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AGE 3-1 : 곡성 哭聲

 

2016년 5월에 개봉한 이 영화는 수많은 해석과 논란을 일으키며 600만명이 넘는 흥행을 했던 영화이다. 당시의 답답한 상황들과 맞물려 느꼈던 엄청난 무력감이 이 영화를 흥행하게 만든 하나의 이유이기도 하다. 그 사이에 정말 많은 상황들이 지나가고, 모든 것이 정상으로 돌아가고 있다고 믿는 지금, 1년도 더 된 영화를 다시 소환하려고 한다. 그 사이에 무력감은 어떤 긍정적인 에너지로 전환되는 것처럼 보이는 지금, 세상이 뭔가 원하는 방향으로 가는 것처럼 보이는 지금, 이 영화의 세계가 유효하지 않은 것처럼 은폐된 지금.

세상은 변화한 것처럼 보이지만, 항상 삶의 전체를 가로지르는 구조들과 장치들은 그대로 건재하다. 여전히 태극기, 십자가, 성조기가 삼위일체의 형상으로 모습을 드러낸 상징과 의미, 그것을 믿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과 함께 하고 있다. 어쩌면, 이 영화를 다시 읽음으로써 다른 세계관을 좀 더 근원적으로 알 수 있을 지도 모른다.

 

이 영화는 쉽게 의심과 의혹에 대한 영화라고 읽혀졌다. 하지만, 의심은 유동성을 지향하는 행위이며, 진행 중인 행위이고, 흔들림이다. 일종의 틀깨기이다. 그런 의미에서 ‘곡성’은 의심에 대한 영화가 아니다. 반대로 견고한 믿음에 대한 것이고, 그 믿음을 깨지 않기 위해 파국을 지향하는 것에 대한 것이다. 이 영화는 기득권에서 벗어난 적이 없고, 사회의 중심이 아니었던 적이 없었던 인물이, 자신의 이해를 넘는 상황을 만나서 붕괴하는 이야기이다. 그 붕괴의 중심에는 일본인이라는 외부자가, 효진이로 대변되는 내부자가 있다. 흔들림을 견디지 못하고, 그 견고함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더 많은 치열함과 더 비열한 폭력이 필요할 뿐이다.

 

 

내 손과 내 발을 보아라

 

이 영화의 수많은 장치들은 쉽게 믿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다. 현혹은 의심에서 비롯된다기보다, 우리가 강력하게 믿는 믿음에서 비롯될 때가 많다. 감독은 고래로 가장 강력한 믿음, 종교에서 시작한다.

 

A “어찌하여 너희는 당황하느냐? 어찌하여 마음에 의심을 품느냐? 내 손과 내 발을 보아라. 바로 나다. 나를 만져 보아라. 너희가 보다시피, 나는 살과 피가 있다.“

B “어찌하여 너희는 당황하느냐? 어찌하여 마음에 의심을 품느냐? 내 손과 내 발을 보아라. 바로 나다. 나를 만져 보아라. 영은 과 뼈가 없지만 너희가 보다시피 나는 살과 뼈가 있다.“

 

영화의 도입부에서 제시된 성서의 구절 A에는 ‘영은 살과 뼈가 없지만’이란 구절이 없다. 성서를 빌어 오지만, 일정한 구절을 삭제하여 감독은 영화를 위한 무대를 마련한다. 이 무대 안에서는 모든 주인공들은 사람인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아시다시피 영화 안에서 유령, 사람, 귀신의 경계는 없다. 기가 막힌 이 세상은 현실, 환각, 환상을 넘나든다. 이 영화 안에서는 현실과 환상, 사람과 귀신, 과거와 현재, 과거와 대과거가 구분없이 감각의 차원에서 동등하게 풀어진다. 성서의 문구, 악마의 독백,  귀신의 대사는 동등한 요소들이다. 흥미롭게도 영화의 후반부에서 악마의 형상으로 변한 일본인은 정확하게 성서의 구절 B를 부제에게 이야기한다.

