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년에 한 번 열리는 카셀 도큐멘타는 대형 미술행사가 있을 때마다 언급되는 세계적인 행사이다. 많은 미술관계자의 발길이 자연스레 카셀을 향한다. 특히나 올해는 카셀 도큐멘타, 뮌스터 조각 프로젝트, 아트 바젤, 베니스 비엔날레가 유럽에서 한꺼번에 열리는 해였다. 10년에 한 번 오는 행사들은 시작 전부터 관심을 끌었다. 수많은 미술관계자들이 독일과 이탈리아 베니스를 방문했고 앞으로도 할 것이다. 하지만, 막상 우리는 피상적으로 그 행사들을 접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막연한 명성, 막연한 유서 깊음 같은 것에 끌리며 말이다. 사실 1995년 광주 비엔날레를 시작으로 우리나라에서도 수많은 국제 비엔날레가 열리고 있다. 비엔날레들이 열릴 때마다 주기적으로 비엔날레 자체에 대한 비판이 반복된다. 2년 주기의 행사가 열릴 때마다 수많은 문제들이 제기되고 우려되지만 결국은 같은 방식으로 행사들은 다시 반복된다. 그에 대한 분석들도 비엔날레의 역사만큼이나 지속되어 왔다. 하지만 시계는 항상 2년 단위로 다시 원점에 맞추어진다. 기획으로 들어가 촘촘하게 논의하는 작업들은 아직도 요원한 것처럼 보인다. 카셀 도큐멘타는 1955년부터 현재 62년간, 지속해오는 프로젝트이다. 현재의 웅장하고 숭고해져버린 이 행사의 외양을 카피하는 것은 임시방편에 불과하다. 오히려, 이 행사들이 이렇게 지속적으로 열릴 수 있는 원천적인 힘이 무엇인지, 이 행사가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를 들여다보는 것이 새삼스레 유의미할지도 모르겠다.

 

 

카셀 KASSEL

 

  카셀 KASSEL은 독일 헤센 주에 위치한 도시로 면적 107킬로평방미터 (광주의 면적 501킬로평방미터)20151231일 기준, 인구 197,984명의 중소도시이다. 1945년도 전쟁 당시의 인구는 160,000여명 정도였다는 것을 감안하면, 도시 자체의 크기나 인구의 변화가 카셀 도큐멘타를 통해 변한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도시는 풀다 강 연안과 접해있으며,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된 빌 헬름스회헤 산공원이 위치한다.

  이 도시의 이름은 로마 시대 이후부터 이 지역에 살았던 독일 부족인 Chatti의 성곽인 고대 Castellum Cattorum에서 비롯된 것이다. 카티족은 로마의 역사가인 타키투스(55-120?)이 기록한 <게르마니아>에서 게르만의 여러 부족 중 하나로 기록되어 있다. 타키투스에 의하면 카티족은 게르만인치고는 상당한 분별력이 있고 일처리 솜씨도 능란하다고 표현된다. 그들은 성인의 나이가 되면 곧 머리칼이나 수염이 계속 자라도록 내버려 두고, 가장 용감한 자들은 모두 쇠로 만든 반지를 끼고 쇠사슬처럼 보유하며, 많은 카티족은 눈에 띄고 무서운 용모를 즐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로마의 역사서에 기록된 이후에 우리가 잘 알 수 있는 유명인으로는 그림형제가 있다. 그림형제는 19세기 초 카셀에서 살며, 동화를 쓰고 모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실제로 우리가 알고 있는 많은 동화들의 원형들이 수집되어 있다. 그림형제의 이야기는 단순히 동화 뿐 아니라, 많은 해석을 발현시켰으며, 근래에는 미드로 만들어지기도 했다(Grimm 2011-2017).

