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 페인팅은 잘 만들어진 이미지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사고를 응축하는 프로세스의 절정이며, 결정적인 순간들의 환희, 클라이막스 같은 것이다. 나는 여전히 마를렌 뒤마가 ‘페인팅은 전위가 아니라, 후위다’라고 이야기한 그녀의 자신감을 신뢰한다. 전위가 아니라 후위이기 때문에 좀 더 사색적이고 그만큼 복잡하고 깊이를 가질 수 있다고 믿는다. 내가 생각하는 페인팅은 미학적으로 완성된 스타일의 반복이 아니다. 끊임없이 사고를 재정립하는 조합과 해체의 과정이며 그것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것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미지를 재구축 재편집하는 것은 언제부터인가 일종의 유행처럼 치부된다. 하지만, 이미지를 재구축하는 것은 사고를 재구축하는 것이다. 이미지의 영역은 결과의 영역이 아니라, 작업 안에서 과정의 영역이다. 과정의 영역이라는 의미는 이미지 안에서 새로 구성되는 레이어들은 지워지거나 수정되는 대신 그 시간의 겹처럼 겹겹이 쌓이게 된다는 것이다. 물론 이런 좌충우돌을 산만함으로 이해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산만함이야말로 내가 생각하는 작업의 본질, 그리고 내가 세상을 흡수하고 재표현하는 방식이라고 생각한다.

 

과정성을 보여준다는 것은 과정성이 있다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과정성의 유의미함을 증명하는 것이다. 나에게 이 프로세스는 언어와 이미지를 넘나들며, 그 사이의 이합집산과 편집, 수집과 버림의 반복적인 과정이다. 그리고 그 끝에 페인팅이라는 이미지가 존재한다. 사람에 대해, 사랑에 대해, 관계에 대해, 욕망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싶어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작업의 결과물들은 온통 복잡하고 난해할 수밖에 없다. 나는 자주 신화적 형상, 실존 인물, 도상적 재현 등 사회에서 익숙하게 통용되는 코드들을 채집하여 만들어 내는 이미지 속에 기입해 놓는다. 강한 상징적 코드를 다시 뒤집어 구축한 환상은 오히려 익숙한 코드의 생경함을 산출해낸다. 사실, 이 생경함은 오히려 솔직한 것이다. 내가 바라보는 세상은 단순한 사물조차 전혀 단순하지 않다. 내가 상상하는 전시는 그 복잡함들이 서로 간섭하면서, 그 복잡다단한 과정의 필요성 혹은 그 과정에서 작가를 괴롭히는 어쩔 수 없는 과정의 에너지 그 자체이기를 바란다. 사랑에 대해 어떤 사람은 ‘사랑한다’는 한마디로 표현할 수 있지만, 어떤 사람은 한 권의 책을 써도 표현하기 힘들다. 내 작업은 표현의 불가능성 혹은 어려움을 인지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속적으로 수행함으로써 얻어지는 어떤 것들에 대한 서사시이다.

 

20140903

'STATEMENTS' 카테고리의 다른 글

우리를 위한 셋 Three of Us 2014  (0) 2017.04.03
공백 空白 2006  (0) 2017.04.03
이탈리아식 오페라하우스 초안 2009  (0) 2016.06.04
망각 OBLIVION 2010  (0) 2016.02.05
PORNOGRAPHY 포르노그라피 2007  (0) 2016.02.05
ELIZABETH SHORT 엘리자베스 쇼트 2007  (0) 2016.02.04

자주 현실처럼 느껴지지 않는 공백을 느낀다

정지된 순간에 파고드는 미묘한 감정선

환타지같은 그 순간을 포착하고 싶다

 

