작업 전반에는 사랑과 욕망의 구조적 관계 및 그것들에 의해 파생되는 이야기들로 가득 차있다. 욕망 속에서 사랑을 발견하고 싶은 열망. 작가는 그것의 불가능성을 받아들이기보다는 환상과 아름다움의 영역으로 이동시킨다. 그러나 환상의 영역으로 들어간 작가는 다시 그 속에서 사랑의 가능성을 탐색한다. 왜냐하면, 환상은 욕망이 실현되는 시나리오를 보여주지 않기 때문이다. 라캉 정신분석에서 환상은 `우리로 하여금 무엇인가를 욕망할 수 있도록 해주는, 혹은 욕망하는 방법을 가르쳐주는 하나의 틀로서 기능한다.'하였듯이. 그는 욕망의 심층으로 들어가 그것의 근원적 이유를 찾는 것이 아니라, 욕망의 표면에서 환상의 환영이 만들어내는 가능성의 영역을 이야기한다. 

The body of his work is filled with the structural relationship between love and desire, as well as with the stories which derive from both. Rather than accept the impossibility of the yearning to discover love within desire, the artist transports said yearning into the province of fantasy and beauty. Having followed it into such imaginations, he again searches for the possibility of love. The search is made possible by the fact that fantasy omits all scenarios in which desire is carried out. As in Lacanian psychoanalysis, which defines our fantasies in terms of a framework which either enables us to desire something or teaches us how to desire, the artist does not delve into the depths of desire in order to discover its roots. He instead speaks of the sphere of possibility created on the surface of desire by the phantasms of fantasy.

 


환상의 접면

Intersections with the Imaginary


오용석의 페인팅에서 보이는 공간은 물리적으로 평평하다. 뚜렷한 소실점이 없거나 약화시킴으로 3차원의 원근법적 깊이가 가지고 있는 현실감을 벗어나 판타지를 극대화한다. 또한, 그림의 얇은 표면이 갖는 의미 작용은 그가 그리는 얼굴의 이미지에서 더욱 선명하게 찾아볼 수 있다. 그는 잘린 머리와 같은 이미지를 반복하여 그리곤 한다. 그것을 거세된 욕망의 이야기로 해석할 수도 있겠지만, 그에 앞서 인격과 분리된, 표면으로 다루어진 얼굴을 보게 된다. 내면을 반영하는 얼굴이 아닌 얼굴의 껍데기는 표면의 표상이다. 깊이가 없는 표층의 세계가 가질 수 있는 존재의 희미함이 새로운 영역에 들어갈 수 있는 틈으로 작용한다. 그에게 표면의 세계는 현실과 비현실의 접면일 것이다. 욕망의 근원을 찾는 것이 아니라 환상의 세계에서 욕망의 표면들과 조우하는 것, 즉 그의 그림에서는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를 궁금해하는 것보다 현실의 욕망이 치환되는 과정을 추적하는 것이 그의 그림을 읽어내는 방법일지도 모른다. 

The spaces in Yongseok Oh’s paintings are physically flat. His use of indistinct or indistinguishable vanishing points strips his work of a sense of realism and fills it with an augmented fantasticality. The mechanisms of meaning within the thin surface of these paintings become all the more lucid through the faces which he draws. Oh’s work tends to include repetitive images such as severed heads. These images may be interpreted as a commentary on castrated desire, but, more importantly, they enable the viewer to observe the face as a surface cut off from humanity. The face as shell instead of the face as reflection of the interior functions as an image of the surface. The abstruse existences inhabiting the flat realm of the surface function as a gap leading into new domains. For the artist, the realm of the surface constitutes an intersection between reality and the unreal. One does not go about reading his paintings by hunting down the source of desire or pondering the message that his work seems to impart. The viewer would be better advised to encounter the surfaces of desire within the province of fantasy and pursue the process through which the desires of reality permutate into the unreal.



보내지지 않은 편지  

An Unsent Letter


깊이가 없는 표면이 유발하는 존재의 모호함은 그가 쓰는 소설의 형식에서도 비슷하게 드러난다. 그의 소설에 등장하는 화자는 대부분 1인칭 ‘나'이며, 서간체 소설의 형식을 주로 사용한다. 객관적 서술이 가능한 3인칭 시점과 달리, 1인칭 시점은 세계를 `나'의 내면으로 끌어들인다. 그렇게 `나'의 독백으로 가득 찬 소설이지만 독백과 방백 사이를 오간다. 편지라는 형식이 그것을 가능하게 해주는데, 그것은 편지의 진정한 수신자가 편지의 내용을 가장 잘 이해해줄 상대자로 설정했기 때문이다. 수신자에게 받을 답장을 기다리듯, 작가는 끊임없이 욕망 속에서 사랑의 가능성 발견하길 기대한다. 오용석은 그의 작업과 소설에서 본능, 충동, 욕망, 사랑을 환상의 프리즘에 투과시킨 스펙트럼으로 보여주고 있다. 우리는 그 프리즘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흥미롭게 지켜보면 될 것이다.

Oh’s novels are similarly characterized by an ambiguity of existence triggered by flat surfaces. The majority of his novels are epistolary novels narrated by a first person “I.” Unlike the somewhat objective accounts of third person narration, first person perspective situates itself and the reader within the interior of the “I.” It uses the soliloquy as its means of fluctuating between speaking in monologue and speaking aside. Such soliloquies are made possible by the epistolary form, largely due to the true recipient of these epistles having been designated as an individual best suited to comprehending their contents. As if waiting for a response to his letters, the artist ceaselessly anticipates the possibility of finding love in desire. The paintings and novels of Yongseok Oh present us with a spectrum of instinct, impulse, desire, and love filtered through the prism of fantasy. All we need do is observe the way in which the prism operates.

 

                                           <RE: 보내지지 않은 편지> 중에서, 장파, 2013

From “RE: An Unsent Letter,” JangPa, 2013


<롤랑의 노래 2013> 수록




                                                김만석(미술평론가)


1. 이미지 생태계


오용석의 회화는 밀림이다. 회화와 밀림을 등가로 놓았다고 해서 오해해서는 안 된다. 아니, 그의 회화를 밀림으로 은유했다고 해서 정말로 밀림이 아니거나, 회화는 회화일 뿐 오해하지 말자는 익숙한 농담으로 간주할 수 없다. 회화에 대한 반성이 회화에 깃든 환상을 걷어내는 데 있었다면, 오히려 오용석의 회화는 회화가 지닌 마법들을 보다 풍부하게 활용함으로써 이미지의 밀림을 정초하는 데 초점이 맞추어져 있기 때문이다. 잘 알다시피, 밀림이 갖은 초목들과 파충류, 갑각류, 포유류 등을 포괄하는 광범위한 생태계가 자유롭게 혹은 그 내적 원리에 따라서 균형을 이루고 있는 세계라고 할 수 있다면, 오용석의 회화를 밀림으로 간주해야 한다는 진술은 서로 다른 유적 질서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되는 각각의 이미지들이 화폭 위에서 균형과 조화를 이루고 있다는 것을 뜻한다. 물론 캔버스가 이미지의 서식지라고 하더라도 세상의 모든 이미지들이 자신의 존재론적 지평을 막무가내로 캔버스 위에 안착할 수 있다는 말은 아니다. 

즉, 오용석의 캔버스가 갖는 토양에 따라 서식할 수 있는 이미지의 ‘종-속-과-목-강-문-계’의 유형이 구성된다는 것이다. 물론 오용석의 캔버스에 등장하는 이미지들이 캔버스의 내적 논리에 의해 이미지의 계열이 형성된다고 해서, 그것이 반드시 유형화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이미지의 유형화가 이미지를 조직하는 방법을 알려준다고 하더라도, 오용석의 캔버스가 지배적이고 규율적인 이미지의 체계를 구성하는 시스템 아래에서 사물과 이미지가 특권적인 방식으로만 다루어지는 데 대한 비판이 내재하고 있음을 고려하는 것이 훨씬 중요하기 때문이다. 즉, 오용석의 캔버스는 사물과 이미지를 일의적으로만 존재하도록 만드는 방식으로부터 이탈하도록 만들면서 그 사물과 이미지를 다른 방식으로 살도록 만드는 데 더욱 관심을 갖기 때문에 이미지가 유형화되고 있다는 사실보다 다른 국면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아니, 사물과 존재가 지니고 있는 이미지를 다른 방식으로 성장시키는 오용석의 캔버스가 왜 중요한가?

