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탉들의 싸움 - 생존의 방식으로 번역된 사랑

 

연극을 자주 보는 편이 아니라서, 어쩌다 보게 될 기회가 생길 때마다 긴장이 된다. 미술전시처럼 그냥 편할 때 들어가서 휘익 돌아보고 나오는 것이 아니라, 시간에 맞춰서 기다려야하고 극장 안에 들어가서도 이미 설치된 무대를 미리 경험하게 되서 일지도 모른다. 전희 같은 순간들이 있다. ‘스페이스 111을 찾아주신 관객여러분 감사합니다....’ 낭랑한 남자의 목소리가 곧 연극이 시작됨을 알린다. 암전.

 

존(John)은 오랜 연인 사이였던 한 남자(M)와의 관계를 정리했다. 언제까지나 자신을 아이처럼 대하는 M의 태도를 참을 수 없었던 것. 그러던 어는 날, 통근 길에서 자주 마주치던 한 여자(W)가 존에게 말을 걸어온다. 존은 자기도 모르게 얼마 전 헤어진 M과의 관계에 대해 털어놓게 되고, W도 자신이 겪은 이혼의 아픔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한다. 짧은 대화 속에 서로를 이해하기 시작한 두 사람은, 존이 이전에는 한 번도 여자와 사랑을 해본 적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멋진 하룻밤을 보내게 된다. 하지만 M을 완전히 잊지 못하는 존은 불쑥 M에게 W와 사랑에 빠졌음을 고백한다. M은 갑자기 존과의 사이에 끼어든 W의 존재가 거북하고 싫지만, 그녀를 저녁식사에 초대하기로 한다.

존과 M,그리고 W의 저녁식사. 어색하고 불편한 상황을 만든 존을 끊임없이 비난하는 M과 달리, W는 존을 감싸며 위로한다. 존은 이런 W와 함께라면 자신도 평범하고 행복하게 살 수 있을지 모른다는 희망을 품게 된다. 그런데 갑자기 이들의 저녁식사에 M의 아버지(F)가 들이닥친다. M의 지원군을 자처한 F는 존에게 자신의 정체성을 되찾으라며 설교하기 시작한다. 각각 자신을 선택하라고 종용하는 M과 W, 그리고 M에게 돌아가라고 독촉하는 F, 이들 사이에서 존은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계속 망설이는데...과연 존은 어떤 선택을 하게 될까?

 

수탉들의 싸움(리플렛), p14-p15

  

잘 정리된 줄거리가 아니어도, 레슬링이나 복싱의 링을 연상시키는 무대에서는 이미 전운이 감돌고 있었다. ‘수탉들의 싸움’이라는 제목 덕분에도 그다지 어렵지 않게 연출자의 의도를 읽었다. 하지만 1시간 30분 가까이 되는 그들의 싸움을 지켜보면서, 연극의 끝을 알리는 암전을 만날 때까지, 극본과 연극이 끊임없이 충돌했다.

원제는 ‘COCK’. 수탉이라는 의미도 있지만, 흔한 말로 남자 성기의 의미도 있다. 사실 원제는 후자의 의미에 가깝지 않을까 짐작한다. 수탉의 의미라면 극작가 Mike Bartlett는 'COCKS'라고 제목을 붙이지 않았을까 짐작해본다. 번역의 어려움. 다른 나라의 언어를 다시 우리나라 언어로 바꾸어 표현하는 것 자체가 사실 굉장히 힘든 일이다. sarcastic의 감수성은 부정적인 위트에 더 가깝다. 극본의 구조는 시니컬이 아니라 sarcastic의 감각에서 비롯된 것으로 그만큼 미묘하다. ‘수탉들의 싸움’이란 제목으로 공연된 이번 연극은 아쉽게도 그러한 미묘함을 끌어들이지 못했다. 전체적인 연출기조가 싸움에 맞추어진 탓에 모든 감정은 격앙되어 있고 그 목소리 톤에서 발생하는 대사들은 애증 대신 분노의 대사로 전환된다. 사실 극작가의 의도를 충실히 살리는 것이 나은 것인지, 연출가의 새로운 연출 의도를 따르는 것이 나은 것인지는 대해서는 논쟁의 여지가 있다.

