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디 해럴슨 Woody Harrelson, 매튜 맥커허니 Matthew McConaughey. 캐스팅의 화려함 만으로도 이 드라마는 눈길을 끈다.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이번에 수상한 매튜 맥커허니, 그리고 우디 해럴슨의 연기만으로도 이 드라마는 충분히 볼만한 것이었다. 연기파 배우라 알고 있는 우디 해럴슨은 그렇다 치고, 초반기 젊을 때 그저 잘생긴 배우로 기억되던 매튜 맥커허니의 연기는 사실 소름이 돋을 정도였다. 혜성처럼 연기로 등장한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시간이 흐를수록 자신의 외모와 인상에 의존한 연기를 한다면, 매튜 맥커허니는 포르노 배우 같던 젊은 시절의 모습을 모두 지워버리고, 마치 <몬스터 Monster>의 샤를리즈 테론 Charlize Theron처럼 <트루 디텍티브>에서 우리에게 다가온다. 보통, 미국드라마의 시즌이 40분 내외에 20편 이상 진행되는 것과 다르게, <트루 디텍티브>는 영화에 가까운 영국드라마의 6편 혹은 8편의 형태를 따른다. <트루 디텍티브> 시즌 1은 총 8회로 구성되어 있다.

 

태풍이 휩쓸고 간 루이지애나 주를 배경으로 <트루 디텍티브>는 아주 느리게 진행된다. 기존 미드의 속도에 익숙한 사람들에게는 지루하게 느껴질 정도이다. 거기다 루이지애나의 독특한 풍광, 습하고 더운 늪지대로 가득한, 흔히 드라마에서 보던 LA나 마이애미와 달리 화려한 느낌이 아니라, 건조하고 푸석한 풍광은 이 드라마를 낯설게 만든다. 드라마가 장소 특히 도시의 이미지를 만들어낸다고 보았을 때, 뉴욕, 엘에이, 마이애미, 텍사스 등에 익숙한 우리의 시선에 루이지애나는 독특하게 다가온다. 하나의 사건을 8부작으로, 십년이 넘는 시간의 공백을 통해 다루는 방식 역시, 기존의 미국드라마가 지녔던 화려한 숨가쁨 과는 거리가 있다.

 

익숙하지 않은 지루함에도 불구하고 <트루 디텍티브>라는 제목은 강렬하게 나를 끌어당겼다. 공교롭게도 작업에서 중요한 역할을 차지하는 두 단어가 결합했기 때문이다. 정보를 수집하고 분석하고, 거기에 통찰력을 더해가면서 전체의 흐름을 관망하는 방식에 있어서, 일종의 방법론에 있어서 나는 탐정의 방법론을 따른다. 다른 점이 있다면, 그 과정의 전체가 지향하는 목적이나 목표가 설정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일반적으로 탐정은 사라진 사람이나 사물을 찾거나, 범죄를 저지른 이를 찾는다). '진정한 혹은 진짜', ‘탐정 혹은 형사’ 라는 번역에서도 알 수 있듯이, True Detective라는 제목 자체는 지나치게 진지해서 유머러스하게 느껴지기까지 한다. 처음에 그래서 이 드라마에 대한 궁금증이 더 증폭되었다. 이전에 언급한 <한니발>이 매 회마다 살인사건을 다루면서도 탐정이 존재하지 않는 드라마라면 (<한니발>에는 모든 것을 조정하려고 하는 '죽음'과 그것에 대항하려고 하는 '의지 Will'만 존재한다), 반대로 <트루 디텍티브>에는 '사건'과 그것을 해결하려고 하는 '탐정'만 존재한다(개인적으로 아주 흥미롭다).

