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년에 한 번 열리는 카셀 도큐멘타는 대형 미술행사가 있을 때마다 언급되는 세계적인 행사이다. 많은 미술관계자의 발길이 자연스레 카셀을 향한다. 특히나 올해는 카셀 도큐멘타, 뮌스터 조각 프로젝트, 아트 바젤, 베니스 비엔날레가 유럽에서 한꺼번에 열리는 해였다. 10년에 한 번 오는 행사들은 시작 전부터 관심을 끌었다. 수많은 미술관계자들이 독일과 이탈리아 베니스를 방문했고 앞으로도 할 것이다. 하지만, 막상 우리는 피상적으로 그 행사들을 접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막연한 명성, 막연한 유서 깊음 같은 것에 끌리며 말이다. 사실 1995년 광주 비엔날레를 시작으로 우리나라에서도 수많은 국제 비엔날레가 열리고 있다. 비엔날레들이 열릴 때마다 주기적으로 비엔날레 자체에 대한 비판이 반복된다. 2년 주기의 행사가 열릴 때마다 수많은 문제들이 제기되고 우려되지만 결국은 같은 방식으로 행사들은 다시 반복된다. 그에 대한 분석들도 비엔날레의 역사만큼이나 지속되어 왔다. 하지만 시계는 항상 2년 단위로 다시 원점에 맞추어진다. 기획으로 들어가 촘촘하게 논의하는 작업들은 아직도 요원한 것처럼 보인다. 카셀 도큐멘타는 1955년부터 현재 62년간, 지속해오는 프로젝트이다. 현재의 웅장하고 숭고해져버린 이 행사의 외양을 카피하는 것은 임시방편에 불과하다. 오히려, 이 행사들이 이렇게 지속적으로 열릴 수 있는 원천적인 힘이 무엇인지, 이 행사가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를 들여다보는 것이 새삼스레 유의미할지도 모르겠다.

 

 

카셀 KASSEL

 

  카셀 KASSEL은 독일 헤센 주에 위치한 도시로 면적 107킬로평방미터 (광주의 면적 501킬로평방미터)20151231일 기준, 인구 197,984명의 중소도시이다. 1945년도 전쟁 당시의 인구는 160,000여명 정도였다는 것을 감안하면, 도시 자체의 크기나 인구의 변화가 카셀 도큐멘타를 통해 변한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도시는 풀다 강 연안과 접해있으며,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된 빌 헬름스회헤 산공원이 위치한다.

  이 도시의 이름은 로마 시대 이후부터 이 지역에 살았던 독일 부족인 Chatti의 성곽인 고대 Castellum Cattorum에서 비롯된 것이다. 카티족은 로마의 역사가인 타키투스(55-120?)이 기록한 <게르마니아>에서 게르만의 여러 부족 중 하나로 기록되어 있다. 타키투스에 의하면 카티족은 게르만인치고는 상당한 분별력이 있고 일처리 솜씨도 능란하다고 표현된다. 그들은 성인의 나이가 되면 곧 머리칼이나 수염이 계속 자라도록 내버려 두고, 가장 용감한 자들은 모두 쇠로 만든 반지를 끼고 쇠사슬처럼 보유하며, 많은 카티족은 눈에 띄고 무서운 용모를 즐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로마의 역사서에 기록된 이후에 우리가 잘 알 수 있는 유명인으로는 그림형제가 있다. 그림형제는 19세기 초 카셀에서 살며, 동화를 쓰고 모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실제로 우리가 알고 있는 많은 동화들의 원형들이 수집되어 있다. 그림형제의 이야기는 단순히 동화 뿐 아니라, 많은 해석을 발현시켰으며, 근래에는 미드로 만들어지기도 했다(Grimm 2011-2017).

  카셀은 근대에 이르러서는 오스트리아-프러시아전쟁에서 오스트리아의 편에 있었으며, 18세기 후반부터 주요 산업단지와 주요 철도 교통의 요지로 발전해왔다. 그러한 산업적 기반으로 현대사에 이르러, 카셀은 나치의 군사요충지 역할을 하게 되었다. 카셀에는 2차 세계 대전 중에 독일 군사지역 Wehrkreis IX의 본부가 위치해 있었으며, 정치인 수용소로 악명높았던 다카우 수용소의 서브캠프, 탱크를 생산하는 군수공장등이 위치하고 있었다. 덕분에 심각한 폭격을 받게 되었고, 도시의 90퍼센트 이상이 폭격으로 사라졌다. 하지만, 군수공장은 전쟁이 끝날 때까지 살아남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454월 연합군은 카셀에 진격하여, 격렬한 전투를 벌였고 그 때 역시 도시는 황폐화하였다.

 

 사진 1 -독일지도

 

  카셀은 전쟁과 폭격 당시 사라진 건물들을 재건하는 대신 1950년대의 형식으로 대부분의 도시는 재건되었다. 카셀도큐멘타는 이러한 도시적 배경에서 1955년 처음 열리게 된다. 1955년 아놀드 보데가 표방한 도큐멘타의 이상은 그동안 퇴폐미술/예술로 분류되었던 모든 현대미술/예술을 가능케하는 것이었다.

 

 

퇴폐미술

 

  히틀러가 1933131일에 권력을 잡은 이후에 가장 먼저 행했던 것 중에 하나가 퇴폐예술을 정화하려는 시도이다. 이러한 시도는 미술뿐만 아니라 음악, 문학, 영화 등 전방위에 걸쳐서 행해졌다. 나치가 정의하기에 퇴폐적이라고 정의된 예술가들은 공식적인 문화적인 활동을 지속할 수 없었다. 19339월에는 라이히 문화회의소 Reichskulturkammer를 조제프 괴벨스의 책임아래에 만들었고, 이곳은 히틀러의 선전과 홍보에 이용되었다. 이들은 나치를 지지하는 인종적으로 순수한 예술가로 구성되거나 그 조건을 기꺼이 준수하는 회원들로 이루어졌다. 괴벨스는 국민선전계몽부 장관이면서 문화회의소 총재였다. 1935년 문화회의소는 10만 명의 회원을 지니게 되었다. 그 안에서 퇴폐에 대한 기준들이 논의되었고, 문화회의소의 회원이 아닐 경우에는 나치치하에서 예술 활동을 할 수 없었다. 히틀러는 제국주의에 모더니스트 실험을 위한 장소가 없다고 19349월에 선언한다. 이 칙령은 수많은 예술가들의 지위를 무력화하였다. 프란츠 카프카의 저서는 1939년에 더 이상 발간할 수 없었다.

 

 

 사진2 - 퇴폐미술전

 

  나치는 바우하우스, 큐비즘, 야수파, 표현주의, 다다, 인상주의등 대부분의 현대미술운동과 아방가르드를 억압하였다. 1937년까지 퇴폐미술에 대한 나치 정책은 확고했으며, 1937630일 괴벨스는 6명의 위원으로 구성된 라이히 문화회의소 시각예술 분과를 통해 우리가 아는 현대 미술의 시작점이 된 앙소르, 놀데, 헨켈, 마티스, 피카소, 고흐 등 우리가 알고 있는 대부분의 작가들의 5000점이 넘는 작품들이 압수했다. 1937719일 독일 32개 박물관과 미술관 소장품 중 650 점이 넘는 그림, 조각, 서적 등이 전시된 퇴폐미술전은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다른 11개 도시에서 전시되기 전에 1130일까지 뮌헨에서 처음 개최되었다. 퇴폐미술전 이후 괴벨스는 독일미술컬렉션에 대한 철저한 수색을 명령하고, 그 압수를 통해서 수집된 작품은 무려 16558점에 이른다. 퇴폐미술전과 반대로 대독일미술전시를 동시에 개최한다. 퇴폐미술전 이후에도 예술분야에 대한 지속적인 탄압이 진행되었고, 많은 예술가들은 독일을 떠났다.

 

 

도큐멘타

 

  도큐멘타라는 단어는 신조어로 알려져 있다. 이 단어는 나치시대 동안 독일에서 가능하지 않았던 모든 현대미술에 대한 기록을 의미하며, 모든 형식의 전시가 가능함을 표방한다. 나치가 퇴폐라는 이름으로 지속적으로 억압했던 모든 현대미술을 가능하게 하고 예술에 자유로움을 부여한다는 것이 도큐멘타의 가장 기본적인 방향이었다. 도큐멘타는 억압에 대한 반대, 모든 표현의 자유라는 기초 개념의 골격이다. 나치의 치밀한 문화적인 억압에 대항하는 의미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훨씬 강한 추동력을 가질 수 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 거대한 명분은 사실 제대로 구현된 적이 없기 때문에 끊임없이 재시도되고 재각성되어야 하는 것이다.

  첫 번째 디렉터 아놀드 보데는 카셀 출신이며, 베를린에서 교수활동을 하다가 나치에 의해 퇴직한 후 카셀에서 계속 지낸 것으로 알려져 있다. 도큐멘타의 전시기간은 최대 100일이다. 도시 전역에서 벌어지는 도큐멘타는 1955년 첫 회에 148명의 참여자와 670회의 전시, 그리고 관람객 수 13만을 기록한다. 아놀드 보데는 도큐멘타 3(1964)까지 참여한다. 그 이후에도 Harald Szeemann과 같은 디렉터는 미술사를 가로지르는 행사를 기획한다. 2017년까지 14회째를 맞고 있는 도큐멘타의 연혁은 다음과 같다.

 

  documenta 1955.7.16-9.18 Arnold Bode, 참여작가 148, 관람객 130,000

  II.documenta 1959.7.11-10.11 Arnold Bode/Werner Haftmann, 참여작가 338, 관람객 134,000

  documenta III 1964.6.27-10.5 Arnold Bode/Werner Haftmann, 참여작가 361, 관람객 200,000

  4.documneta 1968.6.27-10.6 24-strong documenta council, 참여작가 151, 관람객 220,000

  documenta 5 1972.6.30-10.9 Harald Szeemann, 참여작가 218, 관람객 228,621

  documenta 6, 1977.6.24-10.2 Manfred Schneckenburger, 참여작가 622, 관람객 343,410

  documenta 7, 1982.7.19-9.28 Rudi Fuchs, 참여작가 182, 관람객 378,691

  documenta 8, 1987.6.12-9.20 Manfred Schneckenburger,참여작가 150, 관람객 474,417

  DOCUMENTA IX, 1992.6.12-9.20 Jan Hoet, 참여작가 189, 관람객 603,456

  documenta X, 1997.6.21-9.28 Catherine David, 참여작가 120, 관람객 628,776

  Documenta 11, 2002.6.8-9.15 Okwui Enwezor, 참여작가 118, 관람객 650,924

  documenta 12, 2007.6.16-9.23 Roger M. Buergel/Ruth Noack, 참여작가 114, 관람객 754,301

  dOCUMENTA(13), 2012.6.9-9.16 Carolyn Christov-Bakargiev, 참여작가 187, 관람객 904,992

  documenta 14, 2017.4.8-7.16 그리스 아테네 / 2017.6.10-9.17독일 카셀, Adam Szymczyk

 

 사진 3 - Marta Minujin 책들의 파르테논

 

  도큐멘타의 현재는 우리가 뉴스로 접하는 것처럼 스펙타클하지만, 비판에서 자유롭지는 못하다. 올해는 처음으로 아테네와 카셀에서 시간차를 두고 같은 방식으로 열렸으며, 통합관객이 백만이 넘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아테네와 카셀에서 열렸던 이번 도큐멘타는 외부적인 조건에서 비롯된 논의가 더 많았다. 그리스의 경제 위기가 지속되는 가운데 기획된 이번 도큐멘타는 기획 자체가 민감한 지점에 위치한다. 알다시피 독일은 그리스의 국가 부도 사태에서 에누리없는 자세를 지속적으로 유지해왔고, 그리스의 반독일 감정은 증폭되어 있다. 카셀이라는 중소도시에서 발현한 도큐멘타라는 브랜드가 60년만에 세계 문화의 보고, 그리스의 아테네에서 개최되는 것은 복잡한 경제적 상황을 제외하고도 꽤나 아이러니하고 상징적이다. 이전의 다른 도큐멘타와 달리 외부적인 정세 요인이 도큐멘타를 평가하는 주요 기준이 되는 것은 이례적이기도 하다. 동시에 상업행사로서 아트바젤이 스위스 바젤 뿐만 아니라, 홍콩과 마이애미에서 열리는 것과 같은 분점화가 현대미술, 혹은 컨템포러리 미술에 까지 영향을 미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것이 단순히 도큐멘타 14의 단발적인 시도인지, 앞으로도 고려되는 것인지 귀추가 주목된다.

 

  비엔날레와 트리엔날레에 비해, 카셀 도큐멘타와 뮌스터 프로젝트가 사람들에게 얻은 신뢰는 긴 준비 기간에 기인한 것이 크다. 2년 혹은 3년 사이에 세계미술의 흐름을 보여준다는 것은 사실 불가능에 가깝다. 2년이라는 기간은 오히려 만국박람회에 적합하다. 단순히 오래 준비하는 것이 유의미하다는 것은 아니다. 5년과 10년이라는 시간은 정치나 경제의 시간과 일치하지 않다는 것이다. 쉽게 생각해서, 5년과 10년 단위의 행사는 관광이나 경제의 의미로 운용하는 것은 어렵다. 5년과 10년은 대부분은 정치적 임기들보다 훨씬 긴 시간이므로, 오히려 외부 정세적 간섭요소가 줄어든다. 도큐멘타의 탄생이 정치의 예술적 억압에 반대하는 것으로 시작했으므로 이러한 선택은 설득력이 있다. 예술을 통해 다른 것을 만들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순수하게 예술적 입장을 견지할 수 있었던 것이 오히려 수많은 비엔날레에도 불구하고 도큐멘타가 꾸준히 견조하게 성장할 수 있던 배경이다. 그런 의미에서 도큐멘타14 디렉터 Adam Syzmczyk의 시도는 솔직히 도큐멘타의 긴 흐름에서 벗어나는 결정이었다.

 

  도큐멘타의 연혁에서 보면 알 수 있듯이, 도큐멘타의 타이포와 로고 자체는 그 도큐멘타의 성격을 반영한다. 로마자와 숫자의 표기, 도큐멘타의 앞 혹은 뒤에 숫자가 위치하는 것, 대문자 소문자의 차이 등 작은 변주들을 볼 수 있다. 그것이 가지는 디테일한 의미는 그 문자로만 온전히 표현되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러한 디테일이 흥미로운 것은 그 디테일한 변주 자체가 일종의 미술적 표현으로 느껴진다는 것이다. 도큐멘타의 시각 정체성은 처음 행사가 만들어졌을 때부터 바우하우스의 변주로써 만들어졌다. 물론 올해 도큐멘타 14의 폰트는 그것을 완전히 픽셀화하면서 타이포의 자체 속성을 무력화 시켰다. 디자인은 단순히 독일의 행사라는 큰 틀을 깨어버린 이번 도큐멘타 14의 행위와도 일치해 보인다. 디렉터의 선정에서부터 이번에는 지금까지의 도큐멘타가 아닌 다른 시도를 원했던 것으로 짐작된다. 그것이 훌륭한 선택이었냐는 것은 이론의 여지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각적 아이덴티티와 행사의 성격을 일치시키려는 것은 현대미술이 지향해 온 긴 흐름의 연장이라고 볼 수 있다. 시도 자체의 옳고 그름이 문제가 아니고, 오히려 이런 섬세한 시도들과 완결도가 도큐멘타의 저력이라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그럼에도 여전히, 예술의 정치력은 정치로부터 자유로울 때 발생한다라는 문득 머리에 떠오른 문구가 계속 뇌리에 앙금처럼 남는다. 그 말은 예술이 정치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는다는 말이 아니라, 어떻게 억압적으로 작동하는 정치에서 자유로와질 수 있는가에 대한 스스로 혹은 우리 자신에 대한 물음이다.


원문보기 전달

STAGE 3-1 : 곡성 哭聲

 

2016년 5월에 개봉한 이 영화는 수많은 해석과 논란을 일으키며 600만명이 넘는 흥행을 했던 영화이다. 당시의 답답한 상황들과 맞물려 느꼈던 엄청난 무력감이 이 영화를 흥행하게 만든 하나의 이유이기도 하다. 그 사이에 정말 많은 상황들이 지나가고, 모든 것이 정상으로 돌아가고 있다고 믿는 지금, 1년도 더 된 영화를 다시 소환하려고 한다. 그 사이에 무력감은 어떤 긍정적인 에너지로 전환되는 것처럼 보이는 지금, 세상이 뭔가 원하는 방향으로 가는 것처럼 보이는 지금, 이 영화의 세계가 유효하지 않은 것처럼 은폐된 지금.

세상은 변화한 것처럼 보이지만, 항상 삶의 전체를 가로지르는 구조들과 장치들은 그대로 건재하다. 여전히 태극기, 십자가, 성조기가 삼위일체의 형상으로 모습을 드러낸 상징과 의미, 그것을 믿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과 함께 하고 있다. 어쩌면, 이 영화를 다시 읽음으로써 다른 세계관을 좀 더 근원적으로 알 수 있을 지도 모른다.

 

이 영화는 쉽게 의심과 의혹에 대한 영화라고 읽혀졌다. 하지만, 의심은 유동성을 지향하는 행위이며, 진행 중인 행위이고, 흔들림이다. 일종의 틀깨기이다. 그런 의미에서 ‘곡성’은 의심에 대한 영화가 아니다. 반대로 견고한 믿음에 대한 것이고, 그 믿음을 깨지 않기 위해 파국을 지향하는 것에 대한 것이다. 이 영화는 기득권에서 벗어난 적이 없고, 사회의 중심이 아니었던 적이 없었던 인물이, 자신의 이해를 넘는 상황을 만나서 붕괴하는 이야기이다. 그 붕괴의 중심에는 일본인이라는 외부자가, 효진이로 대변되는 내부자가 있다. 흔들림을 견디지 못하고, 그 견고함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더 많은 치열함과 더 비열한 폭력이 필요할 뿐이다.

 

 

내 손과 내 발을 보아라

 

이 영화의 수많은 장치들은 쉽게 믿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다. 현혹은 의심에서 비롯된다기보다, 우리가 강력하게 믿는 믿음에서 비롯될 때가 많다. 감독은 고래로 가장 강력한 믿음, 종교에서 시작한다.

 

A “어찌하여 너희는 당황하느냐? 어찌하여 마음에 의심을 품느냐? 내 손과 내 발을 보아라. 바로 나다. 나를 만져 보아라. 너희가 보다시피, 나는 살과 피가 있다.“

B “어찌하여 너희는 당황하느냐? 어찌하여 마음에 의심을 품느냐? 내 손과 내 발을 보아라. 바로 나다. 나를 만져 보아라. 영은 과 뼈가 없지만 너희가 보다시피 나는 살과 뼈가 있다.“

 

영화의 도입부에서 제시된 성서의 구절 A에는 ‘영은 살과 뼈가 없지만’이란 구절이 없다. 성서를 빌어 오지만, 일정한 구절을 삭제하여 감독은 영화를 위한 무대를 마련한다. 이 무대 안에서는 모든 주인공들은 사람인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아시다시피 영화 안에서 유령, 사람, 귀신의 경계는 없다. 기가 막힌 이 세상은 현실, 환각, 환상을 넘나든다. 이 영화 안에서는 현실과 환상, 사람과 귀신, 과거와 현재, 과거와 대과거가 구분없이 감각의 차원에서 동등하게 풀어진다. 성서의 문구, 악마의 독백,  귀신의 대사는 동등한 요소들이다. 흥미롭게도 영화의 후반부에서 악마의 형상으로 변한 일본인은 정확하게 성서의 구절 B를 부제에게 이야기한다.