내가 말하는 공백은 완전히 무엇이 비어있다는 것보다는, 모든 것은 존재하는데 결계처럼 또 다른 세상이 존재하는 것에 더 가깝다. 엄밀히 말하면 그 공백은 사이나 틈에 가깝다. 들뢰즈의 주름일수도 있다. 그것은 명확하게 나에게 보여지는 것이 아니라, 단지 희미하게 느껴지는 것이다. 그 공백은, 내가 느끼는 순간, 존재하는 것이며, 시간이 정지한 것같은 그 순간에 나는 일종의 묘한 감정, 평온함, 혹은 슬픔, 애조를 느낀다. 나는 새로운 것을 보는 것은 아니다. 단지 무형의 어떤 것에 지배를 받는다. 오시이 마모루의 애니메이션에서 가끔 나오는 슬로우의 순간들. 뭔가를 보고 있으나, 다른 것을 보고 있을 때. 공백은 외부에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내 안에서 생긴다. 아니면 나와 사물 사이에 생기는 것일지도 모른다. 여하튼 그런 상태에 도달하는 순간, 많은 감정과 오만가지 생각이 교차하면서 나는 세상과 격리되어 환각에 빠진다. 나는 그런 개인적인 순간을 포착하고 싶어 하며, 그 순간을 같이 경험할 수 있기를 원한다. 환타지의 순간, 세상과 내가 분리되는 순간.

'STATEMENTS' 카테고리의 다른 글

우리를 위한 셋 Three of Us 2014  (0) 2017.04.03
공백 空白 2006  (0) 2017.04.03
이탈리아식 오페라하우스 초안 2009  (0) 2016.06.04
망각 OBLIVION 2010  (0) 2016.02.05
PORNOGRAPHY 포르노그라피 2007  (0) 2016.02.05
ELIZABETH SHORT 엘리자베스 쇼트 2007  (0) 2016.02.04

«'소돔120일‘은 피에르 파올로 파졸리니의 영화 ’살로, 소돔의 120일‘에 영감을 주었다. 이 영화는 합의하지 않은 희생자들에게 가해지는 공포와 잔혹을 생생하게 그려 내고 있다. 이 영화가 지닌 예술적 가치와는 무관하게, ’살로, 소돔의 120일‘을 본다는 것은 관객에게는 일종의 사디즘적인 공격이 되어, 관객은 영화를 보는 동안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합의한 희생자로 변모한다.»

 

에스텔라 V. 웰든, 사도마조히즘, 2002

 

관객이 사디즘에 공격되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관객이 합의한 희생자로 변모한다고 지적하지만, 사실은 동화를 통해 합의하지 않은 가해자, 공범자, 목격자로 전환된다. 관객이 느낄 수 있는 혐오감이나 죄의식은 희생자 혹은 피해자가 느낄 수 있는 감정이나 정서가 아니다. 희생자가 느꼈을 것은 오히려 공포, 불안, 복수심이다. 그것은 완전히 다른 변모이며, 해석의 여지도 완전히 달라진다. ‘합의된’이라는 수식어가 붙는 것은 그 안에서 피해자와 가해자의 관계가 둘 사이의 상호계약에 기초한다는 가정에서 비롯된 것이다. 반대로 ‘합의하지 않은’은 ‘계약의 범주에 들어있지 않은’, ‘예측되지 않은’이라는 의미이다. 도착이 쌍방이 필요하지 않고 극도로 개인적인 성향을 띠고 있다면 사도마조히즘은 오히려 사회적인 룰을 지닌다. 하지만 관객 자체는 항상 관찰자의 위치에 있으며, 동시에 계약의 내부에 존재하지 않는다. 즉, 피해자에 대한 연민을 느낄 수 있지만, 폭력적인 시선의 주인인 가해자, 공범자, 목격자일 수 밖에 없다. 폭력적인 것에 대한 학습이 희생자의 경험으로 이어질 것이라는 지적은 잘못된 것이다. 오히려 폭력의 경험은 가해자의 가상경험으로 연결되며, 그 보다 더 복잡한 동시경험의 상태에 빠진다. 그것은 순간적인 자아의 상실 혹은 간접적인 타자성의 사적인 경험이다. 혐오의 정서는 타자성의 경험에 대한 거부에 가깝고, 죄의식의 정서는 이러한 유사경험에 대한 동화의 측면이 강하다.