 
한니발과 윌의 양자구도처럼 <트루 디텍티브> 안에도 독특한 마티 Marty 와 러스트 Rust의 관계가 있다. 모든 관계를 동성애적 관계로 환원한다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범죄물의 대부분에서는 여성의 존재보다는 남성과 남성 사이의 유대가 훨씬 더 비중 있게 다루어지는 것은 사실이다(불평금지). 이들의 구체적인 관계보다 흥미로운 것은 그들의 이름이다. <한니발>과 <트루 디텍티브> 두 드라마에서 '한니발'과 '러스트'는 그들의 캐릭터가 고정된 인물이다. '한니발'은 신화적이고 역사적인 인물로 존재하며, 그의 이름은 그에게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로마시대로 거슬러 올라가 로마인을 공포에 떨게 한 역사적인 인물을 따른다. '한니발' 캐릭터가 가지고 있는 무자비한 살상과 식인의 테마는 고대의 '한니발'의 루머에서 비롯된 것이다. 동시에 그 이름은 '죽음'을 상징하기에 적절하다. '한니발'을 연기하는 매즈 미켈슨 Mads Mikkelsen이 그 안에서 유일한 금발의 북구인 인 것은 오히려, 카르타고인의 혼혈적 이미지의 역반영이다(사실 한니발이라는 역사적 인물에 더 가까운 캐릭터는 잭 크로포드이다. 동시에 현재 미국의 인종비를 반영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다른 유일한 금발은 한니발의 상담의로 나오는 질리언 앤더슨 Gillian Anderson정도?). <트루 디텍티브>에서 '러스트' 역시 매우 흥미로운 이름을 지니고 있다. 그의 이름은 사물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현상을 지칭한다. 녹은 쇠가 아니며, 쇠에서 발생하는 자연 현상이다. 드라마에서 그의 캐릭터는 끝나는 내내 변함없이 일관성을 유지한다. 반면 <한니발>의 윌과 <트루 디텍티브>의 마티는 끊임없이 방황하는 캐릭터이다 (그 점에서 둘은 신화적인 영웅의 캐릭터랑 닮아있다). 드라마를 진행하는 내내 윌과 마티는 갈등하며, 고뇌하고, 방황한다. 윌과 마티의 다른 점은 윌은 드라마 내내 죽음을 상징하는 ‘한니발’과 대항하는 입장이지만, 마티는 ‘러스트’와 동료이다. 마티라는 그의 이름 탓일 수도 있다 (Marty라는 이름은 미국과 영국에서 여자이름으로 주로 쓰인다. 네이버 어학사전).

 

<트루 디텍티브>는 마티와 러스트를 인터뷰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드라마는 그들의 인터뷰를 통해 계속 과거로 트랙백한다. 러스트를 지루하게 인터뷰하는 영상은 <가늘고 푸른 선 Thin Blue Line>을 떠올리게 한다. 그것은 영상 뿐만 아니라, 나중에 발생하는 상황 때문이기도 하다. 지루한 사건의 기록은 러스트와 마티를 만나게 한 사건으로 돌아간다. <트루 디텍티브>와 <한니발>의 흥미로운 접점이 여기서도 발생한다. 두 드라마의 시작은 한 소녀의 살인인데, <트루 디텍티브>에서는 사슴뿔을 쓰고 기도하는 소녀의 이미지라면, <한니발>에서는 사슴 뿔에 받힌 소녀의 이미지이다. <트루 디텍티브>의 원작은 1895년에 발간된 로버트 W. 채임버스 Robert W. Chambers의 <노란 옷을 입은 왕 The King in Yellow>(미술하는 이에게는 비어즐리의 삽화로 더 유명한)이다. 짐작하건데, <한니발>의 사슴뿔 모티브 역시 채임버스의 소설에서 비롯된 것이라 여겨진다. 사슴의 모티브는 전통적으로 뿌리 깊은 신화적인 근원을 가지고 있다. <원령공주 Princess Mononoke> 역시 시시가미와 원령공주의 만남을 소재로 삼는다. 사슴은 자연 그 자체이며, 항상 온화하지만은 않다(시시가미-사슴신의 피는 온 세상을 죽음으로 이끈다). 사슴은 그 생과 사를 관장하는 역할로 나타나며, 그러한 성격은 온전히 '한니발' 캐릭터에 흡수된다. <트루 디텍티브>는 그에 비해서 좀 더 이성적이다. 처음 발생하는, 드라마틱하고 정교한 살인은 이야기의 시작을 장식할 뿐이다 (이 드라마가 지니는 지루함을 보강하기 위해서이지 않을까). <트루 디텍티브>는 사건의 추적보다는 사건을 추적하는 이의 삶을 아주 고리타분하고 찌질스럽게 계속 들여다본다. 처음 이 드라마에 적응하기 힘들었던 것은, 이 드라마가 지속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사건의 진행이 아니라, 사건 안에 존재하는 캐릭터의 일상이었기 때문이다 (여기서도 어떤 면에서는 '사건' 자체는 사라진다). 아마도 우디 해럴슨과 매튜 맥터허니가 아니었으면 이 드라마를 끝까지 보지 못했을 것이다 (특출한 배우 둘을 캐스팅한 이유는 있었다).