 영화 말미에 등장하는 악마는 예수가 부활하는 방식으로 세상에 다시 등장한다. 악마는 빙의를 통해서 세상에 나오는 것이 아니라, 부제의 거울로서 몸을 지닌다.  부제는 공포에 눌려, 악마의 살과 뼈를 만져볼 수 조차 없다. 악마 역시 부제와 접촉하지 않는다. 단지 사진을 찍을 뿐이다. 무력한 부제가 무너지며, 영화 전반을 사로잡고 있던 거대한 종교적 서사는 마무리된다. 엑소시즘은 시도되지도 않았고, 악마는 여전히 건재하다.

 

  모든 등장인물들은 일본인이라는 존재에 이미 현혹된 상태에서 의심의 원인이 되는 타자를 제거하기에 열을 올린다. 이쯤 되면 의심이라 하기 보다는 확신에 찬 광기이다. 결국, 영화에서 외부인이자 타자는 실제로 악마였음이 밝혀지고, 광기는 유의미한 것으로 증명된다. 자신의 세계를 지키기 위해 다른 세계를 배제하는 방식은 현실과 아주 흡사하다.

 영화가 제시하는 기본 배경들은 오래된 신념들과 일치한다. 무속이 여전히 살아있을 것같은 전라도의 원초적인 이미지, 악마스럽고 변태스러운 일본인의 이미지, 광인들의 광기, 여성과 아이에 대한 전통적인 이미지, 무속신앙이 가지고 있는 이미지들은 영화 안에서 더욱 설득력 있는 사실로 자리매김을 할 뿐만 아니라, 영화를 보고 있는 관객의 무의식에도 다시 각인된다.

 

실제 영화관에서 이 영화의 사건들에 접할 때는 그 강력함과 공포스러움에 압도되어 사건들의 디테일을 보기가 힘들다. 하지만, 영화의 기묘한 결말에 이르고 나면, 영화에서 이야기하는 단서들이 하나 둘 씩 생명력을 가지며 부활한다. 단서들은 하나의 방향을 가리키지 않는다. 분석하면 할 수록, 영화에 대한 것은 미궁으로 빠진다. 그러다 지쳐 혹은 확신있게 도달하는 결론이 있다면, 그것 역시 영화 전체를 아우르지 않는다. 감독의 의미하는 열린 결말은 그런 의미일 것이다. 이 지점에서 질문을 던지게 된다. 하지만 왜 이렇게까지? `

 

 

뭐시 중헌디?

 

우선 감독의 장치들을 짚어가보자. 감독의 가장 강력한 장치는 앞에서도 이야기한 종교적 요소들이다. 이 영화가 단순한 스릴러나 공포영화가 되지 않고, 악에 대한 진지한 신화로 다시 태어나는 것은 일본인이 단순한 범죄자가 아니라 우리의 손에 닿지 않는 추상적인 존재가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일본인이 초기의 시나리오처럼 일광과 같이 도망가는 씬이 있다면, 마지막에 얼마나 맥이 빠졌을까 쉽게 상상할 수 있다. 그런 종류의 결말이라면 관객들은 모두 안도했을 것이고, 영화 안의 사건들은 영화 안에서만 머무를 뿐, 일상으로 들어오지 않았을 것이다.

 

종교의 요소를 걷어내도, 이 영화는 쉽지 않다. 살인사건에서 가해자가 피해자를 죽이는 순간이 가장 결정적인 순간이라면, 영화에서 그 결정적 순간을 목도할 수 없다. 영화 안에는 현란한 사건의 흔적만 가득하다. 실제에서 관찰할 수 있는 것은 항상 사건의 흔적들과 소문들 뿐이다.  

 예외적인 순간들은 사람이라고 여겨지지 않는 대상들에서 발생한다. 첫번째 살인사건의 용의자와 좀비 박춘배. 둘은 당연히 없애야 하는 괴물이며 타자로 등장한다. 영화 안에서 목격되는 죽음은 그들의 죽음뿐이다.

 

 

뭐시 중하냐고?

 

‘곡성 谷城’과 동음의 ‘곡성 哭聲’은 모든 환상이 가능한 곳이다. 독버섯이 남자들의 불면, 환상, 악몽, 광기의 잠재적 원인으로 작동한다. 환각의 실제적인 이유일 수 있는 건강식품에 섞인 독버섯에 대해서는 영화에서 진지하게 언급이 되지 않는다. 하지만, 이 언급되지 않은 사소한 장치가 작가로서의 감독이 영화-현재에서 자유로와지게 한다.

 

‘곡성 谷城’이 아니라, ‘곡성 哭聲’이어야하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다. 실제 공간을 무대로 만들었을 때, 실제 주민과 지역에 미칠 부정적인 이미지에 대한 걱정 혹은 법률적인 문제가 발생할 가능성이 있을 수 있다. 아마도 이십세기 폭스사가 제작했으니, 이 요소를 고려했을 것이다.

좀 더 영화적인 이유를 찾는다면, ‘곡성 哭聲’의 무대가 실제의 ‘곡성 谷城’이 아닐 경우에 이 영화의 서사들이 훨씬 설득력을 얻는다. 전라도 사투리가 통용되는 이 장소와 시간은, 무속과 귀신이 등장하는 것이 어색하지 않은 장소이며, 원시적인 에너지가 아직 살아있는 곳이다. 그 조건을 만족할 때, 모든 일화, 꿈, 풍문, 소문들은 비로소 현실감을 획득한다.   

 

영화 안에서는 소리, 말은 아주 중요한 요소이다. 의아한 것은 아무도 곡소리를 하지 않는다. 죽음을 애도하지 않는다. 이 안에서 모든 소문들은 현실적 이미지를 지닌다. 말은 곧 실제가 된다. 영화 안에서 제시되는 사건들은 짐작컨데, 감독이 수집한 사건들이다. 영화 안에서는 모든 풍문들이 진실이며, 살아있어야 한다. 그래야 모든 원인이 일본인에게서 비롯될 수 있으며, 신학적인 서사의 악마가 탄생할 수 있다.

이 영화는 일반적인 시간을 따르는 것처럼 보이지만, 각각 다른 소문에서 비롯된 사건들 - 다른 시간대의 사건을 영화 안으로 소환한다. 각각의 사건들 만큼이나 많은 시간들이 영화 속에 내재되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것들이 ‘곡성 谷城’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믿게 만드는 장치들과 동일한 인물들(같은 경찰들)에 의해 다루어지기 때문에, 하나의 시간대라고 믿게 된다. 종구(경찰)/무명/일본인으로 대변되는 인물들을 통해서 대과거/과거/현재의 사건들은 영화 안으로 위험하게 안착한다.     

‘곡성 哭聲’과 ‘곡성 谷城’은 동명의 다른 시공간임에도 영화 안에서는 끝까지 혼용된다. 영화의 후반부에서 겨우 ‘곡성 哭聲’과 ‘곡성 谷城’이 같은 곳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유일한 단서를 제시한다. 일광은 영화의 말미에서, 곡성 8km라고 적혀진 표지판을 지나지만 아침에야 도착한다. 일광은 밤의 시공간에 도달할 수 없다.

보통 영화 안에서 사용된 트릭들이 친절하게 결말 이 전에 어느 정도 해소되는 것이 일반적인 관례라 한다면, 이 영화는 모든 장치들을 마지막까지 제시하지 않는다. 오히려 더 불친절하게, 영화의 결말에서 트릭들과 장치들이 더 격렬하게 충돌하게 만든다. 하지만, 감독이 구성한 이 정교한 무대에는 의도한 균열들이 있다.

 

 

모두 그 놈 짓이여

 

일본인의 방을 세 사람이 방문한다. 종구(경찰), 양이삼(부제), 오성복(경찰). 다른 두 명은 일본인의 방에 대해서 오성복을 통해 전해 듣는다. 그 방은 오직 오성복을 통해서 관찰된다. 그는 미친 사람처럼 중얼거린다. 모두 그 놈 짓이라고 사건이 일어나기 전에 그 사람을 찍고, 그 사람들을 죽게하고, 죽은 뒤에 다시 사진을 찍는다는 이야기를 한다. 일본인은 모든 일을 알고 있었고, 모든 일이 일어나도록 하는 힘이 있다. 그럴 수 있는 존재는 악마 뿐이다.

오성복은 일본인의 방에서 무엇을 깨달은 것인가? 그는 종구에게 효진의 실내화를 전해준다. 하지만, 영화에서 그는 일본인을 죽이는데 동참하거나, 부제처럼 일본인을 쫓는 것이 아니라, 주인집 아주머니를 살해한다. 실제로 그는 무엇을 보았는가?

 

일본인의 방은 기록의 방이며, 과거의 방이다. 동시에 탐정의 방이다. 이런 집착적인 스크랩은 보통 범죄자나 광인의 상징으로 나오지만, 사실은 수없이 접하는 작가의 방이기도 하다. 흥미롭게도 그 방에 있는 사진들이 영화에서 보여지지 않은 많은 것들을 채운다. 일광은 나중에 그것을 수집한다. 일본인이 세상을 접하는 것은 카메라를 통해서 이다. 그리고, 일본인의 방은 심지어 사진을 찍으면 영혼을 뺏긴다는 오래된 이야기조차 재현한다.

영화의 시간이 우리가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크게 굴절되어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바라본다면, 사실 일본인의 방은 시간적으로 영화 안에서 항상 가장 나중에 만들어진다. 심지어 그 방은 영화와 영화 이 전에 일어난 일들의 시작과 결말도 지니고 있다.  

 

 

버럭지같은 놈이 미끼를 생켜부렀구먼

 

일본인을 죽이러 간 종구와 종구친구들이 굿을 통해 부활한 박춘배를 죽이고 일본인을 쫓는 긴 시퀀스가 있다. 이 사건은 영화 안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이다.

 

박춘배는 효진을 제외하고 가장 이름이 많이 불리워진다. 그는 우물에서 발견된 세 여자를 죽인 용의자로 일본인에 의해 트럭에서 발견된다. 그리고 일본인과 일광의 굿 씬에서 부활한다. 박춘배는 흘러가는 풍문이 아니라, 계속 이름이 보여지고 호명된다. 일본인이 차에서 그를 발견했을 때, 군복에 새겨진 박춘배의 이름이 보여진다. 미친 여자가 자살한 나무 밑에 있던 무명이 입고 있던 군복은 박춘배의 군복이다. 사람들이 세 아주머니가 죽은 현장에서 박춘배와 부인의 사진을 볼 때, 경찰서장은 그의 이름을 세 번 부른다. 왜 박춘배는 계속 호명되는가? 박춘배는 왜 다시 부활하는가?

연이어 목격자로서의 일본인을 쫓는 장면들 역시 곡성 안의 다른 사건들과 다른 지점이 있다. 박춘배를 죽이는 장면을 목격한 일본인은 그들에게 쫓기다가 결국은 벼랑에서 떨어진다. 공교롭게도 일본인은 한참을 달리는 그들의 차 위에 떨어진다. 그리고 종구와 종구친구들은 일본인을 다시 벼랑으로 밀어던진다. 그 사이 살짝 무명으로 보이는 여자의 영상이 끼어든다.  

 

두 사건들은 사건 자체가 그 사건을 다시 지시한다. 죽은 사람을 죽인다. 떨어진 사람을 다시 떨어뜨린다. 이 반복은 이전의 과거, 이후의 미래를 연상하게 한다. 현재에 좀비와 트럭 위로 떨어진 사람이라는 설정이 있지만, 과거에 사람 혹은 떨어 뜨린 행위가 동시에, 동시간대에 존재하면서 기묘한 시간적 루프를 형성한다.

공교롭게도 무명, 일본인, 박춘배 이 셋은, 이 사건을 기점이나 종점으로 서로 다른 방식으로 부활한다. 무명은 박춘배의 군복, 술집 작부의 가디건, 효진의 머리핀, 세 가지 사물에 연관된 귀신으로, 일본인은 종구와 종구친구들이 준 죽음에서 부활한 악마로, 박춘배는 좀비로 부활했지만 종구와 종구친구들에 의해 다시 죽는 좀비로. 이 사건은 곡성 전체의 내러티브에서 일종의 균열이자, 무명이 언급한 원죄적 사건이다. ‘니 딸의 애비가 남을 의심하고 남을 죽일라카고 그래서 죽여서’

 

이 사건은 모든 이야기가 시작되는 대과거이자 동시에 앞으로 펼쳐질 미래의 연옥이다.

 

 

어찌하여 두려워하느냐?

 

“3) 장치 개념은 ‘보편적인 것들’에 대한 거부와 관계가 있다. 하지만 그것은 동시에 보편적인 것의 범주 그 자체를 대체하고 치환하고 있는 개념이기도 하다. 3절에서 제기된 ‘어원’에 관한 물음은 바로 4절에서 희랍어 ‘oikonomia’ 개념에 대한 분석으로 이어지고 있다. 왜 이러한 분석이 ‘장치’라는 개념의 파악에 있어 중요한 의미를 갖는가? 아감벤의 설명에 따르면, 먼저 이 ‘오이코노미아’의 개념은 기독교 성립의 핵심적 개념 중의 하나인 ‘삼위일체’의 해석에 있어 중요한 의미를 띠고 있다. 다시 말해서, 존재에 있어서는 하나의 실체인 신이 어떻게 성부, 성자, 성령이라고 하는 ‘세 가지’ 모습을 띨 수 있는가에 대한 대답 속에서 이 ‘오이코노미아’의 개념이 재-전유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오이코노미아’라는 개념 자체가 이미 삼위일체라는 기독교적 도그마의 성립을 위한 하나의 장치가 되고 있는 것인데, 바로 이러한 장치가 신이라는 ‘하나의’ 실체 안에서 존재와 행위를 분리해내는, 곧 존재론과 실천론을 분리해내는 작용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아감벤이 보기에, 이러한 분리는 곧 ‘오이코노미아’ 개념의 재-전유가 서구 문화 안에 불러일으킨 하나의 분열증이다.”

 

최정우 <장치란 무엇인가? 푸코 들뢰즈 아감벤>

https://netpolity.wordpress.com/2012/12/25/장치란-무엇인가-푸코-들뢰즈-아감벤

 

영화와 관련된 가장 설득력 없었던 리뷰들은 영화와 감독이 감독의 종교적인 불신을 표현했다고 하는 것들이었다. 근래에 이 영화처럼 종교적인 구조를 지닌 영화를 본 적이 없다. 영화는 삼위일체라는 고전적인 종교적 장치를 끊임없이 반복한다. 일본인-일광-악마, 무명-미친여자-귀신과 같이 하나의 존재이면서, 동시에 세 가지 혹은 그보다 많은 모습으로 현현하는 구조를 끊임없이 만들어낸다. 그러한 강박은 공간이나 시간에 있어서도 하나가 아닌 세 개 이상의 층위를 만들어낸다. 그 층위들은 너무나 촘촘해서 숨이 막힐 지경이다.

하지만, 그 층위를 구성하는 이 시공간과 인물들 사이에는 균열이 발생할 수 밖에 없다. 여기서 발생한 균열과 분열증을 감독은 꽤나 진부한 방법으로 봉합시킨다. 그의 종교적 세계는 귀신의 세계를 소환하고, 외부의 타자를 악으로 재생하면서 말끔하게 하나로 굴러가기 시작한다. 항상 그렇듯이 종교의 세계는 싸울 상대가 없을 경우에 존재하지 못한다. 악마는 종교를 위한 필요조건이다.

흥미롭게도 감독이 제시하는 삼위일체의 구조는 작년 말에 우리를 당황스럽게 만들었던 태극기, 성조기, 십자가가 혼연일체된 시위 사진과 유사한 방식으로 봉합된다. 인과성은 필요없다. 당연히 세 가지가 결합해야할 논리적 이유는 존재하지 않는다. 단지, 세 가지가 결합하기 위해서는 더욱더 정교한 장치들이 필요할 뿐이다.

 

일본인에게 이름이 없는 것은 그가 여러 행위들의 행위자 이며, 수많은 이름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일본인은 살인범이기도, 강간범이기도, 아동성애자이기도, 무당이기도, 귀신이기도, 악쿠마 이기도 하다. 동시에 일본인은 영화 안에서 수많은 사건들의 목격자이기도, 범인이기도, 피해자이기도, 기록자이기도 하다. 영화의 수많은 사건들에서 일본인은 끊임없이 소환된다..  

부제에 의해 부활이 목격되기 이전 부터 일본인은 끊임없이 부활하는 자이며, 죽지 않는다. 일본인의 실체는 언어, ‘말’ 그 자체이다. 그는 항상 언어/소문을 통해 실체를 지니고 지속적으로 소환된다. 그리고, 일본인은 소환하는 이의 ‘거울’로서 존재한다. 보는 이가 원하는 모습으로 영화 안에 등장한다. 부제가 소환한 일본인은 뼈와 살이 있는 뿔 달린 ‘붉은 악마’이다.

 

 

그 놈은 귀신이여

 

무명은 종구가 믿고 싶지만 믿을 수 없는 것을, 일본인은 종구가 믿기 쉬운 것을 투영한다. 둘은 밤의 시간에 각자의 실체를 드러낸다. 일본인은 부제에게, 무명은 종구에게. 종구는 자신을 붙잡는 무명의 손을 팽개친다. 이 장면은 꽤나 특이한 장면이다. 무명은 귀신이나 초자연적 존재이다. 이 장면에서 무명과 종구가 적어도 그 순간, 같은 차원에 존재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무명은 왜 자기 딸에게 이 일이 일어났냐는 종구의 질문에 이렇게 답한다.

무명 : 니 딸의 애비가, 죄를 지어서.

종구 : 무슨 죄, 내가 무슨 죄를 지었는데?

무명 : 니 딸의 애비가, 남을 의심하고, 남을 죽일라카고 결국엔 죽여버렸어.

종구 : 네 딸이, 네 딸이, 네 딸이 먼저 아파 가지고 그런 것이제. 그것이 어찌케 (두번째 닭이 운다)  

 

보통 이 대화에서, ‘니 딸의 애비’가 당연히 종구라고 생각하고, ‘니 딸의 애비’가 일본인을 의심하고, 일본인을 죽일라카고 결국엔 죽여버렸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무명은 죄를 지은 자의 이름을 종구라고 부르지 않고, ‘니 딸의 애비’라고 부른다. 의아한 호명법이다.

이 영화에서 이름이 있는 자는 종구, 효진, 오성복, 양이삼, 권명주, 박춘배, 덕기, 흥국, 병규이다. 그 이외의 사람들은 이름 조차 가지고 있지 않다. 병규(종구 친구)를 제외하고, 다른 이름 있는 자들의 공통점은 용의자이거나 살인자이다.

굳이 무명이 종구를 ‘니 딸의 애비’라고 표현하는 것은 몇 가지 가능성이 있다. 희미하게 효진의 애비가 종구가 아닐 가능성(그럴 경우, 동시에 니 딸의 애비가 저지른 죄는 다른 것일 수도 있다), 지금 무명이 대화하고 있는 이가 사람-종구가 아닐 가능성, 무명이 생각하기에 종구가 아직 ‘이름 있는 자’-‘죄지은 자’-‘가해자’의 위치에 있지 않을 가능성.     

 

 

아니여, 절대 아니여

 

“왜 종구가 그러한 일을 당해야 했는가. 무명은 ‘아비가 (외지인을) 의심하고 해쳐서’라고 답했는데, 의심하기 전부터도 종구네 가족에겐 어떤 징후가 보였다는 점에서 앞뒤가 바뀐 것이 아닌가”

 

“영화를 만들기 전 성직자를 찾아다녔다. 몇 개의 상황을 놓고 질문하고 동냥하듯 답을 모았다. 다양한 종교의 얼굴을 보고 싶어서 네팔과 일본도 갔다. 그런 과정을 겪으면서 현존하는 종교는 신성할 정도로 정말 완벽하구나 느꼈다. 성직자들의 세계는 이렇듯 자기 완결적이고 완벽한데 내 마음은 여전히 납득이 안됐다.