  카셀은 근대에 이르러서는 오스트리아-프러시아전쟁에서 오스트리아의 편에 있었으며, 18세기 후반부터 주요 산업단지와 주요 철도 교통의 요지로 발전해왔다. 그러한 산업적 기반으로 현대사에 이르러, 카셀은 나치의 군사요충지 역할을 하게 되었다. 카셀에는 2차 세계 대전 중에 독일 군사지역 Wehrkreis IX의 본부가 위치해 있었으며, 정치인 수용소로 악명높았던 다카우 수용소의 서브캠프, 탱크를 생산하는 군수공장등이 위치하고 있었다. 덕분에 심각한 폭격을 받게 되었고, 도시의 90퍼센트 이상이 폭격으로 사라졌다. 하지만, 군수공장은 전쟁이 끝날 때까지 살아남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454월 연합군은 카셀에 진격하여, 격렬한 전투를 벌였고 그 때 역시 도시는 황폐화하였다.

 

 사진 1 -독일지도

 

  카셀은 전쟁과 폭격 당시 사라진 건물들을 재건하는 대신 1950년대의 형식으로 대부분의 도시는 재건되었다. 카셀도큐멘타는 이러한 도시적 배경에서 1955년 처음 열리게 된다. 1955년 아놀드 보데가 표방한 도큐멘타의 이상은 그동안 퇴폐미술/예술로 분류되었던 모든 현대미술/예술을 가능케하는 것이었다.

 

 

퇴폐미술

 

  히틀러가 1933131일에 권력을 잡은 이후에 가장 먼저 행했던 것 중에 하나가 퇴폐예술을 정화하려는 시도이다. 이러한 시도는 미술뿐만 아니라 음악, 문학, 영화 등 전방위에 걸쳐서 행해졌다. 나치가 정의하기에 퇴폐적이라고 정의된 예술가들은 공식적인 문화적인 활동을 지속할 수 없었다. 19339월에는 라이히 문화회의소 Reichskulturkammer를 조제프 괴벨스의 책임아래에 만들었고, 이곳은 히틀러의 선전과 홍보에 이용되었다. 이들은 나치를 지지하는 인종적으로 순수한 예술가로 구성되거나 그 조건을 기꺼이 준수하는 회원들로 이루어졌다. 괴벨스는 국민선전계몽부 장관이면서 문화회의소 총재였다. 1935년 문화회의소는 10만 명의 회원을 지니게 되었다. 그 안에서 퇴폐에 대한 기준들이 논의되었고, 문화회의소의 회원이 아닐 경우에는 나치치하에서 예술 활동을 할 수 없었다. 히틀러는 제국주의에 모더니스트 실험을 위한 장소가 없다고 19349월에 선언한다. 이 칙령은 수많은 예술가들의 지위를 무력화하였다. 프란츠 카프카의 저서는 1939년에 더 이상 발간할 수 없었다.

 

 

 사진2 - 퇴폐미술전

 

  나치는 바우하우스, 큐비즘, 야수파, 표현주의, 다다, 인상주의등 대부분의 현대미술운동과 아방가르드를 억압하였다. 1937년까지 퇴폐미술에 대한 나치 정책은 확고했으며, 1937630일 괴벨스는 6명의 위원으로 구성된 라이히 문화회의소 시각예술 분과를 통해 우리가 아는 현대 미술의 시작점이 된 앙소르, 놀데, 헨켈, 마티스, 피카소, 고흐 등 우리가 알고 있는 대부분의 작가들의 5000점이 넘는 작품들이 압수했다. 1937719일 독일 32개 박물관과 미술관 소장품 중 650 점이 넘는 그림, 조각, 서적 등이 전시된 퇴폐미술전은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다른 11개 도시에서 전시되기 전에 1130일까지 뮌헨에서 처음 개최되었다. 퇴폐미술전 이후 괴벨스는 독일미술컬렉션에 대한 철저한 수색을 명령하고, 그 압수를 통해서 수집된 작품은 무려 16558점에 이른다. 퇴폐미술전과 반대로 대독일미술전시를 동시에 개최한다. 퇴폐미술전 이후에도 예술분야에 대한 지속적인 탄압이 진행되었고, 많은 예술가들은 독일을 떠났다.