 영화 말미에 등장하는 악마는 예수가 부활하는 방식으로 세상에 다시 등장한다. 악마는 빙의를 통해서 세상에 나오는 것이 아니라, 부제의 거울로서 몸을 지닌다.  부제는 공포에 눌려, 악마의 살과 뼈를 만져볼 수 조차 없다. 악마 역시 부제와 접촉하지 않는다. 단지 사진을 찍을 뿐이다. 무력한 부제가 무너지며, 영화 전반을 사로잡고 있던 거대한 종교적 서사는 마무리된다. 엑소시즘은 시도되지도 않았고, 악마는 여전히 건재하다.

 

  모든 등장인물들은 일본인이라는 존재에 이미 현혹된 상태에서 의심의 원인이 되는 타자를 제거하기에 열을 올린다. 이쯤 되면 의심이라 하기 보다는 확신에 찬 광기이다. 결국, 영화에서 외부인이자 타자는 실제로 악마였음이 밝혀지고, 광기는 유의미한 것으로 증명된다. 자신의 세계를 지키기 위해 다른 세계를 배제하는 방식은 현실과 아주 흡사하다.

 영화가 제시하는 기본 배경들은 오래된 신념들과 일치한다. 무속이 여전히 살아있을 것같은 전라도의 원초적인 이미지, 악마스럽고 변태스러운 일본인의 이미지, 광인들의 광기, 여성과 아이에 대한 전통적인 이미지, 무속신앙이 가지고 있는 이미지들은 영화 안에서 더욱 설득력 있는 사실로 자리매김을 할 뿐만 아니라, 영화를 보고 있는 관객의 무의식에도 다시 각인된다.

 

실제 영화관에서 이 영화의 사건들에 접할 때는 그 강력함과 공포스러움에 압도되어 사건들의 디테일을 보기가 힘들다. 하지만, 영화의 기묘한 결말에 이르고 나면, 영화에서 이야기하는 단서들이 하나 둘 씩 생명력을 가지며 부활한다. 단서들은 하나의 방향을 가리키지 않는다. 분석하면 할 수록, 영화에 대한 것은 미궁으로 빠진다. 그러다 지쳐 혹은 확신있게 도달하는 결론이 있다면, 그것 역시 영화 전체를 아우르지 않는다. 감독의 의미하는 열린 결말은 그런 의미일 것이다. 이 지점에서 질문을 던지게 된다. 하지만 왜 이렇게까지? `

 

 

뭐시 중헌디?

 

우선 감독의 장치들을 짚어가보자. 감독의 가장 강력한 장치는 앞에서도 이야기한 종교적 요소들이다. 이 영화가 단순한 스릴러나 공포영화가 되지 않고, 악에 대한 진지한 신화로 다시 태어나는 것은 일본인이 단순한 범죄자가 아니라 우리의 손에 닿지 않는 추상적인 존재가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일본인이 초기의 시나리오처럼 일광과 같이 도망가는 씬이 있다면, 마지막에 얼마나 맥이 빠졌을까 쉽게 상상할 수 있다. 그런 종류의 결말이라면 관객들은 모두 안도했을 것이고, 영화 안의 사건들은 영화 안에서만 머무를 뿐, 일상으로 들어오지 않았을 것이다.

 

종교의 요소를 걷어내도, 이 영화는 쉽지 않다. 살인사건에서 가해자가 피해자를 죽이는 순간이 가장 결정적인 순간이라면, 영화에서 그 결정적 순간을 목도할 수 없다. 영화 안에는 현란한 사건의 흔적만 가득하다. 실제에서 관찰할 수 있는 것은 항상 사건의 흔적들과 소문들 뿐이다.  

 예외적인 순간들은 사람이라고 여겨지지 않는 대상들에서 발생한다. 첫번째 살인사건의 용의자와 좀비 박춘배. 둘은 당연히 없애야 하는 괴물이며 타자로 등장한다. 영화 안에서 목격되는 죽음은 그들의 죽음뿐이다.

 

 

뭐시 중하냐고?