여러해 전 이라크에서 누군가가 피살을 당한 경우가 있었다. 어떤 성직자에게 그분은 왜 돌아가셨는지 물었다. 그랬더니 가지 말라고 하는 곳에 가서 하지 말라는 일을 하다가 엄한 사람은 살인자로 만드는 죄를 저질렀다는 답을 듣고 경악했다. 무명(천우희)의 답변은 그런 마음을 일으키려 했다.

이 영화는 피해자에 대한 이야기다. 그가 왜 피해자여야 했느냐가 중요한데 알고보면 누구도 피해자가 되어야 할 이유가 없다. 이건 아주 충격적인 얘기였다. 인간이 존재해야 할 이유는 있는데 사라져야 할 이유가 없다는 것은 말이 안된다고 생각했다. 인간의 존재 이유는 신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으니 신께 말씀드리고 싶었다. 하나님 당신의 선과 존재 이유가 의심을 받고 있네요. 무명은 신과 같은 존재라고 생각했다. 인터넷에서 영화를 본 사람들이 감독에게 묻는 여러 이야기들은 하늘에 계신분께 질문하고 싶은 것과 동일한 내용이다.”
 

한겨레신문 5월 12일자:
http://www.hani.co.kr/arti/culture/movie/744857.html

 

 

기자는 이 영화의 사건들이 선형적인 구조라는 것을 믿으며 질문한다. 그 질문에 흥미롭게도 감독은 무명의 화법을 구사한다. ‘존재하는 이유는 종교와 신과 밀접한 연관이 있는데, 종교와 관련된 사라져야 하는 이유는 납득할 수 없다. 무명에게 질문하고 싶었던 것은 신에게 물어보는 것과 같은 이유에서이다.’ 감독은 사람이 사라져야 하는 이유로 신 반대편의 신적인 존재를 영화 안에서 재생했다. 그는 영화 안에서, 강력하게 자신이 던지는 질문의 해답을 이미 제시했다. ‘종구가 피해자여야 하는 것이 중요한데, 알고 보면 누구도 피해자여야할 이유가 없다.’ 인터뷰가 왜곡되는 경우가 있다고 가정을 해 보아도, 감독의 언어 또한, 돌고 돌아 다시 원점으로 다가오는 무명의 이야기같다.

 

이 영화 전체를 아우르는 정교하고 다양하게 해석가능한 플롯들은 사실, ‘이 영화는 피해자를 위한 영화다’라는 한 마디에 조심스레 흔들린다. 감독이 정교하게 구축한 신적인 세계, 그것과 같이 연동하는 무속, 삶의 세계, 그것들 사이에 만들어진 그 세밀한 균열들이 지향하는 바가 지닌 목적이 궁금해진다. 작가의 입장에서, 영화가 이렇게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것은 우선, 작업적으로 성공적이라는 것을 안다. 감독은 분명히 종교적인 논쟁을 예측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가 던진 ‘이 영화는 피해자를 위한 영화이다’라는 명제 또한 격렬한 논쟁을 일으킬 것을 알았을 것이다. 그렇지 않다고 상상하기에 감독은 너무 치밀하다.

 

그렇다면, 종구는 피해자인가? 효진이 그렇게 된 것은 정말 일본인 때문인가? 이 영화는 가족 간의 살인, 존속 살인에 대해서는 허심탄회하게 시각적으로 다루지만(무대의 요소로), 가족 안으로 전혀 들어가지 않는다. 그 안은 또 다른 지옥도 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신과 인간의 관계에서 종구를 피해자로 만들어 버리고, 그 구도 안에 종구의 죄들을 묻어 버리고 일반화시킨다. 사실은 유일하게 호명되는 두 사람, 박춘배와 효진이 그 죄의 원천이다. 일본인은 그 죄의 외부적 원인, 종구가 사라져야 하는 신학적 해답일 뿐이다.   

 

 

바로 나다

 

외부자와 내부자 사이에 흐르는 경계와 그 안의 관계들을 성서를 통해 촘촘히 채운 감독의 세계는 공포스럽다. 그 공포는 종구가 그 세계에서 망가지는 것을 보는 것과는 전혀 다르다. 아마도 내부자가 한 번도 되어 보지 못한, 공동체의 일원이 되지 못해 본 사람이라면, 나홍진이 구축한 세계가 훨씬 공포스럽게 여겨질 것이다. 정말 많은 다수가 종구와 같은 선택을 할 것이라는 것을 무의식적으로 알게 된다.

 

영화 ‘이끼’의 구조는 ‘곡성’에 비하면 훨씬 단순하다. ‘이끼’에서는 주인공이 피해자가 되는 이유가 확실하다. 주인공은 마을을 내부자이자 외부자 로서 관찰하게 되고, 이상한 일들이 발생하는 것을 쫓아가다가 마을의 비밀에 다가간다. 마을 사람들은 그것을 방어하려고 하고, 그를 막으려고 한다. ‘이끼’의 갈등구조와 공포는 ‘곡성’과 비교하면, 단조롭고 평이하기 까지 하다. ‘이끼’는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조용하고 평화로와 보이는 마을’의 허상을 폭로한다. 공포와 의심의 범주를 아주 가까운 이웃의 속성으로 끌어들인다. 그리고 오히려 폭력의 이유가 확실하다.

 

‘곡성’에서 나갈 수 있는 출구는 애초에 설계되지 않았다. 나홍진 감독의 모든 영화가 그렇듯이. 그가 구축한 것은 지옥도이고, 지금까지 만든 것 중에서 가장 정교하다. 가해자와 피해자라는 이 복잡한 담론을 덥석 던져 놓지만, 신학적 요소들이 이미 인간들 모두를 압도한다. 등장인물들은 나홍진 감독이 구축한 세계에서 계속 고통받는다. 폭력은 이미 자연스러운 요소이며, 그것은 그 세계의 기본 배경이다. 감독이 말하는 ‘피해자’는 종구의 처나, 할머니나, 미친 여자나, 효진이나, 장모나, 우물 속에서 발견된 세 명의 여인이나, 아들이나, 부부나, 주인집 아주머니가 아니다. 우리 모두 인간이라는 이름으로 ‘피해자’일 뿐이고, ‘곡성’에 구축된 지옥도에서 나홍진 감독의 말은 항상 옳다.

 

나홍진 감독이 구축한 이 심오하고 견고한 세계 앞에서, 실상 묘하게도, 아무 것도 할 수 없으니 가만히 있으라는 강한 의지를 만나게 된다. 이 혹독한 세계, 극장에서 유일하게 소환되는 신적인 존재는 감독 뿐이다. 사실, 우리는 그가 구축한 세계과 그가 믿는 세계에 단 한발짝도 들어가거나, 들여보내질 수 없다. 왜냐하면, 우리의 대부분은 항상 적지 않은 수이지만, 항상 소수일 것이며, 누구의 외부자일 수밖에 없다. 우리 대부분이 그의 세계에서 할 수 있는 역할은, 피해자로 호명되지도 않는 수북이 쌓이는 시체더미이거나 악쿠마로 변한 외부자일 뿐이다.

반대로, 견고함에 머무르고 있던 종구에게 역시 이 세계는 혹독하다. 자신의 세계를 유지하기 위해 그는 일본인을 죽이려고 하고 죽여야한다. 하지만, 결국은 자신의 가족을 지켜내지 못한다. 감독에게 피해자로 인정받은 종구 역시 좌충우돌하며, 아버지로서 효진이를 보호하겠다는 집념을 표현하며 죽어간다. 그 일념이 잘못되어 있든, 아니든 상관은 없다. 이 견고한 신념의 아름다운 숭고함이 몸에서 소름이 돋게 한다.

나홍진 감독이 구축한 세계, 그가 현실이라고 믿는 세계에서는 모두(내부에 있다고 믿든 외부에 있다고 믿든)가 끊임없이 부활하는 악마를 만날 수 밖에 없다. 그 세계의 시점은 항상 살인자들과 가해자들의 것이다. 그의 세계에서 그들에게 속죄할 시간은 주어지지 않는다. 원인은 저 멀리에 있을 뿐이다.

아무도 그 세계를 벗어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이 복잡한 서사 전체는 ‘어쩔 수 없음’이라는 거대한 출구로 귀결된다.

 


전달


STAGE 1-2 : 블랙리스트, 관료제

 

 

적폐 청산이란 무엇을 하는 것일까? 청산해야 할 적폐들은 수없이 많지만, 최근 며칠 동안 선거와 관련된 뉴스를 보면서 떠오른 것은 유신헌법의 잔향이었다. 1972년에 제정되어 유신체제의 근간이 된 유신헌법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1조 2항에 나온 주권자에 대한 규정이다.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국민은 그 대표자나 국민투표에 의하여 주권을 행사한다” 이후 대통령 긴급조치를 통해 이 헌법에 대한 부정적인 의견을 표출하는 것 자체가 범죄로 규정된 것처럼, 주권자인 국민은 직접 정치에 대해 이야기할 수도 없고, 오직 투표나 청탁을 통해서만 정치에 관여할 수 있게 되었다. 즉, 누구를 지지하느냐 어느 줄에 서느냐가 ‘정치’가 된 셈이다. “

 

“올해 1월, <한겨레>가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더 나은 민주주의 사회를 위해 필요한 것으로 시민들이 검찰 개혁에 이어 두번째로 꼽은 것이 시민의 직접 정치 참여였다. 이는 꼭 대의제를 부정하자는 이야기는 아니다. 선거과정을 통해 더 다양한 의견들이 드러날 수 있게 하는 것도 우리가 할 수 있는 직접 정치 참여의 한 방법이며, 성소수자들의 행동이 바로 그런 것이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투표뿐이라는 생각에서 벗어나지 않는 한, 유신시대는 끝나지 않는다.”

 

[세상 읽기] 선거는 어떻게 민주주의를 파괴하는가 / 후지이 다케시

2017.4.30일자 한겨레 칼럼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792898.html

 

 

대통령 선거가 있기 전 2017년 4월 30일자의 이 컬럼을 보며, 한줄기 단비를 느꼈다. 탄핵이 이루어지고, 대통령 선거 전까지의 기간은 그야말로 다른 의미로 아수라였다. 모든 정치인들은 국민과 촛불에서 비롯된 힘이 위대함을 역설하며, 자신들이 그 촛불의 대변인이 되겠다고 부르짖었던 시기였다. 누구를 대통령으로 찍겠냐는 것이 여론몰이와 토끼잡이의 이유가 되기도 하고, 서로의 반대세력들과의 충돌들도 있었다. 인터넷은 서로와 서로를 향한 방어와 공격으로 열심히 달아올랐다. 아마도 일반 국민이 정치에 직접적으로 도달할 수 있는 유일한 기회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후지이 타케시의 칼럼은 문재인의 ‘동성애 반대’ 발언에 대한 항의로 문재인 연설때 시위를 했던 성소수자 단체를 향해 발현했던 비난의 분위기를 언급하기도 한다. 대통령 선거와 둘러싼 그 열광과 열망 사이에서 사람들의 생각이 극명하게 드러나는 순간을 관찰하게 되는 기회들이었다.

 

다행히 정권은 바뀌었다. 그리고 나서, 갑자기 찾아든 편안함이 있었다는 것은 부정하지는 못하겠다. 정말 어려웠던 탄핵정국이 지나고 대선을 거치면서 세상은 이제 조금 편안해진 것처럼 보인다. 여전히 새 정권은 분투중이지만, 문재인 대통령이 취임한 일주일간의 경험은 이전 정권이 보여준 몰상식에 비하면, 너무나 상식적이어서 이상했다. 가슴을 쓸어내리고 정말 이번에는 사람을 잘 뽑았구나하는 안도의 한숨을 쉰 사람들이 많았을 것이다. 갑자기 나라가 나라같아진 것같다는 평도 많았다. 사람들이 대통령이라면 갖추어야한다고 생각하는 행위와 이미지를 보여주는 것만으로도 보는 이의 마음은 너무 편해졌다. 문재인 대통령의 행보는 석 달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아직은 조심스러운 순항중이다.

 

다 좋은 데 무슨 또 잡소리를 하냐고 할 사람들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후지이 다케시의 컬럼은 중요한 질문을 다시 던지도록 한다. ‘적폐’는 단순히 정치적으로 반대세력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 ‘적폐’를 청산한다는 것은 그냥 다시 줄을 서는 것이 아니라, 생활의 양식을 변화시키는 것이라는 것.

 

 

성城 : 끊임없이 소환되는 중세 中世

 

1.

임금님의 사건수첩 (2017 문형선 감독)은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코믹 추리극이다. 조선명탐정 시리즈와 좀 다른 점이라면, 주인공이 왕이라는 것. 이 영화에서 흥미로운 부분은 예종(이선균)이 조선의 권력 구조를 이야기하는 장면이다. 나라를 건국할 때 도움을 준 개국공신들, 그리고 온갖 결혼과 조직으로 엮어진 관료조직으로 촘촘하게 구성된 관료사회를 이야기하면서, 왕이라고 해도 모든 것을 관여하거나 뜻대로 하지 못한다고 이야기를 한다. 영의정 역시 조선은 사대부의 나라라고 이야기하면서, 자신들의 말을 따르지 않는 왕을 탐탁치 않게 여기며, 왕을 제거할 계획을 짠다. 물론 자신의 손을 통해서가 아니라, 뛰어난 무술실력으로 천민에서 발탁된 병조판서를 통해서 말이다. 이러한 설정은 사극에서 너무나 전형적이어서 다시 언급하는 것 조차 진부하다. 하지만, 예종이 말하는, 친인척, 소개와 발탁, 학연을 통해 만들어진 관료체계란 현재의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하게 다가와서, 오히려 현재의 이야기에 대한 비유로 들린다. 그 역시 자신이 제어할 수 없는 관료체계에 맞서서 환관과 학자에 둘러싸인 자신의 비밀조직을 구성한다. 종국에 예종(이선균)이 권력을 유지할 수 있었던 유일한 방법은 그가 만든 조직이 아니라, 희극적이게도 ‘조선제일검’이라는 그의 농담 같은 진실 때문이었다.

여기서 왕은 권력의 정점에 있으면서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존재이다. 예종(이선균)은 그 관료제에 대항함과 동시에 진정한 왕으로 거듭나고자 한다. 진정한 왕의 필수 조건이란, 위에서 아래로의 상명하달의 완벽한 관료제를 완성한다는 것이다.

 

2.

촛불집회에 반하던 지난 태극기 집회는 대단히 기괴한 상징체계를 제시했었다. 태극기, 성조기, 십자가가 거대하게 함께 하는 광경을 기억한다. 기독교와 정치와 미군정시절의 추억이 결합한 기묘한 광경이었다. 근래에 들어 엠블렘이 그렇게 강렬하게 작동한 때를 찾기가 힘들 정도이다. 그 상징체계 안에서는 애국 = 친미 = 기독교 = 박근혜의 공식으로 이어지면서, 현재 우리의 정치가 왕정과 신정의 어느 지점에 있었음을 각인시켰다. 박근혜 전 대통령은 단순히 왕 = 독재자의 딸이 아니라, 왕 = 구원자의 지점에 있었던 것이다. 다른 표현으로 하면, 그녀는 모든 것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공화국에서 투표로 뽑힌 대통령임에도 불구하고 그녀를 둘러싼 이미지는 극도로 그로테스크하다.

 

영웅, 지도자, 구원자의 신화는 뿌리 깊은 믿음이긴 하다. 헐리우드의 영웅들이 아니더라도, 현재의 문제를 해결해 줄 누군가, 나를 보살펴줄 누군가를 무의식으로 원한다. 현실에서는 새로운 사람이 권력자로 있으면 모든 것이 바뀔 수 있을 것이라는 일종의 신앙과 같은 열광이 대통령선거 때마다 보여지는 것도 사실이다. 보통 그러한 열광은 대통령을 선출할 때, 후보자들이 보여주는 이미지에 대한 열광일 뿐일 경우가 많다. 박근혜 전 대통령 또한 온전한 개인이라기보다는 개인으로 이미지화하는 정치세력의 큰 덩어리이다. 그의 지지자와 그는 분리된 존재들이지만, 이미지로서의 정치 안에서 하나로 구성된다. 그들이 함께 구성하는 이미지는 형언하기 힘든 광기가 격렬한 욕망과 함께 뒤범벅되어 나타난다. 신앙과 군신의 관계로 엮어진 끈끈함은 주술적 동질감으로 똘똘 뭉쳐있다. 그것은 심지어 그들만의 헤테로토피아처럼 보인다.

 

3.

검사들의 이야기를 희극적으로 만들어낸 ‘더킹 2017’은 박태수(조인성)이 어떻게 정치검사의 반열에서 내부고발자가 되는지, 그래서 어떻게 정치인으로 다시 태어나는지를 희극적으로 보여준다. 검사의 세계는 옳고 그름의 세계가 아니라는 단순한 진리에서부터, 우리나라의 현재에서 용인하는 권력의 세계가 가감없이 보여진다. 박태수(조인성)이 전라도 출신에 백도 없이 사법고시를 통해 권력의 핵심으로 다가가는 중에 한강식(정우성)을 만나게 된다. 한강식(정우성)은 이미 정치 검찰로 성공한 위치에 있으며, 정권이 바뀌는 시기마다, 정치세력들 사이에서 적절히 행동하면서 자신의 권력과 부를 유지하는 인물이다. 이 영화 안에는 진실이나 시시비비에 대한 고민이나 번뇌는 담지 않고, 시종일관 가볍다. 그 와중에 대선을 앞두고, 검사들이 용하다는 무당과 굿을 하면서 같이 뽈짝뽈짝 뛰는 장면이 기억에 남는다. 정말 어이없는 줄서기구나 하는 생각과 동시에, 저 말할 수 없는 가벼움이 진실과 가장 근접한다는 것 때문이다. 후지이 다케시가 언급한 줄서기가 자신들의 생존과 함께, 처절한 희극의 형태로 발현한다.

이 영화의 가장 큰 장점은 우리가 말하는 관행 혹은 적폐가 놀랄 만한 비리가 아니라, 우리 사회에 정말 한없이 가까이 밀착되어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광기는 주술과 결합해서 더 이상은 유머스럽지 않다. 왜곡된 디오니소스의 축제는 관찰자에게 마치 멈출 수 없는 웃음처럼, 제어할 수 없는 피곤함으로 다가온다.  

 

사법체계에서 가장 이성적인 집단이어야할 검찰이 가진 비이성적 행태가 너무도 당연하게 다가오는 것은 그만큼 현재 우리가 얼마나 비틀어져 있는 곳에 위치해 있는가를 인식하게 만든다. 검찰은 돼지발정제에 대한 글을 책에 쓰고도 대선후보로 나올 수 있는 뻔뻔함이 용인될 수 있는 관료제에 불과했던 것이다. 그것은 후안무치가 아니고서야 그 조직에서 살아남을 수 없다는 것을 반증하기도 한다.  

 

 

블랙리스트 BLACKLIST

 

2017년 7월 27일 블랙리스트와 관련된 첫번째 선고가 있었다. 김기춘 전 비서실장은 직권남용과 위증으로 징역 3년, 조윤선 전 문체부장관은 징역 1년, 집행유예 2년을 받았다.

재판부는 김 전 실장에 대해선 블랙리스트 실행의 '정점'에 있었다며 유죄를 인정했지만, 조 전 수석에게는 직접 지시하거나 보고받은 사실이 인정되지 않는다며 무죄 판단을 내렸다.’  

 

연합뉴스 2017년 7월 27일자 <‘블랙리스트' 함께 기소…김기춘 유죄·조윤선 무죄는 왜?>

http://www.yonhapnews.co.kr/bulletin/2017/07/27/0200000000AKR20170727170800004.HTML?input=1195m

 

분노한 사람들은 김기춘의 3년과 라면을 훔친 도둑에게 부여되는 3년을 비교한다. 노희찬 의원은 조윤선의 위증은 유죄, 직권남용은 무죄라는 판결을 보고 그녀를 투명인간에 비유했다. 사법부가 가진 정의와 관련된 형량은, 너무나 전형적인 유전무죄, 무전유죄를 구현한다. 화이트칼라 범죄는 블루칼라 범죄보다 훨씬 우아하고 용서받을만한 것이다.