현실의 사물이 갖는 이미지가 원래의 장소로부터 고착되어 특정한 방식으로 이해되기를 강제당하는 것은 일반적이다. 일상적인 사물이나 경험들은 ‘장소’에 고착되어 있는 탓이다. 하지만 장소는 지속적으로 상실되고 있고 사물의 이미지는 부박하기 짝이 없는 것이 오히려 더 현실적이다. 스타일을 통해서 삶과 정체성을 바꿀 수 있다고 믿는 현실이니, 사물과 존재의 고정된 이미지란 불가능하다고 할 수 있다. 주의해야 할 것은 스타일을 통해서 삶을 변경할 수 있다고 믿더라도 사회적 형식에서는 특정한 원리를 통해 정체성의 표지가 변경되는 것을 부정적으로 판단하고 있고 정체성이라는 경계의 표지를 넘는 것에 대한 강력한 금기가 형성되어 있음을 지적할 필요가 있다. 예컨대, 젠더나 국가, 민족, 인종, 섹슈얼리티와 같은 경계에는 ‘기요틴’이 드리워져 있어서 그것을 넘는 자의 목을 잘라버릴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그만큼 이를 넘는 것은 쉽지 않은 것이고 이 경계를 넘어서는 자의 삶은 고통으로 점철되어 있음을 눈여겨보지 않으면 안 된다.

이런 점에서 경험과 기억이 상실되는 자본주의적 현실에서 장소에 특권적인 힘을 부여하고 삶이 추상화되는 현실을 비판적으로 논의하는 다양한 사유들은 새삼 문제적일 수도 있다. 사물이나 존재의 정체성을 고정화하는 이런 전략들은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비판적 논점은 제공할 수 있지만 궁극적으로 사물과 존재의 가능성과 다양성 자체를 제한하고 폐쇄적으로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이 시스템에서의 삶이 자신이 거주할 삶의 장소를 지속적으로 상실하는 데에 있는 것이 사실이라고 해도, 장소 그러니까 고향으로의 회귀를 배면에 깔고 있는 정체성의 정치는 다분히 위험한 지점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즉, 이미지를 다루는 데에는 고착화와 해방이라는 주제가 놓여 있으며 모더니즘 미학이 신화화했던 바, ‘새로움’이라는 ‘미적인 것’은 자명한 것이 아니라 갈등적인 상태의 명제로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사물과 존재를, 그것이 처해 있는 ‘컨텍스트로’부터 해방시키고 사물과 존재를 ‘텍스트화’하는 과정이 근대적 예술이 취해왔던 방식이었다는 것을 잘 알려져 있다. 그러니까, 캔버스로 사물과 존재를 옮김으로써 사물과 존재가 맺고 있는 세계 내에서의 흐름을 차단하고 고립적으로 다룰 수 있었기 때문에 사물과 존재는 그 장소로부터 ‘해방’될 수 있었음과 동시에 원천적으로 추상화된 관계 속으로 존재론적인 비약을 감행해야만 했다. 즉, 이 때 캔버스로 걸어 들어간 사물과 존재는 익명의 관객과의 관계로 나아가야만 했다는 것이다. 캔버스가 해방시킨 사물과 존재는 그런 점에서 다시 캔버스라는 토양 위에서 자신의 운명을 감내해야만 했다. 그것을 우리는 재현이 아니라 표현이라고 불렀지만, 캔버스 위에 등장하는 세계는 기본적으로 ‘재현’을 부정하기는 쉽지 않았다. 그런 점에서 현대예술이 이 재현의 마력으로부터 탈주하고 회화 자체가 가지는 원리를 궁구했던 것도 우연일 수 없다.

오용석은 이러한 재현의 문제를 다루는 것을 애초에 사고하지 않는다. 그것은 재현이 아니라 부재하는 세계를 정초하려는 차원에서 사물과 존재를 캔버스 위에 가지고 온다는 것을 주목해야 한다. 사물의 이미지를 다른 방식으로 생존하도록 만드는 것이 오용석의 캔버스라는 토양이라고 할 수 있는 셈이다. 이 때문에 그의 캔버스가 갖는 토양의 성질과 그가 자주 생장시키는 이미지의 속성들에 대해 주의 깊게 성찰해야만 한다. 이는 단순히 캔버스의 생태 상태가 어떤 것인지를 사회적 조건을 통해서만 탐구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캔버스가 세상의 모든 이미지를 자라게 만들 수 있는 지평이라면, 그 지평 속에서 과연 어떤 이미지들이 생장되는가를 더 밀도 있게 질문해야만, ‘비가시적인 세계’로 내몰리는, 그러나 바로 그러한 방식을 통해서 숙성되고 있는 삶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을 뜻한다. 달리 말해, 정돈되고 규범적인 형식으로 매끄럽게 다듬어진 세계에서 사물-이미지들의 가능성이 최소한으로 제한되고 있지만, 그 사물-이미지가 다른 방식으로 생장하기 위해서는 당연히 캔버스의 토양 자체가 달라져야만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PIEDMONT, 130cmx194cm, Oil on Canvas, 2011 PRIVATE COLLECTION



2. 밀림에서의 외침 : ‘미싱’이라는 형식


그러나 그가 ‘타잔’은 아니라는 것은 미리 말해두어야겠다. 이미지 밀림에서 그가 큰 소리를 외쳐서 입맛대로 달려오는 참한 생명은 없다는 뜻이다. 오히려 그가 큰 소리로 외칠 때 응답하는 이미지들이 과연 무엇인가, 그리고 그 이미지들이 어떤 방식으로 변용되는가의 문제도 중요하다. 캔버스로 안착시킨 이미지들의 원본이 있다고 가정해서는 안 될 뿐만 아니라 역설적이지만 이미지의 밀림에서 큰 소리로 외칠 때 응답하는 사물-이미지들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은 그리 중요한 일이 아니다. 캔버스에 등장한 이미지는 이미 변경된 이미지이고 캔버스라는 토양을 통해서 숙성된 이미지라는 점에서 그것은 현실과 대조해서 얻어질 수 있는 상태로 존재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가 웹을 통해서 수많은 이미지를 수집하거나 갖은 대중문화의 이미지들을 경유해서 작업할 때, 그것들이 갖는 이미지의 기원(고향)은 없으며 뿌리 없는 그 이미지들의 뿌리와 근육을 갖도록 해 준다는 점에서 그의 캔버스는 ‘없는 세계’를 구성하는 ‘이종의 서식지’라고 할 수 있다. 물론 타잔처럼 그가 이미지를 힘차게 외칠 때, 캔버스로 모든 이미지들이 다 온다고 해서 그 이미지들이 무조건 캔버스에 발을 들여놓을 수 있지는 않다. 이종이 탄생하는 데도 일종의 독특한 원리가 작동하기 때문이다. 

이 원리를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영원히 이어붙일 수 있는 천이고 다른 하나는 사진 이미지이다. 이 양자의 원리는 ‘미싱’이라는 매개적 방식을 통해 이질적인 두 사물이 결합할 수 있으며 이를 통해 새로운 종이 생성된다. 그렇다면 오용석에게 회화는 ‘미싱’이라는 ‘기술’이 아닐까? 예술이 오래전부터 ‘기술’(techne)로 간주되어 왔다는 것을 떠올려 보자. 희랍철학에 따르면 기술은 세계를 조화롭게 구성하는 원리로 이해되고 있었고 곧 예술은 폴리스[도시]에서의 삶 혹은 생명들이 맺는 관계를 형성하게 하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마치 정보통신기술이 거리[관계]를 이어주는 방식이듯이, 예술 역시 삶 혹은 생명 사이를 연결하는 것으로 간주되었다는 것이다. 예술가들이 일종의 기술자이고 이들이 사멸해버린 세계나 현존하는 세계로 인정받을 수 없는 세계를 관람객들과 접속하게 만드는 (간혹 귀신들린) 존재들이었던 셈이다. (따라서 오용석의 캔버스가 결합하도록 만드는 세계와 그것을 바라보는 관객들이 결합되는 방식은 분별해서 사고할 필요가 있을지 모른다. 오용석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만 해도 충분히 힘겨운 일이니 후자는 다른 방식으로 질문해야 할 터이다.)

천-사물-존재-사진-이미지들의 결합과 미싱이라는 원리는 다음의 두 절을 통해서 살피는 것이 필요할 듯하다. 


미싱은 잘도 도네, 돌아가네 : 식구들이 모두 일을 찾아 어디론가 사라지고 집에는 아이와 엄마가 남아 비오는 오후를 견디고 있다. 슬레이트 지붕에 떨어지는 비를 보며 막 김치전을 함께 만들어 먹던 모자는 겨울 내내 견딘 이불 호청을 새로 갈기 위해 마루에 미싱을 요란하게 꺼낸다. 아이는 엄마의 요청에 이불을 가지런히 펴고 가위로, 조심스레 잘 박음질된 이불의 안팎을 분리한다. 짧은 아이의 탄성. 위쪽 천을 뜯자 속에는 하얀 솜으로 가득하다. 저 붉고 화려한 천속에 저렇게 하얀 솜이 가득 들어 찰 수 있다니, 엄니, 와, 신기해요. 신기한 건 그것만이 아니란다. 보렴, 천은 버릴 것이 하나도 없으니, 미싱만 있다면 여러 가지 천들이 더 큰 천으로, 더 큰 천은, 그보다 더 큰 천으로 이어 붙일 수 있단다. 그러니, 속에 든 것만큼 껍질이야말로 얼마나 중요한 것이냐. 엄니, 그럼 세상은 온통 껍질들이네? 그럼, 이 땅위에 있는 건 모든 게 연결되어 있단다. 