 

그들의 말대로 계약이 성립되어야 혹은 계약에 대한 믿음이 존재해야지 성립될 수 있는 관계라면, 사도마조히즘 안의 쾌락은 이미 예측가능한 것이며, 예측불허의 사고로 발전하지 않는다. 이러한 생각은 사회적 시스템을 바라보는 입장에서도 같은 것이며, 그것은 시스템의 혹은 계약의 완결성에 대한 믿음이 선행하는 것이다. 사도마조히즘의 룰 안에서는 희생자와 가해자의 관점이 아니라, 오히려 성적인 연극의 개념이 도입된다. 그 안에서 진정한 의미의 피해자와 가해자는 도출되지 않는다. 그렇게 만드는 것은 계약인데, 그것은 시스템으로 전이되서 모두 참여자로 변모시킨다. 다른 말로 하면 계약에 합의를 하였기 때문에 참여자로서의 책임을 동반하게 하는 것이다. 이것은 자본주의의 논리 안에서 사람들을 옭아매는 계약과 같은 속성을 지닌다. 그 계약에 참여하는 자는 그 안에서 발생하는 스트레스와 불이익을 감당하는 것으로 간주한다. 이런 상황에서는 무대와 무대에 참여하는 배우와 관객으로 모든 심각한 논의의 쟁점이 변질된다.

 

가해자의 역할과 피해자의 역할은 학습되어야 한다. 쾌락을 위한 학습은 실제의 욕망을 분출하는 무대이며, 실제의 욕망을 컨트롤하는 무대이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쾌락의 무대 안에서는 욕망을 분출시키기 않도록 하는 억제기제가 발동한다. 이 안에서는 죄의식은 없다. 단지 자기파멸의 방어기제가 작동하며, 단지 계약에 의한 학습의 기제가 발동한다. 아이러니 하게도 쾌락의 행위를 하도록 장려하는 한편, 그것을 멈출 수 있는 기제를 제공하는데, 그것은 가해자의 역할을 하는 사람의 개인적인 의지에 맡겨져 있다. 즉 욕망에 극도로 윤리적인 상황 안에서 기존의 도덕율을 따라하는 분열적인 상황을 창출한다.

 

예측되는 쾌락은 향유의 단계로 급격히 전환된다. 즉, 룰을 파기할 수 있는 상태, 반복의 정점에 금방 다다르게 한다는 것이다. 반복이 나선적이라는 가정 하에서 이러한 향유의 반복은 다른 설정과 상황으로 전이를 요구하게 된다.

 

작가가 표현할 수 있는 것이 관능을 쾌락을 즐기는 자기 자신의 자화상에 불과하다면, 그것을 노출함으로써 관객은 그것과 동일시하게 되고 죄의식을 느끼게 하는 구조가 성립하는데, 그것은 사실 어떻게 보면, 도덕률의 부활을 원하는 것인데, 온전히 그 대상이 쾌락의 개념으로 정의되었을때, 선택이 항상 가장 쉬운 쪽으로 흐른다는 것을 가정을 하면, 제시된 이미지는 내가 원하는 억제의 기제나 주저함의 기제로 사용될 수 없다.

 


왼쪽 마지막 집

 

이 영화의 흥미는 초반기에 피해자의 위치에 머물러 있다가 생존을 목적으로 급격하게 가해자로 변모하는 것이다. 본래의 가해자들에 대한 인과응보적인 폭력 혹은 생존을 위한 폭력은 호러 무비 안에서 지속되는 고전적인 반전이지만, 이 영화 안에서는 보다 적극적이고, 치밀하다.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생존본능과 자식에 대한 사랑이다. 더더욱 흥미로운 인물은 데이빗인데, 그는 가해자로서의 아버지에 마지막에 반기를 든다. 그를 추동하는 것은 생물학적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에 반하는 어떤 것이다. 반대로 어떤 심각한 트라우마적 경험을 통해서 스스로 자립하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정신적 트라우마를 자신에게 준 대상을 제거하는데 동참하는 입장이다. 트라우마적 대상을 제거하는 행위는 그리스 신화에서부터 비롯되는 굉장히 신화적인 행위이다.