이 연극이 흥미로운 것은, 드물게 정체성(특히 성정체성)에 대해 정면으로 다루기 때문이다. 동성애는 요즘 소재로 많이 다루어진다. 이제 온갖 매체를 통해 양념처럼 나온다. 좀 더 치열하게 정체성을 다룬다는 것 자체가 오히려 진부하게 여겨질 정도이다. 하지만, 추상적인 동성애의 환상 혹은 막연한 정의감에서 비롯된 인정하는 대신, 현실 안에서 다름과 차이에 대해 우리가 얼마나 극단적인지를 기억한다면, 타자에 대한 이야기는 여전히 유효하다. 그런 면에서 ‘수탉들의 싸움’은 꽤나 많은 기대를 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연극이 마쳤을 때, 여러 면에서 아쉬웠다. 부끄럽게도, 차례차례 인사를 하는 배우들이 인사할 때, John을 연기한 배우에게는 박수를 보내지 않았다. 아니, 보낼 수 없었다. 그의 잘못만은 아니지만, 가장 아름다운 캐릭터를 망가뜨린 배우에게 경의를 표할 수가 없었다. John의 캐릭터에는 좀 더 추상적인 순수함이 필요했다. 그는 남자라기보다 이상적이고 낭만적인 사랑을 지향하는 소년의 캐릭터에 더 가까우며, 한없이 갈등하는 일종의 순수감성과 같은 인물이다. 그래서 그의 우유부단한 행위는 책임감이 없어 보이는 대신 반대로 한없이 아름다워 보여야 했다. 적어도 내게는.

 

‘수탉들의 싸움’의 연출자는 정체성을 생존의 범주에 위치시켰다. 연출가에게 그것은 일종의 투쟁이며, 일종의 생존방식이다. 4명의 인물은 각자의 터전에서 각자의 영역 안에서 그것을 지키기 위해 1시간이 넘도록 투쟁한다. 게이인 한 남성이 오랜 동안 사귄 애인 대신 한 여성을 만나면서 사건은 벌어진다. 그 여성과의 만남은 아직 관계의 영역 안에 들어오지는 않았다. 주인공 John은 이 모든 상황에서 어떤 선택을 하지 않는다. 하지 않는다기보다 하지 못한다. 그의 캐릭터를 일상에서 만난다면, 정말 때려주고 싶을 정도로 결단력 없다. 등장인물들은 복싱링의 벨이 울리면, 마치 싸움하는 것처럼 대사를 뱉어낸다. 마치 막장드라마 같다. 막장드라마의 본질은 카타르시스를 제공하는 것이다. 막장드라마 안에서 모든 등장인물들은 특정 사건으로 인해 파국을 향해 치닫는다. 그 곳에서는 현실적인 결말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파국을 향해 달리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갈등의 에너지 양이 중요하다. 등장인물들은 미친 듯이 싸우고, 자신들의 욕망의 한계와 도덕의 한계를 끊임없이 뛰어넘는다. 그러한 일탈의 에너지들을 관찰하면서 우리는 관음증적인 쾌락을 얻는다.

하지만, 이 연극의 극본은 그렇지가 않다. 극작가는 마지막에서도 어떤 선택을 하느냐를 보여주는 것이 대신, 선택이라는 것 자체가 억압적인 것이라고 이야기하려고 한다. John은 실제적으로 아무런 선택을 하지 않으며, 고뇌하는 모습보다는 슬퍼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렇지만, 싸움이라는 틀을 놓고 해석된 연극 안에서 애정. 혹은 애증의 카테고리는 소멸되어 버리고, 갈등의 언어에 포커스가 맞게 됨으로서 극본의 결말은 엉뚱하게 따라붙은 사족으로 변해버린다.