팔과 다리, 몸통을 보렴. 쓰이는 데가 모두 다른 데도, 이어 붙인 흔적을 찾을 수 없이, 한 몸이듯, 세상은 서로 다른 여러 몸들이 이렇게 저렇게 붙어 있는 거야. 나는 엄니 몸과 붙어 있는 거야? 붙어 있기도 하고 떨어져 있기도 해. 잘 모르겠다, 엄니. 붙어 있다가 떨어졌다, 다시 붙은 거라고 해야 할까? 떨어져서 붙은 거라고 해도 될 거야. 아니지. 그렇다고 모든 천들이 함께 붙는 건 아니란다. 이어붙이는 방법은 붙이는 사람들에 따라 모두 다르니, 방법도 한이 없고 모양도 한이 없다고 해야 바르다고 해야 할지 모른단다. 너를 보렴. 너야말로 이어 붙여 태어난 아이란다. 누구나 다 이어 붙여 태어나니, 너는 온 몸이 이어 붙은 채로 태어난 게지. 엄니도 이어 붙은 거니까, 나는 언제부터, 어떻게, 누구들의 이어 붙음일까? 엄니, 이어 붙으면서 찢어지기도 해야만 하는 건 뭐 때문인 거야? 그건 ‘사랑’ 때문이란다. ‘사랑’이 이어 붙이고 사랑이 떼어 놓는단다.

엄니, 근데, 어제 지갑에서 십 원짜리 동전 다섯 개 훔쳐 ‘깐도리’ 아이스크림 사먹은 거 알고 있겠네? 알다마다. 그런데 왜 누이들을 야단친 거야? 네가 이미 그 순간에 야단을 맞고 있었기 때문이란다. ‘죄’는 결백한 자에게 한 없이 가벼운 거란다. 천을 이어붙일 때, 잘 이어 붙이려면 한쪽 천과 한쪽 천이 평평하게, 나풀거리지 않게 잘 놓여 있어야 하는 게야. 그것이 죄라는 걸 알려면 누이들이 혼나는 게 네게 더 큰 죄가 되지 않겠니? 누이들의 이유 없는 꾸지람은 네게 죄의 무거움과 너와 네 누이들이 모두 저 천처럼 묶여 있다는 걸 알려주고픈 엄니의 마음이란다. 엄니의 찢어지는 마음이야? 마음까지 이어 붙은 건가봐. 다시는 엄니 주머니에서 십 원짜리 동전 꺼내지 않을게. 비가 후드득 떨어지고 미싱이 덜덜덜 돌아간다. 빗소리 미싱 바늘과 실에 실려 천과 천 사이에 부드럽게 스며든다. 천 하나의 세계가 다른 천과 만나 무한이 된다. 하나는 이미 여러 개다. 


추억은 방울방울 : 오용석에게 사진첩은 작업의 밑거름이다. 그러나 제의와 의례적 관습에서나, 그러니까 결혼식과 같은 형식 아래에서 생산되는 사진첩을 제외한다면, 사진첩은 요즘 거의 볼 수 없다. 그래서 그가 작업에서 사진첩을 사용한다고 할 때, 그는 세계 전체를 하나의 사진첩으로 간주하고 있다고 판단하는 것이 옳다. 왜냐하면 그에게 세계는 시간의 순간적 정지와 사물의 국부적 형태의 종합이기 때문에 그러하고 이미지의 누적적 체계로 판단하고 이해하고 있어서이다.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그의 작업이 사진첩을 밑거름으로 활용한다고 할 때, 일반적으로 풍경의 재현이나 인물의 표현을 위해 사진을 활용하는 방식과는 거리가 멀고 대상을 정확하게 재현하기 위해서 활용되는 보조적인 수단으로서도 이용되지 않는다. 오히려 사진이 말하기를 그친, 그렇다고 바르트의 용어법에서의 ‘풍크툼’(punctum)처럼 사진 이미지가 관람자-주체의 고요한 내면에 상처를 내는 방식과는 달리, 사진에 등장한 이미지가 말하지 않는 가능성을 캔버스 위에서 가능하도록 만든다. 

달리 말해, 그는 사진 이미지가 탈프레임화한 세계를 새로운 프레임으로 재구축하려고 시도한다. 이는 사진 이미지를 이중적인 방향으로 활성화한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먼저 단순히 사진 이미지에 포착된 형상 바깥의 세계를 포착하는 게 아니라 프레임화하는 시선을 굴절하고 왜곡하는 방식을 채택함으로써 이루어진다. 즉 상식적이고 정상적이라고 간주된 시선이 이른 바 합법적 시선으로 통용되고 있다면 이 시선이 갖는 폭력적이고 강제적인 시선권력을 자연화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세계를 보는 방식 자체가 결정되어 사건/사물을 바라보는 입장이 몇 가지로 제한되고 있는 현실에서 오용석이 사진 이미지를 변경시키는 것은 필연적일 수 있다. 가령, ‘말’과 관련된 이미지들은 종과 동물로써 말로 더 이상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그러니까, 사진이 장소로부터 떼어 낸 이미지를 오용석은 캔버스를 통해서 다른 세계에 이어 붙인다는 것이다. 물론 그 때 캔버스는 완결된 세계일 수 없고 하나의 접속점으로 기능한다.  


‘미싱’이라는 방법은 작가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중대한 캔버스의 생장 원칙이다. (주의하자. 성장이 아니라 생장이다.) 미싱이 떨어져 있는 사물과 존재를 결합시키는 방법, 더 정확하게 말해 ‘기계’라고 한다면, 이전의 오용석의 작업에서 볼 수 있었던 신체적 뒤틀림이나 살의 혼융을 거듭한 이후에 등장한 존재론적인 결합관계를 의미하는 이미지들에서 수행했던 방법과는 궤를 달리하는 것처럼 보인다. 달리 말해, 이미지를 특정한 주제와 소재에 적합하도록 캔버스에 옮겨오기는 했지만, 그 이질적 이미지들이 결속되지 않았으며 이미지의 중첩은 실질적으로 일어나지 않았다는 말이다. 이번 전시에서 오용석은 다양한 이미지를 동시적으로 존재하도록 만드는 기계를 회화에 도입했다는 것. 거기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이나 사물들은 모두 박음질된 상태이며 그들 혹은 그것들은 항상 이미 ‘여러 가지’로 절합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3. 캔버스의 두께 : 외로움의 밀도


결속은 하나가 되는 것이지만, 그보다 우선 이질적인 두 존재가 엮일 때 결속이라고 부를 수 있다는 점에서 하나가 되었다는 것보다 이질적인 두 존재라는 차이가 근본적이라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캔버스가 작가와 관객을 매개하는 미디어라고 할 때, 관객/작가가 한 몸이 된다고 하더라도 근원적으로 이 양자가 지닌 차이가 있듯이, 캔버스가 관객/작가의 결속을 도모하더라도 이 양자가 동일하게 묶일 수 없듯이 말이다. 이질적인 두 이미지가 뒤섞이고 이미지가 누적적으로 캔버스 위에 도입된다고 해도, 이들은 서로 분별되기 때문에 결합될 수 있는 것이고 바로 이런 사정 때문에 오용석의 캔버스에서 이미지는 하나이면서 항상 여러 개로 포옹하고 있는 상태이다. 

그러나 여기서 더 근본적으로 질문해야 할 것은 이미지들의 결속이 대체 왜 필요한가이다. 왜 단독적인 이미지보다 이미지들의 결속을 초래해야 하는가. 캔버스가 왜 이미지들을 불러 모으는가. 이 격렬한 호출과 호흡은 외로움/상실의 문제이며 동시에 애도 불가능성의 문제와 관계된다. 내 이웃이나 내가 이웃이라고 간주하지 않았던 존재의 상실이 나에게 고통을 구성할 때, 놀랍게도 내 이웃이나 내가 이웃이라고 여기지 않았던 존재들이 ‘나’를 구성하고 있었다는 것을 뜻한다. 이는 ‘나’라는 단독적인 의식이 실은 언제나 나 이외의 요소들과의 관계에서만 성립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며 한 존재는 항상 나 이외의 존재가 처하는 상실에 매우 취약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좌이다. 우리는 이를 외로움이라고 부르며 이 외로움에 탓에 반복적인 결속을 요구/요청한다. 

