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AGE 3-1 : 곡성 哭聲

 

2016년 5월에 개봉한 이 영화는 수많은 해석과 논란을 일으키며 600만명이 넘는 흥행을 했던 영화이다. 당시의 답답한 상황들과 맞물려 느꼈던 엄청난 무력감이 이 영화를 흥행하게 만든 하나의 이유이기도 하다. 그 사이에 정말 많은 상황들이 지나가고, 모든 것이 정상으로 돌아가고 있다고 믿는 지금, 1년도 더 된 영화를 다시 소환하려고 한다. 그 사이에 무력감은 어떤 긍정적인 에너지로 전환되는 것처럼 보이는 지금, 세상이 뭔가 원하는 방향으로 가는 것처럼 보이는 지금, 이 영화의 세계가 유효하지 않은 것처럼 은폐된 지금.

세상은 변화한 것처럼 보이지만, 항상 삶의 전체를 가로지르는 구조들과 장치들은 그대로 건재하다. 여전히 태극기, 십자가, 성조기가 삼위일체의 형상으로 모습을 드러낸 상징과 의미, 그것을 믿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과 함께 하고 있다. 어쩌면, 이 영화를 다시 읽음으로써 다른 세계관을 좀 더 근원적으로 알 수 있을 지도 모른다.

 

이 영화는 쉽게 의심과 의혹에 대한 영화라고 읽혀졌다. 하지만, 의심은 유동성을 지향하는 행위이며, 진행 중인 행위이고, 흔들림이다. 일종의 틀깨기이다. 그런 의미에서 ‘곡성’은 의심에 대한 영화가 아니다. 반대로 견고한 믿음에 대한 것이고, 그 믿음을 깨지 않기 위해 파국을 지향하는 것에 대한 것이다. 이 영화는 기득권에서 벗어난 적이 없고, 사회의 중심이 아니었던 적이 없었던 인물이, 자신의 이해를 넘는 상황을 만나서 붕괴하는 이야기이다. 그 붕괴의 중심에는 일본인이라는 외부자가, 효진이로 대변되는 내부자가 있다. 흔들림을 견디지 못하고, 그 견고함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더 많은 치열함과 더 비열한 폭력이 필요할 뿐이다.

 

 

내 손과 내 발을 보아라

 

이 영화의 수많은 장치들은 쉽게 믿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다. 현혹은 의심에서 비롯된다기보다, 우리가 강력하게 믿는 믿음에서 비롯될 때가 많다. 감독은 고래로 가장 강력한 믿음, 종교에서 시작한다.

 

A “어찌하여 너희는 당황하느냐? 어찌하여 마음에 의심을 품느냐? 내 손과 내 발을 보아라. 바로 나다. 나를 만져 보아라. 너희가 보다시피, 나는 살과 피가 있다.“

B “어찌하여 너희는 당황하느냐? 어찌하여 마음에 의심을 품느냐? 내 손과 내 발을 보아라. 바로 나다. 나를 만져 보아라. 영은 과 뼈가 없지만 너희가 보다시피 나는 살과 뼈가 있다.“

 

영화의 도입부에서 제시된 성서의 구절 A에는 ‘영은 살과 뼈가 없지만’이란 구절이 없다. 성서를 빌어 오지만, 일정한 구절을 삭제하여 감독은 영화를 위한 무대를 마련한다. 이 무대 안에서는 모든 주인공들은 사람인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아시다시피 영화 안에서 유령, 사람, 귀신의 경계는 없다. 기가 막힌 이 세상은 현실, 환각, 환상을 넘나든다. 이 영화 안에서는 현실과 환상, 사람과 귀신, 과거와 현재, 과거와 대과거가 구분없이 감각의 차원에서 동등하게 풀어진다. 성서의 문구, 악마의 독백,  귀신의 대사는 동등한 요소들이다. 흥미롭게도 영화의 후반부에서 악마의 형상으로 변한 일본인은 정확하게 성서의 구절 B를 부제에게 이야기한다.

 영화 말미에 등장하는 악마는 예수가 부활하는 방식으로 세상에 다시 등장한다. 악마는 빙의를 통해서 세상에 나오는 것이 아니라, 부제의 거울로서 몸을 지닌다.  부제는 공포에 눌려, 악마의 살과 뼈를 만져볼 수 조차 없다. 악마 역시 부제와 접촉하지 않는다. 단지 사진을 찍을 뿐이다. 무력한 부제가 무너지며, 영화 전반을 사로잡고 있던 거대한 종교적 서사는 마무리된다. 엑소시즘은 시도되지도 않았고, 악마는 여전히 건재하다.

 

  모든 등장인물들은 일본인이라는 존재에 이미 현혹된 상태에서 의심의 원인이 되는 타자를 제거하기에 열을 올린다. 이쯤 되면 의심이라 하기 보다는 확신에 찬 광기이다. 결국, 영화에서 외부인이자 타자는 실제로 악마였음이 밝혀지고, 광기는 유의미한 것으로 증명된다. 자신의 세계를 지키기 위해 다른 세계를 배제하는 방식은 현실과 아주 흡사하다.

 영화가 제시하는 기본 배경들은 오래된 신념들과 일치한다. 무속이 여전히 살아있을 것같은 전라도의 원초적인 이미지, 악마스럽고 변태스러운 일본인의 이미지, 광인들의 광기, 여성과 아이에 대한 전통적인 이미지, 무속신앙이 가지고 있는 이미지들은 영화 안에서 더욱 설득력 있는 사실로 자리매김을 할 뿐만 아니라, 영화를 보고 있는 관객의 무의식에도 다시 각인된다.

 

실제 영화관에서 이 영화의 사건들에 접할 때는 그 강력함과 공포스러움에 압도되어 사건들의 디테일을 보기가 힘들다. 하지만, 영화의 기묘한 결말에 이르고 나면, 영화에서 이야기하는 단서들이 하나 둘 씩 생명력을 가지며 부활한다. 단서들은 하나의 방향을 가리키지 않는다. 분석하면 할 수록, 영화에 대한 것은 미궁으로 빠진다. 그러다 지쳐 혹은 확신있게 도달하는 결론이 있다면, 그것 역시 영화 전체를 아우르지 않는다. 감독의 의미하는 열린 결말은 그런 의미일 것이다. 이 지점에서 질문을 던지게 된다. 하지만 왜 이렇게까지? `

 

 

뭐시 중헌디?

 

우선 감독의 장치들을 짚어가보자. 감독의 가장 강력한 장치는 앞에서도 이야기한 종교적 요소들이다. 이 영화가 단순한 스릴러나 공포영화가 되지 않고, 악에 대한 진지한 신화로 다시 태어나는 것은 일본인이 단순한 범죄자가 아니라 우리의 손에 닿지 않는 추상적인 존재가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일본인이 초기의 시나리오처럼 일광과 같이 도망가는 씬이 있다면, 마지막에 얼마나 맥이 빠졌을까 쉽게 상상할 수 있다. 그런 종류의 결말이라면 관객들은 모두 안도했을 것이고, 영화 안의 사건들은 영화 안에서만 머무를 뿐, 일상으로 들어오지 않았을 것이다.

 

종교의 요소를 걷어내도, 이 영화는 쉽지 않다. 살인사건에서 가해자가 피해자를 죽이는 순간이 가장 결정적인 순간이라면, 영화에서 그 결정적 순간을 목도할 수 없다. 영화 안에는 현란한 사건의 흔적만 가득하다. 실제에서 관찰할 수 있는 것은 항상 사건의 흔적들과 소문들 뿐이다.  

 예외적인 순간들은 사람이라고 여겨지지 않는 대상들에서 발생한다. 첫번째 살인사건의 용의자와 좀비 박춘배. 둘은 당연히 없애야 하는 괴물이며 타자로 등장한다. 영화 안에서 목격되는 죽음은 그들의 죽음뿐이다.

 

 

뭐시 중하냐고?