 

이 판결을 보면서, 예전에 조영남 위작사건과 관련된 글을 쓰던 때, 느꼈던 사법부의 무지를 다시 느꼈다. 사법의 범주에서 바라보는 예술과 관련된 시선은 항상 예술과 무관하다고 생각하는 시민의 사고 이상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그들이 사회의 엘리트층을 구성한다고 스스로 자부함에도 불구하고 문화예술에 대한 이해와 지식이 전혀 없다는 것을 줄곧 확인하게 된다. 무지하다고 느낄 때에는 좀 더 신중해야하는 것이 맞지만, 보통은 더욱 과감할 따름이다.

 

예술가는 표현하는 것을 업으로 한다. 어떤 단체나 조직의 이득을 대변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으로서의 자신의 의지와 생각을 자유롭게 표출하는 것 자체가 가장 중요한 일이다. 그래서 블랙리스트는 정부지원을 받고, 받지 않음의 단순한 경제적인 문제가 아니다. 블랙리스트는 검열이다. 검열은 헌법 상에 포함된 표현의 자유, 국민의 기본권을 제한하는 것이다. 특히나, 표현 자체를 직업으로 삼는 예술가에게는 일종의 사형선고같은 것이다. 예술의 사회적 역할은 국가공무원이 지정하고 요청하는 것처럼, 시민의 문화활동을 고양하고, 사회를 아름답게 꾸미는 것이 아니다.

 

항상 문화 현장에서도 가장 많이 듣던 소리 중 하나는 본인은 어쩔 수 없다는 것이었을 것이다. 수많은 실무자는 조직에 책임을 넘기며, 자신은 지금 이상의 다른 것을 할 수 없다는 이야기를 종종 한다. 예술은 조직과 조건에서 비롯된 그 불가능함에 대해서 발언할 수 있는 공식적인 창구이다. 그것은 아주 사적인 이야기에서부터, 아주 공적이고 정치적인 이야기까지 포함한다. 예술 혹은 예술가는 바로 말 못하는 당신을 위한 사회적 여분인 것이다. 아마 문화관련 국가공무원이면서도 이러한 기본적인 기반에 대한 이해가 전혀 없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그럼에도 그들은 항상 전문가로서 군림하려고 한다. 특검조차도 블랙리스트가 헌법상의 권리를 침해한다고 보지 않았다. 특검 역시 김기춘과 조윤선을 단순히 일반적인 관료의 일인으로 파악한 것이다. 그들 역시 그 거대한 관료조직의 일부이기 때문에 가지는 한계일지도 모르겠다.

 

 

적폐 積弊 : 오랫동안 쌓이고 쌓인 관행, 부패, 비리 등의 폐단

 

관료제의 가장 큰 특징은 피라미드식 구조이면서 상명하달이 쉽게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하는 중앙집권적 구조이다. 정책이나 행정처리에 있어서 일관성을 유지하고 신속하게 시행하는 것이 본래 관료제의 이상적인 목적이다. 이 구조 안에서는 당연히 피라미드의 상위 구조에 있는 관료가 훨씬 많은 책임을 가져야하는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심지어 나라의 수뇌부 조차 ‘어쩔 수 없었다’라고 이야기를 한다.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정무수석, 혹은 대통령이 어떤 행위에 책임이 없다면 과연 누구에게 있는가? 우리나라 조직의 구조에서는 그것을 담당한 하위 실무자에게 책임을 묻는 것이 비일비재하다. 피라미드 구조의 견고한 조직에서는 당연히 아무도 판단할 수 없으며, 아무도 책임질 수 없다. 피라미드 구조에서 하위 실무자가 책임을 지는 조직이라면, 그 조직은 이미 존재의 가치를 잃어버리고 무너져버린 조직이다. 관료제의 이상적인 장점을 잃어버린 조직은 기생수처럼 조직의 생존을 악착같이 추구하기 마련이다.

  

조윤선은 보고받지 않았기 때문에 무죄이며 책임이 없다고 사법부는 판결했다. 청와대에서 나와서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을 하면서 김기춘의 명령을 그대로 따른 죄밖에 없다. 문화체육관광부의 수장이었던 그녀는 여기서만 김기춘의 똘마니로 역할을 한다. 그녀는 장관이었지만, 스스로 공적인 책임을 질 능력이 없는 것으로 법원은 판결했다. 이 판단기준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정권들이 끊임없이 바뀌지만, 유지되어온 국가공무원으로 대변되는 조직이 얼마나 썩어버렸는지를 관찰해야한다. 조윤선에게 적용된 현재 재판의 기준은 박근혜 전 대통령의 재판에서도 똑같이 인용될 가능성이 크다. 이번 판결은 그 견고한 국가공무원 조직이 정권의 변화나 흐름의 변화에 저항하는 것처럼 보인다. 국정교과서를 계속 추진하려고 했던 교육부의 사소한 반란은 귀여울 정도이다. 정확히 이야기하면, 사법부가 김기춘과 조윤선은 남의 일이 아니며, 선례로 작용할 것임을 알고, 고추가루를 뿌린 것이다. 사법부가 공직자에 대한 뒷문을 열어두는 것은 지옥문을 여는 것이다. 우리는 그 폐단을 꽤 오랫동안 보아 왔다. 사실 그 자체가 우리나라 정치, 공직의 역사이다. 본인들이 열어둔 지옥문을 다시 닫아야하는 상황에서 그들은 다시금 비상구를 만들고 있다. 항상 정치 검찰로 명성을 날려온 사람들이, 이런 결정적인 순간에는 사법의 형평성에 대해 언급하며, 자신의 정치적 미래를 담보를 받으려 한다. 법률의 구체적인 조항은 모르지만, 그 주변을 싸고 도는 루틴은 정말 진부하고도 진부할 따름이다.

 

블랙리스트 관련되어 많은 사람들이 묵인했음에도 불구하고, 사고를 할 수 있는 개인으로 행동하고 어려운 결정들을 해 온 사람들은 분명 있었다. 하지만, 내부고발자들은 항상 조직에서 처절하게 추출된다. 이미 블랙리스트 관련되어 많은 사람들이 조직의 부조리에 대항했을 것이며, 불이익을 받은 것으로 알고 있다. 그들에 대해서는 과연 누가 책임을 질 것인가.

 

그렇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그 조직 안에는, 이 순간 이 문제에 대해서 여전히 아무 것도 판단하지 않는 누군가 분명 있을 것이고, 그 수는 대부분, 다수일 것이다. 그 이유가 동의이든, 두려움이든, 용기없음이든, 무관심이든.

 

 

남들에게 동조하기

 

아이히만은 나치시절 평범한 중간간부였다. 그는 전쟁 패전 이후에 아르헨티나로 도망가 숨어 살다가 모사드에 납치되어 이스라엘에서 전범재판을 받는다. 그는 평범한 공무원이었지만, 그의 통제하에 수십만의 유대인들이 이송되었고, 그 중 많은 수는 생명을 잃었다. 아이히만의 전범재판은 납치라는 그 과정에서부터 세계의 주목을 받았고, 한나 아렌트는 그의 재판장면을 기록하고 책을 발간하였다. 유대인 커뮤니티의 고위층에 대한 비난도 포함한 그 책 역시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아이히만은 그 재판에서 유죄를 선고받았고 처형되었다. 한나 아렌트의 기록에 의하면, 아이히만은 수십만의 유대인 이송정책을 승인한 것에는 죄의식이 없었다고 한다. 그는 자신의 위치에서 본분을 다했을 뿐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한 유대인의 뺨을 때린 것에 대해서는 죄의식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그에 대한 한나 아렌트의 인터뷰 발췌로 글을 마치려고 한다.

 

그게 정말로 새로운 유형의 범죄라는 점에는 동의하지만 단서를 달고 싶어요. 우리는 어떤 범죄자를 떠올릴 때 범행 동기가 있는 사람을 상상해요. 그런데 아이히만을 살펴보면 실제로는 아무 범행 동기가 없었어요. 우리가 일상적으로 범행 동기라고 이해할 만한 게 없었다는 거죠. 그는 나머지 사람들에게 동조하기를 원했어요. 그는 우리라고 말하고 싶어했는데, ‘나머지 사람들에게 동조하기’와 ‘우리라고 말하고 싶어 하기’만으로도 역사상 가장 극악한 범죄가 자행되게 만들기에 충분했죠. 사실 히틀러 지지자들은 결국 이런 종류의 상황에 전형적인 사람들이 아니에요. 그 사람들은 타인의 지지가 없다면 무력해질 거예요.

 

나는 아이히만에게만 집중하고 싶어요. 그를 잘 아니까요. 내가 우선 말하고 싶은 것은, 남들에게 동조하는 것 - 많은 사람이 함께 행동하는 데 끼고 싶어 하는 것 - 이 권력을 낳는다는 거예요. 혼자 있을 때는 당신이 얼마나 강한 사람인지 여부와는 상관없이 늘 무력해요. 함께 행동하는 데서 유발되는 이런 권력의 느낌은 그 자체로는 절대로 그릇된 게 아니에요. 그건 인간이 느끼는 일반적인 감정이에요. 그렇다고 선한 감정도 아니에요. 그냥 중립적인 감정이에요. 그건 단순히 하나의 현상이라고 기술할 필요가 있는 보편적인 인간적 현상이에요. 그런 식으로 행동하면 극도의 쾌감이 느껴지죠.

 

기능하기 funtioning는 정말로 변태적인 행위 양식이고, 이런 기능하기에는 항상 쾌감이 따른다는 말을 하고 싶네요. 그렇지만 행위에서 중요한 것은 남들과 함께 행동하기, 즉 함께 상황을 논의하기, 어떤 의사 결정에 도달하기, 책임을 받아들이기, 우리가 하는 일에 대해 사유하기 등이 있는데, 이 모든 것이 기능하기에서는 제거돼요. 당신이 거기서 얻는 것은 그저 관성대로 굴러가는 것일 뿐이죠. 이런 단순한 기능에서 얻는 쾌감이, 이런 쾌감이 아이히만에서 꽤나 눈에 잘 띄었어요. 그가 권력에서 특별한 쾌감을 얻었느냐고요?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그는 전형적인 공무원이에요. 그런데 공무원 이상도 이하도 아닌 존재일 때 정말이지 대단히 위험한 신사예요. 여기에서 이데올로기는 그다지 큰 역할을 수행하지 않았다고 봐요. 내 눈에는 이게 결정적인 요인으로 보여요.

 

한나 아렌트, <한나 아렌트의 말>, 마음산책, p76

1964년 <다스 테마 DAS THEMA> 인터뷰

 

 

e나라도움

 

올 초부터 SNS에서 e나라도움과 관련된 글들이 많이 올라오고 있다. 보통 보조금을 운용하고 있지 않은 입장에서는, 꽤나 시스템이 불편하게 바뀌었나보다고 막연히 생각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e나라도움은 단순히 있던 관행이 더 복잡하게 변한 것이 아니라, 기금과 보조금이 사용되는 모든 틀을 바꾸는 관리체계이다.

 

“‘e나라도움’을 포기합니다”라는 제목으로 쓰여진 2017년 4월 19일자 경인일보 공지영 기자의 기사를 보면 미리 시행된 e나라도움이 몇가지 중요한 사실들을 파악할 수 있다. http://www.kyeongin.com/main/view.php?key=20170416010005352

 

우선, 이 시스템을 통해 이미 선정된 사업이라도 진행되기가 아주 어렵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굳이 일반적인 비교를 하자면, 직장에서 일하고 급여를 받는 방식이 다음과 같다. 본인이 빵 하나 살 때마다, 쌀 한 팩을 살 때마다, 산다는 확인증을 받아서 스캔하고 올린 뒤에야 회사를 통해 소매점에 계좌이체가 되고, 일정한 분기가 지난 다음에는 다시 자신이 쓴 모든 지출 가계부를 직장에 제출해야 하는 시스템이다. 즉, 급여가 한 번에 지불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소비가 발생하는 순간마다 회사에게 허락을 받고 지불되어야 한다. 이것은 엄밀히 말해 기금, 보조금, 혹은 급여의 개념이 아니라 ‘배급’의 개념에 더 가깝다.

 

물론 기금과 보조금에 기반한 문화 예술 사업을 일반적인 노동 급여와 같은 것으로 파악한다는 것이 무리일 수도 있다. 하지만, 문화예술과 관련된 노동이 단순히 한 장소와 일정한 시간에 한정된 노동이 아니라는 것을 감안한다면, 현재 이러한 방식은 더더욱 적합하지 않다. 게다가, 기금사업은 불특정 다수에게 그냥 집행되는 것이 아니다. 알다시피, 수년의 경력이 있는 예술단체와 개인(대부분 이미 기금을 받았었고, 이미 정산도 진행한 검증된 예술단체와 개인)이 자신의 사업계획과 예산계획을 작성하고 제출한 것을 1차 서류심사와 2차 면접까지 거쳐서 치열하게 진행한 공모에서 선정되어야 하는 것이다. 즉, 이미 정부가 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거쳐서 검증한 예술단체와 개인에게 집행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의 방식은 모든 지출을 검증하려고 한다.

 

그리고 e나라도움을 통해 사용되는 모든 결재수단은 처음에 신용카드였다. 신용카드를 발급받을만한 신용등급이 아닌 경우에는 사업에 참여할 수 없다. 이미 기금으로 지급된 예산임에도 불구하고 신용카드를 통해서 사용해야 하므로 정부(정확히는 e나라도움)-은행간의 실제적인 집행에는 한 달의 격차가 발생한다. 기금이나 보조금이라는 것이 본래 예산이 확보되지 않은 상태에서는 집행되지 않는다는 것을 생각하면, 꽤나 의심이 가는 부분이다. 2017년 5월 7일에서야 처음으로 농협에서 e나라도움을 위한 직불카드를 출시했다. 대부분의 예술단체나 개인이 금융권의 신용조건에 합당하지 않다는 것을 고려한다면, 국가의 보조금 체계 자체가 기금을 받는 대상을 다시 계층화하는 것은 복지분야와 문화예술분야에서는 특히나 부적절하다.

 

또한, 사업종료시 기금의 결과물은 다시 재평가된다. 활동을 검증받은 사람들 중에서, 심사를 거치며, 그 계획서와 예산서를 심사에서 선별하여 주고, 정산하고 검증받고 또 다시 평가 받는 구조이다. 일반적인 사회로 비유를 하자면, 취업면접을 보고 직원이나 사업자를 선정한 뒤에도 끊임없이 급여의 정산과정을 보고해야 하는 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e나라도움은 단 하나의 지출도 서류없이 진행하지 않겠다는 강력한 의지를 보여준다. 사실 그 이전의 기금 방식도 이러한 통제의 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하지만 지금은 그 도가 지나치다. 차라리 담당공무원이 카드를 들고 한 명씩 나와서 직접 결재하는 것이 더 효율적인 방법일 것이다.

 

왜 이런 통제의 방식이 지속되는가? 국가는 수 조, 수 천억원의 사업들에는 너그러우면서, 수천, 수백만원의 문화예술사업을 이렇게 통제하려고 하는가?

 

e나라도움을 홍보하는 기획재정부의 네이버 블로그등 각 사이트에서 제시하는 e나라도움의 기능, 목적, 지향하는 바는 다음과 같다.

https://www.young.go.kr/#!/content/60396

 

우선 e나라도움의 가장 큰 존재이유는 전반적인 내용에서 부패와 부정수급을 막는다는 내용이다. 기획재정부의 언어로 표현을 하자면, ‘중복/부정수급의 방지’, ‘끊임없이 집행상황을 관리 보조사업자 선정 시 수급자격 및 중복신청 검증을 통해 부적격자를 적발’, ‘정산의 간소화’ 등이다. 하지만, 이 허울좋은 편리함에 대한 기획재정부의 홍보글에서 짚고 넘어가야하는 것들이 몇 가지 있다.

 

 

의문들

 

e나라도움의 탄생배경에 좀 더 투명한 재정에 대한 의지가 있다면, 부정수급, 중복지원, 부적격자에 대한 통계는 왜 제시되지 않는가. 부정수급의 수준은 어느 정도이며, 전체를 기준으로 얼마나 발생하고 있는가. e나라도움의 목적이 기획재정부의 홍보와 같다면, 왜 e나라도움은 복지분야와 문화예술분야에서 시작되는가.

의문은 계속 된다. 정말 부정수급과 부패를 막으려는 시도를 하려 한다면, 정부가 가장 허약한 경제구조를 가지고 있는 문화예술분야의 작가와 예술단체, 교육분야와 복지분야에서 e나라도움을 가장 먼저 실시하려고 하는가. 왜 이 제도를 중앙정부 자신이 사용하고 검증한 이후가 아니라, 가장 약한 계층을 통해 검증하는가

 

어렸을 때, 우리나라에서 가장 부패한 분야는 의료와 건설분야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나에게 이야기해준 사람의 근거는 법조항이었다. 법에는 항상 예외조항이 있는데, 예외조항이 가장 많은 분야가 의료와 건설분야라고 했다. 상식적으로 상상해보아도, 예외조항이 많으면 많을 수록, 하도급이 많으면 많을 수록 그 사이에서 부정부패가 발생할 가능성이 많아진다. 우리나라 재벌이 부패의 온상이라는 것은 그들이 가지고 있는 엄청난 단계의 하도급 시스템을 보면 알 수 있다. e나라도움의 도움pdf(별로 도움이 안되지만)를 보면서 꽤나 의아해 했던 사람이 많았을 것이다. 수급되는 과정을 도표화한 표에는 하도급의 과정이 보통 예술단체나 개인이 이해하기 힘들 정도로 여러 단계가 제시되어 있다. 하도급의 과정이 네 개 이상되는 문화예술사업이 과연 존재하나 싶을 정도이다. 실제 보통 문화예술 기금사업의 예술단체나 개인작가의 수급단계는 한두 개에 불과하다. e나라도움의 도움사례에 적합한 것은 건설분야나, 문화예술분야에서는 공공미술 분야정도이다.

정부 혹은 국가가 선한 의지를 지니지 않았다는 것은 이미 우리가 탄핵정국을 지나오며 뼈져리게 느껴온 것이다. 이 지점에 e나라도움의 불편함에 대해 지속적으로 비난하는 것이 무의미해진다. e나라도움은 애초에 보조금을 받는 예술단체나 개인의 편의를 위한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쉽게 기사화되는 내용처럼 공무원의 행정편의를 위한 것 또한 아니다. ‘공무원’이라는 불특정 다수의 비호감 그룹에 대한 일종의 혐오는 e나라도움에 대한 본질적인 질문을 던지는 것을 막는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e나라도움에 대한 질문을 다시 던질 필요가 있다.

 

그렇다면, e나라도움은 무엇을 위한 것이며, 어떻게 탄생하였는가.

 

 

e나라도움의 탄생 : 2015년 국가재정전략회의

 

그렇게 말도 많고 탈도 많은 e나라도움에 대한 기사는 아직 중앙지에 게재된 적이 없다. 오히려 지방신문을 통해서 몇몇의 기사가 나오고 있다. 대부분은 문화예술분야를 이해하지 못하는 공무원의 편의행정에 대한 비판이다. 그 중에 앞에서 인용했던 경인일보의 공지영 기자의 다른 기사가 있다. 사업포기와 관련된 기사 이전에 발행된 2017년 4월 4일자 경인일보 기사이다.

http://www.kyeongin.com/main/view.php?key=20170329010010600

 

“지난 1월 2일 기재부는 분야를 막론하고 국고보조금을 받는 모든 사업에 대해 'e나라도움'으로 보조금 지급을 시작했다. 기재부는 이중·부정수급 관리를 목적으로 e나라도움을 도입하면서 중앙정부는 물론 기초자치단체, 민간사업자의 보조금 상세내역의 집행상황을 철저히 관리하겠다고 공언했다.”“게다가 이중·부정수급 모니터링 기능과 정산 및 재정정보 공개시스템 등 핵심 프로그램은 7~9월 말 이후에나 개발이 완료되는 것으로 확인됐다. 프로그램을 완전히 구축하고 시범 가동 후 오픈하는 게 일반적인데 프로그램 홍보는 물론 교육시간조차 제대로 주지 않은 채 서둘러 공개한 것은 이해하기 힘들다는 게 현장의 목소리다. 이에 대해 기재부 관계자는 "2015년 대통령 주재의 국가재정전략회의를 통해 정해진 사업으로, 2년여에 걸쳐 꾸준히 준비해 온 사업"이라고 강조하면서도 "시스템이 아직도 개발 중에 있어 미비한 것은 사실이지만 예산편성 시기 등을 고려해 무리없이 진행될 것"이라고 해명했다.”