 

‘곡성 谷城’과 동음의 ‘곡성 哭聲’은 모든 환상이 가능한 곳이다. 독버섯이 남자들의 불면, 환상, 악몽, 광기의 잠재적 원인으로 작동한다. 환각의 실제적인 이유일 수 있는 건강식품에 섞인 독버섯에 대해서는 영화에서 진지하게 언급이 되지 않는다. 하지만, 이 언급되지 않은 사소한 장치가 작가로서의 감독이 영화-현재에서 자유로와지게 한다.

 

‘곡성 谷城’이 아니라, ‘곡성 哭聲’이어야하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다. 실제 공간을 무대로 만들었을 때, 실제 주민과 지역에 미칠 부정적인 이미지에 대한 걱정 혹은 법률적인 문제가 발생할 가능성이 있을 수 있다. 아마도 이십세기 폭스사가 제작했으니, 이 요소를 고려했을 것이다.

좀 더 영화적인 이유를 찾는다면, ‘곡성 哭聲’의 무대가 실제의 ‘곡성 谷城’이 아닐 경우에 이 영화의 서사들이 훨씬 설득력을 얻는다. 전라도 사투리가 통용되는 이 장소와 시간은, 무속과 귀신이 등장하는 것이 어색하지 않은 장소이며, 원시적인 에너지가 아직 살아있는 곳이다. 그 조건을 만족할 때, 모든 일화, 꿈, 풍문, 소문들은 비로소 현실감을 획득한다.   

 

영화 안에서는 소리, 말은 아주 중요한 요소이다. 의아한 것은 아무도 곡소리를 하지 않는다. 죽음을 애도하지 않는다. 이 안에서 모든 소문들은 현실적 이미지를 지닌다. 말은 곧 실제가 된다. 영화 안에서 제시되는 사건들은 짐작컨데, 감독이 수집한 사건들이다. 영화 안에서는 모든 풍문들이 진실이며, 살아있어야 한다. 그래야 모든 원인이 일본인에게서 비롯될 수 있으며, 신학적인 서사의 악마가 탄생할 수 있다.

이 영화는 일반적인 시간을 따르는 것처럼 보이지만, 각각 다른 소문에서 비롯된 사건들 - 다른 시간대의 사건을 영화 안으로 소환한다. 각각의 사건들 만큼이나 많은 시간들이 영화 속에 내재되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것들이 ‘곡성 谷城’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믿게 만드는 장치들과 동일한 인물들(같은 경찰들)에 의해 다루어지기 때문에, 하나의 시간대라고 믿게 된다. 종구(경찰)/무명/일본인으로 대변되는 인물들을 통해서 대과거/과거/현재의 사건들은 영화 안으로 위험하게 안착한다.     

‘곡성 哭聲’과 ‘곡성 谷城’은 동명의 다른 시공간임에도 영화 안에서는 끝까지 혼용된다. 영화의 후반부에서 겨우 ‘곡성 哭聲’과 ‘곡성 谷城’이 같은 곳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유일한 단서를 제시한다. 일광은 영화의 말미에서, 곡성 8km라고 적혀진 표지판을 지나지만 아침에야 도착한다. 일광은 밤의 시공간에 도달할 수 없다.

보통 영화 안에서 사용된 트릭들이 친절하게 결말 이 전에 어느 정도 해소되는 것이 일반적인 관례라 한다면, 이 영화는 모든 장치들을 마지막까지 제시하지 않는다. 오히려 더 불친절하게, 영화의 결말에서 트릭들과 장치들이 더 격렬하게 충돌하게 만든다. 하지만, 감독이 구성한 이 정교한 무대에는 의도한 균열들이 있다.

 

 

모두 그 놈 짓이여

 

일본인의 방을 세 사람이 방문한다. 종구(경찰), 양이삼(부제), 오성복(경찰). 다른 두 명은 일본인의 방에 대해서 오성복을 통해 전해 듣는다. 그 방은 오직 오성복을 통해서 관찰된다. 그는 미친 사람처럼 중얼거린다. 모두 그 놈 짓이라고 사건이 일어나기 전에 그 사람을 찍고, 그 사람들을 죽게하고, 죽은 뒤에 다시 사진을 찍는다는 이야기를 한다. 일본인은 모든 일을 알고 있었고, 모든 일이 일어나도록 하는 힘이 있다. 그럴 수 있는 존재는 악마 뿐이다.