<트루 디텍티브>는 온전히 남성의 드라마이다. 부정적인 마초의 드라마가 아니라 오히려 꽤나 구질구질한 중년들(?)의 드라마이다. 일종의 동료애 혹은 중년 이후의 빛바랜 과정들이 이 드라마에서는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 17년의 시간성은 자연스레 주인공들의 삶에 접근하게 되고, 길기만 한 그들의 인생은 평행선을 달린다. 그들이 만나는 지점은 바로 그들이 추적해야할 '사건'이며 그것을 대하는 신념이다. 17년간의 추적을 통해서 그들은 작은 결말을 내지만, 그 안에서 등장한 수많은 악역 중에서 단지 4명 정도를 잡는데 그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추적을 멈출 수 없다. 전형적이라고 바라볼 수도 있는 결말에서 그들은 다시 어디론가 떠난다. 마지막 회에서는 마티와 러스트의 삶은 대칭적으로 보여진다. 그들의 삶은 씁쓸한 느낌을 준다. 병원에서 마티는 가족들과 둘러싸여 눈물을 흘린다. 반면 러스트는 마티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하면서 눈물을 흘린다(러스트에게는 가족이 없다. 그는 일종의 자연 현상이므로 태생이 없는 것이 당연하다). 드라마 내내 욕망으로 좌충우돌하는 마티와 괴짜처럼 단호한 러스트는, 어느 순간 동등한 위치가 되어 있다. 전혀 다른 그들을 바라보는 시선은 담담하다. 그들이 만나는 지점은 우리가 거창하게 말하는 정의감이 아니라, 인스턴트 음식과 맥주를 매우 무료하게 혼자서 먹는 그 순간이다. 쿨하거나 아름답거나 멋있는 장면이 아니라, 망가지고 부서지고 그래도 다시 일어나는 혹은 일어날 수 밖에 없는 순간들을 보여주기 위해 <트루 디텍티브>는 무던히 노력한다. 이 드라마의 가장 큰 장점은 방법론에 대한 선택을 강요하거나 의문을 던지는 대신 그 방법론들이 실재에서 어떻게 만날 수 있는지를 탐구한다. <트루 디텍티브>에서 진정한 ‘사건’은 그들이 평생을 걸쳐 추적하는 살인사건이 아니라, 오히려 마티와 러스트의 삶이 교차하는 그 순간일지도 모른다. 그 지점이 흔하디 흔한, 하지만 찾을 수 없는 '가족애'가 아닌 것이 천만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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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mylab.nayana.kr/s1/mainissue/5969

 <양들의 침묵 1991>으로 시작된 토마스 해리스의 모티브는 안소니 홉킨스와 조디 포스터의 인상적인 연기 이후에 <한니발 2001>, <레드 드레곤 2002>,<한니발 라이징 2007>으로 이어진다. 강렬하고 비현실적이면서 천재적인 한니발 렉터 캐릭터는 2014년에 다시 티비시리즈로 다시 태어난다. 새로운 시리즈는 <양들의 침묵>이전의 한니발과 윌에 대한 스토리를 담고 있다. <맨헌터 1989>에서 잠시 보여진 윌이 이번 시리즈에서는 주인공이다.