 

 

이 기사는 4월 9일자 기사보다 흥미로운 사실을 알려준다. 우선 2017년 1월 2일이 어떤 시국인지 생각해보면 이 기사가 훨씬 의미심장해진다. 2016년 겨울부터 2017년 겨울은 최순실국정농단 사건의 파장으로 한 주도 빠짐없이 촛불시위가 열리던 때였다. 2016년 12월 3일 탄핵소추안이 발의되어, 2016년 12월 9일 국회본회의가 통과되고 대통령 권한이 정지된 상태에서 황교안 국무총리가 대통령 권한 대행을 하는 시기이다. 그리고 2017년 3월 10일 헌법재판소의 탄핵 결정이 나기 전의 그 숨가쁜 시국이었다. 이미 국회에서 대통령 직무정지를 시켰음에도 불구하고, 기획재정부는 e나라도움이 2015년 대통령 주재의 국가재정전략회의에 의한 사업이며, 2년동안 준비해왔던 것이라며, 급하게 출범시켰다(2015년 국가재정전략회의가 2015년 5월에 있었던 것을 감안하면, 2년이 아니라 1년 6개월 정도 준비한 것이다).

하지만, 기획재정부는 홍보에서 그렇게 중요하게 강조하던 이 시스템의 가장 중심인 이중·부정수급 모니터링 기능과 정산 및 재정정보 공개시스템은 아직 갖추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e나라도움을 가동시킨다. e나라도움에서 가장 중요한 전산시스템은 올 7월이나 9월에 만들어진다. 다른 말로 하면, 현재의 e나라도움은 껍데기만 있다. 현재의 e나라도움이 집행되고 있는 예산에 대해서는 모니터링이 되고 있는지 확인할 수가 없다. 원래 2017년 7월이나 9월에 시행되어야하는 시스템이 시스템의 핵심인 부정수급이나 정산 모니터링 기능이 빠진 체로 급하게 탄핵정국 안에서 시행된 것이다. 현재의 e나라도움은 원래의 목적에 합당한 상태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시스템은 올 1월에 황교안 국무총리의 대통령 대행 기간에 승인되었다.

짐작이긴 하지만, 현재 e나라도움의 수많은 오류와 이상한 디자인의 원인은, 아직 e나라도움의 시스템이 구축되지 않은 상태에서 실행되고 있기 때문일 가능성이 크다. 현재 e나라도움의 시스템이 예산 집행을 통계화하거나 집행을 모니터링할 기능이 없어서, 기존의 방식과, 시스템이 정상화되었을 때 필요한 서류를 이중으로 갖추어야 하는 상태라고 보는 것은 꽤나 합리적인 의심이다.

 

 

그렇다면 e나라도움은 왜 이렇게 급하게 실행되어야 했는가

 

‘2015년 국가재정전략회의’는 2015년 5월 13일 청와대에서 박근혜 전 대통령이 지출효율화가 시급한 10대 분야의 재정개혁 추진방안에 대해 논의한 회의이다. 여기서 논의 대상이 된 10대 분야는 지방재정, 지방교육재정, 연구개발, 복지재정, 문화지출, 방위사업, 사회간접자본(SOC), 일자리 사업, 성과평가체계, 공공기관 기능조정이다. 연합뉴스 2015년 5월 13일 기사에 따르면, 이날 회의에는 최경환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강경화 인사청문회 때 참으로 말이 많았던), 황우여 사회부총리 겸 교육부 장관(국정교과서를 추진한)을 비롯한 전 국무위원과 새누리당 정책위의장, 국책연구기관장, 민간전문가 등 180여명이 참석했다한다. e나라도움은 이 회의의 결과물이다. 그 회의에 참여했던 사람들의 면면이나, 그 이후의 행적들을 감안하면, e나라도움이 불편함으로만 언급될 시스템이 아니라는 것을 한 눈에 알 수 있다. 이것은 단순하게 국가문화예술지원시스템(http://www.ncas.or.kr)의 잘못된 변주가 아니다.

 

우리나라의 중앙정부재정은 예산과 기금으로 이루어져 있다. 예산은 중앙정부의 경우 일반회계 1개이고, 우체국예금특별회계와 같이 세금이 아닌 우체국예금을 관리하는 특별회계가 현재 19개로 이루어져 있다. 그리고 기금은 67개의 기금이 존재한다. 올해 우리나라의 예산과 기금을 합한 정부정부재정의 총지출은 400조 정도로 예상되며, 예산 지출은 274조 정도, 기금 지출은 126조 정도로 예상된다. 지출이 많은 순으로 적어보면 보건/복지/고용분야로 129.5조, 일반/지방행정 분야 63.3조, 교육 57.4조, 국방, 40.3조, 사회기반시설(SOC) 22.1조원, 문화예술 7.1조원 등등이다(기획재정부 2017년 나라살림 예산개요 2017년 2월 24일자

http://www.mosf.go.kr/com/synap/synapView.do?atchFileId=ATCH_000000000004500&fileSn=2)

 

앞서 2015년 국가재정전략회의에서 언급한 10대 분야에 해당되는 예산은 300조가 넘는 방대한 액수이다. e나라도움은 이 예산을 하나의 시스템으로 관리하겠다는 어마어마한 계획의 일환이다. 하지만, 지금이 이미 2분기의 말미인 6월이고 이 시스템이 완비되는데는 아직도 시간이 걸린다. 이 재정계획은 사실 2015년에서 2019년에 걸쳐 진행되어야할 것이었고, 정확히 말하면, 2018년도 혹은 탄핵정국이 아니라면 있었을 12월 대선 이전에 마무리되는 것이 계획이었을 것이다. 그 계획을 일년이나 앞당긴 것을 단순히 기획재정부 단독으로 재정시스템을 변화하는 것으로만 바라보는 것은 너무 순진한 생각일 것이다.

 

 

e나라도움 : 통제와 부패의 의지

 

e나라도움의 골자는 이 나라의 모든 예산 집행을 하나의 시스템으로 관리하겠다는 것이다. e나라도움의 태생적 한계는 박근혜 정권이 꼭 실현시키고 싶었던 관리체계라는 것 뿐만은 아니다.

 

이 시스템에는 결정적인 오류들이 있다. 첫번째는 잘못된 경제구조는 그대로 유지하며, 그것의 부정 수급을 관리하겠다는 의지이다. 즉, 잘못된 경제구조에 대한 수정을 바라지 않는 것이며, 단지 자금을 통제하겠다는 것이다. 쉽게 이야기를 하면, 농부와 소비자가 직접 거래하던 것을 그 사이에 유통업체가 끼어들어 거래하는 것과의 차이일 것이다. 유통시스템은 보통 안정적인 시장을 유지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유통시스템 자체의 이익을 추구한다. 유통시스템같은 관문의 역할을 하는 것이 e나라도움이다. 지역자치단체에 할당되어진 예산이라도, 실제로 사용할 때는 e나라도움을 통해서 관리되어야한다. 이 체계 안에서는 모든 예산집행이 e나라도움을 통과해야한다.

두번째는 우리나라의 모든 예산이 블랙박스에 담긴다는 것이다. 이 시스템이 완전했을 경우에도, 자금의 흐름은 신용카드를 통해 운용되고 실제의 자금흐름이 발생하지 않는 기간이 존재한다. 거기에서 발생하는 이익의 흐름을 파악하는 것은 쉽지 않다. 정상적이라면, 국고에 다시 환수되어야하지만, 어떻게 처리가 되고 있는 지는 오리무중이다. 하물며 현재의 불완전한 시스템에서 6개월간의 예산이 제대로 파악이 되고 있는지 역시 우려된다. 앞서 이것이 공무원에게 편한 시스템이 아니라고 이야기하는 지점은 이 부분이다. 이 시스템을 파악할 수 있는 혹은 관리할 수 있는 사람은 아주 극소수이며, 실무자가 자금의 흐름을 알 수가 없다. 모든 것을 블랙박스화하려는 시도는 십중팔구 정말 큰 도둑, 정말 큰 부패를 위한 도구가 될 가능성이 크다. 그리고, 우리나라의 국가 보안체제의 허술함을 감안해볼 때, 우리나라의 예산을 단 하나의 사이트로 일원화하는 것은 안보를 고려한다면 자살행위에 가깝다. 전세계 해킹 공격의 제 1타격점이 될 것이다.

세번째는 e나라도움이 처음 적용된 것이 복지분야이며, 그 다음이 문화예술분야라는 것이다. 복지분야와 문화예술분야는 수급자가 정부 대 개인으로 하도급이 거의 존재하지 않는 부분인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e나라도움의 통제 의지는 사회적으로 가장 약한 자를 맨처음 겨냥한다. 이 부분에서 불온한 의지가 그대로 드러난다. 사회적인 약자는 이 시스템을 과감하게 거부할 수 없는 위치에 있다. 아무리 지원받기가 어려워도 수용할 수 밖에 없는 상황에 놓여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문화예술분야 역시 그렇다. e나라도움은 블랙리스트와는 비교가 안될 정도로 통제를 지향한다. 거의 모든 개인과 단체는 이 시스템에 간섭을 받거나 받을 예정이다. 다른 말로 하면, 부정부패를 척결하겠다는 의지는 이 시스템에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다. 여기에는 통제에 대한 갈망만 존재한다. 부정부패 척결을 원한다면 SOC(사회기반시설) 분야와 국방분야에서 가장 먼저 실시했어야 하는 것이 상식적이다.

 

현재 우리는 e나라도움이 편리해지거나 개선되기를 요청하는 것이 아니라, 이 시스템의 전반적인 개편 혹은 폐지를 주장해야한다. 복지와 문화예술분야에 대한 통제 의지는, 가장 본질적인 삶과 생각에 대한 통제 의지이다. e나라도움 이전 문화예술분야 지원 역시 그 선정과 집행에 있어서 충분히 자유롭지 않은 구조였다. 하지만, 기획재정부의 홍보문구에서도 보이듯이, 그들은 ‘끊임없이’ 이 과정을 통제하고 점검하기를 원한다. 가장 자본의 시스템에서 벗어나 있고 포섭당하지 않는 예술가마저 자본을 통해 끊임없이 관리하겠다는 것은 곧 문화예술의 통제 역시 원하는 것이다. 문화예술에 대한 통제는 생각과 사고를 통제하려는 시도를 항상 포함하고 있다. e나라도움은 블랙리스트와 국정교과서와 같은 줄기의 생각에서 발현했으며, 모든 자본을 통제한다는 개념에서는 훨씬 더 심각한 문제이다.

시스템은 개인으로 대변되는 집권자에 비해 영속성을 지닌다. 정권이 바뀌고 대통령이 바뀌었으니, 이런 관리체계는 무시해도 된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검열백서와 비교가 안될 정도 어마어마한 새로운 괴물이 탄생중이다. e나라도움은 진지하게 정권차원에서 검증의 과정을 다시 거쳐야한다.

*20161207에 광주드림에 기고한 글

 

뉴커머, 새로 온 사람, 외지인, 외국인, 이방인, 혹은 새로 시작하는 사람. 광주 안에서 이미 외지인과 현지인의 구도나, 학연에 의한 구도, 기관과 예술가 사이의 구도는 이미 식상할지도 모른다. 식상하다는 것은 이미 해결된 문제이거나 진부하다는 의미가 아니다. 비엔날레·아시아문화전당과 광주의 갈등, 그 곳에서 일하는 사람들과 광주의 상관관계 등은 꽤나 많은 외부적 요인들 사이에서 아직도 우여곡절을 겪고 있다. 그래서 오히려 뉴커머의 의미를 좀 더 협소한 범주, 특히 이 지역에서 미술대학을 재학 중이거나 막 졸업한 사람들, 작가든 기획자든 어떤 식으로든 예술계에 입문을 시도하는 사람들에 한정해서 바라보고자 한다.

 

광주는 뉴커머, 새로 시작하는 사람들에게 좋은 곳인가? 이 질문을 짚어가는 것이 먼저이다. 가장 연약한, 소외받을 수 있는 약자에게 좋은 조건이라면 분명 이미 작업하고 있는 작가나 기획자에게도, 외부에서 잠시 정착하거나, 정착하고자 하거나, 정착을 꿈꾸는 사람들에게 역시 좋은 조건일 것이다.

 

광주는 민주화의 성지, 전통적인 야당 성향 등으로 진보적일 것이라는 기대를 만드는 곳이다. 동시에 예술의 도시를 지향하며 국가적인 거대 프로젝트가 진행되고 있는 곳이다. 아트페어, 20년 된 비엔날레, 아시아문화전당, 시립미술관, 광주문예회관, 광주문화재단 등 예술관련 행사와 시설을 모두 갖추고 있다. 그렇다면, 현재 광주에서 예술이 융성하고 있는가? 혹은 예술가들이 모여들기에 가장 편한 곳인가?

이를 논의하기 위해서는, 예술가에 대해 다시 들여다봐야 한다. 예술가는 정신적으로는 풍요로울 수 있으나, 대부분은 현실 면에서 생활보호대상자 수준일 경우가 많다. 그래서 예술가는 일종의 지표식물 같다. 이 때문에 그들은 가장 규제가 없는 곳, 가장 자유로운 곳, 가장 생활비와 임대료가 싼 곳에 스며든다. 그런 점에서 광주는 타 도시에 비해 충분한 장점이 있다.

하지만, 그 장점을 살리지 못하는 일들 또한 많다. 가령 최근 광주시장의 예술 검열에 대해 기사화된 적이 있다. 현 정권 안에서 검열이란 참으로 비일비재한 일이라, 큰 문제가 아닌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 문제는 광주라는 도시와 예술의 미래에 있어 아주 중요한 사안이다. 광주의 이미지는 국제행사에 몇명의 대형 작가들이 오고 몇명의 관람객이 있느냐에서 발현하는 것이 아니다. 검열로 인해 생긴 상처는 지금까지 기관이나 대형 행사를 통해 나타난 비전문성과 미숙함으로 인해 남겨진 부정적 이미지를 훨씬 초과한다. 왜냐하면 ‘검열’이 행해지는 곳은 절대 예술적인 장소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광주가 가진 매력은 홍길동전에서 등장하는 율도국과 같은 이상적인 이미지이다. 이것은 쉽게 만들어질 수 없는 가장 중요한 우리의 유산이다. 광주가 빛을 발하는 순간은 가장 자유로워 질 때이며, 예술적 자유는 모든 예술가와 예술관련 된 사람들에게 공기와 같은 조건이다.

 

현재, 예술에 대한 정책적 조건도 그렇게 훌륭하다고 보기 힘들다. 적어도 문화와 관광이 통합된 문화관광부 시절이 지났으니 더 이상 문화와 관광을 붙여서 보는 것을 멈춰야 한다. 그렇지만 전반적인 문화정책은 관광을 여전히 중추에 두고 있다. 광주는 이미 훌륭한 문화적 전통이 있는 곳이지만 예술적 관광지가 되서는 안 된다. 관광객을 원한다면 세계적으로 유명한 고전작가의 명작을 사서 일반에 공개하는 것이 가장 빠른 길이다. 아마 전 세계에서 광주에 올 것이다.

또한, 문화는 예술의 상위개념이며 문화의 영역 안에 들어가지 않는 사람의 행위는 거의 없다. 하다못해 싸는 방식도 문화다. 요컨대, 광주가 다루고자 천명한 것은 예술이다. 문화를 갱신하고 발전시키는 것은 예술을 포함한 모든 조건이 시스템을 갱신하려고 노력해야 가능한 것이다. 전시를 한 번 한다고 문화가 만들어지지 않는다. 오히려 잘못된 관행 특히 예술적 관행을 고치는 것, 대규모 전시와 기구들의 목적과 디테일을 갖춰나가는 것만으로도 문화는 생성된다. 예컨대, 기금의 지원과 정산방식만 바꾸어도, 수많은 사람들이 모일 것이다.

 

현실적이고 미시적인 차원에서 어떻게 가능할 것인지 살펴보자. 뉴커머(들)는 광주에 주어진 예술적 상황을 향유하거나 훌륭한 교육을 받고 있는가. 광주에는 해마다 많은 해외 유명작가들과 큐레이터들이 온다. 엄청난 양의 리소스가 제공되지만 막상 그들의 경험과 역량, 예술적 성취가 제대로 제시되지는 않는다. 전시의 단편만으로 그 작가들과 큐레이터들을 알기에 부족하다. 그 막대한 리소스를 교육적인 리소스로 전환하는 것은 어떤가. 그저 그 작가들과 큐레이터들의 포트폴리오 프리젠테이션으로도 커리큘럼과 국제학교가 만들어질 수 있을 정도일 것이다. 일부러 포럼을 만들거나, 잘 먹이고 관광시켜야한다는 강박을 버리고 그들의 경험이 교육적 차원에서 학생들에게 자양분이 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광주 전남 미술대학 재학생이라면 광주비엔날레·아시아문화전당 그 외에 관련 국제 행사에 무료로 입장할 수 있게 하는 것 등 막상 방법을 찾는다면 생각보다 많을 것이다.

우리가 최고의 작가·큐레이터·기획자·교수가 아니라면 당연히 그들이 우리보다 낫게 만드는 것이 모든 사람들의 의무다. 그들이 경쟁력을 충분히 갖추게 하는 것은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다. 만약 그렇게 되지 못한다면, 아마 해마다 줄어드는 예산들 대부분을 바리바리 챙겨 해외로 보내는 것이 앞으로 우리가 할 일이 될 것이다. 아마도, 많은 수의 졸업생들이 작가와 큐레이터를 하겠다고, 혹은 다른 지역에 없는 조건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게 될 때, 광주가 자본이 아닌 다른 가치를 바라볼 수 있을 때, 우리가 굳이 부르지 않아도 이상한 뉴커머들이 우리 주변을 득시글거리며 부유하고 있을 것이다.

 

오용석(작가)

 

 

오용석은 2007년 ‘BLOW UP’을 첫 개인전으로 시작하여 현재까지 광주와 서울을 오가며, 작업활동 중이다.
 

원문보기

http://www.gjdream.com/v2/news/view.html?news_type=207&code_M=2&mode=view&uid=477106

 

 ‘조영남 대작사건’

 

현재, 조영남 사기죄에 대한 재판이 새로운 재판부와 함께 다시 시작되었다. 2016년 4월부터 7월까지 불붙었던 논란의 결과가 어떻게 진행될 지 흥미진진하기보다는, 어떤 오류가 다시 생기게 될 지 걱정이 앞선다. 사건의 개요를 읽다보면, 대작이 관행이냐 아니냐와 대작의 경우, 저작권이 작가에 있는지 조수에게 있는 것인지에 따라 판결이 날 것이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공소사실에 기초해서 보면, 대작 자체가 불법이며 범행이다. 현재 재판부의 의견에 따라, 대작에 대한 정의가 내려질 상황이다.

 

사건에 대한 많은 글들을 다시 읽으면서, 이 글을 시작한다. 다시 읽어본 텍스트들은 주로 인쇄되었거나, 인터넷을 통해 연재되었거나, 기사화된 내용들이다. 수많은 기자와 필자들이 이 사건에 대해 언급하고 논쟁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일 년 가까이 지난 지금, 다시 이 사건에 대해 정리해 보는 것은 ‘대작’과 관련된 논쟁 혹은 그 논쟁이 피해간 지점에 혹은 그 논쟁이 피해간 지점에 여전히 ‘현재, 여기’에서 짚고 넘어가야할 중요한 문제들이 아직 남아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 글에서는 SNS가 아닌 발간되거나 연재된 좀 더 정리된 텍스트들을 살펴볼 예정이다.