 

‘곡성 谷城’과 동음의 ‘곡성 哭聲’은 모든 환상이 가능한 곳이다. 독버섯이 남자들의 불면, 환상, 악몽, 광기의 잠재적 원인으로 작동한다. 환각의 실제적인 이유일 수 있는 건강식품에 섞인 독버섯에 대해서는 영화에서 진지하게 언급이 되지 않는다. 하지만, 이 언급되지 않은 사소한 장치가 작가로서의 감독이 영화-현재에서 자유로와지게 한다.

 

‘곡성 谷城’이 아니라, ‘곡성 哭聲’이어야하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다. 실제 공간을 무대로 만들었을 때, 실제 주민과 지역에 미칠 부정적인 이미지에 대한 걱정 혹은 법률적인 문제가 발생할 가능성이 있을 수 있다. 아마도 이십세기 폭스사가 제작했으니, 이 요소를 고려했을 것이다.

좀 더 영화적인 이유를 찾는다면, ‘곡성 哭聲’의 무대가 실제의 ‘곡성 谷城’이 아닐 경우에 이 영화의 서사들이 훨씬 설득력을 얻는다. 전라도 사투리가 통용되는 이 장소와 시간은, 무속과 귀신이 등장하는 것이 어색하지 않은 장소이며, 원시적인 에너지가 아직 살아있는 곳이다. 그 조건을 만족할 때, 모든 일화, 꿈, 풍문, 소문들은 비로소 현실감을 획득한다.   

 

영화 안에서는 소리, 말은 아주 중요한 요소이다. 의아한 것은 아무도 곡소리를 하지 않는다. 죽음을 애도하지 않는다. 이 안에서 모든 소문들은 현실적 이미지를 지닌다. 말은 곧 실제가 된다. 영화 안에서 제시되는 사건들은 짐작컨데, 감독이 수집한 사건들이다. 영화 안에서는 모든 풍문들이 진실이며, 살아있어야 한다. 그래야 모든 원인이 일본인에게서 비롯될 수 있으며, 신학적인 서사의 악마가 탄생할 수 있다.

이 영화는 일반적인 시간을 따르는 것처럼 보이지만, 각각 다른 소문에서 비롯된 사건들 - 다른 시간대의 사건을 영화 안으로 소환한다. 각각의 사건들 만큼이나 많은 시간들이 영화 속에 내재되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것들이 ‘곡성 谷城’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믿게 만드는 장치들과 동일한 인물들(같은 경찰들)에 의해 다루어지기 때문에, 하나의 시간대라고 믿게 된다. 종구(경찰)/무명/일본인으로 대변되는 인물들을 통해서 대과거/과거/현재의 사건들은 영화 안으로 위험하게 안착한다.     

‘곡성 哭聲’과 ‘곡성 谷城’은 동명의 다른 시공간임에도 영화 안에서는 끝까지 혼용된다. 영화의 후반부에서 겨우 ‘곡성 哭聲’과 ‘곡성 谷城’이 같은 곳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유일한 단서를 제시한다. 일광은 영화의 말미에서, 곡성 8km라고 적혀진 표지판을 지나지만 아침에야 도착한다. 일광은 밤의 시공간에 도달할 수 없다.

보통 영화 안에서 사용된 트릭들이 친절하게 결말 이 전에 어느 정도 해소되는 것이 일반적인 관례라 한다면, 이 영화는 모든 장치들을 마지막까지 제시하지 않는다. 오히려 더 불친절하게, 영화의 결말에서 트릭들과 장치들이 더 격렬하게 충돌하게 만든다. 하지만, 감독이 구성한 이 정교한 무대에는 의도한 균열들이 있다.

 

 

모두 그 놈 짓이여

 

일본인의 방을 세 사람이 방문한다. 종구(경찰), 양이삼(부제), 오성복(경찰). 다른 두 명은 일본인의 방에 대해서 오성복을 통해 전해 듣는다. 그 방은 오직 오성복을 통해서 관찰된다. 그는 미친 사람처럼 중얼거린다. 모두 그 놈 짓이라고 사건이 일어나기 전에 그 사람을 찍고, 그 사람들을 죽게하고, 죽은 뒤에 다시 사진을 찍는다는 이야기를 한다. 일본인은 모든 일을 알고 있었고, 모든 일이 일어나도록 하는 힘이 있다. 그럴 수 있는 존재는 악마 뿐이다.

오성복은 일본인의 방에서 무엇을 깨달은 것인가? 그는 종구에게 효진의 실내화를 전해준다. 하지만, 영화에서 그는 일본인을 죽이는데 동참하거나, 부제처럼 일본인을 쫓는 것이 아니라, 주인집 아주머니를 살해한다. 실제로 그는 무엇을 보았는가?

 

일본인의 방은 기록의 방이며, 과거의 방이다. 동시에 탐정의 방이다. 이런 집착적인 스크랩은 보통 범죄자나 광인의 상징으로 나오지만, 사실은 수없이 접하는 작가의 방이기도 하다. 흥미롭게도 그 방에 있는 사진들이 영화에서 보여지지 않은 많은 것들을 채운다. 일광은 나중에 그것을 수집한다. 일본인이 세상을 접하는 것은 카메라를 통해서 이다. 그리고, 일본인의 방은 심지어 사진을 찍으면 영혼을 뺏긴다는 오래된 이야기조차 재현한다.

영화의 시간이 우리가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크게 굴절되어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바라본다면, 사실 일본인의 방은 시간적으로 영화 안에서 항상 가장 나중에 만들어진다. 심지어 그 방은 영화와 영화 이 전에 일어난 일들의 시작과 결말도 지니고 있다.  

 

 

버럭지같은 놈이 미끼를 생켜부렀구먼

 

일본인을 죽이러 간 종구와 종구친구들이 굿을 통해 부활한 박춘배를 죽이고 일본인을 쫓는 긴 시퀀스가 있다. 이 사건은 영화 안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이다.

 

박춘배는 효진을 제외하고 가장 이름이 많이 불리워진다. 그는 우물에서 발견된 세 여자를 죽인 용의자로 일본인에 의해 트럭에서 발견된다. 그리고 일본인과 일광의 굿 씬에서 부활한다. 박춘배는 흘러가는 풍문이 아니라, 계속 이름이 보여지고 호명된다. 일본인이 차에서 그를 발견했을 때, 군복에 새겨진 박춘배의 이름이 보여진다. 미친 여자가 자살한 나무 밑에 있던 무명이 입고 있던 군복은 박춘배의 군복이다. 사람들이 세 아주머니가 죽은 현장에서 박춘배와 부인의 사진을 볼 때, 경찰서장은 그의 이름을 세 번 부른다. 왜 박춘배는 계속 호명되는가? 박춘배는 왜 다시 부활하는가?

연이어 목격자로서의 일본인을 쫓는 장면들 역시 곡성 안의 다른 사건들과 다른 지점이 있다. 박춘배를 죽이는 장면을 목격한 일본인은 그들에게 쫓기다가 결국은 벼랑에서 떨어진다. 공교롭게도 일본인은 한참을 달리는 그들의 차 위에 떨어진다. 그리고 종구와 종구친구들은 일본인을 다시 벼랑으로 밀어던진다. 그 사이 살짝 무명으로 보이는 여자의 영상이 끼어든다.  

 

두 사건들은 사건 자체가 그 사건을 다시 지시한다. 죽은 사람을 죽인다. 떨어진 사람을 다시 떨어뜨린다. 이 반복은 이전의 과거, 이후의 미래를 연상하게 한다. 현재에 좀비와 트럭 위로 떨어진 사람이라는 설정이 있지만, 과거에 사람 혹은 떨어 뜨린 행위가 동시에, 동시간대에 존재하면서 기묘한 시간적 루프를 형성한다.