오성복은 일본인의 방에서 무엇을 깨달은 것인가? 그는 종구에게 효진의 실내화를 전해준다. 하지만, 영화에서 그는 일본인을 죽이는데 동참하거나, 부제처럼 일본인을 쫓는 것이 아니라, 주인집 아주머니를 살해한다. 실제로 그는 무엇을 보았는가?

 

일본인의 방은 기록의 방이며, 과거의 방이다. 동시에 탐정의 방이다. 이런 집착적인 스크랩은 보통 범죄자나 광인의 상징으로 나오지만, 사실은 수없이 접하는 작가의 방이기도 하다. 흥미롭게도 그 방에 있는 사진들이 영화에서 보여지지 않은 많은 것들을 채운다. 일광은 나중에 그것을 수집한다. 일본인이 세상을 접하는 것은 카메라를 통해서 이다. 그리고, 일본인의 방은 심지어 사진을 찍으면 영혼을 뺏긴다는 오래된 이야기조차 재현한다.

영화의 시간이 우리가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크게 굴절되어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바라본다면, 사실 일본인의 방은 시간적으로 영화 안에서 항상 가장 나중에 만들어진다. 심지어 그 방은 영화와 영화 이 전에 일어난 일들의 시작과 결말도 지니고 있다.  

 

 

버럭지같은 놈이 미끼를 생켜부렀구먼

 

일본인을 죽이러 간 종구와 종구친구들이 굿을 통해 부활한 박춘배를 죽이고 일본인을 쫓는 긴 시퀀스가 있다. 이 사건은 영화 안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이다.

 

박춘배는 효진을 제외하고 가장 이름이 많이 불리워진다. 그는 우물에서 발견된 세 여자를 죽인 용의자로 일본인에 의해 트럭에서 발견된다. 그리고 일본인과 일광의 굿 씬에서 부활한다. 박춘배는 흘러가는 풍문이 아니라, 계속 이름이 보여지고 호명된다. 일본인이 차에서 그를 발견했을 때, 군복에 새겨진 박춘배의 이름이 보여진다. 미친 여자가 자살한 나무 밑에 있던 무명이 입고 있던 군복은 박춘배의 군복이다. 사람들이 세 아주머니가 죽은 현장에서 박춘배와 부인의 사진을 볼 때, 경찰서장은 그의 이름을 세 번 부른다. 왜 박춘배는 계속 호명되는가? 박춘배는 왜 다시 부활하는가?

연이어 목격자로서의 일본인을 쫓는 장면들 역시 곡성 안의 다른 사건들과 다른 지점이 있다. 박춘배를 죽이는 장면을 목격한 일본인은 그들에게 쫓기다가 결국은 벼랑에서 떨어진다. 공교롭게도 일본인은 한참을 달리는 그들의 차 위에 떨어진다. 그리고 종구와 종구친구들은 일본인을 다시 벼랑으로 밀어던진다. 그 사이 살짝 무명으로 보이는 여자의 영상이 끼어든다.  

 

두 사건들은 사건 자체가 그 사건을 다시 지시한다. 죽은 사람을 죽인다. 떨어진 사람을 다시 떨어뜨린다. 이 반복은 이전의 과거, 이후의 미래를 연상하게 한다. 현재에 좀비와 트럭 위로 떨어진 사람이라는 설정이 있지만, 과거에 사람 혹은 떨어 뜨린 행위가 동시에, 동시간대에 존재하면서 기묘한 시간적 루프를 형성한다.

공교롭게도 무명, 일본인, 박춘배 이 셋은, 이 사건을 기점이나 종점으로 서로 다른 방식으로 부활한다. 무명은 박춘배의 군복, 술집 작부의 가디건, 효진의 머리핀, 세 가지 사물에 연관된 귀신으로, 일본인은 종구와 종구친구들이 준 죽음에서 부활한 악마로, 박춘배는 좀비로 부활했지만 종구와 종구친구들에 의해 다시 죽는 좀비로. 이 사건은 곡성 전체의 내러티브에서 일종의 균열이자, 무명이 언급한 원죄적 사건이다. ‘니 딸의 애비가 남을 의심하고 남을 죽일라카고 그래서 죽여서’

 

이 사건은 모든 이야기가 시작되는 대과거이자 동시에 앞으로 펼쳐질 미래의 연옥이다.

