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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ATEMENTS

이탈리아식 오페라하우스 초안 2009

«'소돔120일‘은 피에르 파올로 파졸리니의 영화 ’살로, 소돔의 120일‘에 영감을 주었다. 이 영화는 합의하지 않은 희생자들에게 가해지는 공포와 잔혹을 생생하게 그려 내고 있다. 이 영화가 지닌 예술적 가치와는 무관하게, ’살로, 소돔의 120일‘을 본다는 것은 관객에게는 일종의 사디즘적인 공격이 되어, 관객은 영화를 보는 동안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합의한 희생자로 변모한다.»

 

에스텔라 V. 웰든, 사도마조히즘, 2002

 

관객이 사디즘에 공격되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관객이 합의한 희생자로 변모한다고 지적하지만, 사실은 동화를 통해 합의하지 않은 가해자, 공범자, 목격자로 전환된다. 관객이 느낄 수 있는 혐오감이나 죄의식은 희생자 혹은 피해자가 느낄 수 있는 감정이나 정서가 아니다. 희생자가 느꼈을 것은 오히려 공포, 불안, 복수심이다. 그것은 완전히 다른 변모이며, 해석의 여지도 완전히 달라진다. ‘합의된’이라는 수식어가 붙는 것은 그 안에서 피해자와 가해자의 관계가 둘 사이의 상호계약에 기초한다는 가정에서 비롯된 것이다. 반대로 ‘합의하지 않은’은 ‘계약의 범주에 들어있지 않은’, ‘예측되지 않은’이라는 의미이다. 도착이 쌍방이 필요하지 않고 극도로 개인적인 성향을 띠고 있다면 사도마조히즘은 오히려 사회적인 룰을 지닌다. 하지만 관객 자체는 항상 관찰자의 위치에 있으며, 동시에 계약의 내부에 존재하지 않는다. 즉, 피해자에 대한 연민을 느낄 수 있지만, 폭력적인 시선의 주인인 가해자, 공범자, 목격자일 수 밖에 없다. 폭력적인 것에 대한 학습이 희생자의 경험으로 이어질 것이라는 지적은 잘못된 것이다. 오히려 폭력의 경험은 가해자의 가상경험으로 연결되며, 그 보다 더 복잡한 동시경험의 상태에 빠진다. 그것은 순간적인 자아의 상실 혹은 간접적인 타자성의 사적인 경험이다. 혐오의 정서는 타자성의 경험에 대한 거부에 가깝고, 죄의식의 정서는 이러한 유사경험에 대한 동화의 측면이 강하다.

 

그들의 말대로 계약이 성립되어야 혹은 계약에 대한 믿음이 존재해야지 성립될 수 있는 관계라면, 사도마조히즘 안의 쾌락은 이미 예측가능한 것이며, 예측불허의 사고로 발전하지 않는다. 이러한 생각은 사회적 시스템을 바라보는 입장에서도 같은 것이며, 그것은 시스템의 혹은 계약의 완결성에 대한 믿음이 선행하는 것이다. 사도마조히즘의 룰 안에서는 희생자와 가해자의 관점이 아니라, 오히려 성적인 연극의 개념이 도입된다. 그 안에서 진정한 의미의 피해자와 가해자는 도출되지 않는다. 그렇게 만드는 것은 계약인데, 그것은 시스템으로 전이되서 모두 참여자로 변모시킨다. 다른 말로 하면 계약에 합의를 하였기 때문에 참여자로서의 책임을 동반하게 하는 것이다. 이것은 자본주의의 논리 안에서 사람들을 옭아매는 계약과 같은 속성을 지닌다. 그 계약에 참여하는 자는 그 안에서 발생하는 스트레스와 불이익을 감당하는 것으로 간주한다. 이런 상황에서는 무대와 무대에 참여하는 배우와 관객으로 모든 심각한 논의의 쟁점이 변질된다.

 

가해자의 역할과 피해자의 역할은 학습되어야 한다. 쾌락을 위한 학습은 실제의 욕망을 분출하는 무대이며, 실제의 욕망을 컨트롤하는 무대이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쾌락의 무대 안에서는 욕망을 분출시키기 않도록 하는 억제기제가 발동한다. 이 안에서는 죄의식은 없다. 단지 자기파멸의 방어기제가 작동하며, 단지 계약에 의한 학습의 기제가 발동한다. 아이러니 하게도 쾌락의 행위를 하도록 장려하는 한편, 그것을 멈출 수 있는 기제를 제공하는데, 그것은 가해자의 역할을 하는 사람의 개인적인 의지에 맡겨져 있다. 즉 욕망에 극도로 윤리적인 상황 안에서 기존의 도덕율을 따라하는 분열적인 상황을 창출한다.

 

예측되는 쾌락은 향유의 단계로 급격히 전환된다. 즉, 룰을 파기할 수 있는 상태, 반복의 정점에 금방 다다르게 한다는 것이다. 반복이 나선적이라는 가정 하에서 이러한 향유의 반복은 다른 설정과 상황으로 전이를 요구하게 된다.

 

작가가 표현할 수 있는 것이 관능을 쾌락을 즐기는 자기 자신의 자화상에 불과하다면, 그것을 노출함으로써 관객은 그것과 동일시하게 되고 죄의식을 느끼게 하는 구조가 성립하는데, 그것은 사실 어떻게 보면, 도덕률의 부활을 원하는 것인데, 온전히 그 대상이 쾌락의 개념으로 정의되었을때, 선택이 항상 가장 쉬운 쪽으로 흐른다는 것을 가정을 하면, 제시된 이미지는 내가 원하는 억제의 기제나 주저함의 기제로 사용될 수 없다.