공교롭게도 무명, 일본인, 박춘배 이 셋은, 이 사건을 기점이나 종점으로 서로 다른 방식으로 부활한다. 무명은 박춘배의 군복, 술집 작부의 가디건, 효진의 머리핀, 세 가지 사물에 연관된 귀신으로, 일본인은 종구와 종구친구들이 준 죽음에서 부활한 악마로, 박춘배는 좀비로 부활했지만 종구와 종구친구들에 의해 다시 죽는 좀비로. 이 사건은 곡성 전체의 내러티브에서 일종의 균열이자, 무명이 언급한 원죄적 사건이다. ‘니 딸의 애비가 남을 의심하고 남을 죽일라카고 그래서 죽여서’

 

이 사건은 모든 이야기가 시작되는 대과거이자 동시에 앞으로 펼쳐질 미래의 연옥이다.

 

 

어찌하여 두려워하느냐?

 

“3) 장치 개념은 ‘보편적인 것들’에 대한 거부와 관계가 있다. 하지만 그것은 동시에 보편적인 것의 범주 그 자체를 대체하고 치환하고 있는 개념이기도 하다. 3절에서 제기된 ‘어원’에 관한 물음은 바로 4절에서 희랍어 ‘oikonomia’ 개념에 대한 분석으로 이어지고 있다. 왜 이러한 분석이 ‘장치’라는 개념의 파악에 있어 중요한 의미를 갖는가? 아감벤의 설명에 따르면, 먼저 이 ‘오이코노미아’의 개념은 기독교 성립의 핵심적 개념 중의 하나인 ‘삼위일체’의 해석에 있어 중요한 의미를 띠고 있다. 다시 말해서, 존재에 있어서는 하나의 실체인 신이 어떻게 성부, 성자, 성령이라고 하는 ‘세 가지’ 모습을 띨 수 있는가에 대한 대답 속에서 이 ‘오이코노미아’의 개념이 재-전유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오이코노미아’라는 개념 자체가 이미 삼위일체라는 기독교적 도그마의 성립을 위한 하나의 장치가 되고 있는 것인데, 바로 이러한 장치가 신이라는 ‘하나의’ 실체 안에서 존재와 행위를 분리해내는, 곧 존재론과 실천론을 분리해내는 작용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아감벤이 보기에, 이러한 분리는 곧 ‘오이코노미아’ 개념의 재-전유가 서구 문화 안에 불러일으킨 하나의 분열증이다.”

 

최정우 <장치란 무엇인가? 푸코 들뢰즈 아감벤>

https://netpolity.wordpress.com/2012/12/25/장치란-무엇인가-푸코-들뢰즈-아감벤

 

영화와 관련된 가장 설득력 없었던 리뷰들은 영화와 감독이 감독의 종교적인 불신을 표현했다고 하는 것들이었다. 근래에 이 영화처럼 종교적인 구조를 지닌 영화를 본 적이 없다. 영화는 삼위일체라는 고전적인 종교적 장치를 끊임없이 반복한다. 일본인-일광-악마, 무명-미친여자-귀신과 같이 하나의 존재이면서, 동시에 세 가지 혹은 그보다 많은 모습으로 현현하는 구조를 끊임없이 만들어낸다. 그러한 강박은 공간이나 시간에 있어서도 하나가 아닌 세 개 이상의 층위를 만들어낸다. 그 층위들은 너무나 촘촘해서 숨이 막힐 지경이다.

하지만, 그 층위를 구성하는 이 시공간과 인물들 사이에는 균열이 발생할 수 밖에 없다. 여기서 발생한 균열과 분열증을 감독은 꽤나 진부한 방법으로 봉합시킨다. 그의 종교적 세계는 귀신의 세계를 소환하고, 외부의 타자를 악으로 재생하면서 말끔하게 하나로 굴러가기 시작한다. 항상 그렇듯이 종교의 세계는 싸울 상대가 없을 경우에 존재하지 못한다. 악마는 종교를 위한 필요조건이다.

흥미롭게도 감독이 제시하는 삼위일체의 구조는 작년 말에 우리를 당황스럽게 만들었던 태극기, 성조기, 십자가가 혼연일체된 시위 사진과 유사한 방식으로 봉합된다. 인과성은 필요없다. 당연히 세 가지가 결합해야할 논리적 이유는 존재하지 않는다. 단지, 세 가지가 결합하기 위해서는 더욱더 정교한 장치들이 필요할 뿐이다.

 

일본인에게 이름이 없는 것은 그가 여러 행위들의 행위자 이며, 수많은 이름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일본인은 살인범이기도, 강간범이기도, 아동성애자이기도, 무당이기도, 귀신이기도, 악쿠마 이기도 하다. 동시에 일본인은 영화 안에서 수많은 사건들의 목격자이기도, 범인이기도, 피해자이기도, 기록자이기도 하다. 영화의 수많은 사건들에서 일본인은 끊임없이 소환된다..  

부제에 의해 부활이 목격되기 이전 부터 일본인은 끊임없이 부활하는 자이며, 죽지 않는다. 일본인의 실체는 언어, ‘말’ 그 자체이다. 그는 항상 언어/소문을 통해 실체를 지니고 지속적으로 소환된다. 그리고, 일본인은 소환하는 이의 ‘거울’로서 존재한다. 보는 이가 원하는 모습으로 영화 안에 등장한다. 부제가 소환한 일본인은 뼈와 살이 있는 뿔 달린 ‘붉은 악마’이다.

 

 

그 놈은 귀신이여

 

무명은 종구가 믿고 싶지만 믿을 수 없는 것을, 일본인은 종구가 믿기 쉬운 것을 투영한다. 둘은 밤의 시간에 각자의 실체를 드러낸다. 일본인은 부제에게, 무명은 종구에게. 종구는 자신을 붙잡는 무명의 손을 팽개친다. 이 장면은 꽤나 특이한 장면이다. 무명은 귀신이나 초자연적 존재이다. 이 장면에서 무명과 종구가 적어도 그 순간, 같은 차원에 존재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무명은 왜 자기 딸에게 이 일이 일어났냐는 종구의 질문에 이렇게 답한다.

무명 : 니 딸의 애비가, 죄를 지어서.

종구 : 무슨 죄, 내가 무슨 죄를 지었는데?

무명 : 니 딸의 애비가, 남을 의심하고, 남을 죽일라카고 결국엔 죽여버렸어.

종구 : 네 딸이, 네 딸이, 네 딸이 먼저 아파 가지고 그런 것이제. 그것이 어찌케 (두번째 닭이 운다)  

 

보통 이 대화에서, ‘니 딸의 애비’가 당연히 종구라고 생각하고, ‘니 딸의 애비’가 일본인을 의심하고, 일본인을 죽일라카고 결국엔 죽여버렸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무명은 죄를 지은 자의 이름을 종구라고 부르지 않고, ‘니 딸의 애비’라고 부른다. 의아한 호명법이다.

이 영화에서 이름이 있는 자는 종구, 효진, 오성복, 양이삼, 권명주, 박춘배, 덕기, 흥국, 병규이다. 그 이외의 사람들은 이름 조차 가지고 있지 않다. 병규(종구 친구)를 제외하고, 다른 이름 있는 자들의 공통점은 용의자이거나 살인자이다.

굳이 무명이 종구를 ‘니 딸의 애비’라고 표현하는 것은 몇 가지 가능성이 있다. 희미하게 효진의 애비가 종구가 아닐 가능성(그럴 경우, 동시에 니 딸의 애비가 저지른 죄는 다른 것일 수도 있다), 지금 무명이 대화하고 있는 이가 사람-종구가 아닐 가능성, 무명이 생각하기에 종구가 아직 ‘이름 있는 자’-‘죄지은 자’-‘가해자’의 위치에 있지 않을 가능성.     