 

사도마조히즘적 쾌락은 그 집 밖에서 관찰하는 관객으로서 언급하는 것.




포르노그라피 안에서는 사도마조히즘.


쾌락을 느낄 수 있는 기본 전제에는 계약이 있다. 계약은 안전핀과 같은 역할을 한다. 죽음에 대한 공포를 경감시키는 역할. 약속된 상해의 한도를 넘지 않을 수 있다는 전제에서 쾌락의 무대 안으로 타자를 끌어들이게 된다. 계약은 무대가 생성되게 하는 가장 큰 조건이다. 하지만 무대의 단계에 이르러 계약에 대한 신뢰와 의심 사이에서 또다른 공포 불안요소가 등장한다. 그것의 가장 큰 축은 행위자들의 욕구, 욕망이다. 그것 또한 무대를 생성하게 하는 중요한 요인이다. 하지만 계약이 쾌락을 성립시킴과 동시에 쾌락의 한계를 조절하는 반면, 욕망은 그 한계에 대한 갈증으로 쾌락을 증폭시키는 역할을 한다. 계약이 온전히 행위자, 참여자의 의지에 의존하기 때문에, 욕망과 사이에서 갈등을 유발한다. 금기 앞에서 욕망은 불만족을 불러오지만, 동시에 금기 앞에서, 그 경계에 머문다는 것때문에 쾌락은 증폭된다. 행위자의 내적으로는 안전하다는 사실이 쾌락을 불러일으키지만, 본질적인 욕망에 대해서는 행위자의 입장에서 비윤리적인 제어장치로 작동한다. 사디스트와 마조히스트 사이에서는 근본적인 태도의 차이가 존재하게 된다. 마조히스트의 쾌락기제인 계약은 반대로 사디스트의 쾌락강도를 삭감시킨다. 이것을 상보하기에 계약에 기반하지 않는 또다른 이중적인 무대가 발생한다. 그것은 사디스트와 마조히스트와 그들을 바라보는 관객들 사이에서 만들어진다. 행위자의 행위는 보여진다는 사실, 관객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통해, 보다 강력한 쾌락의 단계로 끌어진다. 관객은 마조히스트에게는 수치심을 증폭시키고, 그 역시 마조히스트에게 쾌락을 강화하는 역할을 한다. 그리고 사디스트에게는 힘과 권위에 대한 과시의 장으로 행위의 무대를 전환시킨다. 사디스트와 마조히스트 사이의 계약은 관객을 제어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행위자들에게 자신 내부의 의지와 무관한 콘트롤하기 힘든 변수이다. 변수의 존재를 통해 행위자의 쾌락은 영향을 받는다.

현대는 분명하게 극장 안의 극장, 무대안의 무대로 이루어져 있다. 극악스러운 행위와 음란한 행위도 직접적으로 전달되지 않는다. 미디어를 통해 여과된 형태의 간접경험은 오히려 그러한 대상들이나 행위들에 대한 왜곡된 쾌락을 장려한다. 반면, 이러한 경험들이 직접적인 경험으로 다가올 때, 그것을 접한 대상은 트라우마적 징후에 노출된다. 그것은 안전하지 않으며, 안전한 세상이 거짓임을 증명하는 단서가 된다. 그것의 소스는 단순히 잔혹한 경험이나, 선정적인 장면들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역사적인 사실에서 비롯되기도 한다. 아주 드물게 역사적 사실과 이미지, 그리고 그 이미지에 대한 전적인 쾌락과 죄의식이 부적절하게 결합할 때 발생하기도 한다. 그것들이 만나는 가상적인 공간을 나는 무대라고 부른다. 그 무대가 흥미로운 것은 그 무대가 아주 광범위한 형태를 지니고 있으며, 각각의 참여자가 서로 다른 입장을 분열감없이 공유하는 데이빗 린치의 영화같은 무대라는 것이다.