 

<한니발 2013> 시즌 1에서 가장 흥미로운 것은 한니발과 윌의 관계이다. 한니발은 윌의 상담의이면서 동시에, 연쇄살인범이다. 윌은 그 연쇄살인범을 쫓는 FBI를 자문한다. 조디 포스터가 FBI요원인 것에 비해 윌은 범죄심리학 박사이다. 직접 살인범을 쫓거나, 프로파일링과 다르게, 현장에서 살인범의 정신과 동일한 상태의 환각에 빠지면서 살인범의 사고를 더듬는다. 살인범의 세계를 이해하면 할수록 윌은 정신적인 혼란과 착란에 빠진다. 그 과정에서 한니발은 윌을 조심스레 관찰한다. 한니발의 욕구는 파괴적이지만, 어떤 면에서는 사랑에 근접한다. 한니발은 윌 만이 자신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는 가능성과 동시에, 윌은 절대 자신처럼 되지 않는다는 사실에 더욱 매료된다. 포식자로서 한니발은 인간에 대한 호기심과 애정을 가져본 적이 없는 인물인 까닭에, 윌에 대한 감정은 친구에 대한 우정으로 포장되지만 사실은 사랑에 가깝다. 한니발의 윌에 대한 집착은 그래서 더욱더 절실하다. 한니발은 윌을 점점 극단으로 몰아 한계점에 위치하도록 강요한다. 한니발의 가학적인 사랑은 윌의 상황이 나빠질수록 더 강해진다. 결국 시즌 1은 윌이 한니발의 살인에 대한 누명을 쓰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한니발은 절묘하고 빠져나갈 수 없는 함정에 윌을 빠뜨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니발은 윌에 대한 집착을 멈출 수 없다.


<한니발>에서 가장 흥미로운 지점은 모든 육체적인 폭력은 오히려 미학적인 것으로 승화되고, 모든 관념적인 사고는 오히려 신체적인 것으로 전이된다는 것이다. 난무하는 살인과 그 살인의 결과물들은 미학적이다 못해 초현실적이다. <한니발 2014> 시즌2 역시 그것을 반영한다. 피해자의 육체는 살인자의 관념을 위해 온전히 봉사하는 일종의 재료에 불과하다. 여기에서 피해자에 대한 연민이나 고통의 장면들은 철저히 삭제된다. 오로지 존재하는 것은 오브제로서의 인체와 그것을 만들어내는 살인자의 관념만이 존재한다. 시즌 2는 한니발의 존재를 자각한 윌의 대반격이 전체적인 주제이다. 윌 역시 한니발과 공유하는 것은 피해자가 아니라 가해자의 시각을 상상할 수 있다는 것이다. 결국 <한니발> 안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그러한 관념들의 싸움이다. 어떤 부분에서 이 드라마는 지젝이 말하는 윤리성에 가장 근접한 형태의 이미지들로 이루어져 있다. 욕망에 대한 죄의식이 없는 상태, 혹은 그것을 실현한 상태, 그 이후의 이야기들이 <한니발>이다. <한니발>은 아주 완성도 높은 화면을 제시한다. 모든 영상은 관념과 심리를 반영한다. 이 안에서 실재하는 현실이나 주관성을 벗어낸 객관적인 시각이나 앵글은 존재하지 않는다. 거의 모든 장면들은 그것을 보는 자의 관념과 상상을 반영한다. 덕분에 가끔은 구토와 현기증을 불러일으킨다. 시즌 1과 시즌 2 공히 가장 많은 장면들은 윌의 상상계에 대한 것이다. 윌의 심리와 상상을 반영하는 그 영상들은 사건의 진실에 근접한다. 시즌 2에서 역시 사건의 진실에 다가갈 수 있는 이는 오로지 한니발과 윌 두 사람 뿐이기에, 둘의 유대는 더욱 끈끈해진다. 그 사이에서 나타나는 인물들의 역할은 한니발과 윌의 체스말로서의 역할이다. 종국에 체스말은 제거될 운명이다.