 

 

아니여, 절대 아니여

 

“왜 종구가 그러한 일을 당해야 했는가. 무명은 ‘아비가 (외지인을) 의심하고 해쳐서’라고 답했는데, 의심하기 전부터도 종구네 가족에겐 어떤 징후가 보였다는 점에서 앞뒤가 바뀐 것이 아닌가”

 

“영화를 만들기 전 성직자를 찾아다녔다. 몇 개의 상황을 놓고 질문하고 동냥하듯 답을 모았다. 다양한 종교의 얼굴을 보고 싶어서 네팔과 일본도 갔다. 그런 과정을 겪으면서 현존하는 종교는 신성할 정도로 정말 완벽하구나 느꼈다. 성직자들의 세계는 이렇듯 자기 완결적이고 완벽한데 내 마음은 여전히 납득이 안됐다.

여러해 전 이라크에서 누군가가 피살을 당한 경우가 있었다. 어떤 성직자에게 그분은 왜 돌아가셨는지 물었다. 그랬더니 가지 말라고 하는 곳에 가서 하지 말라는 일을 하다가 엄한 사람은 살인자로 만드는 죄를 저질렀다는 답을 듣고 경악했다. 무명(천우희)의 답변은 그런 마음을 일으키려 했다.

이 영화는 피해자에 대한 이야기다. 그가 왜 피해자여야 했느냐가 중요한데 알고보면 누구도 피해자가 되어야 할 이유가 없다. 이건 아주 충격적인 얘기였다. 인간이 존재해야 할 이유는 있는데 사라져야 할 이유가 없다는 것은 말이 안된다고 생각했다. 인간의 존재 이유는 신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으니 신께 말씀드리고 싶었다. 하나님 당신의 선과 존재 이유가 의심을 받고 있네요. 무명은 신과 같은 존재라고 생각했다. 인터넷에서 영화를 본 사람들이 감독에게 묻는 여러 이야기들은 하늘에 계신분께 질문하고 싶은 것과 동일한 내용이다.”
 

한겨레신문 5월 12일자:
http://www.hani.co.kr/arti/culture/movie/744857.html

 

 

기자는 이 영화의 사건들이 선형적인 구조라는 것을 믿으며 질문한다. 그 질문에 흥미롭게도 감독은 무명의 화법을 구사한다. ‘존재하는 이유는 종교와 신과 밀접한 연관이 있는데, 종교와 관련된 사라져야 하는 이유는 납득할 수 없다. 무명에게 질문하고 싶었던 것은 신에게 물어보는 것과 같은 이유에서이다.’ 감독은 사람이 사라져야 하는 이유로 신 반대편의 신적인 존재를 영화 안에서 재생했다. 그는 영화 안에서, 강력하게 자신이 던지는 질문의 해답을 이미 제시했다. ‘종구가 피해자여야 하는 것이 중요한데, 알고 보면 누구도 피해자여야할 이유가 없다.’ 인터뷰가 왜곡되는 경우가 있다고 가정을 해 보아도, 감독의 언어 또한, 돌고 돌아 다시 원점으로 다가오는 무명의 이야기같다.

 

이 영화 전체를 아우르는 정교하고 다양하게 해석가능한 플롯들은 사실, ‘이 영화는 피해자를 위한 영화다’라는 한 마디에 조심스레 흔들린다. 감독이 정교하게 구축한 신적인 세계, 그것과 같이 연동하는 무속, 삶의 세계, 그것들 사이에 만들어진 그 세밀한 균열들이 지향하는 바가 지닌 목적이 궁금해진다. 작가의 입장에서, 영화가 이렇게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것은 우선, 작업적으로 성공적이라는 것을 안다. 감독은 분명히 종교적인 논쟁을 예측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가 던진 ‘이 영화는 피해자를 위한 영화이다’라는 명제 또한 격렬한 논쟁을 일으킬 것을 알았을 것이다. 그렇지 않다고 상상하기에 감독은 너무 치밀하다.

 

그렇다면, 종구는 피해자인가? 효진이 그렇게 된 것은 정말 일본인 때문인가? 이 영화는 가족 간의 살인, 존속 살인에 대해서는 허심탄회하게 시각적으로 다루지만(무대의 요소로), 가족 안으로 전혀 들어가지 않는다. 그 안은 또 다른 지옥도 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신과 인간의 관계에서 종구를 피해자로 만들어 버리고, 그 구도 안에 종구의 죄들을 묻어 버리고 일반화시킨다. 사실은 유일하게 호명되는 두 사람, 박춘배와 효진이 그 죄의 원천이다. 일본인은 그 죄의 외부적 원인, 종구가 사라져야 하는 신학적 해답일 뿐이다.   

 

 

바로 나다

 

외부자와 내부자 사이에 흐르는 경계와 그 안의 관계들을 성서를 통해 촘촘히 채운 감독의 세계는 공포스럽다. 그 공포는 종구가 그 세계에서 망가지는 것을 보는 것과는 전혀 다르다. 아마도 내부자가 한 번도 되어 보지 못한, 공동체의 일원이 되지 못해 본 사람이라면, 나홍진이 구축한 세계가 훨씬 공포스럽게 여겨질 것이다. 정말 많은 다수가 종구와 같은 선택을 할 것이라는 것을 무의식적으로 알게 된다.

 

영화 ‘이끼’의 구조는 ‘곡성’에 비하면 훨씬 단순하다. ‘이끼’에서는 주인공이 피해자가 되는 이유가 확실하다. 주인공은 마을을 내부자이자 외부자 로서 관찰하게 되고, 이상한 일들이 발생하는 것을 쫓아가다가 마을의 비밀에 다가간다. 마을 사람들은 그것을 방어하려고 하고, 그를 막으려고 한다. ‘이끼’의 갈등구조와 공포는 ‘곡성’과 비교하면, 단조롭고 평이하기 까지 하다. ‘이끼’는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조용하고 평화로와 보이는 마을’의 허상을 폭로한다. 공포와 의심의 범주를 아주 가까운 이웃의 속성으로 끌어들인다. 그리고 오히려 폭력의 이유가 확실하다.

 

‘곡성’에서 나갈 수 있는 출구는 애초에 설계되지 않았다. 나홍진 감독의 모든 영화가 그렇듯이. 그가 구축한 것은 지옥도이고, 지금까지 만든 것 중에서 가장 정교하다. 가해자와 피해자라는 이 복잡한 담론을 덥석 던져 놓지만, 신학적 요소들이 이미 인간들 모두를 압도한다. 등장인물들은 나홍진 감독이 구축한 세계에서 계속 고통받는다. 폭력은 이미 자연스러운 요소이며, 그것은 그 세계의 기본 배경이다. 감독이 말하는 ‘피해자’는 종구의 처나, 할머니나, 미친 여자나, 효진이나, 장모나, 우물 속에서 발견된 세 명의 여인이나, 아들이나, 부부나, 주인집 아주머니가 아니다. 우리 모두 인간이라는 이름으로 ‘피해자’일 뿐이고, ‘곡성’에 구축된 지옥도에서 나홍진 감독의 말은 항상 옳다.

 

나홍진 감독이 구축한 이 심오하고 견고한 세계 앞에서, 실상 묘하게도, 아무 것도 할 수 없으니 가만히 있으라는 강한 의지를 만나게 된다. 이 혹독한 세계, 극장에서 유일하게 소환되는 신적인 존재는 감독 뿐이다. 사실, 우리는 그가 구축한 세계과 그가 믿는 세계에 단 한발짝도 들어가거나, 들여보내질 수 없다. 왜냐하면, 우리의 대부분은 항상 적지 않은 수이지만, 항상 소수일 것이며, 누구의 외부자일 수밖에 없다. 우리 대부분이 그의 세계에서 할 수 있는 역할은, 피해자로 호명되지도 않는 수북이 쌓이는 시체더미이거나 악쿠마로 변한 외부자일 뿐이다.