그런 점에서 하나이면서 여러 개인 이미지는 완전히 하나로 포개지는 거울 이미지가 아니다. 이 이미지는 한 개별적 존재가 여러 개로 결속되어 있는 사태를 지칭하고 있다. 이 결속이 와해되는 순간을 흔히 상실이라고 부르며 보통 이 사태에 직면해서 성공적인 애도를 수행하고 상실을 의례와 제의로 처리하지만, 오용석은 성공적인 애도를 수행하기보다 그것에 실패함으로써 외로움을 저지한다. 말하자면, 애도에 성공하는 순간 우리는 상실되어 버린 존재와 영원히 결속할 수 없는 외로움에 직면하게 되므로, 애도를 불가능하게 만듦으로써 외로움이라는 사태에 응답하고, 오히려 이 때문에 더 많은 결속들을 수행하게 된다. 그렇다고 외로움이 소멸하는 것은 아니지만, 바로 이러한 감각이 ‘이웃’과 더불어 ‘나’의 존립가능성을 확인하게 만들어주는 만큼, ‘이웃 혹은 대상’은 지배하고 통치할 수 있는 존재일 수 없다. 아니, 오용석의 캔버스는 이미지/존재들의 상실에 저항하는 존재론적인 보살핌의 장이라고 할 수 있다. 마치, 재앙과 파국이 새로운 삶, 그러니까 다른 방식의 사랑과 연애를 구성하도록 만드는 것처럼 말이다. 그의 사랑이 외로움과 더불어 ‘수행’된다는 것은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닌 것일까? 2011


<[Tu] 2011> 수록


 



I forget to remember to forget1 (le sommeil éveillé du monstre) 1


Luc  Jeand'heur(작가) 

번역 : 정현

 

나는 망각을 기억하는 것을 잊어버렸다. ( 잠에서 깨어난 괴물)

 

« 장치들이 포획한 사용법의 가능성을 그 장치들로부터 매번 빼앗아야만 한다. 남용할 수 없음의 남용이야말로 다가올 세대의 정치적 숙제다. »

지오르지오 아감벤, 모독, 2005

 

한국은 물론 서양에서도 20세기란 우울함이 깃든 재앙의 감정을 시대 뒤에 남겨두었다. 개개인은 그만의 방법으로 이 역사의 광기와 죽음을 밀어내겠지만, 신세기의 요동 속에서도 의식을 지닌 젊은 예술가들은 동시대성 속에 내재된 (역사적) 연속성에 현혹되지만은 않는다. 오용석은 이런 시대적 상실과 방황을 확신하고 있는 세대에 속한다. 이 세대는 공허함을 채우길 거부하고 되려 공허함을 « 도려낸다 »2.그리고 그들은 전시주의도 크로노포비(연대기혐오증, 역주)도 없이 예술을 통해 « 세상을 믿는다 »는 힘을 실어준다. 무소유로 산다는 것 역시 소유하며 사는 것이다란 문구처럼 (시대적) 유산과 대결한다는 것은 오늘날에도 관념적 사유를 의미한다. 오용석의 회화가 결핍, 부재, 몰이해 그리고 공허함과 같은 야만족의 신화로부터 얼룩지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요소들은 작가의 공간을 활성화된 의지로 수놓아진다. 이처럼 강렬한 추상화의 영역은 작가가 개척한 공간을 형상화하며 이 공간들은 회화성으로 가득 채워진다.

 

« User's guide : 1. Follow the leaders. 2. Kill the past. 3. Load the weapons. 4 Destroy the machines. 5. Kill the leaders. »

Mathieu Kleyebe Abonnenc, RIOT,2000

“ 사용자 설명서: 1.리더를 따라가라. 2. 과거를 제거하라. 3. 무기를 옮겨라. 4. 기계를 파괴하라. 5. 리더를 제거하라.”

 마튜 클레이비 아본넥, RIOT, 2000

 

인터넷이 새롭게 느껴지는 세대의 예술가들에게 이 매체는 현실 속에서 필름 위에 음영화를 그리는 대신 수많은 환영을 무한복제하기위한 새로운 가능성을 제공했다. 이 거대한 소통과 기억의 망조직은 장소, 정보, 시간과 정체성의 공식적이고 일상적인 기술일 것이다.3인터넷기술은 공공연하게 일상을 통해 거대하고 전지구적인 무의식을 스스로 습득하고 있으니 말이다. 늑대가 먹이감을 찾기 위한 흔적들을 수집하기 위한 것처 오용석은 숲을 거닐 듯 인터넷을 산책한다. 그는 그 속에서 범죄현장의 이미지, 증거품, 시각적인 증언과 폭동의 사진을 발견한다. 그것은 마치 운명의 기층처럼 형상을 그려내는 신체와 장소들이다. 그것들은 사라지지 않는다. 페테 슬로터다이크에 의하면, «  범죄현장은 지식에 의한 공범자와 같고 행위 속에 공범자를 내포하고 있는 기괴한 총합적 영역이다. »4오용석은 그 현장에 정시에 도착한다. 그의 작업은 알리바이를 제시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는 현장도 신체도 내버려두지 않는다. 현장으로의 회귀와 회화적 몸짓은 마치 나는 여기 있어, 실제로 말이야, 바로 살인에 의해 세척된 그 얼굴들 안에서, 버려진 현장 안에서 라는  고백을 들을 수 있기 때문이다.

 

« L'humanité est peuplée de plus de morts que de vivants. »

Auguste Comte, Coursdephilosophiepositive,1839

« 인류는 점점 더 산 자들보다 사자들로 채워져간다. »

오귀스트 꽁트, 긍적적 철학 수업, 1839

 

마치( 남성적인 여성처럼 보이는) 몸짓의 이미지는 개인적으로 우리들을 따라다니고 집단적으로 우리를 포획한다. 돈 디릴로의 삶의 명상처럼, «  존재는 예리한 의식의 절대적인 원천으로부터, 집착의 틀을 너머, 공포의 단계와 깊이를 통해 자족하려는 경향이 있다. ». 오용석의 전작 « 블로우-업 » 시리즈는 회화를 통해 일종의 살풀이를 수행한다. 인간세상 속에 드리워진 암흑으로부터 작가는 자신이 창조한 인물들의 신화로부터 차용한 서술적인 퍼즐을 통해 대답한다. 관객은 작가의 « 정신적인 작은 영화 »를 완성시키기 위해 초대되었다. 그의 신체는 마치 (영화의) 검수작업이나 몽타쥬, 스토리보드를 위한 편집작업재료처럼  그의 시선을 작은 영화 속으로 이동시킨다. 이런 과정은 알레고리와 메타포로 연동하는데, « 암흑의 중심 »5으로 인도하는 수많은 길 속에서 만난  니진스키, 엘리자베스 쇼트 그리고 조이 스테파노는 그의 영웅인 말로우 Marlow의 언어로 이렇게 말한다 : « 우리는 오로지 꿈꾸듯 살고 있다. »

 

« Fabriquer de l'histoire est l'équivalent athée d'une prière. » 

Paul Veyne, interview pour le magazine Lire,2005/2006

«  역사를 만드는 것은 무신론자의 기도와 동등하다. »

폴 벤느, Lire 월간지와의 인터뷰, 2005/2006

 

그의 최근작은 흰색의 가치만이 유일한 것이 아니라는 점을 증명해준다. 왜냐하면 « 검정 » 역시 모든 색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그의 회화를 처음 대면하게 되면 무엇보다 죽음에 대한 공포와 포르노그래피 그리고 이미지에 대한 매혹과 같은 반복적인 테마와 마주하게 되면서 조금은 당황하게 될지도 모른다 (이 역시 인터넷의 성격이다). 오용석은 그 지점에서 이런 이미지를 바라보는 방법과 어떻게 «  이미지들이 우리를 바라보는가 »를 질문한다. 프랑켄슈타인의 지시로 완성된 예술가처럼, 그는 이미 존재하는 사진들과 관련된 이야기를 해부한다. 이런 행위는 남겨진 이미지와 이미지를 남기는 무엇인가에 의해 구축되는 예술이다.  그것은 소비될 수 없거나 소화될 수 없는 것과 같다. 실제의 이야기는 회화라는 우회로, 그 손길에 의해 스스로 변화할 수 있는 황홀한 권리와 자신만의 다른 시간성을 지닌 길을 차용한다. 격정이 사라진 후 캔버스 표면 위엔 유화의 기름만이 남아있다. 이미 예견된 « 회화의 죽음 »6이 실제 벌어지지는 않았지만, 이 죽음은 언제나 작가의 작품 안에서 탐욕스러운 현재형의 신화를 그려내고 있다.

 

« C'est tranquille comme un corps, comme un organe qui bouge à peine, qui respire rêveusement jusqu'au moment des périls, mais c'est plein de secrets, de ripostes latentes, d'une fureur et d'une rapidité biologiques, comme une anémone de mer au fond d'un pli de granit... »

Paul Nizan, Laconspiration,1938

«  마치 신체처럼, 마치 위급한 상황까지 꿈꾸듯 숨쉬는 고작 움찔하는 장기처럼 고요하지만 그것은 마치 화강암의 굴곡 깊숙한 곳에 숨어있는 말미잘처럼 비밀과 잠재된 반격, 분노와 생물학적 속도로 가득차 있다… »

폴 니잔, 음모, 1938

 

회화적 원천은 질료적으로 숭배해야하거나 정치적으로 올바른 것도 아니며 성스럽거나 그렇다고 귀족적인 것도 아니다. 바로 이 그림자 부분7은 걱정스럽고 식어버린 불안한 역사로부터 유래되었다. 그럼에도 오용석의 작업은 회화가 지닌 정제과정을 거친 매혹과 유혹의 힘을 지니고 있다. 마치 극단적인 경험처럼, 마치 악몽이나 망상처럼, 마치 사람들이 되돌아와야만 하는 꿈처럼, 고독과 고립 속에 위치한 각 작업은 복합적인 드러냄과 감춤, 외적 연상과 내적 연상, 구상과 추상, 내부의 공간-사물과 외부의 공간-사물 그리고 진실게임을 형상화한다. 작가가 선사한 세계는 지옥의 풍경이 아니다. 그의 작업은 군중 속의 한 개인의 예견된 죽음에 대해 니체적인 개인권력의지를 지시하는 듯한 죽음이미지를 통해 저항 속에서 어떤 중요한 진리를 발견할 수 있음을 의미하고 있다. 오직 예술작품만이 동시대적임을 제시할 수 있는 시간의 질서 속에서 추출된 어떤 한 순간을 통해 죽은 자와 죽음 사이의 상징적 균형을 이끌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그의 회화는 바로 이런 사유를 구체화한다. 괴물은 비인간이 아니다. 화가는 그만의 방법으로 열정적이고 야만적이기까지한 폭력성을 지닌 채 반대의 관계를 공유한다. 어두운 터널 끝은 우리의 인류와 같은 그들의 감정의 빛이 떠오르기 때문이다. “ 나는 망각을 기억하는 것을 잊어버렸다”는 “나는 기억을 기억하는 것을 기억한다”로 바꿀 수 있을 것이다..