 

 

어찌하여 두려워하느냐?

 

“3) 장치 개념은 ‘보편적인 것들’에 대한 거부와 관계가 있다. 하지만 그것은 동시에 보편적인 것의 범주 그 자체를 대체하고 치환하고 있는 개념이기도 하다. 3절에서 제기된 ‘어원’에 관한 물음은 바로 4절에서 희랍어 ‘oikonomia’ 개념에 대한 분석으로 이어지고 있다. 왜 이러한 분석이 ‘장치’라는 개념의 파악에 있어 중요한 의미를 갖는가? 아감벤의 설명에 따르면, 먼저 이 ‘오이코노미아’의 개념은 기독교 성립의 핵심적 개념 중의 하나인 ‘삼위일체’의 해석에 있어 중요한 의미를 띠고 있다. 다시 말해서, 존재에 있어서는 하나의 실체인 신이 어떻게 성부, 성자, 성령이라고 하는 ‘세 가지’ 모습을 띨 수 있는가에 대한 대답 속에서 이 ‘오이코노미아’의 개념이 재-전유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오이코노미아’라는 개념 자체가 이미 삼위일체라는 기독교적 도그마의 성립을 위한 하나의 장치가 되고 있는 것인데, 바로 이러한 장치가 신이라는 ‘하나의’ 실체 안에서 존재와 행위를 분리해내는, 곧 존재론과 실천론을 분리해내는 작용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아감벤이 보기에, 이러한 분리는 곧 ‘오이코노미아’ 개념의 재-전유가 서구 문화 안에 불러일으킨 하나의 분열증이다.”

 

최정우 <장치란 무엇인가? 푸코 들뢰즈 아감벤>

https://netpolity.wordpress.com/2012/12/25/장치란-무엇인가-푸코-들뢰즈-아감벤

 

영화와 관련된 가장 설득력 없었던 리뷰들은 영화와 감독이 감독의 종교적인 불신을 표현했다고 하는 것들이었다. 근래에 이 영화처럼 종교적인 구조를 지닌 영화를 본 적이 없다. 영화는 삼위일체라는 고전적인 종교적 장치를 끊임없이 반복한다. 일본인-일광-악마, 무명-미친여자-귀신과 같이 하나의 존재이면서, 동시에 세 가지 혹은 그보다 많은 모습으로 현현하는 구조를 끊임없이 만들어낸다. 그러한 강박은 공간이나 시간에 있어서도 하나가 아닌 세 개 이상의 층위를 만들어낸다. 그 층위들은 너무나 촘촘해서 숨이 막힐 지경이다.

하지만, 그 층위를 구성하는 이 시공간과 인물들 사이에는 균열이 발생할 수 밖에 없다. 여기서 발생한 균열과 분열증을 감독은 꽤나 진부한 방법으로 봉합시킨다. 그의 종교적 세계는 귀신의 세계를 소환하고, 외부의 타자를 악으로 재생하면서 말끔하게 하나로 굴러가기 시작한다. 항상 그렇듯이 종교의 세계는 싸울 상대가 없을 경우에 존재하지 못한다. 악마는 종교를 위한 필요조건이다.

흥미롭게도 감독이 제시하는 삼위일체의 구조는 작년 말에 우리를 당황스럽게 만들었던 태극기, 성조기, 십자가가 혼연일체된 시위 사진과 유사한 방식으로 봉합된다. 인과성은 필요없다. 당연히 세 가지가 결합해야할 논리적 이유는 존재하지 않는다. 단지, 세 가지가 결합하기 위해서는 더욱더 정교한 장치들이 필요할 뿐이다.

 

일본인에게 이름이 없는 것은 그가 여러 행위들의 행위자 이며, 수많은 이름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일본인은 살인범이기도, 강간범이기도, 아동성애자이기도, 무당이기도, 귀신이기도, 악쿠마 이기도 하다. 동시에 일본인은 영화 안에서 수많은 사건들의 목격자이기도, 범인이기도, 피해자이기도, 기록자이기도 하다. 영화의 수많은 사건들에서 일본인은 끊임없이 소환된다..  