반대로, 견고함에 머무르고 있던 종구에게 역시 이 세계는 혹독하다. 자신의 세계를 유지하기 위해 그는 일본인을 죽이려고 하고 죽여야한다. 하지만, 결국은 자신의 가족을 지켜내지 못한다. 감독에게 피해자로 인정받은 종구 역시 좌충우돌하며, 아버지로서 효진이를 보호하겠다는 집념을 표현하며 죽어간다. 그 일념이 잘못되어 있든, 아니든 상관은 없다. 이 견고한 신념의 아름다운 숭고함이 몸에서 소름이 돋게 한다.

나홍진 감독이 구축한 세계, 그가 현실이라고 믿는 세계에서는 모두(내부에 있다고 믿든 외부에 있다고 믿든)가 끊임없이 부활하는 악마를 만날 수 밖에 없다. 그 세계의 시점은 항상 살인자들과 가해자들의 것이다. 그의 세계에서 그들에게 속죄할 시간은 주어지지 않는다. 원인은 저 멀리에 있을 뿐이다.

아무도 그 세계를 벗어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이 복잡한 서사 전체는 ‘어쩔 수 없음’이라는 거대한 출구로 귀결된다.

 


전달


 

 ‘조영남 대작사건’

 

현재, 조영남 사기죄에 대한 재판이 새로운 재판부와 함께 다시 시작되었다. 2016년 4월부터 7월까지 불붙었던 논란의 결과가 어떻게 진행될 지 흥미진진하기보다는, 어떤 오류가 다시 생기게 될 지 걱정이 앞선다. 사건의 개요를 읽다보면, 대작이 관행이냐 아니냐와 대작의 경우, 저작권이 작가에 있는지 조수에게 있는 것인지에 따라 판결이 날 것이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공소사실에 기초해서 보면, 대작 자체가 불법이며 범행이다. 현재 재판부의 의견에 따라, 대작에 대한 정의가 내려질 상황이다.

 

사건에 대한 많은 글들을 다시 읽으면서, 이 글을 시작한다. 다시 읽어본 텍스트들은 주로 인쇄되었거나, 인터넷을 통해 연재되었거나, 기사화된 내용들이다. 수많은 기자와 필자들이 이 사건에 대해 언급하고 논쟁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일 년 가까이 지난 지금, 다시 이 사건에 대해 정리해 보는 것은 ‘대작’과 관련된 논쟁 혹은 그 논쟁이 피해간 지점에 혹은 그 논쟁이 피해간 지점에 여전히 ‘현재, 여기’에서 짚고 넘어가야할 중요한 문제들이 아직 남아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 글에서는 SNS가 아닌 발간되거나 연재된 좀 더 정리된 텍스트들을 살펴볼 예정이다.

 

 

사건의 개요

 

가수 겸 화가 조영남(71)씨가 대작 그림 판매로 1억8천만원 상당을 챙긴 혐의로 2016년 6월14일 재판에 넘겨졌다. 조씨는 2011년 9월부터 지난해 1월 중순까지 송모(61)씨 등 대작 화가에게 점당 10만원에 주문한 그림에 경미한 덧칠 작업을 거친 뒤 호당 30만∼50만원에 판매한 혐의다. 20호짜리 그림은 600만∼1천만원에 판매됐다. 이 같은 수법으로 17명에게서 21점의 대작 그림을 팔아 1억5300여만 원을 챙긴 것으로 드러났다. 조 씨의 매니저도 지난해 9월부터 지난 4월 초까지 대작 범행에 가담해 3명에게 대작 그림 5점을 팔아 2680여만원을 챙겼다. 이 중 대작 화가 송씨가 24점을 그렸고, 나머지 2점은 다른 대작 화가가 그린 것으로 드러났다. 이 외에도 7점이 더 있었지만, 검찰은 피해자가 확인되지 않아 공소사실에서 제외했다. 그에게 적용된 것은 사기죄이다.

2016년 6월 13일에는 한국미술협회, 한국전업미술가협회, 서울미술협회 등 미술인 단체 11곳은 조영남이 미술인들의 명예를 훼손했다며 14일 오후 1시 춘천지검 속초지청 앞에서 성명을 발표하고 고소장을 제출하였다. 명예훼손과 관련된 소송은 각하되었다.

 

‘조영남 대작사건’에서 미술 전반에 종사하는 비평가, 작가, 관계자들이 엄청나게 관여하게된 계기는 조사 후 조영남씨의 발언들이었다. ‘대작은 미술계의 관행이다’, ‘팝아티스트로 용인되는 줄 알았다’ 등등. 그리고 대작이 관행이냐 아니냐 하는 문제에 대해 SNS부터 언론에 이르기까지 그야마로 불꽃 튀기는 논쟁이 벌어졌고, 대작과 관련된 다수의견에 반했던 반이정씨, 진중권씨에 대한 반대와 포화도 어마어마했다.

 

 

‘미술계’의 반응

 

기소되기 전에 조영남씨는 기자들에게 ‘대작은 미술계의 관행이다’, ‘팝아티스트로 용인되는 줄 알았다’ 등등의 발언을 했다. 그의 발언들에 미술계가 반응을 보이며, 대작에 대한 논쟁이 끝도 없이 벌어졌다. 미술계 대부분의 의견은 ‘대작’은 미술계의 ‘관행’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와중에 진중권씨와 반이정씨는 ‘대작’은 미술계의 관행이 맞다는 의견을 제시한다.

 

"예술가의 터치를 회화의 진품성과 무관한 것으로 만드는 것이 20세기 예술을 앞 세기들의 예술과 그토록 다르게 만들어준 개념적 혁명의 한 가지 중요한 요소다." (David W. Galenson, Conceptual Revolutions in Twentieth-Century Art.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9. p.198)
 

2016년 7월에 진중권씨의 오마이뉴스 기고 글의 서두는 이렇게 시작한다. 대작이 관행이라는 근거로서, 데이빗 호크니, 임멘도르프, 데미안 허스트, 제프 쿤스, 앤디 워홀, 뒤샹, 무라카미 다카시의 사례들이 언급이 된다. 진중권씨가 언급한 현대미술에 대한 정의에 대해서 분명 이해하고 숙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제시한 글들은 읽기가 어려웠다. 틀린 이야기를 하고 있지 않는데 왜 이렇게 동의가 안되는지에 대해 고민하다 내린 결론은 그의 트위터 글부터 오마이뉴스 기고에까지 뿌리깊게 깔려있는 계몽적인 태도 때문은 아닐까였다.

진중권씨의 지적 중에서 하나 동의하는 것은 대작 자체가 범죄이고 사기죄로 처벌해야할 범주가 아니라는 것이다. ‘조영남 대작사건’의 재판은 대작이 불법이냐 아니냐로 판결될 것이며, 만약 불법일 경우, 우리는 수많은 작가들의 재판을 목도하게 될 것이다. 아니면, 조수가 참여한 작업들에 대해서는 컬레터와 일반에 고지해야할 의무가 생길 것이다. 반대로 대작이 불법이 아니고 관행임이 인정된다고 해도 그다지 순기능이 있을 것으로 예상이 되지는 않는다. 더 중요한 것은 내가 바라보기에 ‘조영남 대작사건’의 본질은 ‘대작’이 ‘관행’이냐 아니냐 문제가 아니다.

 

의견의 시시비비를 떠나, 개인적으로 흥미로우면서 피곤한 부분은 왜 이렇게 심한 의견의 충돌이 발생하며, 감정싸움으로 전환되는가이다. 그리고 놀랍게도 이 모든 논쟁은 관행의 변화에 기여하지 못하고 사라져 버렸다. 현상을 변화시키는 힘을 냉큼 권력에 주어버리고 우리는 대기 중이다. 2016년 4월의 이 사건이 발생하고 난 이후, 탄핵과 관련된 정국에서 보여지는 상황을 겪고나서 이해가 가는 부분들이 많이 생겼다. 많은 행위와 행동들은 그것이 진실이냐 아니냐, 더 나은 선택이냐 아니냐의 문제보다는 각자의 현재상황을 정상적으로 유지시키느냐 아니냐에서 비롯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관행’

 

관행2 (慣行) [관행]

[명사] 오래전부터 해 오는 대로 함. 또는 관례에 따라서 함. [유의어] 상습, 관습, 버릇1

네이버 사전

 

‘관행’이라는 말은 요사스러운 곳이 있어서, 사실 사건 사고가 있을 때마다 튀어나온다. 대학을 처음 졸업하고 나와서 일을 구하거나, 작업을 하는 사람들은 이 단어를 손쉽게 만날 것이다. 비상식적이어서 항의를 하면, 이런 것도 몰랐냐는 눈빛과 함께 ‘관행’이라는 말을 자주 들을 것이다. 보통 ‘관행’은 이미 있는 관례를 반복하는 것이다. 그것을 강요하는 입장에서는 책임이 자신에게 있지 않다는 것을 강조할 때 많이 쓰인다.