 

 « 2. Les saints parlent aux oiseaux mais seuls les fous obtiennent des réponses. » 

Don DeLillo, Americana,1971

« 2. 성인은 새에게 말하지만 오직 광인들만이 대답을 들을 수 있다 »

돈 드릴로, 아메리카나, 1971

 

 하지만 혼동하지 말자. 왜냐하면 오용석에게 죽음에 대한 욕망이나 사랑따위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오용석에게 표출되는 « 황무지 »8(wild는 광기로 해석될 수 있다) 는 이마쥬리(수집된 이미지들의 모음)의 반추를 위한 초석이다. 이런 광기어린 동요는 재현의 의미 안에서만 펼쳐진다. 재현할 수 없는 것을 재현한다는 것은 질료 이전으로서의 회화성이 무엇보다 정신적 이미지이기 때문이다. 그의 주제들은 재위치되고 회전하거나 방향을 바꾸고 흔들리고 위장되거나 까발려진다. 형상은 생경한 표현주의적인 타박상이나 신체의 뒤틀림의 세밀함에 복종한다. 신체의 외곽선은 흐릿해지고 색은 검거나 하얀 구멍, 공간들, 가면과 신체의 용솟음처럼 느껴진다. 전체적으론 초현실주의적 경험과 유사해 보이지만, 회화의 소재로서 바라본 이미지의 해체는 관람객에겐 그림의 표면 극단까지의 탐험을 요구한다. 우선, 과거도 미래도 없는 밀도감을 통해 회화적 경험을 발견한 후 형태와 함께 울림이 퍼져나오는 총체적 사유가 드러날 수 있도록 흩어진 이야기의 조각들, 증거물과 힌트를 가늠할 수 있는 혼란스러운 읽기를 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이런 현상이 낯선 내적 회화성과 자아의 외적 주관 사이의 유기적인 융해를 이끌어낸다. 괴물성 혹은 세상의 단잠을 깨우는 스탕달 신드롬9처럼 말이다. 어쩌면 추락에 이를 때까지. 2008

 

 

1 titre d'une chanson d'Elvis Presley, 1955

엘비스 프레슬리의 노래제목, 1955

2 citation approximative de Jacques Derrida, SpectresdeMarx,1993

자크 데리다, 마르크스의 환영, 1993

3  En dépit de son origine militaire qui n'est pas le moule à cire perdue que l'on voudrait croire. Chacun y bâtit sa libre part d'éternité tant qu'il paye la caution de son abonnement. 

인터넷이란 군대로부터 출발했기 때문에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 출발점은 지워지지 않는다. 그 대신 우리가 보증금과 월정액을 지불했기 때문에 불멸의 자유를 그 공간 속에 건설할 수 있다.

4 Peter Sloterdijk, l'heureducrime etletempsdel'oeuvred'art,2001

피터 슬로터다이크, 예술작품의 시간성과 범죄의 시간, 2001

5 titre d'une nouvelle de Joseph Conrad, 1899

조셉 곤레드의 새로운 제목

6 en Occident dans les années 1960-70

서구의 1960-70년대

7 James Ellroy, Mapartd'ombre,1999

제임스 엘로이, 그림자 속 내 몫, 1999

8 état de nature et de sauvagerie paradoxal jeté vers l'avenir et presque révolu ingrédient traditionnel du « romance » roman romanesque américain

미래로 향하는 역설적인 야만성과 인간본질 및 이미 폐기된 미국의 낭만적인 « 로맨스 »소설의 전통적인 소재

9  le syndrome de Stendhal est une maladie psychosomatique qui provoque des accélérations du rythme cardiaque, des vertiges, des suffocations voire des hallucinations chez certains individus exposés à une surcharge d'œuvres d'art. Cette perturbation est assez rare et touche principalement des personnes trop sensibles. Ce syndrome fait partie de ce qu'on peut appeler les troubles du voyage ou syndromes du voyageur. Wikipédia.

스탕달 신드롬은 심장박동의 가속을 야기하는 정신신체의학적 질명이다. 일부 사람들에게는 예술작품의 벅찬 감동 때문에 현기증, 호흡곤란및 환각증상까지 야기시킬 수 있다. 이런 혼돈은 드문 현상이며 특별히 예민한 사람들에게만 일어난다. 스탕달 신드롬은 여행자가 겪는 신드롬 또는 여행이 주는 혼란함을 일컬을 수 있다. 위키페디아 백과사전.

 

<[Tu] 2011> 수록



RELATED TEXT : 망각 OBLIVION 2010



 




I forget to remember to forget1 (le sommeil éveillé du monstre)


Luc  Jeand'heur 

  

« Il faut arracher à chaque fois aux dispositifs la possibilité d'usage qu'ils ont capturée. La profanation de l'improfanable est la tâche politique de la génération qui vient. » 

Giorgio Agamben, Profanations,2005

 

Que ce soit en Occident aussi bien qu'en Corée, le XXe siècle a laissé derrière lui un sentiment de désastre avéré teinté de mélancolie. Chacun possède sa façon de refouler cette histoire de mort et de folie et il n'est pas étonnant de rencontrer de jeunes artistes qui, conscients du basculement du nouveau millénaire, ne sont pas dupes pour autant d'une continuité dans le présent. Yong-Seok Oh appartient à cette génération mondiale qui croit en une mémoire vive de la perte et de l'errance. Elle refuse de combler les vides ou de les « évider encore plus »2  et donne à l'art le pouvoir de « croire au monde » sans présentisme ni chronophobie. Affronter cet héritage implique aujourd'hui la pensée : vivre sans est vivre avec. Quand bien même les tableaux de Yong-Seok sont entachés du mythe de la barbarie, les manques, les absences, les incompréhensions, les vides y sont une volonté activée. Des zone d'abstraction intenses qui figurent les espaces conquis. Ils sont tous intégralement remplis de peinture.

 

« User's guide : 1. Follow the leaders. 2. Kill the past. 3. Load the weapons. 4 Destroy the machines. 5. Kill the leaders. »

Mathieu Kleyebe Abonnenc, RIOT,2000

 

Internet offre aux artistes qui lui sont contemporains de nouvelles possibilités de gratter les négatifs pour multiplier le nombre de fantômes dans le présent. Ce vaste réseau de communications et de mémoires est aujourd'hui une technologie ordinaire agrégative des lieux, des informations, des temps et des identités3.Elles'appréhendeégalementauquotidiencommeunvasteinconscientglobalàcielouvert. Yong-Seok se promène sur Internet comme dans un bois, pendant que le loup... pour y collecter son matériel initial. Il y puise des images de scènes de crime, des pièces à conviction, des témoignages visuels et des clichés d'émeute. Ce sont les lieux et les corps de l'après qui figurent comme des substrats de destins. Ce qui n'a pas disparu. Selon Peter Sloterdijk, « le lieu du crime est le périmètre de ce monstrueux global qui inclut ses complices par l'action et ses complices par le savoir. »4Yong-Seokestunartisteàl'heure.Sontravailneproposepasd'alibis.Ilnelaissenilescorpsnileslieuxàl'abandon.L'aveudugestepictural,dudétournementduréelest:jesuislà,pourdevrai,danslesvisageslavésdumeurtre,dansleslieuxdésertés.  

 

« L'humanité est peuplée de plus de morts que de vivants. »

Auguste Comte, Coursdephilosophiepositive,1839

 

Il y a des images comme des gestes (au féminin comme au masculin) qui nous obsèdent individuellement et nous possèdent collectivement. Comme des méditations sur la vie. Don DeLillo parle de « l’existence tend à se nourrir des profondeurs, du niveau de la peur, du plan de l’obsession, de l’absolue source de conscience aiguë ». La précédente série de toiles de Yong-Seok , Blowup,fonctionnaitcommeunesorted'exorcismepictural.Alanoirceurdumondedeshommes,ilrépondaitparunpuzzlenarratifempruntés à la légende de ses personnages. Le spectateur était invité à mettre en oeuvre son « petit cinéma mental ». Son corps y déplace son regard comme instrument de dérushage, de storyboard, de montage, de visionnage. Allégories et métaphores. Autant de routes pour nous conduire Aucoeurdesténèbres5 où Vaslav Nijinski, Elizabeth Short et Joey Stephano parlent avec les mots de Marlow, son héros : « Nous vivons comme nous rêvons, seuls ».