발투스의 그림들은 대상을 바라보는 쾌락에 대해 아주 안정적인 형태를 보여준다. 그 안에는 이미 즐김에 대한 죄의식이나 공범자로서의 죄의식은 녹아들어있지 않다. 그 안에는 온전한 즐김의 태도가 녹아 있다. 거기에는 어떤 공포나 불안감이 없다. 대상은 오히려 보는 관객보다 당당하며, 자신들에 대한 쾌락의 정당성을 부여한다. 그들은 피해자도 아니며, 순진한 꼬마도 아니다. 발투스가 포착한 순간은 아이들이 하나의 개체로서 상대를 응시하는 순간이며, 그 순간들은 쾌락의 원천이 전적으로 그들에서 비롯됨을 강조한다.

'STATEMENTS' 카테고리의 다른 글

우리를 위한 셋 Three of Us 2014  (0) 2017.04.03
공백 空白 2006  (0) 2017.04.03
이탈리아식 오페라하우스 초안 2009  (0) 2016.06.04
망각 OBLIVION 2010  (0) 2016.02.05
PORNOGRAPHY 포르노그라피 2007  (0) 2016.02.05
ELIZABETH SHORT 엘리자베스 쇼트 2007  (0) 2016.02.04

'위험한 관계 Dangerous Liaisons'의 발몽은 트루베 부인과 헤어지기 위해, 'It's beyond my control' 이라는 말을 반복한다. 안다. 세상 안에, 인간의 마음 안에 어쩔 수 없는 본능과 욕망으로 가득차 있다는 것은. 단지, 그것이 당당한 이유가 되지도, 시의적절한 변명이 아니라는 사실마저 잊어버릴 수는 없다. 지속적으로 반복되는 ‘시의부적절한’ 것들 사이에서 살아남기 위해 모든 것을 잊어버릴 수는 없다. 모든 것을 잊어버린다고, 모든 것이 사라지지는 않는다. 


망각. 망각은 기억보다 항상 유혹적이고, 항상 쉽다. 사실이 진실에 가깝다는 믿음은 맹목적이다. 사실과 사실 사이를 상상한다. 틈에 숨겨진 맥락들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드러나는 것들은 항상 모든 것의 1%이다. 체홉의 소설 속에 인물, 체르바코프를 죽음에 이르게 하는 사소한 의혹은 그의 죽음보다 훨씬 본질적인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미지를 만드는 나는 ‘보이는 것’을 의심한다. 어쩌면 이미지들에서 배어나온 텍스트들이 맥락의 균열을 채우려 사이를 기어 다니는 것은 당연한 수순일지도 모른다. 2010


<[Tu] 2011>에 수록



RELATED TEXT : 나는 망각을 기억하는 것을 잊어버렸다 2008







   



'STATEMENTS' 카테고리의 다른 글

공백 空白 2006  (0) 2017.04.03
이탈리아식 오페라하우스 초안 2009  (0) 2016.06.04
망각 OBLIVION 2010  (0) 2016.02.05
PORNOGRAPHY 포르노그라피 2007  (0) 2016.02.05
ELIZABETH SHORT 엘리자베스 쇼트 2007  (0) 2016.02.04
JOEY STEFANO 조이 스테파노 2007  (0) 2016.02.04

나는 내 속에 도사린 어떤 괴물의 존재를 느꼈다. 그것은 나라는 존재를 빌려 그 어떤 일도 해치울 수 있을 전능한 괴물이었다. 메마른 자부심. 응고된 흥분. 엄격한 자기 단속. 그리고 공허함. 그러고는? 그리고 또 뭐가 있는가? 미사가 막 끝이 났다. 나는 몽롱한 상태로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피곤했다. 어서 이 교회를 벗어나서 집으로, 왔던 모랫길을 되짚어 포부르나로 돌아가고 싶었다. 눈이 무겁게 내리 감겼다. 그런데 문득 무엇인가, 흐릿하게 풀린 내 시선을 붙잡는 것이 있었다. 유혹적이고도 당당한 그것. 그 놀라운 물체는 우리가 어지러운 꿈속에서 마주치게 되는 어떤 장소들과 닮아 보였다. 둘레에 베일이 쳐져 있어 안쪽이 들여다보이지 않고, 들여다보고 싶어도 가까이 가지 못하는 탓에 견딜 수 없는 갈망으로 소리 없이 비명을 내지르며 그 주위를 맴돌게 되는 그런 곳들 말이다.