 

 

사건의 개요

 

가수 겸 화가 조영남(71)씨가 대작 그림 판매로 1억8천만원 상당을 챙긴 혐의로 2016년 6월14일 재판에 넘겨졌다. 조씨는 2011년 9월부터 지난해 1월 중순까지 송모(61)씨 등 대작 화가에게 점당 10만원에 주문한 그림에 경미한 덧칠 작업을 거친 뒤 호당 30만∼50만원에 판매한 혐의다. 20호짜리 그림은 600만∼1천만원에 판매됐다. 이 같은 수법으로 17명에게서 21점의 대작 그림을 팔아 1억5300여만 원을 챙긴 것으로 드러났다. 조 씨의 매니저도 지난해 9월부터 지난 4월 초까지 대작 범행에 가담해 3명에게 대작 그림 5점을 팔아 2680여만원을 챙겼다. 이 중 대작 화가 송씨가 24점을 그렸고, 나머지 2점은 다른 대작 화가가 그린 것으로 드러났다. 이 외에도 7점이 더 있었지만, 검찰은 피해자가 확인되지 않아 공소사실에서 제외했다. 그에게 적용된 것은 사기죄이다.

2016년 6월 13일에는 한국미술협회, 한국전업미술가협회, 서울미술협회 등 미술인 단체 11곳은 조영남이 미술인들의 명예를 훼손했다며 14일 오후 1시 춘천지검 속초지청 앞에서 성명을 발표하고 고소장을 제출하였다. 명예훼손과 관련된 소송은 각하되었다.

 

‘조영남 대작사건’에서 미술 전반에 종사하는 비평가, 작가, 관계자들이 엄청나게 관여하게된 계기는 조사 후 조영남씨의 발언들이었다. ‘대작은 미술계의 관행이다’, ‘팝아티스트로 용인되는 줄 알았다’ 등등. 그리고 대작이 관행이냐 아니냐 하는 문제에 대해 SNS부터 언론에 이르기까지 그야마로 불꽃 튀기는 논쟁이 벌어졌고, 대작과 관련된 다수의견에 반했던 반이정씨, 진중권씨에 대한 반대와 포화도 어마어마했다.

 

 

‘미술계’의 반응

 

기소되기 전에 조영남씨는 기자들에게 ‘대작은 미술계의 관행이다’, ‘팝아티스트로 용인되는 줄 알았다’ 등등의 발언을 했다. 그의 발언들에 미술계가 반응을 보이며, 대작에 대한 논쟁이 끝도 없이 벌어졌다. 미술계 대부분의 의견은 ‘대작’은 미술계의 ‘관행’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와중에 진중권씨와 반이정씨는 ‘대작’은 미술계의 관행이 맞다는 의견을 제시한다.

 

"예술가의 터치를 회화의 진품성과 무관한 것으로 만드는 것이 20세기 예술을 앞 세기들의 예술과 그토록 다르게 만들어준 개념적 혁명의 한 가지 중요한 요소다." (David W. Galenson, Conceptual Revolutions in Twentieth-Century Art.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9. p.198)
 

2016년 7월에 진중권씨의 오마이뉴스 기고 글의 서두는 이렇게 시작한다. 대작이 관행이라는 근거로서, 데이빗 호크니, 임멘도르프, 데미안 허스트, 제프 쿤스, 앤디 워홀, 뒤샹, 무라카미 다카시의 사례들이 언급이 된다. 진중권씨가 언급한 현대미술에 대한 정의에 대해서 분명 이해하고 숙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제시한 글들은 읽기가 어려웠다. 틀린 이야기를 하고 있지 않는데 왜 이렇게 동의가 안되는지에 대해 고민하다 내린 결론은 그의 트위터 글부터 오마이뉴스 기고에까지 뿌리깊게 깔려있는 계몽적인 태도 때문은 아닐까였다.

진중권씨의 지적 중에서 하나 동의하는 것은 대작 자체가 범죄이고 사기죄로 처벌해야할 범주가 아니라는 것이다. ‘조영남 대작사건’의 재판은 대작이 불법이냐 아니냐로 판결될 것이며, 만약 불법일 경우, 우리는 수많은 작가들의 재판을 목도하게 될 것이다. 아니면, 조수가 참여한 작업들에 대해서는 컬레터와 일반에 고지해야할 의무가 생길 것이다. 반대로 대작이 불법이 아니고 관행임이 인정된다고 해도 그다지 순기능이 있을 것으로 예상이 되지는 않는다. 더 중요한 것은 내가 바라보기에 ‘조영남 대작사건’의 본질은 ‘대작’이 ‘관행’이냐 아니냐 문제가 아니다.

 

의견의 시시비비를 떠나, 개인적으로 흥미로우면서 피곤한 부분은 왜 이렇게 심한 의견의 충돌이 발생하며, 감정싸움으로 전환되는가이다. 그리고 놀랍게도 이 모든 논쟁은 관행의 변화에 기여하지 못하고 사라져 버렸다. 현상을 변화시키는 힘을 냉큼 권력에 주어버리고 우리는 대기 중이다. 2016년 4월의 이 사건이 발생하고 난 이후, 탄핵과 관련된 정국에서 보여지는 상황을 겪고나서 이해가 가는 부분들이 많이 생겼다. 많은 행위와 행동들은 그것이 진실이냐 아니냐, 더 나은 선택이냐 아니냐의 문제보다는 각자의 현재상황을 정상적으로 유지시키느냐 아니냐에서 비롯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관행’

 

관행2 (慣行) [관행]

[명사] 오래전부터 해 오는 대로 함. 또는 관례에 따라서 함. [유의어] 상습, 관습, 버릇1

네이버 사전

 

‘관행’이라는 말은 요사스러운 곳이 있어서, 사실 사건 사고가 있을 때마다 튀어나온다. 대학을 처음 졸업하고 나와서 일을 구하거나, 작업을 하는 사람들은 이 단어를 손쉽게 만날 것이다. 비상식적이어서 항의를 하면, 이런 것도 몰랐냐는 눈빛과 함께 ‘관행’이라는 말을 자주 들을 것이다. 보통 ‘관행’은 이미 있는 관례를 반복하는 것이다. 그것을 강요하는 입장에서는 책임이 자신에게 있지 않다는 것을 강조할 때 많이 쓰인다.

조영남씨의 발언 역시 그런 연유에서 사용된 것이라고 예상된다. ‘관행’이니 ‘자신의 책임이 아니다’라는 의미에서 말이다. 그가 인지하지 못한 부분은 ‘대작’이 ‘관행’이라는 사실이 미술 바깥에 있는 일반관객들에게는 전혀 상상할 수 없는 것이었다는 것이다. 보통 사람들에게 작가의 작업은 작가가 직접 한 것이다. 그리고 대부분의 경우는 그러하다.

무급인턴, 아티스트피, 대작, 부정입찰 등 미술 안에서 문제가 생길 때마다 우리는 ‘미술계’, ‘관행’이라는 소리를 수도 없이 듣는다. 그럴 때마다, ‘미술계’는 어디에 있으며, ‘관행’은 누가 만든 것인가 혼자 되묻게 된다. ‘관행’의 마술적인 힘은 그것을 누가 만들었는지, 누가 책임이 있는지를 물을 수 없게 만들며, 그것을 고치려는 사람들에게 싸울 상대가 없음을 인지시키는 데 있다.

 

반이정씨는 미술세계에 기고한 ‘조영남 대작사건을 읽는 법 | ’관행‘을 해명한다’를 통해 그가 왜 대작이 ‘관행’이라는 주장을 했는가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미술계의 절대 다수가 홀로 작업을 감당한다는 건, ‘관행’을 두둔한 나 같은 평론가도 잘 안다. 그럼에도 왜 나는 ‘관행’을 계속 두둔할까? 동시대미술은 ‘미술’이라는 동일한 자장 안에서 헤아릴 수 없이 다양한 제작 방식으로 구현된다. 홀로 작업하는 이가 절대 다수라는 현실로 인해 100명을 고용한 공장형 작가의 존재감이 평가절하되지 않는 것도 이런 다양성을 미술계가 시인하고 수용했기 때문이다. 공장형으로 제작되건 소수의 조수가 완성하건 작가 개인의 아이템을 남의 손으로 구현하는 점에선 차이가 없다. 전자는 체계적으로 수행한 것이고, 후자는 영세하게 운영했다는 차이만 있다. 단품요리와 뷔페는 규모와 제작 방식이 다르고 맛도 다르지만, 미각과 허기를 충족시키는 음식이라는 점에선 같다. 뷔페보다 단품요리를 훨씬 선호하는나 같은 사람마저 뷔페 애호가를 평가절하하거나 음식이 아니라고 부인하진 않는다.

반이정, 조영남 대작사건을 읽는 법 | ’관행‘을 해명한다, 미술세계

 

이름 석 자만 꺼내도 일반인까지 알법한 수두룩한 유명 화가들의 명단을 꼭 늘어놔야 할까? 이건 여론과 언론을 혼란에 빠트릴 테고, 무엇보다 지목된 화가와 그와 연루된 갤러리가 사실을 축소하거나 부인할 게 분명하며 법적 대응까지 거론할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장막 안의 사실을 장막 밖의 사람이 입증할 방법이 없으니까. 바로 이 점이 ‘관행을 변호하는’이의 고충이다. 조영남 대작 소동을 맹공하는 평론가와 언론은 이런 고충을 감당하지 않고 내려놓은 채, 여론과 언론이 유구하게 믿어온 미술가의 ‘이상’이라는 방패의 뒤에 숨어, 주문-제작 관행이라는 ‘현실’과 조영남이라는 개인을 맹공하고 있다. 무지하고 불공정하다.

반이정, 조영남 대작사건을 읽는 법 | ’관행‘을 해명한다, 미술세계

 

‘관행’에 대한 긴 글을 읽다보면, 진중권씨와 반이정씨가 조영남 사건을 바라보는 시각이 일반관객이나 작가들과 꽤 다른 지점에 있다는 것이 발견한다. 73.8%의 국민이 조영남 사건을 사기로 본다는 여론조사에 대한 언급이 두 필자의 글 모두에 나온다.

왜 73.8%는 조영남씨가 사기꾼이라고 생각을 했을까라는 질문을 던져본다. 진중권씨가 주장하는 것처럼 ‘대중과 언론이 빠져있는 본질주의의 오류’에서 비롯한 여론조사 결과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내 기억을 비추어보면, ‘조영남 대작사건’에서 가장 기가 찬 부분은 그림 한 점당 보수를 10만원을 줬다는 부분이었다. 조영남씨의 그림가격이 호당 30-50만원임을 감안한다면, 최저임금을 시간당 계산한다하더라도 지나치게 적은 액수였다. 나중에 실제로 그런 것은 아니라는 조영남씨의 말이 있긴 했지만, 사건 초반기에 기사에 포함된 내용이었다. 당시 기억으로 대작의 여부랑 상관없이 ‘조영남씨가 엄청난 착취를 한 나쁜 놈이다’라는 인식이 첫번째였다.

조영남씨의 첫번째 변명은 대작은 미술계의 ‘관행’이고, ‘팝아티스트에게는 용인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였다. 미술계를 모든 미술관계자를 지칭할 경우, 조영남씨의 말은 전체 미술계를 엿먹인 것은 분명하다.

‘관행’이라는 것이 ‘공공연하게 실행되는 것’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면, ‘관행’이라는 언어 자체는 ‘일반적이다’라는 의미를 내포한다. 반이정씨의 언급처럼 미술계의 절대다수가 혼자서 작업을 한다면, 이것은 전체 미술계의 ‘관행’은 아니라고 보는 것이 적절하다. ‘몇몇 유명화가들’의 언급처럼, ‘대작’이 공공연하게 존재하는 것은 들어 알고 있다. 그렇다면, 이것은 대형 갤러리가 관여하는 ‘상업미술계’의 ‘관행’이라고 말하는 것이 훨씬 정확한 표현이다. 조영남씨의 행위가 사기라고 동의한 73.8%는 이 사건 안에서 대작이 가능한 현대미술의 세계를 보는 것이 아니라, 당연시되는 불평등과 불공정을 보는 것이다. 조영남씨는 자신이 한 행위가 ‘관행’에서 비롯되었다고 했다. 그 말은 동시에 초저임금의 노동력착취 또한 ‘관행’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이다.

 

진중권씨는 조수와 어시스턴트에 대해 논문을 쓸 정도의 자료를 ‘조영남 작가에 권고함’이라는 오마이뉴스 기고글에서 제시한다.

 

조수들에 대한 처우가 나쁜 이유는 뭘까? 간단하다. 그걸 받고서라도 기꺼이 조수가 되려는 사람들이 줄을 섰기 때문이다. 왜? 미국에서 1년에 미대 졸업생이 수만 명이 배출된다. 이들이 졸업하자마자 바로 작가가 되겠는가? 그래서 자립할 때까지 그림도 그리면서 생계도 유지할 자리가 필요한 것이다. 게다가 조수를 하면 어깨너머로 이미 성공한 작가의 기법이나 절차, 수완 등을 배울 수 있고, 나아가 예술계에 인맥을 넓힐 기회도 잡을 수도 있다. 실제로 유명 작가의 조수 중에는, 가령 ‘길버트와 조지’를 위해 일했던 채프먼 형제처럼, 나중에 작가로 자립하여 성공한 예도 많다.

진중권, 조영남 작가에 권고함, 오마이뉴스

 

굉장히 익숙한 문구이다. 무급인턴등 이전에 문제들이 발생했을 때, 기관들이 이야기하던 말과 왜 이리 닮았는지 모르겠다. 그리고 자신이 그렇게 비난하던 보수의 노동관과 아주 닮았다. 도대체 자유주의 경제이론과 이 발언의 차이점은 무엇인가.

 

진중권씨는 현대미술이 시스템과 싸우기 위해 사용했던 전략적 선택(앤디 워홀의 팝아트, 미니멀리즘 등)과 고전시대부터 존재해온 장인 도제의 시스템과 상업갤러리의 ‘관행’을 똑같이 ‘관행’이라는 단어로 혼용하고 있다. 글 자체가 진중권씨가 말하는 ‘본질주의의 오류’라고 부르는 의견들에 대한 반론이라는 것을 감안해도 부적절하다. 글 안에서 조영남씨는 급 현대미술의 상징으로 돌변한다. 그 이유는 하나이다. 조영남씨가 현대미술의 ‘전략’을 따른 것이라 판단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효과적으로 현대미술을 엿먹일 수 있는 방법이 있다니 감탄사가 나올 정도이다.

 

고재열 기자. 걱정 안 하셔도 된다. 만약 이우환 화백이 ‘위증죄’로 기소된다면, 그 때에는 당연히 내가 나설 것이다. 다만, 그런 일이 다시는 없기를 바란다. 왜냐하면, 꼬박 이틀 걸려 어렵게 쓴 글에 20만 독자가 보내준 원고료가 고작 5만원 남짓밖에 안 된다는 냉혹한 현실을 이번에 똑똑히 목도했기 때문이다.

진중권, 조영남 작가에 권고함, 오마이뉴스

 

출력 용지로 39페이지에 이르는 3개의 진중권씨 글 말미이다. 우리나라에 ‘길버트와 조지’, ‘데미안 허스트’에 준하는 세계적인 작가가 몇 명이나 있을까? 유명 작가의 조수/어시스턴트를 하면서 예술계 인맥에 도달하여 성공한 작가가 되기 위해 박봉은 참아야하는 것인가? 대작이 ‘관행’임을 증명하기 위해 ‘관행’에서 비롯된 부조리는 용인되어야하나? ‘관행’이 존중받아야한다면, 그 ‘관행’에 대해 먼저 점검해야하는 것이 맞지 않은가? 만약 글을 쓰는 사람이면 원고료가 나오지 않는 것이 ‘관행’인 잡지들에 장차의 명예를 위해서 꾹 참고 글을 올려야하는가? 진중권씨는 왠지 원고료 나오지 않는 ‘관행’은 참지 못할 것같다.  

 

‘관행’의 불합리함이 현실의 문제로 격렬하게 표출되는 순간에, 그것을 미술사의 문제로 전환시키는 대신, ‘대작’의 가능성을 증명하는 대신, 우리는 이런 미술적 논쟁을 했어야한다.

‘관행’의 정당성이 어디에서 비롯되는가? 그것은 과연 존중되어야하는 ‘관행’인가? ‘관행’에 따라 노동착취를 강요한 ‘작가’에게 법적 제재를 가하는 것은 예술의 자율성을 침해하는가?

 

 

지금, 현재, 이 순간

 

안타깝게도 이 논쟁들의 전쟁터는 회화와 관련된 시장의 영역이다. 국내에서 유통되는 미술품의 대부분은 회화이며, 작년 한 해 온갖 언론을 수놓은 미술기사들의 대부분도 회화에 대한 것이다. 여전히 가장 미술시장에서 많이 거래되는 매체가 회화이다. 덕분에 회화는 자주 미술사 안에서 죽어왔으며, 가끔은 현대미술 또는 동시대미술임을 끊임없이 의심받아야 한다. 동시에 그만큼 부활을 많이 한 매체이기도 하다.

대작이 ‘관행’이라고 주장하는 쪽이나 ‘관행’이 아니라고 주장한 쪽이나, 양쪽 모두에서 언급되는 많은 부분들은 개인적으로 꽤나 절망적이다. 반이정씨가 ‘미적 러다이트’, 진중권씨가 ‘본질주의의 오류’라고 부르며 비판하는 진부함이 묻어나는 작가관념이나 작업에 대한 기준들은,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회화에 대한 고전적인 선입견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동시에 반이정씨나 진중권씨는 일면, 회화의 영역 역시 현대미술의 영역이라고 이야기하는 것같지만, 그들이 인정하는 현대미술에 속하는 회화 혹은 미술에 대한 협소한 생각을 인지시킬 뿐이다. 선험되고 학습된 이후에도 지속가능하고 동시대적일 수 있는 작업에 대해 고민해야하는 입장이 아닐 터이니, 당연한 것같기도 하다.

 

‘마이너리티 리포트’의 존재는 항상 중요하다. 하지만 적어도 상업적으로 성공한 작가들 0.1%에 대한 논의를 위해서나 현대미술의 개념을 설명하기 위해서, 미술계에서 가장 취약한 계층일 수도 있는 조수/어시스턴트를 희생시키는 행위를 서슴지 않는 것은 아니라고 본다. 동시대성이나 동시대미술은 저 멀리 있는 것이 아니고, 지금 현재 이 모든 상황에 존재한다. 미술사의 다음 단계에서 ‘나 현대’라고 이야기하며 미래적으로 다가오는 것이 아니다. ‘관행’이 지속가능한 것이라고 주장하고 고전적인 도제시스템의 ‘관행’과 현대미술이 선행한 ‘전략’을 동일한 ‘관행’으로 이야기하면서, 어떻게 현대미술을 논할 수 있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그리고 현재, 이 순간, 작업을 하고 있는 작가의 입장에서 작은 바램은 현대미술이나 동시대미술의 미래에 대한 걱정 대신, 구조적인 부조리에 대한 날이 선 비평이나 현상에서 가능성을 찾아내는 비평을 만나고 싶다. 정말 미술을 사랑한다면.    

 

 

*인용된 글은 ‘대작’이 ‘관행’이라고 주장했던 대표적인 필자인 진중권이 2016년 7월에 오마이뉴스에 올린 조영남 3부작(진중권 기고: 1. 조영남은 사기꾼인가?, 2. 유시민도 모르는 ‘조영남 사건’의 본질, 3. 조영남 작가에 고함)과 반이정이 2016년에 미술세계에 기고한 ‘조영남 대작사건을 읽는 법 | ’관행‘을 해명한다’이다. 이 글들은 수많은 기사의 반대편에 있던 글들이다. 진중권씨의 글은 2016년 7월에 오마이뉴스를 통해서, 반이정씨의 글은 2016년 6월에 미술세계를 통해서 발표되었다.