 

 

도큐멘타

 

  도큐멘타라는 단어는 신조어로 알려져 있다. 이 단어는 나치시대 동안 독일에서 가능하지 않았던 모든 현대미술에 대한 기록을 의미하며, 모든 형식의 전시가 가능함을 표방한다. 나치가 퇴폐라는 이름으로 지속적으로 억압했던 모든 현대미술을 가능하게 하고 예술에 자유로움을 부여한다는 것이 도큐멘타의 가장 기본적인 방향이었다. 도큐멘타는 억압에 대한 반대, 모든 표현의 자유라는 기초 개념의 골격이다. 나치의 치밀한 문화적인 억압에 대항하는 의미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훨씬 강한 추동력을 가질 수 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 거대한 명분은 사실 제대로 구현된 적이 없기 때문에 끊임없이 재시도되고 재각성되어야 하는 것이다.

  첫 번째 디렉터 아놀드 보데는 카셀 출신이며, 베를린에서 교수활동을 하다가 나치에 의해 퇴직한 후 카셀에서 계속 지낸 것으로 알려져 있다. 도큐멘타의 전시기간은 최대 100일이다. 도시 전역에서 벌어지는 도큐멘타는 1955년 첫 회에 148명의 참여자와 670회의 전시, 그리고 관람객 수 13만을 기록한다. 아놀드 보데는 도큐멘타 3(1964)까지 참여한다. 그 이후에도 Harald Szeemann과 같은 디렉터는 미술사를 가로지르는 행사를 기획한다. 2017년까지 14회째를 맞고 있는 도큐멘타의 연혁은 다음과 같다.

 

  documenta 1955.7.16-9.18 Arnold Bode, 참여작가 148, 관람객 130,000

  II.documenta 1959.7.11-10.11 Arnold Bode/Werner Haftmann, 참여작가 338, 관람객 134,000

  documenta III 1964.6.27-10.5 Arnold Bode/Werner Haftmann, 참여작가 361, 관람객 200,000

  4.documneta 1968.6.27-10.6 24-strong documenta council, 참여작가 151, 관람객 220,000

  documenta 5 1972.6.30-10.9 Harald Szeemann, 참여작가 218, 관람객 228,621

  documenta 6, 1977.6.24-10.2 Manfred Schneckenburger, 참여작가 622, 관람객 343,410

  documenta 7, 1982.7.19-9.28 Rudi Fuchs, 참여작가 182, 관람객 378,691

  documenta 8, 1987.6.12-9.20 Manfred Schneckenburger,참여작가 150, 관람객 474,417

  DOCUMENTA IX, 1992.6.12-9.20 Jan Hoet, 참여작가 189, 관람객 603,456

  documenta X, 1997.6.21-9.28 Catherine David, 참여작가 120, 관람객 628,776

  Documenta 11, 2002.6.8-9.15 Okwui Enwezor, 참여작가 118, 관람객 650,924

  documenta 12, 2007.6.16-9.23 Roger M. Buergel/Ruth Noack, 참여작가 114, 관람객 754,301

  dOCUMENTA(13), 2012.6.9-9.16 Carolyn Christov-Bakargiev, 참여작가 187, 관람객 904,992

  documenta 14, 2017.4.8-7.16 그리스 아테네 / 2017.6.10-9.17독일 카셀, Adam Szymczyk

 

 사진 3 - Marta Minujin 책들의 파르테논

 