 

« Fabriquer de l'histoire est l'équivalent athée d'une prière. » 

Paul Veyne, interview pour le magazine Lire,2005/2006

 

Ses travaux récents nous font encore la preuve que ce n'est pas la seule vertu du blanc : le « noir » contient lui aussi toutes les couleurs. L’abord de ses toiles peut sembler déroutant dans le face à face répété avec des thèmes récurrents tels que l'angoisse de la mort, la pornographie et la fascination pour l'image (également caractéristiques d'Internet). Yong-Seok y interroge la façon dont nous regardons ces images et comment « elles nous regardent ». Un artiste de l'ordre de Frankenstein. Il dissèque les photographies déjà existantes et les récits associés. L'art de construire avec les images qui restent et ce qui reste des images. Ce qui ne peut être consommé, ce qui ne peut être digéré. Une histoire vraie emprunte les détours de la peinture, son temps Autre et sa formidable faculté de transformer en elle-même tout ce qu'elle touche. Après l'incendie ne demeure sur la toile que de l'huile. La « mort de la peinture » annoncée6  n'a pas lieu, elle incarne toujours dans les oeuvres de Yong-Seok  une mythologie du présent dévorante. 

 

« C'est tranquille comme un corps, comme un organe qui bouge à peine, qui respire rêveusement jusqu'au moment des périls, mais c'est plein de secrets, de ripostes latentes, d'une fureur et d'une rapidité biologiques, comme une anémone de mer au fond d'un pli de granit... »

Paul Nizan, Laconspiration,1938

 

Les sources picturales ne sont donc ni nobles ni sacrées ni révérence au médium ni politiquement correctes. Cette partd'ombre7 provient d'une histoire intranquille, refroidie, inquiétante. Les tableaux de Yong-Seok possèdent pourtant un pouvoir de séduction, de fascination qui est celui du filtre de la peinture. 

Chaque tableau figure un jeu confessionnel et complexe d'apparition et d'effacement, évocation et invocation, figuration et abstraction, espace-chose du dedans et espace-chose du dehors. Comme une expérience des limites, comme une hallucination, un cauchemar, comme un rêve, sur lequel on revient, dans la solitude et l’isolement. Les visions offertes par Yong-Seok ne sont pas des scènes d'enfer. Elles signifient qu’il y a sans doute là quelque vérité essentielle à découvrir dans la résistance à ces images de mort qui affichent la volonté de pouvoir nietzschéenne de la mort annoncée de l'individu par les masses. Seule l'oeuvre d'art permet d'atteindre cet équilibre symbolique entre la mort et le mort dans un instant arraché à l'ordre du temps qui le rend terriblement contemporain. Sa peinture se précise dans cette pensée. Le monstre n'est pas inhumain. Le peintre partage à sa manière une lointaine affinité avec sa violence sauvage et passionnée. Au bout du tunnel sombre se révèle la lumière du sentiment de leur humanité pareille à la nôtre. « I forget to remember to forget » devient ainsi « I remember to remember to remember ».

 

« 2. Les saints parlent aux oiseaux mais seuls les fous obtiennent des réponses. » 

Don DeLillo, Americana,1971

 

Il ne faut surtout pas se méprendre. Il n'y a ni amour ni désir de la mort. Chez Yong-Seok , cette « wilderness »8 qui s'exprime (qui est aussi « wild », folie) est  fondamentale dans la réflexion de l'imaginaire de son travail d'artiste. Le basculement n'a lieu que dans le sens de la représentation. Représenter l'irreprésentable. Avant d’être un médium, la peinture est donc une image mentale. Les sujets sont recadrés, combinés, déplacés, floutés, camouflés, dévoilés... La figuration soumet les détails aux contorsions et contusions d'un expressionnisme singulier. Les contours des masses sont estompés. La couleur comme un jaillissement de corps et de masques, d'espaces et de trous noirs ou  blancs. L'ensemble apparaît parfois proche d'une expérience surréaliste. La dissolution de l'image dans la matière-même de la peinture exige du spectateur d'aller lui aussi dans un au-delà, celui de la surface du tableau. En premier lieu, l'intensité sans passé et sans avenir de l'expérience picturale puis une trouble lecture mesurant  les indices, les pièces à convictions et les éléments épars des récits pour qu’apparaisse l'intégralité de la pensée qui est en résonance avec la forme. La fusion organique d'une picturalité intérieure singulière et d'une subjectivité extérieure à soi. Peut-être jusqu'à la chute, le syndrome de Stendhal9 qui nous éveille au sommeil du monstre/du monde. 2008


 

1 titre d'une chanson d'Elvis Presley, 1955

2 citation approximative de Jacques Derrida, SpectresdeMarx,1993

3  En dépit de son origine militaire qui n'est pas le moule à cire perdue que l'on voudrait croire. Chacun y bâtit sa libre part d'éternité tant qu'il paye la caution de son abonnement. 

4 Peter Sloterdijk, l'heureducrime etletempsdel'oeuvred'art,2001

5 titre d'une nouvelle de Joseph Conrad, 1899

6 en Occident dans les années 1960-70

7 James Ellroy, Mapartd'ombre,1999

8 état de nature et de sauvagerie paradoxal jeté vers l'avenir et presque révolu ingrédient traditionnel du « romance » roman romanesque américain

9  le syndrome de Stendhal est une maladie psychosomatique qui provoque des accélérations du rythme cardiaque, des vertiges, des suffocations voire des hallucinations chez certains individus exposés à une surcharge d'œuvres d'art. Cette perturbation est assez rare et touche principalement des personnes trop sensibles. Ce syndrome fait partie de ce qu'on peut appeler les troubles du voyage ou syndromes du voyageur. Wikipédia.


 


서동진(문화평론가)


어느 미술평론가는 게이미술(혹은 그의 표현을 빌자면 호모아트(homoart))을 크게 두 갈래로 나눌 수 있다고 말한다. 요컨대 그것은 프리아포스(Priapus)의 계보와 아도니스(Adonis)의 계보이다. 이 두 명의 원(原)신화적인 인물이 게이미술의 역사를 종합한다고 말하는 것은, 물론 과장이다. 그것은 몇 가지 단서가 붙은 한에서 인정될 수 있을 것이다. 근대사회에 접어들며 동성 간의 친밀성과 성애적인 관계를 별개의 종(성의 인구학)으로 묶게 되었을 때, 그리고 바로 그런 분류에 따라 자신을 인식하고 체험하고자 발버둥쳤던 이들이 등장한 연후에, 우리는 자신의 환상을 대표할 무엇을 찾게 되었다고 말해야 옳을 것이다. 


그러므로 남성적인 욕정과 강건함의 화신인 프리아포스와 양성적인 혹은 남성의 여성적 아름다음의 권화인 아도니스가 각기 동성애적인 환상이 끊임없이 회귀하는 근원적 형상이라고 말하기 위해서는, 오직 우리의 세기, 근대적인 시대가 도래 했어야 한다고 말할 수 있다. 물론 그것이 굳이 프리아포스이거나 아도니스이어야 할 필요는 없다. 우리는 그들을 대신할 수 있는 숱한 신화적인 형상을 추가할 수 있다. 또한 적어도 20세기 후반 이후 즉 근대적인 동성애자사회가 출현한 이후, 우리는 더 이상 그런 신화적 형상에 호소할 필요가 없다. 미국의 쇼핑몰이나 번화한 쇼핑가 어디에서 마주칠 수 있는 애버크롬비 앤 핏치(A & F)라는 의류 브랜드의 쇼핑백에서 우리는 브루스 웨버(Bruce Weber)의 사진들을 손쉽게 만날 수 있다. 그리고 그가 찍은 사진들은 아마 우리 시대의 호모에로틱한 도상의 표준일 것이다. 그것은 눈부시게 아름다운 캘리포니아 청년들이고, 그를 주시하는 동성애적 욕망으로 충만한 카메라의 눈길이다. 


그러나 그 사진을 관능적인 매혹으로 받아들이기 위해 우리는 1960년대의 전설적인 우편 사진 잡지들, 흔히 피지크 픽토리얼(Physique Pictorial)이라는 잡지들이 만들어놓은 이미지들을 전제해야 한다. 그 잡지들은 남성 누드 사진을 제공하였고 그 사진들은 은밀하게 고전적인 고대의 신화들을 상연하는 척 하였다. 즉 그 사진 속에 등장하는 남자들은 프리아포스이거나 아도니스를 재연하였다. 그런 작위는 동성애적 관능을 은폐하기 위한 가장의 몸짓이었을 수도 있고, 아니면 그 사진을 소비하는 이들이 공유하던 동성애적 환상의 무대를 제공하기 위하여 정교하게 연출된 미장센이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제 부르스 웨버의 사진에서 우리는 고대 신화를 참조하는 도상들의 흔적을 발견하기가 불가능하다. 