 

오마이 뉴스 ‘진중권 기고 : 1. 조영남은 사기꾼인가?’

http://star.ohmynews.com/NWS_Web/OhmyStar/at_pg.aspx?CNTN_CD=A0002223712

오마이 뉴스 ‘진중권 기고 : 2. 유시민도 모르는 ‘조영남 사건’의 본질‘

http://star.ohmynews.com/NWS_Web/OhmyStar/at_pg.aspx?CNTN_CD=A0002224343

오마이 뉴스 ‘진중권 기고 : 3. 조영남 작가에 권고함’

http://star.ohmynews.com/NWS_Web/OhmyStar/at_pg.aspx?CNTN_CD=A0002225714

허밍턴포스트 ‘미술세계, 반이정, 조영남 대작사건을 읽는 법 | ’관행‘에 해명한다’

http://www.huffingtonpost.kr/ejung-ban/story_b_10135980.html

 

 

전:달

http://spaceppong.wixsite.com/spaceppong/single-post/2017/04/12/STAGE-0-%E2%80%98%EC%A7%80%EA%B8%88%E2%80%99

 

 

우디 해럴슨 Woody Harrelson, 매튜 맥커허니 Matthew McConaughey. 캐스팅의 화려함 만으로도 이 드라마는 눈길을 끈다.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이번에 수상한 매튜 맥커허니, 그리고 우디 해럴슨의 연기만으로도 이 드라마는 충분히 볼만한 것이었다. 연기파 배우라 알고 있는 우디 해럴슨은 그렇다 치고, 초반기 젊을 때 그저 잘생긴 배우로 기억되던 매튜 맥커허니의 연기는 사실 소름이 돋을 정도였다. 혜성처럼 연기로 등장한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시간이 흐를수록 자신의 외모와 인상에 의존한 연기를 한다면, 매튜 맥커허니는 포르노 배우 같던 젊은 시절의 모습을 모두 지워버리고, 마치 <몬스터 Monster>의 샤를리즈 테론 Charlize Theron처럼 <트루 디텍티브>에서 우리에게 다가온다. 보통, 미국드라마의 시즌이 40분 내외에 20편 이상 진행되는 것과 다르게, <트루 디텍티브>는 영화에 가까운 영국드라마의 6편 혹은 8편의 형태를 따른다. <트루 디텍티브> 시즌 1은 총 8회로 구성되어 있다.

 

태풍이 휩쓸고 간 루이지애나 주를 배경으로 <트루 디텍티브>는 아주 느리게 진행된다. 기존 미드의 속도에 익숙한 사람들에게는 지루하게 느껴질 정도이다. 거기다 루이지애나의 독특한 풍광, 습하고 더운 늪지대로 가득한, 흔히 드라마에서 보던 LA나 마이애미와 달리 화려한 느낌이 아니라, 건조하고 푸석한 풍광은 이 드라마를 낯설게 만든다. 드라마가 장소 특히 도시의 이미지를 만들어낸다고 보았을 때, 뉴욕, 엘에이, 마이애미, 텍사스 등에 익숙한 우리의 시선에 루이지애나는 독특하게 다가온다. 하나의 사건을 8부작으로, 십년이 넘는 시간의 공백을 통해 다루는 방식 역시, 기존의 미국드라마가 지녔던 화려한 숨가쁨 과는 거리가 있다.

 

익숙하지 않은 지루함에도 불구하고 <트루 디텍티브>라는 제목은 강렬하게 나를 끌어당겼다. 공교롭게도 작업에서 중요한 역할을 차지하는 두 단어가 결합했기 때문이다. 정보를 수집하고 분석하고, 거기에 통찰력을 더해가면서 전체의 흐름을 관망하는 방식에 있어서, 일종의 방법론에 있어서 나는 탐정의 방법론을 따른다. 다른 점이 있다면, 그 과정의 전체가 지향하는 목적이나 목표가 설정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일반적으로 탐정은 사라진 사람이나 사물을 찾거나, 범죄를 저지른 이를 찾는다). '진정한 혹은 진짜', ‘탐정 혹은 형사’ 라는 번역에서도 알 수 있듯이, True Detective라는 제목 자체는 지나치게 진지해서 유머러스하게 느껴지기까지 한다. 처음에 그래서 이 드라마에 대한 궁금증이 더 증폭되었다. 이전에 언급한 <한니발>이 매 회마다 살인사건을 다루면서도 탐정이 존재하지 않는 드라마라면 (<한니발>에는 모든 것을 조정하려고 하는 '죽음'과 그것에 대항하려고 하는 '의지 Will'만 존재한다), 반대로 <트루 디텍티브>에는 '사건'과 그것을 해결하려고 하는 '탐정'만 존재한다(개인적으로 아주 흥미롭다).

 
한니발과 윌의 양자구도처럼 <트루 디텍티브> 안에도 독특한 마티 Marty 와 러스트 Rust의 관계가 있다. 모든 관계를 동성애적 관계로 환원한다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범죄물의 대부분에서는 여성의 존재보다는 남성과 남성 사이의 유대가 훨씬 더 비중 있게 다루어지는 것은 사실이다(불평금지). 이들의 구체적인 관계보다 흥미로운 것은 그들의 이름이다. <한니발>과 <트루 디텍티브> 두 드라마에서 '한니발'과 '러스트'는 그들의 캐릭터가 고정된 인물이다. '한니발'은 신화적이고 역사적인 인물로 존재하며, 그의 이름은 그에게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로마시대로 거슬러 올라가 로마인을 공포에 떨게 한 역사적인 인물을 따른다. '한니발' 캐릭터가 가지고 있는 무자비한 살상과 식인의 테마는 고대의 '한니발'의 루머에서 비롯된 것이다. 동시에 그 이름은 '죽음'을 상징하기에 적절하다. '한니발'을 연기하는 매즈 미켈슨 Mads Mikkelsen이 그 안에서 유일한 금발의 북구인 인 것은 오히려, 카르타고인의 혼혈적 이미지의 역반영이다(사실 한니발이라는 역사적 인물에 더 가까운 캐릭터는 잭 크로포드이다. 동시에 현재 미국의 인종비를 반영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다른 유일한 금발은 한니발의 상담의로 나오는 질리언 앤더슨 Gillian Anderson정도?). <트루 디텍티브>에서 '러스트' 역시 매우 흥미로운 이름을 지니고 있다. 그의 이름은 사물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현상을 지칭한다. 녹은 쇠가 아니며, 쇠에서 발생하는 자연 현상이다. 드라마에서 그의 캐릭터는 끝나는 내내 변함없이 일관성을 유지한다. 반면 <한니발>의 윌과 <트루 디텍티브>의 마티는 끊임없이 방황하는 캐릭터이다 (그 점에서 둘은 신화적인 영웅의 캐릭터랑 닮아있다). 드라마를 진행하는 내내 윌과 마티는 갈등하며, 고뇌하고, 방황한다. 윌과 마티의 다른 점은 윌은 드라마 내내 죽음을 상징하는 ‘한니발’과 대항하는 입장이지만, 마티는 ‘러스트’와 동료이다. 마티라는 그의 이름 탓일 수도 있다 (Marty라는 이름은 미국과 영국에서 여자이름으로 주로 쓰인다. 네이버 어학사전).

 

<트루 디텍티브>는 마티와 러스트를 인터뷰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드라마는 그들의 인터뷰를 통해 계속 과거로 트랙백한다. 러스트를 지루하게 인터뷰하는 영상은 <가늘고 푸른 선 Thin Blue Line>을 떠올리게 한다. 그것은 영상 뿐만 아니라, 나중에 발생하는 상황 때문이기도 하다. 지루한 사건의 기록은 러스트와 마티를 만나게 한 사건으로 돌아간다. <트루 디텍티브>와 <한니발>의 흥미로운 접점이 여기서도 발생한다. 두 드라마의 시작은 한 소녀의 살인인데, <트루 디텍티브>에서는 사슴뿔을 쓰고 기도하는 소녀의 이미지라면, <한니발>에서는 사슴 뿔에 받힌 소녀의 이미지이다. <트루 디텍티브>의 원작은 1895년에 발간된 로버트 W. 채임버스 Robert W. Chambers의 <노란 옷을 입은 왕 The King in Yellow>(미술하는 이에게는 비어즐리의 삽화로 더 유명한)이다. 짐작하건데, <한니발>의 사슴뿔 모티브 역시 채임버스의 소설에서 비롯된 것이라 여겨진다. 사슴의 모티브는 전통적으로 뿌리 깊은 신화적인 근원을 가지고 있다. <원령공주 Princess Mononoke> 역시 시시가미와 원령공주의 만남을 소재로 삼는다. 사슴은 자연 그 자체이며, 항상 온화하지만은 않다(시시가미-사슴신의 피는 온 세상을 죽음으로 이끈다). 사슴은 그 생과 사를 관장하는 역할로 나타나며, 그러한 성격은 온전히 '한니발' 캐릭터에 흡수된다. <트루 디텍티브>는 그에 비해서 좀 더 이성적이다. 처음 발생하는, 드라마틱하고 정교한 살인은 이야기의 시작을 장식할 뿐이다 (이 드라마가 지니는 지루함을 보강하기 위해서이지 않을까). <트루 디텍티브>는 사건의 추적보다는 사건을 추적하는 이의 삶을 아주 고리타분하고 찌질스럽게 계속 들여다본다. 처음 이 드라마에 적응하기 힘들었던 것은, 이 드라마가 지속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사건의 진행이 아니라, 사건 안에 존재하는 캐릭터의 일상이었기 때문이다 (여기서도 어떤 면에서는 '사건' 자체는 사라진다). 아마도 우디 해럴슨과 매튜 맥터허니가 아니었으면 이 드라마를 끝까지 보지 못했을 것이다 (특출한 배우 둘을 캐스팅한 이유는 있었다).


<트루 디텍티브>는 온전히 남성의 드라마이다. 부정적인 마초의 드라마가 아니라 오히려 꽤나 구질구질한 중년들(?)의 드라마이다. 일종의 동료애 혹은 중년 이후의 빛바랜 과정들이 이 드라마에서는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 17년의 시간성은 자연스레 주인공들의 삶에 접근하게 되고, 길기만 한 그들의 인생은 평행선을 달린다. 그들이 만나는 지점은 바로 그들이 추적해야할 '사건'이며 그것을 대하는 신념이다. 17년간의 추적을 통해서 그들은 작은 결말을 내지만, 그 안에서 등장한 수많은 악역 중에서 단지 4명 정도를 잡는데 그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추적을 멈출 수 없다. 전형적이라고 바라볼 수도 있는 결말에서 그들은 다시 어디론가 떠난다. 마지막 회에서는 마티와 러스트의 삶은 대칭적으로 보여진다. 그들의 삶은 씁쓸한 느낌을 준다. 병원에서 마티는 가족들과 둘러싸여 눈물을 흘린다. 반면 러스트는 마티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하면서 눈물을 흘린다(러스트에게는 가족이 없다. 그는 일종의 자연 현상이므로 태생이 없는 것이 당연하다). 드라마 내내 욕망으로 좌충우돌하는 마티와 괴짜처럼 단호한 러스트는, 어느 순간 동등한 위치가 되어 있다. 전혀 다른 그들을 바라보는 시선은 담담하다. 그들이 만나는 지점은 우리가 거창하게 말하는 정의감이 아니라, 인스턴트 음식과 맥주를 매우 무료하게 혼자서 먹는 그 순간이다. 쿨하거나 아름답거나 멋있는 장면이 아니라, 망가지고 부서지고 그래도 다시 일어나는 혹은 일어날 수 밖에 없는 순간들을 보여주기 위해 <트루 디텍티브>는 무던히 노력한다. 이 드라마의 가장 큰 장점은 방법론에 대한 선택을 강요하거나 의문을 던지는 대신 그 방법론들이 실재에서 어떻게 만날 수 있는지를 탐구한다. <트루 디텍티브>에서 진정한 ‘사건’은 그들이 평생을 걸쳐 추적하는 살인사건이 아니라, 오히려 마티와 러스트의 삶이 교차하는 그 순간일지도 모른다. 그 지점이 흔하디 흔한, 하지만 찾을 수 없는 '가족애'가 아닌 것이 천만다행이다.

 

 

 

크리티칼 원문보기

http://mylab.nayana.kr/s1/mainissue/5969

 <양들의 침묵 1991>으로 시작된 토마스 해리스의 모티브는 안소니 홉킨스와 조디 포스터의 인상적인 연기 이후에 <한니발 2001>, <레드 드레곤 2002>,<한니발 라이징 2007>으로 이어진다. 강렬하고 비현실적이면서 천재적인 한니발 렉터 캐릭터는 2014년에 다시 티비시리즈로 다시 태어난다. 새로운 시리즈는 <양들의 침묵>이전의 한니발과 윌에 대한 스토리를 담고 있다. <맨헌터 1989>에서 잠시 보여진 윌이 이번 시리즈에서는 주인공이다.

 

<한니발 2013> 시즌 1에서 가장 흥미로운 것은 한니발과 윌의 관계이다. 한니발은 윌의 상담의이면서 동시에, 연쇄살인범이다. 윌은 그 연쇄살인범을 쫓는 FBI를 자문한다. 조디 포스터가 FBI요원인 것에 비해 윌은 범죄심리학 박사이다. 직접 살인범을 쫓거나, 프로파일링과 다르게, 현장에서 살인범의 정신과 동일한 상태의 환각에 빠지면서 살인범의 사고를 더듬는다. 살인범의 세계를 이해하면 할수록 윌은 정신적인 혼란과 착란에 빠진다. 그 과정에서 한니발은 윌을 조심스레 관찰한다. 한니발의 욕구는 파괴적이지만, 어떤 면에서는 사랑에 근접한다. 한니발은 윌 만이 자신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는 가능성과 동시에, 윌은 절대 자신처럼 되지 않는다는 사실에 더욱 매료된다. 포식자로서 한니발은 인간에 대한 호기심과 애정을 가져본 적이 없는 인물인 까닭에, 윌에 대한 감정은 친구에 대한 우정으로 포장되지만 사실은 사랑에 가깝다. 한니발의 윌에 대한 집착은 그래서 더욱더 절실하다. 한니발은 윌을 점점 극단으로 몰아 한계점에 위치하도록 강요한다. 한니발의 가학적인 사랑은 윌의 상황이 나빠질수록 더 강해진다. 결국 시즌 1은 윌이 한니발의 살인에 대한 누명을 쓰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한니발은 절묘하고 빠져나갈 수 없는 함정에 윌을 빠뜨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니발은 윌에 대한 집착을 멈출 수 없다.


<한니발>에서 가장 흥미로운 지점은 모든 육체적인 폭력은 오히려 미학적인 것으로 승화되고, 모든 관념적인 사고는 오히려 신체적인 것으로 전이된다는 것이다. 난무하는 살인과 그 살인의 결과물들은 미학적이다 못해 초현실적이다. <한니발 2014> 시즌2 역시 그것을 반영한다. 피해자의 육체는 살인자의 관념을 위해 온전히 봉사하는 일종의 재료에 불과하다. 여기에서 피해자에 대한 연민이나 고통의 장면들은 철저히 삭제된다. 오로지 존재하는 것은 오브제로서의 인체와 그것을 만들어내는 살인자의 관념만이 존재한다. 시즌 2는 한니발의 존재를 자각한 윌의 대반격이 전체적인 주제이다. 윌 역시 한니발과 공유하는 것은 피해자가 아니라 가해자의 시각을 상상할 수 있다는 것이다. 결국 <한니발> 안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그러한 관념들의 싸움이다. 어떤 부분에서 이 드라마는 지젝이 말하는 윤리성에 가장 근접한 형태의 이미지들로 이루어져 있다. 욕망에 대한 죄의식이 없는 상태, 혹은 그것을 실현한 상태, 그 이후의 이야기들이 <한니발>이다. <한니발>은 아주 완성도 높은 화면을 제시한다. 모든 영상은 관념과 심리를 반영한다. 이 안에서 실재하는 현실이나 주관성을 벗어낸 객관적인 시각이나 앵글은 존재하지 않는다. 거의 모든 장면들은 그것을 보는 자의 관념과 상상을 반영한다. 덕분에 가끔은 구토와 현기증을 불러일으킨다. 시즌 1과 시즌 2 공히 가장 많은 장면들은 윌의 상상계에 대한 것이다. 윌의 심리와 상상을 반영하는 그 영상들은 사건의 진실에 근접한다. 시즌 2에서 역시 사건의 진실에 다가갈 수 있는 이는 오로지 한니발과 윌 두 사람 뿐이기에, 둘의 유대는 더욱 끈끈해진다. 그 사이에서 나타나는 인물들의 역할은 한니발과 윌의 체스말로서의 역할이다. 종국에 체스말은 제거될 운명이다.


<한니발> 시즌1과 시즌2 공히 죄의식의 차원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굉장히 포르노그라피적이다. 거기다 <한니발>안에서 벌어지는 모든 살인들과 피해자들은 한니발과 윌의 갈등 혹은 사랑에 봉사한다. 그 둘이 연결되는 유일한 순간은 '사건'이다. 즉 이 드라마 안에서 사건의 역할은 한니발과 윌의 관념이 만나는 장소이외의 의미가 없다. 시각적으로 자극적이고, 카니발리즘을 기반으로 하는 <한니발>은 오히려 그런 선정성을 통해서 관념성을 획득한다. 그 안에서 팩트 fact, 사실은 전혀 중요한 것이 아니다. 덕분에 다른 살인사건을 다루는 많은 드라마들과 달리, <한니발>은 사건과 그것을 추적하는 탐정을 위한 것이 아니다. 어떤 의미에서 '사건'에서 비롯된 '비극'은 사라지고 존재하지 않는다. 죽음은 이미 현실적인 삶에 발생하는 비극이 아니며, 관계를 위한 순수한 전제일 뿐이다. 죽음은 <한니발>에서 <한니발>의 세상을 구현하는 전제이다. 또한, 한니발의 식인은 일종의 현실에 머무는 의식이다. 한니발이 인간과 유일하게 접촉하는 순간은 살인과 식인의 순간이다. 한니발은 인간의 육체를 지녔지만, 개념적으로는 '죽음의 신'이다. 사라마구의 소설 <죽음의 정지>에서 나오는 신체를 지닐 수 있는 '죽음의 신'의 존재에 가깝다. 한니발에게 윌이 중요한 이유는 윌이 유일하게 살인과 식인의 과정 없이 만날 수 있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그들을 매개하는 수단은 '사건'이지만, 시즌 2에서는 시즌 1과는 전혀 다른 과정을 통해 만난다. 시즌1에서 한니발은 윌의 관심을 끌거나, 윌이 사건의 본질에 다가오지 못하게 하는 과정이었다면, 시즌2에서 윌은 한니발이 모든 사건의 중심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한니발과 윌의 대립 혹은 사랑의 무대는 그들 사이에 있는 모든 사람들로 바뀐다. '죽음의 신'을 유일하게 알고 있는 윌과, 윌을 곤궁에서 벗어나게 함(그 곤궁에 빠뜨린 것이 자신임에도 불구하고)과 동시에 자신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서 노력하는 한니발의 싸움이다(온통 너무 신화적이다).