  도큐멘타의 현재는 우리가 뉴스로 접하는 것처럼 스펙타클하지만, 비판에서 자유롭지는 못하다. 올해는 처음으로 아테네와 카셀에서 시간차를 두고 같은 방식으로 열렸으며, 통합관객이 백만이 넘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아테네와 카셀에서 열렸던 이번 도큐멘타는 외부적인 조건에서 비롯된 논의가 더 많았다. 그리스의 경제 위기가 지속되는 가운데 기획된 이번 도큐멘타는 기획 자체가 민감한 지점에 위치한다. 알다시피 독일은 그리스의 국가 부도 사태에서 에누리없는 자세를 지속적으로 유지해왔고, 그리스의 반독일 감정은 증폭되어 있다. 카셀이라는 중소도시에서 발현한 도큐멘타라는 브랜드가 60년만에 세계 문화의 보고, 그리스의 아테네에서 개최되는 것은 복잡한 경제적 상황을 제외하고도 꽤나 아이러니하고 상징적이다. 이전의 다른 도큐멘타와 달리 외부적인 정세 요인이 도큐멘타를 평가하는 주요 기준이 되는 것은 이례적이기도 하다. 동시에 상업행사로서 아트바젤이 스위스 바젤 뿐만 아니라, 홍콩과 마이애미에서 열리는 것과 같은 분점화가 현대미술, 혹은 컨템포러리 미술에 까지 영향을 미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것이 단순히 도큐멘타 14의 단발적인 시도인지, 앞으로도 고려되는 것인지 귀추가 주목된다.

 

  비엔날레와 트리엔날레에 비해, 카셀 도큐멘타와 뮌스터 프로젝트가 사람들에게 얻은 신뢰는 긴 준비 기간에 기인한 것이 크다. 2년 혹은 3년 사이에 세계미술의 흐름을 보여준다는 것은 사실 불가능에 가깝다. 2년이라는 기간은 오히려 만국박람회에 적합하다. 단순히 오래 준비하는 것이 유의미하다는 것은 아니다. 5년과 10년이라는 시간은 정치나 경제의 시간과 일치하지 않다는 것이다. 쉽게 생각해서, 5년과 10년 단위의 행사는 관광이나 경제의 의미로 운용하는 것은 어렵다. 5년과 10년은 대부분은 정치적 임기들보다 훨씬 긴 시간이므로, 오히려 외부 정세적 간섭요소가 줄어든다. 도큐멘타의 탄생이 정치의 예술적 억압에 반대하는 것으로 시작했으므로 이러한 선택은 설득력이 있다. 예술을 통해 다른 것을 만들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순수하게 예술적 입장을 견지할 수 있었던 것이 오히려 수많은 비엔날레에도 불구하고 도큐멘타가 꾸준히 견조하게 성장할 수 있던 배경이다. 그런 의미에서 도큐멘타14 디렉터 Adam Syzmczyk의 시도는 솔직히 도큐멘타의 긴 흐름에서 벗어나는 결정이었다.

 

  도큐멘타의 연혁에서 보면 알 수 있듯이, 도큐멘타의 타이포와 로고 자체는 그 도큐멘타의 성격을 반영한다. 로마자와 숫자의 표기, 도큐멘타의 앞 혹은 뒤에 숫자가 위치하는 것, 대문자 소문자의 차이 등 작은 변주들을 볼 수 있다. 그것이 가지는 디테일한 의미는 그 문자로만 온전히 표현되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러한 디테일이 흥미로운 것은 그 디테일한 변주 자체가 일종의 미술적 표현으로 느껴진다는 것이다. 도큐멘타의 시각 정체성은 처음 행사가 만들어졌을 때부터 바우하우스의 변주로써 만들어졌다. 물론 올해 도큐멘타 14의 폰트는 그것을 완전히 픽셀화하면서 타이포의 자체 속성을 무력화 시켰다. 디자인은 단순히 독일의 행사라는 큰 틀을 깨어버린 이번 도큐멘타 14의 행위와도 일치해 보인다. 디렉터의 선정에서부터 이번에는 지금까지의 도큐멘타가 아닌 다른 시도를 원했던 것으로 짐작된다. 그것이 훌륭한 선택이었냐는 것은 이론의 여지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각적 아이덴티티와 행사의 성격을 일치시키려는 것은 현대미술이 지향해 온 긴 흐름의 연장이라고 볼 수 있다. 시도 자체의 옳고 그름이 문제가 아니고, 오히려 이런 섬세한 시도들과 완결도가 도큐멘타의 저력이라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그럼에도 여전히, 예술의 정치력은 정치로부터 자유로울 때 발생한다라는 문득 머리에 떠오른 문구가 계속 뇌리에 앙금처럼 남는다. 그 말은 예술이 정치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는다는 말이 아니라, 어떻게 억압적으로 작동하는 정치에서 자유로와질 수 있는가에 대한 스스로 혹은 우리 자신에 대한 물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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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용석의 그림이 위험한 것은 '회화에 대한 고민'을 앞세워 동성 간의 밀애나 신체에 대한 은밀한 탐닉으로 유도하기 때문이다. 어두운 바탕 위에 섬세한 결을 드러낸 얇은 베일의 노랑, 흘러내린 노랑, 흩뿌려진 노랑에 홀려 무심코 따라가다 보면 우리의 눈은 어느새 나뒹구는 신체의 근육, 성기, 엉덩이, 체액에서 헤매고 있다.