그렇지만 그것을 조금만 주의 깊게 추적하면 우리는 그 안에서 동성애적 욕망을 시각적으로 재현하는 역사적 실천들이 매개되어 있음을 찾아볼 수 있다. 웨버의 사진은 더 이상 고대의 제전과 신화에 등장하는 레슬러와 미소년의 모습이 아니라 눈부신 캘리포니아의 태양 아래에서 윈드서핑을 즐기는 서퍼의 모습을 제시할 따름이다. 그러나 웨버의 사진이 있을 수 있기 위해서는 전 시대의 남성 누드 사진의 동성애적 미장센이 불가피하다. 그런 점에서 웨버의 사진이 웃통을 벗은 관능적인 젊은 남자를 응시하는 시선을 제공하기에 동성애적인 것이 아니다. 그의 사진적 도상이 동성애적 욕망을 투사하는 장막이 될 수 있는 것은 전 시대의 남성 누드 사진의 동성애적 미장센을 모방하기 때문이다. 


오용석의 페인팅 역시 바로 그런 환상의 궤적 안에 놓이지 않을까. 자신의 동성애적인 욕망은 나라는 주어에게 속한 것으로 머물 때, 즉 비규정적인 환상이 될 때 그것은 광기가 되고 만다. 따라서 동성애적 욕망을 품고 살아가는 이는 자신의 욕망을 자신이 소속된 어떤 정체성의 연장이자 표현으로 고정시키지 않고서 살아가지 않을 수 없다. 그렇지 않다면 그는 우연적으로 동성인 어떤 누구를 사랑하는 것이지 동성이 가진 일반적인 특성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동성애적 욕망을 자신의 무한한 광기 속으로 빠트리지 않고 공통된 욕망의 표현으로 길들이는 것은 모든 게이 예술의 일차적인 사명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즉 미치지 않기 위하여, 나의 이 욕망이 나의 바깥의 세계에도 존재하며 그 세계 안에서 순환하는 것임을 선언하기 위하여 게이들은 언제나 자신의 욕망을 모방된 욕망, 이미 존재하는 어떤 대상을 향한 욕망으로 만들어낸다. 


그래서 게이 미술은 언제나 모방의 욕망에 속한다는 점에서 도상적인 예술이 되어버릴 수 있다. 물론 그것을 나쁘다고 말할 수는 없다. 당신은 데이빗 호크니의 그림에서 무엇을 보는가. 우리가 그의 70년대의 대표적인 작품들, 이를테면 그의 대표적인 작품들, <비벌리 힐스의 샤워하는 사내>나 <어느 예술가의 초상>같은 작품을 볼 때, 사적인 전기를 식별하고 멜랑콜리한 동일시를 투입할 수 있다. 비록 그 그림을 보는 이가 그 그림들이 호크니의 연인이었던 피터이거나 그레고리 아니면 이언이며, 그가 사랑했던 금발의 아름다운 청년들과 맺은 사적인 관계와 감정을 서사적으로 제시하는 것임을 알고 있거나 모르거나, 그의 그림은 그를 보는 이(물론 게이)의 시선을 통해 게이화되고, 또한 도상화된다. 그렇지만 알다시피 도상적 재현의 규범으로부터 이탈하고 그것을 끊임없이 변형하려는 열정적인 현대 회화의 장인이자 연금술사야말로 호크니를 따라다니던 꼬리표 아니던가. 


그렇다면 게이적인 욕망을 도상화하는 예술가로서의 호크니와 반도상적인 나아가 반재현적인 현대 미술가로서의 호크니라는, 우리는 양립 불가능한 두 명의 호크니를 만난다. 나는 오용석의 작업에서 그런 이중화된 게이 미술가의 정체성을 찾아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가 “블로우 업”이라고 이름붙인 연작 작업이나, “파우누스” 연작, 나아가 “실마리를 찾아서” 작업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그런 게이 작가 혹은 게이적인 도상(양식화된 서구의 게이 포르노그라피, 조이 스테파노, 그리고 심지어 게이적인 욕망을 의인화하기 위한 신화적인 형상으로서 인용된 파우누스(!)에 이르기까지)을 수집하고 모방하는 관람자로서의 작가의 모습을 찾아볼 수 있다. 그렇지만 그런 도상적인 재현을 위한 충동을 조직하는 욕망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예컨대 다시 호크니로 돌아가자면 왜 그는 욕실에서 샤워를 하는 그의 연인 피터를 그와 같이 그려야 했던가. 수도꼭지에서 떨어지는 저 유명한 물줄기, 샤워를 하는 피터의 등을 굽힌 모습, 그것의 배경이 되는 타일벽면의 비원근법적인 평면화된 배치를 구성하는 그의 회화적 스타일은 과연 무엇에 의해 규정되는 것일까. 그리고 알다시피 우리는 그것에 주목함으로써만 호크니의 그림에서 얻을 수 있는 고유한 쾌락을 확보할 수 있다. 그렇지 않다면, 왜 우리가 굳이 호크니의 그림에서 눈길을 떼지 못할 것인가. 


나는 오용석의 작업에서 그런 흥미로운 역설적인 긴장을 찾아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그가 선호하는 색채들이 궁금하다. 그가 집요하리만치 모든 그림 속에 집어놓고 있는 흰색과 검은색의 밀도가 아름답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것이 재현하는 대상들을 다른 감각적 체험의 대상으로 운반하는 요구 앞에 멈추어 서게 된다. 그리고 그런 것들은 그의 그림에서 얻는 도상적인 쾌락보다 멀리 나를 나아가게 한다. 예를 들어 그가 그리는 클로즈업된 애널 섹스의 장면은 포르노그라피적인 것이면서 또한 게이 미술가들이 허다하게 반복적으로 인용하여온 지표적인 이미지이다. 그러나 그것이 그에게 검붉은 혹은 혼탁한 잿빛의 실루엣으로 등장할 때 나는 흥미롭다. 그 장면을 평범한 관능적인 쾌감에서 분리시키는 것은 바로 이러한 감각적인 자질, 혹은 이미지에 추상적인 잉여를 부여하는 힘이라고 생각한다. 그 때문에 게이적 도상을 제시하는 작품과 그로부터 벗어나 있는 대상들을 제시하는 작품들 사이를 관련지우는 방식을 궁금해 하게 된다. 나는 그의 소라 그림과 꽃 그림들이 아름답고 또 그것에서 점진적으로 매혹을 느껴간다. 그리고 나는 그것이 그의 주관성, 그가 시도하는 주관화의 몸짓에 다가서는 것이라고 믿는다.


그런데 덧붙일 점은 여기서 내가 말하는 주관성이나 주관화란 자유주의적 세계관에서 찾아볼 수 있는 사적인 인물의, 혹은 심리적 개인과는 전연 거리가 먼 것이다. 주관화한다는 것(subjectiviation)은 자아라는 환영적인 실체를 만들어내고 그것에 일관성을 부여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기존의 감각의 질서와 다툼을 벌이며 새로운 감각적인 세계가 실존함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를테면 우리가 열정적으로 사랑했던 호크니나 베이컨의 작업들은 온전히 바로 그 주관화의 영역에 놓여있다. 그들은 게이로서의 자신의 욕망을 제시하였지만 우리가 그들의 그림에서 보는 것은 그들이 창출한 새로운 미적 주관성에 있다. 우리가 오용석의 작업에 관심을 기울인다면 그 역시 바로 그것에 있을 것이다. 


따라서 그로부터 우리가 새로운 감각적 세계로 입장할 수 있기를 기대할 때 우리는 그가 제시한 혹은 훗날 우리에게 제공할 작품들이 주는 쾌락과 온전히 해후할 수 있을 것이다. 그의 작품을 게이적인 도상의 또 다른 사례로, 그리고 그 도상을 통해 자신의 사적인 이야기를 건네는 행위로 환원할 때, 우리는 금방 피곤해질 것이다. 이미 우리는 “미니홈피”를 통해, “나(Me)”-세대의 질식할 듯한 나의 이야기를 통해, 그리고 이를 반복하는 현대 미술의 또 다른 지루한 몸짓을 통해, 이미 지쳐있기 때문이다. 희귀한 것은 결국 또 한 번의 재현이 아니라 그 이야기를 전연 다르게 체험하도록 하는 감각적 충격일 것이다. 그것이 굳이 그가 여전히 회화를 통해 자신의 게이적 욕망을 다루어야 했던 이유이자, 이번 전시를 마련한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2007


'BLOW UP' 갤러리 정미소


<[Tu] 2011> 수록






이병희(미술평론가)


예전에 제 2회 광주비엔날레에서, 생성파트의 커미셔너였던 베르나르 마르카데의 글에는 아주 긴 제목이 있었다. 그것은 <분할, 가면, 비굴함, 무의미, 변장, 이민, 브리콜라주, 배설물, 분자적인 것, 증식에 대한 고찰, 그리고 예술에서 여성, 아이, 동물, 사물 되기와 반성>이란 것이었다. 여기서 브리콜라주라는 것은 레비스트로스가 여러 가지 특성이 잘 결부되어있는 하나의 전체라고 정의한 그것이다. 