 

죽음을 둘러싼 온갖 미학과 신화 사이에서 <한니발>이 어떤 결말을 맺게 될지는 아직 알 수 없다. 단지, <워킹테드>가 시각적인 쇼크와 함께 다가와, 시즌이 거듭할수록, 지속되는 잔혹함이 과정으로 치환되고 그 안에서 관계성이 부각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미 추상화의 단계에 이른 <한니발>을 바라보면서 여러가지 의문이 발생한다. 이러한 관념성을 지니기 위해서 꼭 이렇게 정제된 살인의 형상, 재료로 치환된 육체들이 필요한 것일까. 과도한 기괴함과 그로테스크함 없이는 우리는 이러한 이야기를 할 수 없는가. 영화가 아니라 드라마라는 연속물의 형태로 매주 관찰해야할 만큼 우리가 섭취해야할 관념성이 이 안에 존재하는 것일까. 충격에 도달하지 않는 미학적인 죽음의 형상을 매주 관찰할 필요가 있는가. 이런 불편함들의 마지막에 드는 또 한 가지 생각은, <한니발>의 세계가 죽음을 전제로 만들어져 있고, 덕분에 이 드라마를 통해 일상 속의 죽음을 지속적으로 성찰하기를 강요받기 때문에 <한니발>이 나에게 불편하게 느껴지는 것은 아닌가이다. <한니발>이 포르노그라피적이라는 것은, 보통의 이미지는 상상을 통해 환상을 도출하는데 비해, <한니발>이 제공하는 이미지는 이미 너무나 환상적인 상태를 재현해 놓아서 다른 상상을 허용하지 않는다. 극단적인 환상의 재현 덕분에, <한니발>에서는 고야의 인용구(“Fantasy, abandoned by reason, produces impossible monsters.”)의 역전이 발생한다. ‘금지되지 않는 환상은 괴물을 만들어낸다.’ ‘죽음’은 일상이 되고 그것을 운용하고 지배하는 ‘한니발’이라는 괴물이 환상 안에서 처벅처벅 걸어나온다.

 

 20140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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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mylab.nayana.kr/s1/mainissue/5568

Untitled 1-6, Photomontage & Oil Painting, 241x234cm, 2016

 

이미지로 폭력에 대항하는 것이 가능한가. 혹은 폭력성을 정확하게 재현한 이미지로 폭력에 대항하는 것이 가능한가. 이런 질문을 던졌을 때, 그의 작업에서 그 역할을 가장 성공적으로 수행하는 작업은 ‘Untitled’ 시리즈이다. 그가 줄곧 다루어오던 폭력성이 거의 추상적인 수준에까지 밀어붙여져 있다. ‘분노하라’의 형상이 역사의 기억을 건드리면서 관객에게 과거를 소환하게 하거나 ‘해처리’가 군인이라는 인간적인 모습을 유지하고 있는 것과는 전혀 다른 방식이다. ‘Untitled’ 시리즈에서 대상들은 순수하게 폭력적인 가해자의 형상으로 태어난다. 다른 작업들이 가까이 다가갔을 때, 원래의 형상이 사라지면서 콜라주한 세밀한 형상으로 시선을 옮기게 만드는 것에 비해, ‘Untitled’ 시리즈는 관객이 작업과 일종의 거리를 두도록 밀어낸다. 이미 우리가 일반적으로 폭력과 죽음을 연상시키는 늑대, 해골, 피부가 벗겨진 고깃덩이와 결합하여, 끔찍함과 혐오를 증폭시킨다. ‘Untitled’ 시리즈에서 신체는 사라져버리고, 그들에게 더 이상 얼굴과 피부는 불필요하며 존재하지 않는다. 그들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것은 제복이며, 제복은 피부를 대체하는 표피이다. 더 이상 그들은 구체적인 인물의 형상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들은 일반적인 인간을 지칭하는 군인이 아니며, 인간 안에 내재된 순수한 폭력성 혹은 그것을 표출하고 있는 ‘괴물 Monster’이다. 그들의 표피를 통해 그들은 자신이 누구인지 드러낸다. 그 과정에서 표피가 그들의 본질을 지시한다. 폭력성의 진원지는 개인이라기보다, 그의 작업에서는 군복 그 자체 혹은 제복이다. 낫을 들고 있는 해골이 죽음의 의인화이듯, 이미 그들은 이름붙일 수 없는 어떤 것들의 엠블렘 Emblem이다.

 生, Photomontage & Oil Painting, 117x80cm, 2016

 

성기와 피부가 없는 신체는 인체도감에 나올 법한 무성적이면서 남성을 지칭하는 근육의 형상을 지니고 있다. 거기서 재현된 대상 역시 사람이 아니다. ‘간인기고’와 ‘生’은 그런 의미에서 ‘Untitled’ 시리즈 묘한 짝을 이룬다. ‘Untitled' 시리즈에서 신체는 신체가 아닌 것들로 대체되어 있다. 그 신체의 부재를 채우고 있는 것은 늑대나 뱀이나 해골이나 짐승 같은 것들이다. 반면, ’生‘에서는 제복 안에 담긴 추상적이면서 폭력적인 존재들 마저 사라지고, 남아있는 것은 얼굴을 지니지 않은 고깃덩이와 같은 근육이다. 마치, 그것은 'Untitled'에서 배제된 신체만 따로 재현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혹은 폭력을 상징하는 군복과 제복을 벗어버리고 난 이후 존재가 보편적인 고기의 신체로 다시 재현된 것처럼도 보인다. 마치 제복 자체가 피부였던 것처럼, 얼굴이 사라진 남성적인 근육이 아주 메마르게 남아 있다.

 

Hatchery, Photomontage & Oil Painting, 360x200cm, 2015

 

그에 비해, 다른 작업인 ‘해처리’는 일종의 원형 原形 같은 작업이다. 그의 작업 속에 계속적으로 등장하는 군인의 존재를 기념사진 형식으로 이 작업은 보여준다. 하지만 '해처리'는 다른 작업들에 비해 훨씬 복합적이다. 군인들은 아직 5.18민주화항쟁에서 사람들을 구타하거나 죽이는 군인들이 아니다. ‘Untitled'에서 보이는 극도의 추상적 폭력성을 지니고 있지도 않다. 그들은 여전히 20대의 뽀송뽀송한 앳된 얼굴을 지니고 있으며, 기념사진 안에 같은 포즈로 통제되어 보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사람으로 존재한다. 좀 더 가까이 다가가 바라보면, 획일적으로 보이는 군복 또한 각기 다른 형식과 이미지로 구성되어 있다. 그의 콜라주적 방법론이 여기서 제시하는 흥미로운 지점은 가까이 다가갔을 때는 오히려 처음의 단순한 형상들이 사라지고 좀 더 사적인 이미지로써 관찰하게 한다는 것이다. 군복들 안에 놓여있는 이미지들 사이에서 군복의 획일적인 이미지와 상충하는 이미지를 동시에 발견할 수 있다. 그 사이에서 인물 각자에 대한 일종의 개인성 Personality이 발현한다. 얼굴은 서서히 분열되고 있지만, 아직은 우리가 알아볼 수 있는 누군가의 얼굴을 지니고 있다. 이제 부화된, 아직은 완성체가 아닌, 그래서 좀 더 그들은 불완전한 인간에 가깝다. 그들은 콜라주된 존재이지만, 아직 해체되지 않았다.

 

The Phenomenal World, Collage, 200x244cm, 2016

 

B-CONE이 폭력성에서 시작해서 특유의 비아냥 혹은 유희적인 전환을 보이는 반면, 최요안은 좀 더 사색적이다 못해 이미지적으로는 회귀한다. 마치 영화의 마지막에서 카메라가 뒤로 쭈욱 빠지면서 광활한 미장센을 보여주는 것처럼 전시는 조금은 급작스러운 롱샷으로 마무리된다. 바짝 말라버린 대지와 그 안에서 탐욕스럽게 푸른 거대한 나무는 언뜻 보기에는 조용한 풍경화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것을 맴도는 헬리콥터들은 평화스러움 보다는 영화 ‘아바타 Avatar 2009’ 에서 회사가 에이와 나무를 폭격하기 전 같은 불안한 긴장감을 연상시킨다. 단지 다른 점이 있다면, ‘The Phenomenal World’의 나무는 생명이 아니라, 파괴되어야 할 것들로 만들어져 있다.

그의 이번 전시 ‘Phenomenal World’는 솔직히 꽤나 혼돈스럽다. 이 혼돈스러움은 각각의 작업들이 각자 방향성이 다른 이야기를 하는 데서 비롯된다. 그 안에서 작가의 관찰하는 위치도 미묘하게 어긋나 있다.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각 작업 시리즈들에서 이미지를 사용하는 방식이 다르면서 정확하지 않은 것도 그 혼돈스러움을 증폭시킨다. 그가 바라보는 ‘Phenomenal World 현상계 또는 경이로운 세계’에서, 시스템은 근본적으로 사악하다. 그러면서 ‘Phenomenal World’는 온전히 남성의 세계일 뿐이다.

 

가장 근작인 ‘The Phenomenal World’에서 작가의 관찰지점은 특히나 모호한 시점을 유지한다. ‘해처리’에서 보여주는 일말의 동정과 같은 눈빛, ‘Untitled'에서 보여준 격렬한 비난과 동시에 보이는 동화 同化, ’生‘에서 보이는 관조나 자기배려 등과 같이 감정적으로 읽히는 지점이 없으며, 태도에 있어서 유보적인 위치에 있다. 모든 것을 조망하는 듯한 그의 관찰지점이, 영화 ‘지옥의 묵시록 Apocalypse Now 1979'에서 윌라드 대위가 커츠 대령의 왕국에서 나가면서 타는 헬기에서 바라보는 시선인 것인지, 혹은 그들을 구출하러 들어오는 구원자들의 헬기에서 바라보는 시선인 것인지, 혹은 커츠 대령 자신이 세계를 바라보는 시선인 것인지 정확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새삼스레 ‘이미지의 정치성은 어디에서 발현하는가’와 같은 본원적인 질문을 던져야 하는 시점은 항상 귀환한다. 특히나, 광주에 관한 가장 강한 이미지로 작업하는 최요안의 작업들에서 정치성은 가장 중요한 부분이다. 그의 탐구가 피해자의 입장에서 서정적인 방향으로, 혹은 그것을 관찰하는 입장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가해자를 바라보며 그들을 관찰하는 것이 흥미롭다. 군인출신이었던 그의 개인적인 이력 탓일 수도 있지만, 그의 시선은 ‘군인-가해자’에 오랜 시간 포커스가 맞추어져 있었다. 이번 전시의 혼돈스러움에서 발견한 중요한 것은 그 시선들의 미묘한 변화이다. ‘군인-가해자’, 혹은 ‘군인-피해자’, 혹은 ‘군인-폭력’, 혹은 ‘제복-폭력’, 그리고 아직 결정하지 않은 시선까지.

하나의 이미지가 세상을 바꿀 수 있을 것이라고 믿어서 작가가 이미지를 생산하는 것은 아니다. 만약 그럴 수 있는 순진함을 아직도 가질 수 있다면, 일종의 축복일 수도 있겠다. 사명감에 사로잡혀 강력하게 작업을 할 에너지를 유지할 수 있을 것이니 말이다. 하지만, 보통은 항상 흔들림을 지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군가가 생산하는 이미지가 유의미할 수 있는 것은, 하나의 이미지에 세계에 대한 태도와 의지를 기록할 수 있기 때문이 아닐까하는 생각을 한다. 보통 의지는 굉장히 사적인 발화이다. 공적이고 정치적인 소재에서 작업이 발현하더라도, 가장 사적인 작가의 생각이 격렬하게 묻어날 때, 작업은 그때서야 관객들의 사유에 하나의 작은 시작점으로 안착할 수 있는 힘을 지닌다. 그의 유보와 흔들림이 과연 앞으로 어떻게 전개될지 조심스레 예의주시할 필요가 있다.

 

 

 

* 오용석은 현재 미술작가로 활동 중이며, 주요활동으로는 2014 광주신세계미술상, 2013 SeMA 신진작가, 2012 국립현대미술관 고양스튜디오, 2010 금호미술관 영아티스트 등이 있으며, 주요전시로는 ‘퇴폐미술전’ (아트스페이스풀 2016), ‘Made in Seoul' (메이막아트센터 2016), ‘사이렌’ (갤러리 조선 2016), ‘우리를 위한 셋’ (광주신세계갤러리 2015), ‘사랑에는 이름이 없다’ (플레이스막 2015), ‘XXX' (갤러리 버튼 2015), ’라운드업‘ (서울시립미술관 2013), ’롤랑의 노래‘ (갤러리 버튼 2013) 등이 있다.



출처 : 웹진 전:달

 

‘분리 Seperation’ 송아지에서 분리된 한쪽 다리가 전시장에 걸려있고, 그 앞에는 다리가 하나 없는 송아지가 절룩거리며 걷고 있는 영상이 있다. ‘합체 Combination - Triptych’ 분리되어 있던 고깃덩이의 일부들이 천천히 결합하여 부자연스럽게 서있는 송아지와 비슷한 형상이 영상 밖의 관객을 응시한다. 두 개의 작은 방에는 쓰러져 있는 의문스런 고깃덩이가 서서히 일어나 송아지와 고라니처럼 보이더니, 급작스레 해체되며 앵글의 밖을 향해 힘차게 날아가 버린다.

 

분리와 합체는 서로에 반대되는 단어이면서, 동시에 하나의 프로세스 위에 있는 단어이다. 좀 더 기술적으로 발전한 근미래에서는 이 단어를 신체와 생명에 사용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현재로서는 아주 기계적 프로세스에 적합한 언어이다. 작업의 제목 자체가 작가가 스스로 설정한 위치를 짐작해볼 수 있게 한다. 하지만 두 작업은 명확하게 다른 맥락에 위치한다.

‘분리 Seperation’에서 작가는 대상에 관여하지 않고 관찰자의 위치에 머문다. 일종의 차가움을 유지한다. 그래서 실제로 작업을 보았을 때, 전시에 대한 글에서 언급하는 ‘폭력적 상황’이 훨씬 강렬하게 전달된다. 살아있는 송아지와 잘라내어져 박제된 송아지 신체의 일부는 극명하게 대립을 이루면서 제시하는 상황이 가지는 폭력성을 폭발적으로 드러낸다.

반면 ‘합체 Combination - Triptych’에서 작가는 대상에 지나치다 싶을 만큼 적극적으로 개입한다. 고깃덩이를 분해하고, 그것을 분해하는 과정을 사진으로 기록하고, 영상으로 재조립하고, 전시한다. 작업 안에서 이미 대상은 송아지와 고라니가 아니라 단순히 시체이며 고기이다. ‘분리 Seperation’에서 작가는 관찰자이지만, ‘합체 Combination - Triptych’에서 작가는 개입자이며 새로운 의미의 생명을 부여하는 신적인 위치를 가진다. 작가가 베이컨이 종종 차용하던 삼면화라는 부제를 가져온 것도 그런 의미라 짐작해본다. 합체의 과정은 역설적이게도 해체의 기록이다. 해체과정의 기록이 시간적으로 역류하면서 합체의 과정이 된다. 영상에서 가장 흥미로운 부분은 마지막에 고라니와 송아지가 느닷없이 앵글을 빠져나가는 부분이다. 합체라는 작업의 제목을 역행하면서 송아지 혹은 고라니 형상을 한 고깃덩이는 어디론가 사라진다. 마치 지금까지는 또 다른 결합을 위한 준비과정인 것처럼.

 

‘합체 Combination - Triptych’에서 이미 작가는 폭력, 생명, 죽음 혹은 불안과 공포라는 부정적인 감정에 대한 감각을 다루지 않는다. 대상이 송아지 혹은 고라니, 시체임을 제외하고 관찰한다면 작가가 제시하는 상황은 단순한 폭력적인 상황이 아니라, 다른 생명체로의 변신의 과정이다. 영상에 찍힌 대상들은 더 이상 송아지의 시체, 고라니의 시체, 혹은 고깃덩이가 아니다. 기묘한 인형처럼 천천히 다시 붙여지거나, 해체되면서 콜라주 되는 대상은 작가에 의해 만들어지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이질적인 존재이다. 그 안에는 서커스와 같은 위험한 유희의 감각이 있다.

 

작업들을 처음 보았을 때는 폭력과 죽음에 대한 경고 혹은 비판을 위해서 더욱 강렬한 폭력을 재현하는 것이 미술적으로 정당한 것인가에 한참을 생각했고, 다시 한번 글을 쓰기 위해 작업을 곱씹어보다가는 작가가 ‘합체 Combination - Triptych’에서 드러내는 행위자로서의 유희에 고민하게 되었다. 작가가 컨셉으로 전달하려는 폭력성은 오히려 ‘분리 Seperation’에서 아주 효과적으로 전달된다. 그 뿐 아니라, ‘분리 Seperation’는 미술이 재현하거나 퍼포먼스하는 지점에 대한 위험한 경계에서 아주 효과적으로 줄타기를 하고 있다. 반면, ‘합체 Combination - Triptych’는 더 복잡한 상황을 제시한다. B-CONE이 보여주는 영상의 세계는 그가 말하는 폭력에 대한 경고와 응시가 아니라, 초반의 당혹스러움이 사라지면 고깃덩이로 변해버린 생명이 전혀 다른 어떤 것으로 변신하는 과정을 경건하게 혹은 코믹하게 지켜보게 된다. 희화화된 그 과정은 그 자체가 ‘분리 Seperation’와는 다른 폭력성을 지니고 있으며, 작가가 비판하는 시스템과 작가는 심지어 일체화되기까지 한다.

우리가 사는 시스템이 송아지에게 연민을 가지면서도 동시에 살육하는 이유는 그 송아지에게서 제거될 살점, 고기에 있다. 송아지가 죽어야하는 이유는 바로 그 살점이다. 작가의 관심은 막상 노동을 통해 재단한 살점에 있지 않다. 오히려 그 살점을 제거해서 드러나는 혹은 해체되는 혹은 절단되는 뼈와 구조에 있다. 이 부분에서 작업 자체가 훨씬 복잡해지고 혼란스러워진다. 작가는 인간의 잔혹한 폭력성에 대한 비판하고 싶어 하면서, 동시에 생명과 뼈의 구조를 탐닉하고 그것을 비틀어 교란하고 재생산하는 것을 욕망한다.

 

B-CONE의 작업은 물성에서 혈액을 이용한 조각이나, 선천적인 기형의 거대한 조각, 고기 페인팅들을 만든 마크 퀸 MARC QUINN의 작업을 연상시킨다. 마크 퀸 MARC QUINN의 작업들은 조각으로서 관객이 그의 작업을 대면하는 순간의 당혹스러움 혹은 전통적으로 예찬되는 가치에 대한 전복을 노린다. 하지만 B-CONE은 작업 안의 모든 조각적인 요소를 영상으로 전환해 버린다. 작업의 결과물로서 우리가 보는 것은 작가가 행위자로 개입한 실물콜라주의 시간적 나열이다. 모든 입체적인 행위를 평면으로 전환해버렸을 때, 그것들이 본래 가지고 있는 힘은 삭감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B-CONE이 영상을 통해 얻고 싶은 것이 무엇일까 상상해 본다면, 이미 정지한 것들을 다시 부활시키는 영상의 동적 속성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해체된 순간은 다시 붙인다고 해서 해체 이전의 순간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그리고 작가는 되돌릴 수 없는 순간에 대해 정확하게 인지하고 있다. 그렇기에 B-CONE의 작업들은 단순히 대상을 이전의 대상과 닮은 어떤 것이 아니라, 이전의 대상과 전혀 다른 어떤 것을 재현하고자 한다. B-CONE이 다시 만들어내는 송아지와 닮은, 영상 안의 대상에게서 엉뚱하게도 숀더쉽 SHAUN THE SHEEP이라는 클레이애니메이션의 숀 SHAUN의 포즈와 발투스 BALTHUS의 그림에서 심드렁하게 관객을 쳐다보는 소녀들의 응시를 떠올리게 한다. 가장 처참한 모습으로 보여주는 순진함과 해맑음, 무기력과 함께 드러나는 위험함과 기괴함, 그 복합적인 형상의 응시는 우리가 자주 접하는 미술작업들이 보여주는 응시와 다른 어떤 것이다.


출처 : 웹진 전: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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