 


왼쪽 마지막 집

 

이 영화의 흥미는 초반기에 피해자의 위치에 머물러 있다가 생존을 목적으로 급격하게 가해자로 변모하는 것이다. 본래의 가해자들에 대한 인과응보적인 폭력 혹은 생존을 위한 폭력은 호러 무비 안에서 지속되는 고전적인 반전이지만, 이 영화 안에서는 보다 적극적이고, 치밀하다.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생존본능과 자식에 대한 사랑이다. 더더욱 흥미로운 인물은 데이빗인데, 그는 가해자로서의 아버지에 마지막에 반기를 든다. 그를 추동하는 것은 생물학적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에 반하는 어떤 것이다. 반대로 어떤 심각한 트라우마적 경험을 통해서 스스로 자립하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정신적 트라우마를 자신에게 준 대상을 제거하는데 동참하는 입장이다. 트라우마적 대상을 제거하는 행위는 그리스 신화에서부터 비롯되는 굉장히 신화적인 행위이다.

 

사도마조히즘적 쾌락은 그 집 밖에서 관찰하는 관객으로서 언급하는 것.




포르노그라피 안에서는 사도마조히즘.


쾌락을 느낄 수 있는 기본 전제에는 계약이 있다. 계약은 안전핀과 같은 역할을 한다. 죽음에 대한 공포를 경감시키는 역할. 약속된 상해의 한도를 넘지 않을 수 있다는 전제에서 쾌락의 무대 안으로 타자를 끌어들이게 된다. 계약은 무대가 생성되게 하는 가장 큰 조건이다. 하지만 무대의 단계에 이르러 계약에 대한 신뢰와 의심 사이에서 또다른 공포 불안요소가 등장한다. 그것의 가장 큰 축은 행위자들의 욕구, 욕망이다. 그것 또한 무대를 생성하게 하는 중요한 요인이다. 하지만 계약이 쾌락을 성립시킴과 동시에 쾌락의 한계를 조절하는 반면, 욕망은 그 한계에 대한 갈증으로 쾌락을 증폭시키는 역할을 한다. 계약이 온전히 행위자, 참여자의 의지에 의존하기 때문에, 욕망과 사이에서 갈등을 유발한다. 금기 앞에서 욕망은 불만족을 불러오지만, 동시에 금기 앞에서, 그 경계에 머문다는 것때문에 쾌락은 증폭된다. 행위자의 내적으로는 안전하다는 사실이 쾌락을 불러일으키지만, 본질적인 욕망에 대해서는 행위자의 입장에서 비윤리적인 제어장치로 작동한다. 사디스트와 마조히스트 사이에서는 근본적인 태도의 차이가 존재하게 된다. 마조히스트의 쾌락기제인 계약은 반대로 사디스트의 쾌락강도를 삭감시킨다. 이것을 상보하기에 계약에 기반하지 않는 또다른 이중적인 무대가 발생한다. 그것은 사디스트와 마조히스트와 그들을 바라보는 관객들 사이에서 만들어진다. 행위자의 행위는 보여진다는 사실, 관객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통해, 보다 강력한 쾌락의 단계로 끌어진다. 관객은 마조히스트에게는 수치심을 증폭시키고, 그 역시 마조히스트에게 쾌락을 강화하는 역할을 한다. 그리고 사디스트에게는 힘과 권위에 대한 과시의 장으로 행위의 무대를 전환시킨다. 사디스트와 마조히스트 사이의 계약은 관객을 제어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행위자들에게 자신 내부의 의지와 무관한 콘트롤하기 힘든 변수이다. 변수의 존재를 통해 행위자의 쾌락은 영향을 받는다.

현대는 분명하게 극장 안의 극장, 무대안의 무대로 이루어져 있다. 극악스러운 행위와 음란한 행위도 직접적으로 전달되지 않는다. 미디어를 통해 여과된 형태의 간접경험은 오히려 그러한 대상들이나 행위들에 대한 왜곡된 쾌락을 장려한다. 반면, 이러한 경험들이 직접적인 경험으로 다가올 때, 그것을 접한 대상은 트라우마적 징후에 노출된다. 그것은 안전하지 않으며, 안전한 세상이 거짓임을 증명하는 단서가 된다. 그것의 소스는 단순히 잔혹한 경험이나, 선정적인 장면들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역사적인 사실에서 비롯되기도 한다. 아주 드물게 역사적 사실과 이미지, 그리고 그 이미지에 대한 전적인 쾌락과 죄의식이 부적절하게 결합할 때 발생하기도 한다. 그것들이 만나는 가상적인 공간을 나는 무대라고 부른다. 그 무대가 흥미로운 것은 그 무대가 아주 광범위한 형태를 지니고 있으며, 각각의 참여자가 서로 다른 입장을 분열감없이 공유하는 데이빗 린치의 영화같은 무대라는 것이다.

발투스의 그림들은 대상을 바라보는 쾌락에 대해 아주 안정적인 형태를 보여준다. 그 안에는 이미 즐김에 대한 죄의식이나 공범자로서의 죄의식은 녹아들어있지 않다. 그 안에는 온전한 즐김의 태도가 녹아 있다. 거기에는 어떤 공포나 불안감이 없다. 대상은 오히려 보는 관객보다 당당하며, 자신들에 대한 쾌락의 정당성을 부여한다. 그들은 피해자도 아니며, 순진한 꼬마도 아니다. 발투스가 포착한 순간은 아이들이 하나의 개체로서 상대를 응시하는 순간이며, 그 순간들은 쾌락의 원천이 전적으로 그들에서 비롯됨을 강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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