최근의 이러한 혼성은 온갖 미디어(대중 문화 매체 인 영화, 생활 매체인 인터넷 뿐 만이 아니라 심지어 예술까지도) 속에서 가속되거나, 아니면 적어도 받아들일만한 것으로 재영토화되고 있다. 사실 그러한 ‘재영토화’는 비교적 기분 좋은 일은 아니다. 불쾌한 것, 역겨운 것, 폭력적인 것, 낯선 것, 조화롭지 않은 것, 외설적인 것, 무의식적인 것, 소수적인 것 등이 귀환하기는 하는데, 미디어를 통해서‘받아들일 만한 것’으로 귀결된다는 것은 정말 환영할 만한 일인 것인지는 의문의 여지가 있다. 그것은 정말 우리 사회의 가치 기준을 근본적으로 바꿔놓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아니면 단지 무관심의 확대의 증거일 뿐인가? 


오용석의 작품들은 바로 이러한 지점들 사이에 있다. 미디어로 재현되고 심지어 소비되는 어떤 실존했던 인물들을 채집하여, 페인팅한 오용석의 그림들은 그것의 향유가 어느 지점에서 부유하고 있는 것인지를 곰곰이 생각케한다. 

오용석 그림의 소재중 하나인, 포르노 배우였던 조이 스테파노Joey Stefano(1968-1994)는 여태껏 포르노 비디오 속에서 반복적으로 소비되어온 바로 그 자이다. 그러한 미디어 소비는 영화 <링>이 경고했던 바로 그와 같이 복제되고 있는 불쾌한 것이다. 오용석이 페인팅하는 행위가, 조이에 대한 어떤 향유인지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적어도 우리가 바라보는 오용석의 그림 속에 ‘부재하는 조이’의 흔적들은 어쩌면 포르노 비디오 속의 조이의 “실재”라고, 혹은 “실재적인” 조이라고도 불러봄직 할 것이다.

엘에이 어딘가에서 입이 찢어진 채로 발견된, 연쇄살인 사건의 피해자중의 하나인 엘리자베스 쇼츠Elizabeth Shorts(1924-1947)의 신체 부분들(정확히 말하면, 없어진 장기들)을 그린 그림들은 마치 매우 심각한 지경의 페티시를 그린 것처럼 느껴진다. 수많은 연쇄살인자들을 소재로 한 영화 속에서(예를 들면, <양들의 침묵>) 살인자들은 대부분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는 남자인데 그들은 여자들을 매우 정교한 수법과 나름대로의 법칙 속에서 서서히 살해해간다. 그들에게 여자들은 페티시 자체가 된다. 마찬가지로 엘리자베스 쇼츠 또한 비슷한 연쇄살인사건의 피해자였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보는 것은 보는 것은, 사건이 증발된 피해자의 텅 빈 이미지일 뿐이다. 반복적으로 미디어 속에서 재생산되는 이미지를 보면서, 우리는 미결인 사건 자체보다는 이제는 그 살해된 사람의 이미지, 입이 찢어지고 장기가 없어진 그 시체의 이미지를 지속적으로 소비하고 있는 것이다. 오용석의 그림은 오늘날 우리가 자신도 모르게 하고 있는, 그 무의식적 향유의 방식을 고스란히 제시함으로써 우리가 스스로에 대해 수치심을 느끼게 하고 있다.

오용석의 그림에서 목신Faunus을 소재로 한 그림들은 게이 코드들을 가시화시키거나, 아니면 게이 코드 자체를 의문시 하는 작업들이라고 볼 수 있다. 목신(木神)은 주로 남성 욕망에 대한 은유 혹은 상징으로 많이 쓰인다.(심지어는 발기가 지속되는 병적 상태(목신(木腎))를 일컫기도 한다). 물론 오용석이 사용하는 파우너스의 소재는 욕망에 관한 것이다. 게이 코드 중에서 흔히 말하는 레인보우(색깔)에 따른 일련의 상징 혹은 은유들을 그린 그림 속에서 오용석은 익숙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 사이의 어떤 경계들을 가시화시킨다. 그 속에서 사회의 익숙한 코드들, 관습들 같은 차원이 무대화되는데, 그것을 통해서 우리는 시각적, 지적, 관습적 대상에 대한 우리 자신의 폭력적 시선들을 감지하게 되고, 욕망조차도 어느 정도는 익숙함과 통제되는 것 사이에서 훈육되는 것은 아닌가에 대해서 생각하게 된다. 

   

사실, 개인적으로 더 관심이 있는 오용석의 그림은, 죽은 자들인 엘리자베스 쇼츠와 조이 스테파노를 소재로 한 일련의 채집과 추적의 과정 속에서 그려진 그림들이다. 엘리자베스 쇼츠를 소재로 한 그림들은 비교적 ‘예쁘다’. 시체 쇼츠의 도난당한 장기들은 맛깔나는 어떤 달콤한 음식물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게다가 그녀의 시체 또한 풍경속의 한 장면처럼 보인다. 조각난 그녀의 몸뚱아리는, 이제 오용석의 페인팅으로 다시 그려지고 있는 것이다. 오용석은 이미지를 제대로 소비하는 새로운 방법을 제시하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어떠한 이미지라도 향유해버리거나 심지어 쾌락의 대상으로 삼는 현대인들의 게걸스러운 습성을 그대로 재현함으로써 어떤 최소한의 자기-반성을 촉구하는 것일까? 

오용석이 조이 스테파노를 그리게 된 계기는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쾌락을 위하여 포르노 비디오를 보지만, 그것을 보는 자기 자신이 낯설게 느껴지는 그 순간, 욕구차원은 멀어지고 실재적인 인물에 대한 궁금증이 생기는 바로 그 순간, 조이 스테파노는 오용석의 소재가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게이 포르노 장면의 성기들은 지극히 물컹한 육질만 느껴진다. 과연 조이는 어떤 인물이었을까. 물론 그가 다녔던 장소들을 그린 그림은 단지 풍경화처럼 보인다. 그렇지만, 조이의 흔적들은 그 곳들 어딘가에 남아있을 것이다. 일련의 생각 속에서 그림들을 보고 있노라면, 이상하고 껄끄러운 느낌이 엄습해온다. 지극히 관객의 시선과 그것의 소비를 의식하게 하는 그림들이다. 우리는 조이가 약물과다로 죽고 난 지금에도, 다양한 매체를 통해서, 그를 소비하고 있다. 이런 소비는 도대체 무엇일까. 그 불편함과 어떤 폭력적인 느낌들 속에서 만나게 되는 오용석의 그림들은 어느 지점에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인가. 어떤 부활, 혹은 구원 즉 그 사건과의 조우 그 자체를 구원하려고 했던 것일까? 


일상에서 맞이하는 어떤 낯선 틈새들은 불쾌함을 내포한다. 그리고 이는 우리의 외설적 향유에 대한 반성의 순간이 될 수도 있다. 그리고 그러한 순간은 별안간 주체로 하여금 실재적인 것을 향하도록 하기도 한다. 그러한 제스처가 만일 정신분석적 의미에서의 ‘행위’라는 계기라면, 그것은 윤리적인 것으로서의 행위이다. 물론 오용석의 페인팅이 어떤 차원에 있는 행위인지는 다소 애매하다. 그렇지만 적어도 오용석의 페인팅이라는 행위는, 그것의 특징, 이를테면(오용석이 자주 쓰는 접속사이다) 수작업적이라든가, 상상적 개입이 가능하다던가, 색채의 표현적 상징성을 마음대로 이용할 수 있다던가, 완성과 미완성 사이에서 즐길 수 있다던가 등등의 특징들을 지극히 향유하면서, 하나의 물질로 완결시켜버리고 마는 그런 행위이다. 그것은 사진이나 비디오처럼 현실의 이미지와 구성 사이에서 노출되는 간극을 향유하는 것과 전혀 다르다. 자율성과 퍼포먼스성, 그리고 장식성과 구상-추상성 사이에서 오용석은 마음대로 페인팅을 주무르고 싶어한다. 

이번 오용석의 작업들은 어쩌면 미디어 속에서 소비되는 이미지, 그것도 잔혹하고 불쾌하고 역겨운 비체들(abject), 베르나르 마르카데가 이야기했던 바로 그러한 것들을 소비하는 행위자체에 대한 어떤 간섭들을 내포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것을 만일 페인팅이라는 행위로 구원하기라고까지 칭한다면, 오늘날의 예술이 해야하는 어떤 역할에 대해서 오용석은 감지하고 있는 것인가. 아니면, 또 다시 페인팅이라는 다른 방식으로 수집, 반복 소비하고 있는, 즉 현대인의 페티쉬적 수집과 소비를 계속하고 있을 뿐인가? 이 물음에 어떤 대답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면 그 대답을 구체화하는 일은 바로 비평과 관객의 몫으로 남아 있을 것이다. 2007


'BLOW UP' 갤러리 정미소


<[Tu] 2011>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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