비톨트 곰브로비치 '포르노그라피아'



포르노그라피는 느와르 혹은 일종의 전투다. 그것은 에로틱과는 다른 것이다. 그 행위 자체가 더 이상 관능을 포함하고 있지 않을 때, 미디어로 재생되는 포르노의 이미지들을 뭐라고 불러야 할지 난감해진다. 2007










Seaching for Clues Ⅰ


쥘리엥 그린과 점심식사. 우리는 블랙 유머에 대하여 이야기한다. 그는 어떤 미국 일간지에서 읽은 그 잡보 기사를 인용한다. 센트럴 파크에서 강간, 살해당한 한 젊은 여자가 시체가 발견되었다. 그녀의 핸드백에 일기장이 들어 있었다. 그 전날 일기에서 그녀는 아무 일도 일어나는 법이 없는 자신의 무미건조한 생활을 한탄하고 있었다. 


미셀 투르니에 '외면일기'중에서 



Elizabeth Short (1927 ~ 1947)


엘라자베스 쇼트의 사건은 오히려 아주 명확하다. 그녀를 죽인 사람은 그것을 즐겼으며, 한 치의 실수가 없다. 범인은 그녀를 보관하고, 중요하고 보존가치가 있는 것을 우리와 다르게 생각한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내장이다. 거기에는 필연성이 존재한다. 그는 그녀의 내장을 먹었거나 아직도 보존하고 있다. 


엘리자베스 쇼트의 경우는 복수나 응징이라기보다 쾌락의 차원에 있다. 사드의 책에서 나오는 관능의 차원이다. 사건의 본질보다 중요한 것은 사건을 바라보는 관점인데, 내게 있어 이 사건은 일종의 초현실적인 틈이다. 잔혹함과 비합리에서 오는 사건을 접하는 전율. 그것 또한 일종의 쾌락 차원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그 쾌락은 거부할 수 있거나 반항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저 바라본다는 것으로 쾌락은 성립이 된다. 끔찍함과 동시에, 그러한 초현실적인 명상을 갖게 하도록 할 수 있는 것은 일종의 쾌락이라고 볼 수 있다. 그녀의 존재가치는 그 사람이 아니라, 그 사건으로 존재한다. 그녀는 비애, 절망, 혹은 부조리를 보여주는 어떤 총체라고 할 수도 있다. 2007



RELATED WORKS






'STATEMENTS' 카테고리의 다른 글

망각 OBLIVION 2010  (0) 2016.02.05
PORNOGRAPHY 포르노그라피 2007  (0) 2016.02.05
ELIZABETH SHORT 엘리자베스 쇼트 2007  (0) 2016.02.04
JOEY STEFANO 조이 스테파노 2007  (0) 2016.02.04
SALO : 주인의 비열한 규칙들 2009  (0) 2016.01.16
쾌락 PLEASURE 2009  (0) 2016.01.16



SEARCHING FOR CLUES Ⅱ


그보다 뒤늦게 나온 텍스트인 발정한 비너스에서 여주인공은 보다 총명하게 남창의 뚜쟁이 역할을 맡는다. 우연히 그녀는 열두 살 먹은 소년인 어린 "천사"를 얻는데 그녀는 그를 성의 세계에 입문시키고 정기적으로 이용하며 그런 다음에는 자신과 마찬가지로 남자들과 여자들에게 매춘을 시킨다. 그녀는 자신의 세자르가 모든 남편의 부인이 되고 모든 부인의 남편이 된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녀는 판매자와 상품, 지배자와 피지배자 모두의 역할을 하기 때문에 지배와 복종을 혼동하고 그것과 함께 성적 차이를 혼동하는 육감적 사업에 종사하고 있는 것이다. 성적 차이가 확고한 관념이 되어가던 시대에 포르노그라피 텍스트와 여주인공들은 기이하게도 시대에 뒤떨어진 것처럼 보인다. 