 

극작가의 서사구조와 캐릭터의 구조에서 특이한 것은 개인 혹은 특정인에게 고유한 이름을 부여하기보다 무명 혹은 익명에 가까운 이름을 부여했다는 것이다. 남자 애인을 M 여자 애인을 W. 각각 남성 여성의 약자로 표시한다. 주인공 John 역시 가장 일반적인 영어이름(John Doe를 연상시키는)으로 제시한다. M의 아버지는 이전 세대의 남성성 F로 등장한다. 극본의 의도는 한 개인의 캐릭터를 구성하기보다 오히려 정체성을 주변의 구조를 제시한다. 이 극본에서 등장인물을 명명하는 방식은 등장인물의 캐릭터 자체보다 더 중요한 포인트이다. 등장인물은 그 자체가 어떤 상징적인 축이다. 구체적인 이름을 부여하지 않았다는 것은 극의 갈등을 추상적으로 만들고 싶었던 의지라고 생각한다. 즉, 각각의 강렬한 개인으로 환원시키는 대신, 어떤 일반론 혹은 추상적이지만 일반적인 갈등으로 만들고 싶었다는 것이다. 구체적인 형상을 다루는 페인팅이 오히려 추상적이듯이(추상화는 추상적인 형상을 보여주면서 반대로 물성 자체에 집중하게 한다. 이 때, 보통 물성은 극단적인 구체성을 획득한다), 극작가가 구체적인 대사를 통해 추상성을 구현하려는 시도 자체가 흥미롭다.

John을 갈등이 전부인 인격체로 만들고, 남성 여성 그리고 가족으로 대변되는 구조 안에서, 암묵적으로 부여되는 선택의 압박, 선택의 억압에 대한 것들이 이 연극의 골격을 만든다. 그의 남자 애인 M이 G나 H가 아닌 것도 흥미로운 부분이다. 극작가는 M의 캐릭터에서 게이로서의 정체성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남성성을 본다. John의 갈등은 자신이 게이이냐 아니냐의 부분이 아니라, M과 소통할 수 없음에서 비롯된다. John은 처음부터 끝까지 M의 억압적인 부분을 지적하지만, M은 결코 그것에 동의하지 않는다. M이 John을 비난할 때 사용하는 언어는 흥미롭게도 많은 이성애자 남성이 여성에게 말하는 것과 흡사하다. M은 John의 남자답지 못함 혹은 무능력에 대해서 끊임없이 비판한다. 게이커플이라는 다른 카테고리의 정체성 안에서도, 역시 이성애자 사이의 남성 혹은 여성의 억압적인 관계가 재반복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 역시 이 극본의 주요한 포인트이다. M의 정반대편에는 W가 있다. 그들이 정반대에 있는 것은 성 자체가 아니라, 그들의 직업, 그들의 사고방식 등 전혀 다른 라이프스타일 때문이다. M과 W가 대화를 잘 살펴보면, 상대가 남성이어서 혹은 여성이어서 대립하는 것이 아니다. 사랑의 방식, 사랑하는 상대를 대하는 방식에서 역시 둘은 극단의 지점에 있다. M은 게이임에도 불구하고 강한 경제력을 지니고 있으며, 마초적인 사고를 지니고 있다. M은 John을 자신이 원하는 방식으로 사랑한다. 마지막에서 M이 꺼내든 마지막 카드(John이 가장 좋아하는 음식, 치즈케익을 만든다)는 연극 전체를 통틀어 M이 처음으로 John의 입장에서 무언가를 준비한 유일한 것이었다. John이 W를 좋아하는 큰 이유는 섹스(보통 게이도 여자랑 잘 수 있다. 일반적인 오해와 달리)가 아니라, M이 가지고 있지 않은 섬세함과 따스함, 자신에 대한 이해, 그것들을 기반한 소통가능함 같은 것이다. 이 작품은 기본적으로는 성정체성을 배경으로 하기에, 별 수 없이 미묘한 사랑의 차원에 있다. 연극을 보는 내내 힘들었던 것은 작품이 발현하는 갈등의 근본적인 기반이 ‘사랑’임에도 불구하고, ‘수탉들의 싸움’에는 그것이 전혀 표현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자극적인 리플렛의 문장처럼 사실 게이 스트레이트의 구분은 중요하지 않다. 하지만 영국과 우리나라의 배경은 완전히 다르다. 영국에서 동성애자는 보다 일반적이다. 커밍아웃을 하고 일반적인 직장생활이나 사교생활을 하는 것이 우리나라에서 쉽지 않음을 인지한다면 그 차이는 분명하다. 우리나라에선 조직 안에서 동성애 정체성을 드러낸다는 것은 여전히 어려운 일이다. 또, 기혼게이의 비율 역시 생각보다 많다.