조영남씨의 발언 역시 그런 연유에서 사용된 것이라고 예상된다. ‘관행’이니 ‘자신의 책임이 아니다’라는 의미에서 말이다. 그가 인지하지 못한 부분은 ‘대작’이 ‘관행’이라는 사실이 미술 바깥에 있는 일반관객들에게는 전혀 상상할 수 없는 것이었다는 것이다. 보통 사람들에게 작가의 작업은 작가가 직접 한 것이다. 그리고 대부분의 경우는 그러하다.

무급인턴, 아티스트피, 대작, 부정입찰 등 미술 안에서 문제가 생길 때마다 우리는 ‘미술계’, ‘관행’이라는 소리를 수도 없이 듣는다. 그럴 때마다, ‘미술계’는 어디에 있으며, ‘관행’은 누가 만든 것인가 혼자 되묻게 된다. ‘관행’의 마술적인 힘은 그것을 누가 만들었는지, 누가 책임이 있는지를 물을 수 없게 만들며, 그것을 고치려는 사람들에게 싸울 상대가 없음을 인지시키는 데 있다.

 

반이정씨는 미술세계에 기고한 ‘조영남 대작사건을 읽는 법 | ’관행‘을 해명한다’를 통해 그가 왜 대작이 ‘관행’이라는 주장을 했는가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미술계의 절대 다수가 홀로 작업을 감당한다는 건, ‘관행’을 두둔한 나 같은 평론가도 잘 안다. 그럼에도 왜 나는 ‘관행’을 계속 두둔할까? 동시대미술은 ‘미술’이라는 동일한 자장 안에서 헤아릴 수 없이 다양한 제작 방식으로 구현된다. 홀로 작업하는 이가 절대 다수라는 현실로 인해 100명을 고용한 공장형 작가의 존재감이 평가절하되지 않는 것도 이런 다양성을 미술계가 시인하고 수용했기 때문이다. 공장형으로 제작되건 소수의 조수가 완성하건 작가 개인의 아이템을 남의 손으로 구현하는 점에선 차이가 없다. 전자는 체계적으로 수행한 것이고, 후자는 영세하게 운영했다는 차이만 있다. 단품요리와 뷔페는 규모와 제작 방식이 다르고 맛도 다르지만, 미각과 허기를 충족시키는 음식이라는 점에선 같다. 뷔페보다 단품요리를 훨씬 선호하는나 같은 사람마저 뷔페 애호가를 평가절하하거나 음식이 아니라고 부인하진 않는다.

반이정, 조영남 대작사건을 읽는 법 | ’관행‘을 해명한다, 미술세계

 

이름 석 자만 꺼내도 일반인까지 알법한 수두룩한 유명 화가들의 명단을 꼭 늘어놔야 할까? 이건 여론과 언론을 혼란에 빠트릴 테고, 무엇보다 지목된 화가와 그와 연루된 갤러리가 사실을 축소하거나 부인할 게 분명하며 법적 대응까지 거론할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장막 안의 사실을 장막 밖의 사람이 입증할 방법이 없으니까. 바로 이 점이 ‘관행을 변호하는’이의 고충이다. 조영남 대작 소동을 맹공하는 평론가와 언론은 이런 고충을 감당하지 않고 내려놓은 채, 여론과 언론이 유구하게 믿어온 미술가의 ‘이상’이라는 방패의 뒤에 숨어, 주문-제작 관행이라는 ‘현실’과 조영남이라는 개인을 맹공하고 있다. 무지하고 불공정하다.

반이정, 조영남 대작사건을 읽는 법 | ’관행‘을 해명한다, 미술세계

 

‘관행’에 대한 긴 글을 읽다보면, 진중권씨와 반이정씨가 조영남 사건을 바라보는 시각이 일반관객이나 작가들과 꽤 다른 지점에 있다는 것이 발견한다. 73.8%의 국민이 조영남 사건을 사기로 본다는 여론조사에 대한 언급이 두 필자의 글 모두에 나온다.

왜 73.8%는 조영남씨가 사기꾼이라고 생각을 했을까라는 질문을 던져본다. 진중권씨가 주장하는 것처럼 ‘대중과 언론이 빠져있는 본질주의의 오류’에서 비롯한 여론조사 결과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내 기억을 비추어보면, ‘조영남 대작사건’에서 가장 기가 찬 부분은 그림 한 점당 보수를 10만원을 줬다는 부분이었다. 조영남씨의 그림가격이 호당 30-50만원임을 감안한다면, 최저임금을 시간당 계산한다하더라도 지나치게 적은 액수였다. 나중에 실제로 그런 것은 아니라는 조영남씨의 말이 있긴 했지만, 사건 초반기에 기사에 포함된 내용이었다. 당시 기억으로 대작의 여부랑 상관없이 ‘조영남씨가 엄청난 착취를 한 나쁜 놈이다’라는 인식이 첫번째였다.

조영남씨의 첫번째 변명은 대작은 미술계의 ‘관행’이고, ‘팝아티스트에게는 용인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였다. 미술계를 모든 미술관계자를 지칭할 경우, 조영남씨의 말은 전체 미술계를 엿먹인 것은 분명하다.

‘관행’이라는 것이 ‘공공연하게 실행되는 것’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면, ‘관행’이라는 언어 자체는 ‘일반적이다’라는 의미를 내포한다. 반이정씨의 언급처럼 미술계의 절대다수가 혼자서 작업을 한다면, 이것은 전체 미술계의 ‘관행’은 아니라고 보는 것이 적절하다. ‘몇몇 유명화가들’의 언급처럼, ‘대작’이 공공연하게 존재하는 것은 들어 알고 있다. 그렇다면, 이것은 대형 갤러리가 관여하는 ‘상업미술계’의 ‘관행’이라고 말하는 것이 훨씬 정확한 표현이다. 조영남씨의 행위가 사기라고 동의한 73.8%는 이 사건 안에서 대작이 가능한 현대미술의 세계를 보는 것이 아니라, 당연시되는 불평등과 불공정을 보는 것이다. 조영남씨는 자신이 한 행위가 ‘관행’에서 비롯되었다고 했다. 그 말은 동시에 초저임금의 노동력착취 또한 ‘관행’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이다.

 

진중권씨는 조수와 어시스턴트에 대해 논문을 쓸 정도의 자료를 ‘조영남 작가에 권고함’이라는 오마이뉴스 기고글에서 제시한다.

 

조수들에 대한 처우가 나쁜 이유는 뭘까? 간단하다. 그걸 받고서라도 기꺼이 조수가 되려는 사람들이 줄을 섰기 때문이다. 왜? 미국에서 1년에 미대 졸업생이 수만 명이 배출된다. 이들이 졸업하자마자 바로 작가가 되겠는가? 그래서 자립할 때까지 그림도 그리면서 생계도 유지할 자리가 필요한 것이다. 게다가 조수를 하면 어깨너머로 이미 성공한 작가의 기법이나 절차, 수완 등을 배울 수 있고, 나아가 예술계에 인맥을 넓힐 기회도 잡을 수도 있다. 실제로 유명 작가의 조수 중에는, 가령 ‘길버트와 조지’를 위해 일했던 채프먼 형제처럼, 나중에 작가로 자립하여 성공한 예도 많다.