린 헌트 '포르노그라피의 역사'중에서 




JOEY STEFANO (1968 ~ 1994)


나는 그를 단지 모니터의 알몸으로만 접한다. 처음 만남의 흥분이 가라앉으면서, 지루해지기 시작할 때, 조이가 아니라 니콜라스가 누구인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자료를 찾으면서, 그에 대한 개인적인 기록을 거의 찾을 수 없다는 것을 발견했다. 오히려 그가 출연한 포르노그라피를 찾는 것이 훨씬 더 수월하다는 것도. 묘한 아이러니를 느끼게 했다. 그는 포르노그라피의 모니터에서만 존재한다. 스틸컷이 기록을 의미한다면, 움직이는 포르노그라피는 무엇이라고 해야하는가. 그것에서는 영화필름에서 느낄 수 있는 고전의 향수를 느낄 수 없다. 그는 단지 말초적인 흥분을 상기시키기만 한다. 사망했지만, 여전히 쾌락의 대상이다. 그 안에는 죽음에서 비롯된 향수나 기억의 상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는 단지 자신의 탐스럽고 유혹적인 엉덩이로 실재한다. 아무도 그가 어디서 태어났는지, 죽었는지, 어떻게 살았는지에 대해서는 회고하지 않으며, 단지 그의 육체는 영원히, 반복적으로 다른 이의 흥분을 위해 소모된다. 그는 영원한 쾌락의 전당에 봉헌되었다.


포르노그라피 안의 조이를 바라보면서 어떤 방식이든 즐기게 된다면, 그 행위 자체가 네크로필리아와 본질적으로 어떤 차이가 있는지 궁금해졌다. 조이는 이미 사망한 사람이지만, 생전의 육체가 기록되어 또다시 단순한 몸으로써 즐겨질 수 있다. 영상이라는 이름의 미디어가 지닌 기록할 수 있다는 본원적인 특성이 태생적으로 죽음과 쾌락 사이의 어느 지점에 영상을 자리매김하게 만든다. 2007









«'소돔120일‘은 피에르 파올로 파졸리니의 영화 ’살로, 소돔의 120일‘에 영감을 주었다. 이 영화는 합의하지 않은 희생자들에게 가해지는 공포와 잔혹을 생생하게 그려 내고 있다. 이 영화가 지닌 예술적 가치와는 무관하게, ’살로, 소돔의 120일‘을 본다는 것은 관객에게는 일종의 사디즘적인 공격이 되어, 관객은 영화를 보는 동안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합의한 희생자로 변모한다.»

에스텔라 V. 웰든, 사도마조히즘, 2002

 

관객이 사디즘에 공격되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관객이 합의한 희생자로 변모한다고 지적하지만, 사실은 동화를 통해 합의하지 않은 가해자, 공범자, 목격자로 전환된다. 관객이 느낄 수 있는 혐오감이나 죄의식은 희생자 혹은 피해자가 느낄 수 있는 감정이나 정서가 아니다. 희생자가 느꼈을 것은 오히려 공포, 불안, 복수심이다. 그것은 완전히 다른 변모이며, 해석의 여지도 완전히 달라진다. 결국에 관객은 냉혹한 관찰자의 위치를 지킬 수밖에 없다. 2009