연출가의 의도를 좀 더 충실히 따르고, 우리나라의 현실에 좀 더 부합되게 연극을 각색을 한다면, 다음과 같다. John은 W와 선을 본 사이이다. 하지만, 결혼하기 전부터 사귀던 남자애인 M이 있다. 가족을 대변하는 아버지 F가 있다. 문제의 갈등은 John이 7년간 사귄 M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W와 선을 보고 주기적으로 만나게 되면서 발생한다. John은 M과 엄청 싸우게 된다. W를 만나게 되면서 M에게 없는 다른 장점들을 발견하게 되고, 결혼을 해야 하느냐 말아야하는지 고민하게 된다. 우연히 아들 John이 게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아버지 F는 자신도 역시 젊을 때는 그랬지만, 결국 사람은 여자를 만나 결혼해서 사회에 편입해야 한다고, 노후를 생각해야한다고 설득한다. John은 결국 결혼하기로 결정한다. 그리고 결혼 이후에도 M과는 꾸준히 만난다. 완벽한 막장드라마의 극본이 된다. 어이없는 극본이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내가 생각하기에 이것이, 정체성을 생존의 방식으로 치환한 현실에 가까우며, 보다 명쾌하게 연출가의 의도를 보여줄 수 있을 것이다.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저런 상황을 만들고 있고, 놀랍게도 상황은 계속적으로 재생산된다.

극작가는 강요된 선택에 대해 이 극본에서 건드린다. 극작가의 문제의식을 추상적으로 수긍하기에 앞서, 우리는 지나치게 선택을 관성적으로 하는 문제를 건드려야 할 듯 싶다. 극본에서 보여 지는 John의 고민은 우리의 문제에 비하면 너무나 순수하다. 그 순수한 갈등이 우매한 우유부단함으로 보여 지고, 마지막에 결국 M에 남는 그의 뒷모습에서 떠나지 못하는 유약함을 봐야하는 것이 참 가슴이 아팠다. 번역된 이 연극을 보면서, 나는 아직 우리가 극작가가 보여주고자 하는 섬세한 선택을 하기에 여전히 거칠고 투박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오용석 20140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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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을 보면서 미장센에 대해서 생각하게 된다는 것이 사실 꽤나 독특한 경험이었다. 서사에 집중하지 않으면서 볼 수 있다는 것, 이미지를 즐길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서 흥미롭기도 했다. 마지막에 있었던 연출가와의 대화는 오히려 보는 즐거움을 방해했다. 연출가는 주인공 두 명이 하나의 캐릭터라고 이야기했다. 어떤 양면성 혹은 양면성이 결합하는 어떤 방식에 대해 이야기를 했다. 아주 거시적으로 바라보았을 때는 연출가의 말이 그다지 틀린 이야기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작업의 디테일들에 숨어있는 순수한 쾌락적 측면들은 연출가가 말한 것들만을 표현한다고 했을 때는 과도한 것들이다. 우선 두 명의 캐릭터는 하나의 분리된 모습이라기 보기에 각각 생명력과 너무 많은 서사가 함축되어 있다. 공연을 보는 도중, 내가 생각했던 것은 연출가 혹은 누군가가 경험한 캐릭터들이 각각의 인물에 복합적으로 결합된 것처럼 보였다. 처음에는 연출가의 상상적 공간 혹은 경험의 공간에서 일어난 일상들의 파편들이 좀 더 적극적으로 공연에 결합되지 않았을까하는 상상을 하기도 했었다.