진중권, 조영남 작가에 권고함, 오마이뉴스

 

굉장히 익숙한 문구이다. 무급인턴등 이전에 문제들이 발생했을 때, 기관들이 이야기하던 말과 왜 이리 닮았는지 모르겠다. 그리고 자신이 그렇게 비난하던 보수의 노동관과 아주 닮았다. 도대체 자유주의 경제이론과 이 발언의 차이점은 무엇인가.

 

진중권씨는 현대미술이 시스템과 싸우기 위해 사용했던 전략적 선택(앤디 워홀의 팝아트, 미니멀리즘 등)과 고전시대부터 존재해온 장인 도제의 시스템과 상업갤러리의 ‘관행’을 똑같이 ‘관행’이라는 단어로 혼용하고 있다. 글 자체가 진중권씨가 말하는 ‘본질주의의 오류’라고 부르는 의견들에 대한 반론이라는 것을 감안해도 부적절하다. 글 안에서 조영남씨는 급 현대미술의 상징으로 돌변한다. 그 이유는 하나이다. 조영남씨가 현대미술의 ‘전략’을 따른 것이라 판단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효과적으로 현대미술을 엿먹일 수 있는 방법이 있다니 감탄사가 나올 정도이다.

 

고재열 기자. 걱정 안 하셔도 된다. 만약 이우환 화백이 ‘위증죄’로 기소된다면, 그 때에는 당연히 내가 나설 것이다. 다만, 그런 일이 다시는 없기를 바란다. 왜냐하면, 꼬박 이틀 걸려 어렵게 쓴 글에 20만 독자가 보내준 원고료가 고작 5만원 남짓밖에 안 된다는 냉혹한 현실을 이번에 똑똑히 목도했기 때문이다.

진중권, 조영남 작가에 권고함, 오마이뉴스

 

출력 용지로 39페이지에 이르는 3개의 진중권씨 글 말미이다. 우리나라에 ‘길버트와 조지’, ‘데미안 허스트’에 준하는 세계적인 작가가 몇 명이나 있을까? 유명 작가의 조수/어시스턴트를 하면서 예술계 인맥에 도달하여 성공한 작가가 되기 위해 박봉은 참아야하는 것인가? 대작이 ‘관행’임을 증명하기 위해 ‘관행’에서 비롯된 부조리는 용인되어야하나? ‘관행’이 존중받아야한다면, 그 ‘관행’에 대해 먼저 점검해야하는 것이 맞지 않은가? 만약 글을 쓰는 사람이면 원고료가 나오지 않는 것이 ‘관행’인 잡지들에 장차의 명예를 위해서 꾹 참고 글을 올려야하는가? 진중권씨는 왠지 원고료 나오지 않는 ‘관행’은 참지 못할 것같다.  

 

‘관행’의 불합리함이 현실의 문제로 격렬하게 표출되는 순간에, 그것을 미술사의 문제로 전환시키는 대신, ‘대작’의 가능성을 증명하는 대신, 우리는 이런 미술적 논쟁을 했어야한다.

‘관행’의 정당성이 어디에서 비롯되는가? 그것은 과연 존중되어야하는 ‘관행’인가? ‘관행’에 따라 노동착취를 강요한 ‘작가’에게 법적 제재를 가하는 것은 예술의 자율성을 침해하는가?

 

 

지금, 현재, 이 순간

 

안타깝게도 이 논쟁들의 전쟁터는 회화와 관련된 시장의 영역이다. 국내에서 유통되는 미술품의 대부분은 회화이며, 작년 한 해 온갖 언론을 수놓은 미술기사들의 대부분도 회화에 대한 것이다. 여전히 가장 미술시장에서 많이 거래되는 매체가 회화이다. 덕분에 회화는 자주 미술사 안에서 죽어왔으며, 가끔은 현대미술 또는 동시대미술임을 끊임없이 의심받아야 한다. 동시에 그만큼 부활을 많이 한 매체이기도 하다.

대작이 ‘관행’이라고 주장하는 쪽이나 ‘관행’이 아니라고 주장한 쪽이나, 양쪽 모두에서 언급되는 많은 부분들은 개인적으로 꽤나 절망적이다. 반이정씨가 ‘미적 러다이트’, 진중권씨가 ‘본질주의의 오류’라고 부르며 비판하는 진부함이 묻어나는 작가관념이나 작업에 대한 기준들은,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회화에 대한 고전적인 선입견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동시에 반이정씨나 진중권씨는 일면, 회화의 영역 역시 현대미술의 영역이라고 이야기하는 것같지만, 그들이 인정하는 현대미술에 속하는 회화 혹은 미술에 대한 협소한 생각을 인지시킬 뿐이다. 선험되고 학습된 이후에도 지속가능하고 동시대적일 수 있는 작업에 대해 고민해야하는 입장이 아닐 터이니, 당연한 것같기도 하다.

 

‘마이너리티 리포트’의 존재는 항상 중요하다. 하지만 적어도 상업적으로 성공한 작가들 0.1%에 대한 논의를 위해서나 현대미술의 개념을 설명하기 위해서, 미술계에서 가장 취약한 계층일 수도 있는 조수/어시스턴트를 희생시키는 행위를 서슴지 않는 것은 아니라고 본다. 동시대성이나 동시대미술은 저 멀리 있는 것이 아니고, 지금 현재 이 모든 상황에 존재한다. 미술사의 다음 단계에서 ‘나 현대’라고 이야기하며 미래적으로 다가오는 것이 아니다. ‘관행’이 지속가능한 것이라고 주장하고 고전적인 도제시스템의 ‘관행’과 현대미술이 선행한 ‘전략’을 동일한 ‘관행’으로 이야기하면서, 어떻게 현대미술을 논할 수 있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그리고 현재, 이 순간, 작업을 하고 있는 작가의 입장에서 작은 바램은 현대미술이나 동시대미술의 미래에 대한 걱정 대신, 구조적인 부조리에 대한 날이 선 비평이나 현상에서 가능성을 찾아내는 비평을 만나고 싶다. 정말 미술을 사랑한다면.    

 

 

*인용된 글은 ‘대작’이 ‘관행’이라고 주장했던 대표적인 필자인 진중권이 2016년 7월에 오마이뉴스에 올린 조영남 3부작(진중권 기고: 1. 조영남은 사기꾼인가?, 2. 유시민도 모르는 ‘조영남 사건’의 본질, 3. 조영남 작가에 고함)과 반이정이 2016년에 미술세계에 기고한 ‘조영남 대작사건을 읽는 법 | ’관행‘을 해명한다’이다. 이 글들은 수많은 기사의 반대편에 있던 글들이다. 진중권씨의 글은 2016년 7월에 오마이뉴스를 통해서, 반이정씨의 글은 2016년 6월에 미술세계를 통해서 발표되었다.

 

오마이 뉴스 ‘진중권 기고 : 1. 조영남은 사기꾼인가?’

http://star.ohmynews.com/NWS_Web/OhmyStar/at_pg.aspx?CNTN_CD=A0002223712

오마이 뉴스 ‘진중권 기고 : 2. 유시민도 모르는 ‘조영남 사건’의 본질‘

http://star.ohmynews.com/NWS_Web/OhmyStar/at_pg.aspx?CNTN_CD=A0002224343

오마이 뉴스 ‘진중권 기고 : 3. 조영남 작가에 권고함’

http://star.ohmynews.com/NWS_Web/OhmyStar/at_pg.aspx?CNTN_CD=A0002225714

허밍턴포스트 ‘미술세계, 반이정, 조영남 대작사건을 읽는 법 | ’관행‘에 해명한다’

http://www.huffingtonpost.kr/ejung-ban/story_b_10135980.html

 

 

전:달

http://spaceppong.wixsite.com/spaceppong/single-post/2017/04/12/STAGE-0-%E2%80%98%EC%A7%80%EA%B8%88%E2%80%99

 

 

 

‘분리 Seperation’ 송아지에서 분리된 한쪽 다리가 전시장에 걸려있고, 그 앞에는 다리가 하나 없는 송아지가 절룩거리며 걷고 있는 영상이 있다. ‘합체 Combination - Triptych’ 분리되어 있던 고깃덩이의 일부들이 천천히 결합하여 부자연스럽게 서있는 송아지와 비슷한 형상이 영상 밖의 관객을 응시한다. 두 개의 작은 방에는 쓰러져 있는 의문스런 고깃덩이가 서서히 일어나 송아지와 고라니처럼 보이더니, 급작스레 해체되며 앵글의 밖을 향해 힘차게 날아가 버린다.