부제에 의해 부활이 목격되기 이전 부터 일본인은 끊임없이 부활하는 자이며, 죽지 않는다. 일본인의 실체는 언어, ‘말’ 그 자체이다. 그는 항상 언어/소문을 통해 실체를 지니고 지속적으로 소환된다. 그리고, 일본인은 소환하는 이의 ‘거울’로서 존재한다. 보는 이가 원하는 모습으로 영화 안에 등장한다. 부제가 소환한 일본인은 뼈와 살이 있는 뿔 달린 ‘붉은 악마’이다.

 

 

그 놈은 귀신이여

 

무명은 종구가 믿고 싶지만 믿을 수 없는 것을, 일본인은 종구가 믿기 쉬운 것을 투영한다. 둘은 밤의 시간에 각자의 실체를 드러낸다. 일본인은 부제에게, 무명은 종구에게. 종구는 자신을 붙잡는 무명의 손을 팽개친다. 이 장면은 꽤나 특이한 장면이다. 무명은 귀신이나 초자연적 존재이다. 이 장면에서 무명과 종구가 적어도 그 순간, 같은 차원에 존재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무명은 왜 자기 딸에게 이 일이 일어났냐는 종구의 질문에 이렇게 답한다.

무명 : 니 딸의 애비가, 죄를 지어서.

종구 : 무슨 죄, 내가 무슨 죄를 지었는데?

무명 : 니 딸의 애비가, 남을 의심하고, 남을 죽일라카고 결국엔 죽여버렸어.

종구 : 네 딸이, 네 딸이, 네 딸이 먼저 아파 가지고 그런 것이제. 그것이 어찌케 (두번째 닭이 운다)  

 

보통 이 대화에서, ‘니 딸의 애비’가 당연히 종구라고 생각하고, ‘니 딸의 애비’가 일본인을 의심하고, 일본인을 죽일라카고 결국엔 죽여버렸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무명은 죄를 지은 자의 이름을 종구라고 부르지 않고, ‘니 딸의 애비’라고 부른다. 의아한 호명법이다.

이 영화에서 이름이 있는 자는 종구, 효진, 오성복, 양이삼, 권명주, 박춘배, 덕기, 흥국, 병규이다. 그 이외의 사람들은 이름 조차 가지고 있지 않다. 병규(종구 친구)를 제외하고, 다른 이름 있는 자들의 공통점은 용의자이거나 살인자이다.

굳이 무명이 종구를 ‘니 딸의 애비’라고 표현하는 것은 몇 가지 가능성이 있다. 희미하게 효진의 애비가 종구가 아닐 가능성(그럴 경우, 동시에 니 딸의 애비가 저지른 죄는 다른 것일 수도 있다), 지금 무명이 대화하고 있는 이가 사람-종구가 아닐 가능성, 무명이 생각하기에 종구가 아직 ‘이름 있는 자’-‘죄지은 자’-‘가해자’의 위치에 있지 않을 가능성.     

 

 

아니여, 절대 아니여

 

“왜 종구가 그러한 일을 당해야 했는가. 무명은 ‘아비가 (외지인을) 의심하고 해쳐서’라고 답했는데, 의심하기 전부터도 종구네 가족에겐 어떤 징후가 보였다는 점에서 앞뒤가 바뀐 것이 아닌가”

 

“영화를 만들기 전 성직자를 찾아다녔다. 몇 개의 상황을 놓고 질문하고 동냥하듯 답을 모았다. 다양한 종교의 얼굴을 보고 싶어서 네팔과 일본도 갔다. 그런 과정을 겪으면서 현존하는 종교는 신성할 정도로 정말 완벽하구나 느꼈다. 성직자들의 세계는 이렇듯 자기 완결적이고 완벽한데 내 마음은 여전히 납득이 안됐다.