 

이런 부류들이 욕망의 탐닉을 적절히 은폐하기 위해 흔히 쓰는 수법은 자신들에게 중요한 것은 대상의 재현보다는 '순수한 감각'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서동진이 오용석의 그림에 대해 쓴 글이 전형적인 예이다.. "나는 그가 선호하느 색채들이 궁금하다. 그가 집요하리만치 모든 그림 속에 집어넣고 있는 흰색과 검은색의 밀도가 아름답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것이 재현하는 대상들을 다른 감각적 체험의 대상으로 운반하는 요구 앞에 멈추어 서게 된다.[...] 그것이 그에게 검붉은 혹은 혼탁한 잿빛의 실루엣으로 등장할 때 나는 흥미롭다. 그 장면을 평범한 관능적인 쾌감에서 분리시키는 것은 바로 이러한 감각적인 자질, 혹은 이미지에 추상적인 잉여를 부여하는 힘이라고 생각한다." (1. 서동진, "당신의 아름다운 주관성", [Tu](오용석 개인전 자료집), 푸른커뮤니케이션, 2011, p139-140)

 

오용석이 즐겨 그리는 대상이 아닌 그의 색과 형태에만 관심이 있다고 말하는 것은 어리석을 뿐만 아니라 기만적인 짓이다. 마찬가지 부류인 롤랑 바르트는 바로 그런 어정쩡한 상태, 숨은이해관계가 있는 것은 알지만 노골적인 속임수라고 생각하지는 않는, 다시 말해 의미와 형식을 분리하지 않는 애매한 지점에서 비로소 이데올로기가 작동한다고 실토하지 않았던가?! (2. 롤랑 바르트, <현대의 신화>, 이화여자대학교 기호학 연구소 옮김, 동문선, 1997, p293)

 

그들은 조형에 대한 우리의 순수한 탐닉을 악용해 자신들의 변태적 탐닉으로 몰아간다. 이것이 결코 우연이 아니라는 것은 오용석이 우리를 데려가려고 설정한 목표가 얼마나 정교하고 치밀한지 보여주는 그의 글에 잘 나타나 있다. 우리를 이런 섬세함 자체에도 매혹되지 않도록 항상 경계해야 한다.

 

"페티시는 대부분의 경우 성적인 용어로 사용되곤 한다. 보통 도착적 욕망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우리는 이 단어를 언급한다. 하지만, 욕망과 도착의 범주보다 페티시의 더욱 흥미로운 부분은 표피와 경계에 대한 것이다. 경계는 대상의 본질을 통해 결정지어지는 것이 아니라, 보통 표피와 표피 사이에서 만들어진다. 옷과 살같 사이의 그 미묘한 틈을 통해 우리는 타자를 구별하려고 노력한다. 우리의 주된 욕망 중에 하나는 경계를 시각화하려는 것이다. 페티시는 경계의 문제에서 아주 흥미로운 논점을 제공한다. 본질을 덮어쓰는 표피, 레이어를 넘어서는 레이어. 일상성을 넘어서는 감각. 불완전한 경계. 경계를 통해 구분되지 않는 여분. 나의 페인팅들은 그 어는 지점에서 자신들의 자리를 잡는다." - 오용석, "옷과 살갗의 사이" (3. 오용석, "옷과 살갗의 사이", <우리를 위한 셋>, 2015, p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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