<한니발> 시즌1과 시즌2 공히 죄의식의 차원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굉장히 포르노그라피적이다. 거기다 <한니발>안에서 벌어지는 모든 살인들과 피해자들은 한니발과 윌의 갈등 혹은 사랑에 봉사한다. 그 둘이 연결되는 유일한 순간은 '사건'이다. 즉 이 드라마 안에서 사건의 역할은 한니발과 윌의 관념이 만나는 장소이외의 의미가 없다. 시각적으로 자극적이고, 카니발리즘을 기반으로 하는 <한니발>은 오히려 그런 선정성을 통해서 관념성을 획득한다. 그 안에서 팩트 fact, 사실은 전혀 중요한 것이 아니다. 덕분에 다른 살인사건을 다루는 많은 드라마들과 달리, <한니발>은 사건과 그것을 추적하는 탐정을 위한 것이 아니다. 어떤 의미에서 '사건'에서 비롯된 '비극'은 사라지고 존재하지 않는다. 죽음은 이미 현실적인 삶에 발생하는 비극이 아니며, 관계를 위한 순수한 전제일 뿐이다. 죽음은 <한니발>에서 <한니발>의 세상을 구현하는 전제이다. 또한, 한니발의 식인은 일종의 현실에 머무는 의식이다. 한니발이 인간과 유일하게 접촉하는 순간은 살인과 식인의 순간이다. 한니발은 인간의 육체를 지녔지만, 개념적으로는 '죽음의 신'이다. 사라마구의 소설 <죽음의 정지>에서 나오는 신체를 지닐 수 있는 '죽음의 신'의 존재에 가깝다. 한니발에게 윌이 중요한 이유는 윌이 유일하게 살인과 식인의 과정 없이 만날 수 있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그들을 매개하는 수단은 '사건'이지만, 시즌 2에서는 시즌 1과는 전혀 다른 과정을 통해 만난다. 시즌1에서 한니발은 윌의 관심을 끌거나, 윌이 사건의 본질에 다가오지 못하게 하는 과정이었다면, 시즌2에서 윌은 한니발이 모든 사건의 중심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한니발과 윌의 대립 혹은 사랑의 무대는 그들 사이에 있는 모든 사람들로 바뀐다. '죽음의 신'을 유일하게 알고 있는 윌과, 윌을 곤궁에서 벗어나게 함(그 곤궁에 빠뜨린 것이 자신임에도 불구하고)과 동시에 자신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서 노력하는 한니발의 싸움이다(온통 너무 신화적이다).


 

죽음을 둘러싼 온갖 미학과 신화 사이에서 <한니발>이 어떤 결말을 맺게 될지는 아직 알 수 없다. 단지, <워킹테드>가 시각적인 쇼크와 함께 다가와, 시즌이 거듭할수록, 지속되는 잔혹함이 과정으로 치환되고 그 안에서 관계성이 부각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미 추상화의 단계에 이른 <한니발>을 바라보면서 여러가지 의문이 발생한다. 이러한 관념성을 지니기 위해서 꼭 이렇게 정제된 살인의 형상, 재료로 치환된 육체들이 필요한 것일까. 과도한 기괴함과 그로테스크함 없이는 우리는 이러한 이야기를 할 수 없는가. 영화가 아니라 드라마라는 연속물의 형태로 매주 관찰해야할 만큼 우리가 섭취해야할 관념성이 이 안에 존재하는 것일까. 충격에 도달하지 않는 미학적인 죽음의 형상을 매주 관찰할 필요가 있는가. 이런 불편함들의 마지막에 드는 또 한 가지 생각은, <한니발>의 세계가 죽음을 전제로 만들어져 있고, 덕분에 이 드라마를 통해 일상 속의 죽음을 지속적으로 성찰하기를 강요받기 때문에 <한니발>이 나에게 불편하게 느껴지는 것은 아닌가이다. <한니발>이 포르노그라피적이라는 것은, 보통의 이미지는 상상을 통해 환상을 도출하는데 비해, <한니발>이 제공하는 이미지는 이미 너무나 환상적인 상태를 재현해 놓아서 다른 상상을 허용하지 않는다. 극단적인 환상의 재현 덕분에, <한니발>에서는 고야의 인용구(“Fantasy, abandoned by reason, produces impossible monsters.”)의 역전이 발생한다. ‘금지되지 않는 환상은 괴물을 만들어낸다.’ ‘죽음’은 일상이 되고 그것을 운용하고 지배하는 ‘한니발’이라는 괴물이 환상 안에서 처벅처벅 걸어나온다.

 

 20140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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