여러해 전 이라크에서 누군가가 피살을 당한 경우가 있었다. 어떤 성직자에게 그분은 왜 돌아가셨는지 물었다. 그랬더니 가지 말라고 하는 곳에 가서 하지 말라는 일을 하다가 엄한 사람은 살인자로 만드는 죄를 저질렀다는 답을 듣고 경악했다. 무명(천우희)의 답변은 그런 마음을 일으키려 했다.

이 영화는 피해자에 대한 이야기다. 그가 왜 피해자여야 했느냐가 중요한데 알고보면 누구도 피해자가 되어야 할 이유가 없다. 이건 아주 충격적인 얘기였다. 인간이 존재해야 할 이유는 있는데 사라져야 할 이유가 없다는 것은 말이 안된다고 생각했다. 인간의 존재 이유는 신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으니 신께 말씀드리고 싶었다. 하나님 당신의 선과 존재 이유가 의심을 받고 있네요. 무명은 신과 같은 존재라고 생각했다. 인터넷에서 영화를 본 사람들이 감독에게 묻는 여러 이야기들은 하늘에 계신분께 질문하고 싶은 것과 동일한 내용이다.”
 

한겨레신문 5월 12일자:
http://www.hani.co.kr/arti/culture/movie/744857.html

 

 

기자는 이 영화의 사건들이 선형적인 구조라는 것을 믿으며 질문한다. 그 질문에 흥미롭게도 감독은 무명의 화법을 구사한다. ‘존재하는 이유는 종교와 신과 밀접한 연관이 있는데, 종교와 관련된 사라져야 하는 이유는 납득할 수 없다. 무명에게 질문하고 싶었던 것은 신에게 물어보는 것과 같은 이유에서이다.’ 감독은 사람이 사라져야 하는 이유로 신 반대편의 신적인 존재를 영화 안에서 재생했다. 그는 영화 안에서, 강력하게 자신이 던지는 질문의 해답을 이미 제시했다. ‘종구가 피해자여야 하는 것이 중요한데, 알고 보면 누구도 피해자여야할 이유가 없다.’ 인터뷰가 왜곡되는 경우가 있다고 가정을 해 보아도, 감독의 언어 또한, 돌고 돌아 다시 원점으로 다가오는 무명의 이야기같다.

 

이 영화 전체를 아우르는 정교하고 다양하게 해석가능한 플롯들은 사실, ‘이 영화는 피해자를 위한 영화다’라는 한 마디에 조심스레 흔들린다. 감독이 정교하게 구축한 신적인 세계, 그것과 같이 연동하는 무속, 삶의 세계, 그것들 사이에 만들어진 그 세밀한 균열들이 지향하는 바가 지닌 목적이 궁금해진다. 작가의 입장에서, 영화가 이렇게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것은 우선, 작업적으로 성공적이라는 것을 안다. 감독은 분명히 종교적인 논쟁을 예측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가 던진 ‘이 영화는 피해자를 위한 영화이다’라는 명제 또한 격렬한 논쟁을 일으킬 것을 알았을 것이다. 그렇지 않다고 상상하기에 감독은 너무 치밀하다.

 

그렇다면, 종구는 피해자인가? 효진이 그렇게 된 것은 정말 일본인 때문인가? 이 영화는 가족 간의 살인, 존속 살인에 대해서는 허심탄회하게 시각적으로 다루지만(무대의 요소로), 가족 안으로 전혀 들어가지 않는다. 그 안은 또 다른 지옥도 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신과 인간의 관계에서 종구를 피해자로 만들어 버리고, 그 구도 안에 종구의 죄들을 묻어 버리고 일반화시킨다. 사실은 유일하게 호명되는 두 사람, 박춘배와 효진이 그 죄의 원천이다. 일본인은 그 죄의 외부적 원인, 종구가 사라져야 하는 신학적 해답일 뿐이다.   

 

 

바로 나다

 

외부자와 내부자 사이에 흐르는 경계와 그 안의 관계들을 성서를 통해 촘촘히 채운 감독의 세계는 공포스럽다. 그 공포는 종구가 그 세계에서 망가지는 것을 보는 것과는 전혀 다르다. 아마도 내부자가 한 번도 되어 보지 못한, 공동체의 일원이 되지 못해 본 사람이라면, 나홍진이 구축한 세계가 훨씬 공포스럽게 여겨질 것이다. 정말 많은 다수가 종구와 같은 선택을 할 것이라는 것을 무의식적으로 알게 된다.