 

분리와 합체는 서로에 반대되는 단어이면서, 동시에 하나의 프로세스 위에 있는 단어이다. 좀 더 기술적으로 발전한 근미래에서는 이 단어를 신체와 생명에 사용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현재로서는 아주 기계적 프로세스에 적합한 언어이다. 작업의 제목 자체가 작가가 스스로 설정한 위치를 짐작해볼 수 있게 한다. 하지만 두 작업은 명확하게 다른 맥락에 위치한다.

‘분리 Seperation’에서 작가는 대상에 관여하지 않고 관찰자의 위치에 머문다. 일종의 차가움을 유지한다. 그래서 실제로 작업을 보았을 때, 전시에 대한 글에서 언급하는 ‘폭력적 상황’이 훨씬 강렬하게 전달된다. 살아있는 송아지와 잘라내어져 박제된 송아지 신체의 일부는 극명하게 대립을 이루면서 제시하는 상황이 가지는 폭력성을 폭발적으로 드러낸다.

반면 ‘합체 Combination - Triptych’에서 작가는 대상에 지나치다 싶을 만큼 적극적으로 개입한다. 고깃덩이를 분해하고, 그것을 분해하는 과정을 사진으로 기록하고, 영상으로 재조립하고, 전시한다. 작업 안에서 이미 대상은 송아지와 고라니가 아니라 단순히 시체이며 고기이다. ‘분리 Seperation’에서 작가는 관찰자이지만, ‘합체 Combination - Triptych’에서 작가는 개입자이며 새로운 의미의 생명을 부여하는 신적인 위치를 가진다. 작가가 베이컨이 종종 차용하던 삼면화라는 부제를 가져온 것도 그런 의미라 짐작해본다. 합체의 과정은 역설적이게도 해체의 기록이다. 해체과정의 기록이 시간적으로 역류하면서 합체의 과정이 된다. 영상에서 가장 흥미로운 부분은 마지막에 고라니와 송아지가 느닷없이 앵글을 빠져나가는 부분이다. 합체라는 작업의 제목을 역행하면서 송아지 혹은 고라니 형상을 한 고깃덩이는 어디론가 사라진다. 마치 지금까지는 또 다른 결합을 위한 준비과정인 것처럼.

 

‘합체 Combination - Triptych’에서 이미 작가는 폭력, 생명, 죽음 혹은 불안과 공포라는 부정적인 감정에 대한 감각을 다루지 않는다. 대상이 송아지 혹은 고라니, 시체임을 제외하고 관찰한다면 작가가 제시하는 상황은 단순한 폭력적인 상황이 아니라, 다른 생명체로의 변신의 과정이다. 영상에 찍힌 대상들은 더 이상 송아지의 시체, 고라니의 시체, 혹은 고깃덩이가 아니다. 기묘한 인형처럼 천천히 다시 붙여지거나, 해체되면서 콜라주 되는 대상은 작가에 의해 만들어지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이질적인 존재이다. 그 안에는 서커스와 같은 위험한 유희의 감각이 있다.

 

작업들을 처음 보았을 때는 폭력과 죽음에 대한 경고 혹은 비판을 위해서 더욱 강렬한 폭력을 재현하는 것이 미술적으로 정당한 것인가에 한참을 생각했고, 다시 한번 글을 쓰기 위해 작업을 곱씹어보다가는 작가가 ‘합체 Combination - Triptych’에서 드러내는 행위자로서의 유희에 고민하게 되었다. 작가가 컨셉으로 전달하려는 폭력성은 오히려 ‘분리 Seperation’에서 아주 효과적으로 전달된다. 그 뿐 아니라, ‘분리 Seperation’는 미술이 재현하거나 퍼포먼스하는 지점에 대한 위험한 경계에서 아주 효과적으로 줄타기를 하고 있다. 반면, ‘합체 Combination - Triptych’는 더 복잡한 상황을 제시한다. B-CONE이 보여주는 영상의 세계는 그가 말하는 폭력에 대한 경고와 응시가 아니라, 초반의 당혹스러움이 사라지면 고깃덩이로 변해버린 생명이 전혀 다른 어떤 것으로 변신하는 과정을 경건하게 혹은 코믹하게 지켜보게 된다. 희화화된 그 과정은 그 자체가 ‘분리 Seperation’와는 다른 폭력성을 지니고 있으며, 작가가 비판하는 시스템과 작가는 심지어 일체화되기까지 한다.

우리가 사는 시스템이 송아지에게 연민을 가지면서도 동시에 살육하는 이유는 그 송아지에게서 제거될 살점, 고기에 있다. 송아지가 죽어야하는 이유는 바로 그 살점이다. 작가의 관심은 막상 노동을 통해 재단한 살점에 있지 않다. 오히려 그 살점을 제거해서 드러나는 혹은 해체되는 혹은 절단되는 뼈와 구조에 있다. 이 부분에서 작업 자체가 훨씬 복잡해지고 혼란스러워진다. 작가는 인간의 잔혹한 폭력성에 대한 비판하고 싶어 하면서, 동시에 생명과 뼈의 구조를 탐닉하고 그것을 비틀어 교란하고 재생산하는 것을 욕망한다.

 

B-CONE의 작업은 물성에서 혈액을 이용한 조각이나, 선천적인 기형의 거대한 조각, 고기 페인팅들을 만든 마크 퀸 MARC QUINN의 작업을 연상시킨다. 마크 퀸 MARC QUINN의 작업들은 조각으로서 관객이 그의 작업을 대면하는 순간의 당혹스러움 혹은 전통적으로 예찬되는 가치에 대한 전복을 노린다. 하지만 B-CONE은 작업 안의 모든 조각적인 요소를 영상으로 전환해 버린다. 작업의 결과물로서 우리가 보는 것은 작가가 행위자로 개입한 실물콜라주의 시간적 나열이다. 모든 입체적인 행위를 평면으로 전환해버렸을 때, 그것들이 본래 가지고 있는 힘은 삭감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B-CONE이 영상을 통해 얻고 싶은 것이 무엇일까 상상해 본다면, 이미 정지한 것들을 다시 부활시키는 영상의 동적 속성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해체된 순간은 다시 붙인다고 해서 해체 이전의 순간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그리고 작가는 되돌릴 수 없는 순간에 대해 정확하게 인지하고 있다. 그렇기에 B-CONE의 작업들은 단순히 대상을 이전의 대상과 닮은 어떤 것이 아니라, 이전의 대상과 전혀 다른 어떤 것을 재현하고자 한다. B-CONE이 다시 만들어내는 송아지와 닮은, 영상 안의 대상에게서 엉뚱하게도 숀더쉽 SHAUN THE SHEEP이라는 클레이애니메이션의 숀 SHAUN의 포즈와 발투스 BALTHUS의 그림에서 심드렁하게 관객을 쳐다보는 소녀들의 응시를 떠올리게 한다. 가장 처참한 모습으로 보여주는 순진함과 해맑음, 무기력과 함께 드러나는 위험함과 기괴함, 그 복합적인 형상의 응시는 우리가 자주 접하는 미술작업들이 보여주는 응시와 다른 어떤 것이다.


출처 : 웹진 전: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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