<[Tu] 2011>중에서




양자역학에서 한 현상을 설명하는 데는 어느 범위 내에서는 입자의 측면에서 보고, 다른 범위 내에서는 파동의 측면에서 본다. 여러 물리적 양을 측정한 결과가 반드시 확정된 값을 가지는 것이 아니며, 서로 다른 여러 값이 각각 정해진 확률을 가지고 얻어진다고 이야기한다. 양자역학이 기본적으로 제시하는 룰은 불확정성의 원리(Uncertainty Principle)이다. 이런 전제 안에서 획득할 수 있는 진실은 오직 불확정적이라는 것이다. 쾌락과 죄의식, 불안과 공포, 죽음과 폭력은 상보적임과 동시에 대립적인 것이다. 작업을 통해서 계속적으로 드러내려고 하는 것은 지독한 의심 속의 불안, 불안의 쾌락, 죽음이나 폭력에 대한 공포, 공포에 대한 쾌락, 쾌락에 대한 죄의식, 죄의식에 대한 쾌락 뿐은 아니다. 그런 것들은 이미 체홉의 소설이나 고다르의 영화 속에서 더욱 적나라하고 정확하게 드러난다. 결국 드러나는 것은, 그것들을 다시 운반하고, 그 안에서 느끼는 혼돈스러우면서도 일관된 태도, 일관되지만 분열적인 태도, 그 자체, 확신할 수 없음, 혹은 확정적일 수 없음 사이에서 방황하는 모습이다. 혹은 지속적으로 움직이며 한계점으로 이동하는 나의 동선이다. 2009


<[Tu] 2011>중에서




'STATEMENTS' 카테고리의 다른 글

JOEY STEFANO 조이 스테파노 2007  (0) 2016.02.04
SALO : 주인의 비열한 규칙들 2009  (0) 2016.01.16
쾌락 PLEASURE 2009  (0) 2016.01.16
Stage IV : 이탈리아식 오페라 하우스 2009  (0) 2016.01.16
관능 SENSUALITY 2015  (0) 2016.01.15
쾌락을 위한 쾌락 2015  (0) 2016.01.15

현대는 분명하게 극장 안의 극장, 무대안의 무대로 이루어져 있다. 극악스러운 행위와 음란한 행위도 직접적으로 전달되지 않는다. 미디어를 통해 여과된 형태의 간접경험은 대상들이나 행위들에 대한 왜곡된 쾌락을 장려한다. 반면, 이러한 경험들이 직접적인 경험으로 다가올 때, 그것을 접한 대상은 트라우마적 징후에 노출된다. 그것은 안전하지 않으며, 안전한 세상이 거짓임을 증명하는 단서가 된다.

이탈리아식 오페라 하우스에는 배우들, 악단들, 일층에서 바라보는 관객들, 사적인 룸을 지니고 관찰하는 관객들 그리고 귀족과 평민을 나누는 관객석들이 있다. 이런 구조 안에는 관객을 관찰하는 관객이라는 독특한 지위가 발생한다. 스스로 관객이지만 그들은 다른 관객들을 관찰하는 쾌락을 얻기 위해서 오페라 하우스에 등장한다. 연기를 보기 위해 등장한 관객들은 동시에 다른 관객들을 위한 배우로 변신한다.

 

이러한 오페라하우스의 구조는 현재에 이르러 일상에 녹아들어있다. 모든 것은 중계될 수 있고, 모든 것은 공유될 수 있다. 맥락을 분열성 없이 조합할 수 있지 않다면, 이러한 환경에서 살아남기가 힘들다. 전형적인 타자성의 새로운 지평은 아주 상반된 두 역할 다 가질 수 밖에 없는 무대 안에서 발견되고 분석되어야 한다. 그 무대의 결정적인 추동력은 생존이 아니라, 현재 쾌락으로 전이되는 것처럼 보인다. 고통과 스트레스마저 즐기기를 강요하는 혹은 강요당하고 싶어하는 무대의 중심에 우리가 있다. 2010


<[Tu] 2011> 중에서






'STATEMENTS' 카테고리의 다른 글

JOEY STEFANO 조이 스테파노 2007  (0) 2016.02.04
SALO : 주인의 비열한 규칙들 2009  (0) 2016.01.16
쾌락 PLEASURE 2009  (0) 2016.01.16
Stage IV : 이탈리아식 오페라 하우스 2009  (0) 2016.01.16
관능 SENSUALITY 2015  (0) 2016.01.15
쾌락을 위한 쾌락 2015  (0) 2016.01.15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