 

영화 ‘이끼’의 구조는 ‘곡성’에 비하면 훨씬 단순하다. ‘이끼’에서는 주인공이 피해자가 되는 이유가 확실하다. 주인공은 마을을 내부자이자 외부자 로서 관찰하게 되고, 이상한 일들이 발생하는 것을 쫓아가다가 마을의 비밀에 다가간다. 마을 사람들은 그것을 방어하려고 하고, 그를 막으려고 한다. ‘이끼’의 갈등구조와 공포는 ‘곡성’과 비교하면, 단조롭고 평이하기 까지 하다. ‘이끼’는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조용하고 평화로와 보이는 마을’의 허상을 폭로한다. 공포와 의심의 범주를 아주 가까운 이웃의 속성으로 끌어들인다. 그리고 오히려 폭력의 이유가 확실하다.

 

‘곡성’에서 나갈 수 있는 출구는 애초에 설계되지 않았다. 나홍진 감독의 모든 영화가 그렇듯이. 그가 구축한 것은 지옥도이고, 지금까지 만든 것 중에서 가장 정교하다. 가해자와 피해자라는 이 복잡한 담론을 덥석 던져 놓지만, 신학적 요소들이 이미 인간들 모두를 압도한다. 등장인물들은 나홍진 감독이 구축한 세계에서 계속 고통받는다. 폭력은 이미 자연스러운 요소이며, 그것은 그 세계의 기본 배경이다. 감독이 말하는 ‘피해자’는 종구의 처나, 할머니나, 미친 여자나, 효진이나, 장모나, 우물 속에서 발견된 세 명의 여인이나, 아들이나, 부부나, 주인집 아주머니가 아니다. 우리 모두 인간이라는 이름으로 ‘피해자’일 뿐이고, ‘곡성’에 구축된 지옥도에서 나홍진 감독의 말은 항상 옳다.

 

나홍진 감독이 구축한 이 심오하고 견고한 세계 앞에서, 실상 묘하게도, 아무 것도 할 수 없으니 가만히 있으라는 강한 의지를 만나게 된다. 이 혹독한 세계, 극장에서 유일하게 소환되는 신적인 존재는 감독 뿐이다. 사실, 우리는 그가 구축한 세계과 그가 믿는 세계에 단 한발짝도 들어가거나, 들여보내질 수 없다. 왜냐하면, 우리의 대부분은 항상 적지 않은 수이지만, 항상 소수일 것이며, 누구의 외부자일 수밖에 없다. 우리 대부분이 그의 세계에서 할 수 있는 역할은, 피해자로 호명되지도 않는 수북이 쌓이는 시체더미이거나 악쿠마로 변한 외부자일 뿐이다.

반대로, 견고함에 머무르고 있던 종구에게 역시 이 세계는 혹독하다. 자신의 세계를 유지하기 위해 그는 일본인을 죽이려고 하고 죽여야한다. 하지만, 결국은 자신의 가족을 지켜내지 못한다. 감독에게 피해자로 인정받은 종구 역시 좌충우돌하며, 아버지로서 효진이를 보호하겠다는 집념을 표현하며 죽어간다. 그 일념이 잘못되어 있든, 아니든 상관은 없다. 이 견고한 신념의 아름다운 숭고함이 몸에서 소름이 돋게 한다.

나홍진 감독이 구축한 세계, 그가 현실이라고 믿는 세계에서는 모두(내부에 있다고 믿든 외부에 있다고 믿든)가 끊임없이 부활하는 악마를 만날 수 밖에 없다. 그 세계의 시점은 항상 살인자들과 가해자들의 것이다. 그의 세계에서 그들에게 속죄할 시간은 주어지지 않는다. 원인은 저 멀리에 있을 뿐이다.

아무도 그 세계를 벗어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이 복잡한 서사 전체는 ‘어쩔 수 없음’이라는 거대한 출구로 귀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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