 

공연을 보는 내내 즐거웠던 것은 육체 혹은 신체에 대한 기본적인 관능이 소거되지 않았던 까닭이다. 오히려 관음을 자극하는 형태를 따른다. 인물들은 보는 이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자신의 신체를 숨기지는 않으나, 조심스럽게 감춘다. 결과적으로는 포르노그라피와 다른 형태의 관능을 전달한다. 초반과 후반부의 미장센과 다르게, 보다 역동적인 과정으로 보여지는 면도의 과정 혹은 살인의 과정은 역설적이게도 관능의 절정에 이른다. 살해 혹은 절단되는 인물은 처음에 등장할 때부터 신체를 분절하는 패티쉬적인 복장으로 등장한다. 옷을 벗는 그의 행위는 일종의 의식과 같으며, 그 혹은 상대에 대한 관능을 자극하기 위한 고착된 동작을 한다. 그의 행위는 자신의 만족과 더불어 보는 이의 응시를 충족시켜야하는데, 여기서 그 상대는 인도인이라고 짐작한다. 면도의 과정은 인도인이 그에 상응하는 리액션을 하는 것이라 보여진다. 인도인의 마사지 혹은 면도는 단순하게 또다른 나를 파괴하는 과정이 아니다. 단순히 파괴하는 과정이라기에는 너무나 많은 과정을 가지고 있고, 인도인의 캐릭터는 모든 과정을 순수하게 즐긴다. 개인적으로 볼때 극에서 인도인은 그의 살가죽을 벗겼고, 거기에 다시 화장을 하고 다시 살아나기 위한 의식과 더불어 자신이 상상하는 이상적인 포지션을 하고 있는 상대를 재창조한다. 그것이 실현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인도인은 상대의 육체를 파괴한다. 개인적으로 심하게 오독했을지도 모르겠지만, 인도인이 실행하는 행위의 패턴은 내가 생각하는 연쇄살인범의 집착과도 너무나 닮아 있다.

 

덕분에 마지막의 긴 미장센은 나에게 좀더 우울한 풍경이었다. 그들의 포즈는 우울했으며, 그것은 살아있는 사람으로서 관객에게 던지는 시선이 아니라, 죽은 자의 관조에 가깝게 느껴졌다. 마지막 미장센이 너무나 길었던 까닭에 연출가가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 무엇인지 잠시 사고하게 만들었다. 강렬하고 미술적인 퍼포먼스 이후에 마치 정리된 애도의 사진처럼 한명씩 자리잡는 모델들은 각각의 의지에 의해 위치한다기보다는 그 곳을 컨트롤하는 사람, 인도인 혹은 다른 권위자에 의해 위치지워지는 것처럼 보인다. 인도인이 신체의 일부를 원하는 자리에 위치 지움과 같은 방식으로 모델들은 각각의 자리를 잡는다. 그래서 전체적인 맥락 안에서 그들이 앞에 있었던 퍼포먼스의 다른 희생자인 것처럼 보여진다. 마지막 말미에서 사보이 사우나는 디스토피아적 세계로 변한다.

 

이미지적 서사가 완성되기 이전의 순간까지가 ‘사보이 사우나’는 아주 흥미롭다는 생각을 했다. 서사를 완성시키려는 욕구는 이미지 사이의 당위성과 개연성을 찾게 하고, 결국 내가 내린 결론은 음울한 살인의 추억같은 것이 되었다. 물론 그 안에서 발현하는 쾌락이 내가 그림을 그리면서 접하는 육체에 비해 훨씬 더 자유롭다는 것이어서 나름 즐길만한 것이었다. 연출가의 말처럼 단순한 층위에 있다고 보기에는 ‘사보이 사우나’는 좀 더 복잡한 구조를 지니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혹은 내가 바라보는 일종의 숨겨진 내러티브가 온전히 의도된 것은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든다.

 

하지만, 신체 특히 남성의 신체에 대한 이야기가 이런 방식으로 다루어질 수 있다는 것 자체, 주인공이 인도인인 탓에 언어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시점. 그래서 연극 혹은 공연의 언어적인 차원이 배제되면서 이미지화하는 과정 같은 것은 미술하는 입장에서는 신선한 자극같은 것이었다. (오용석 2013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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