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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ITICS

이병희 : 애브젝트, 혼성, 미디어 그리고 향유 2007

이병희(미술평론가)


예전에 제 2회 광주비엔날레에서, 생성파트의 커미셔너였던 베르나르 마르카데의 글에는 아주 긴 제목이 있었다. 그것은 <분할, 가면, 비굴함, 무의미, 변장, 이민, 브리콜라주, 배설물, 분자적인 것, 증식에 대한 고찰, 그리고 예술에서 여성, 아이, 동물, 사물 되기와 반성>이란 것이었다. 여기서 브리콜라주라는 것은 레비스트로스가 여러 가지 특성이 잘 결부되어있는 하나의 전체라고 정의한 그것이다. 

최근의 이러한 혼성은 온갖 미디어(대중 문화 매체 인 영화, 생활 매체인 인터넷 뿐 만이 아니라 심지어 예술까지도) 속에서 가속되거나, 아니면 적어도 받아들일만한 것으로 재영토화되고 있다. 사실 그러한 ‘재영토화’는 비교적 기분 좋은 일은 아니다. 불쾌한 것, 역겨운 것, 폭력적인 것, 낯선 것, 조화롭지 않은 것, 외설적인 것, 무의식적인 것, 소수적인 것 등이 귀환하기는 하는데, 미디어를 통해서‘받아들일 만한 것’으로 귀결된다는 것은 정말 환영할 만한 일인 것인지는 의문의 여지가 있다. 그것은 정말 우리 사회의 가치 기준을 근본적으로 바꿔놓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아니면 단지 무관심의 확대의 증거일 뿐인가? 


오용석의 작품들은 바로 이러한 지점들 사이에 있다. 미디어로 재현되고 심지어 소비되는 어떤 실존했던 인물들을 채집하여, 페인팅한 오용석의 그림들은 그것의 향유가 어느 지점에서 부유하고 있는 것인지를 곰곰이 생각케한다. 

오용석 그림의 소재중 하나인, 포르노 배우였던 조이 스테파노Joey Stefano(1968-1994)는 여태껏 포르노 비디오 속에서 반복적으로 소비되어온 바로 그 자이다. 그러한 미디어 소비는 영화 <링>이 경고했던 바로 그와 같이 복제되고 있는 불쾌한 것이다. 오용석이 페인팅하는 행위가, 조이에 대한 어떤 향유인지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적어도 우리가 바라보는 오용석의 그림 속에 ‘부재하는 조이’의 흔적들은 어쩌면 포르노 비디오 속의 조이의 “실재”라고, 혹은 “실재적인” 조이라고도 불러봄직 할 것이다.

엘에이 어딘가에서 입이 찢어진 채로 발견된, 연쇄살인 사건의 피해자중의 하나인 엘리자베스 쇼츠Elizabeth Shorts(1924-1947)의 신체 부분들(정확히 말하면, 없어진 장기들)을 그린 그림들은 마치 매우 심각한 지경의 페티시를 그린 것처럼 느껴진다. 수많은 연쇄살인자들을 소재로 한 영화 속에서(예를 들면, <양들의 침묵>) 살인자들은 대부분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는 남자인데 그들은 여자들을 매우 정교한 수법과 나름대로의 법칙 속에서 서서히 살해해간다. 그들에게 여자들은 페티시 자체가 된다. 마찬가지로 엘리자베스 쇼츠 또한 비슷한 연쇄살인사건의 피해자였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보는 것은 보는 것은, 사건이 증발된 피해자의 텅 빈 이미지일 뿐이다. 반복적으로 미디어 속에서 재생산되는 이미지를 보면서, 우리는 미결인 사건 자체보다는 이제는 그 살해된 사람의 이미지, 입이 찢어지고 장기가 없어진 그 시체의 이미지를 지속적으로 소비하고 있는 것이다. 오용석의 그림은 오늘날 우리가 자신도 모르게 하고 있는, 그 무의식적 향유의 방식을 고스란히 제시함으로써 우리가 스스로에 대해 수치심을 느끼게 하고 있다.

오용석의 그림에서 목신Faunus을 소재로 한 그림들은 게이 코드들을 가시화시키거나, 아니면 게이 코드 자체를 의문시 하는 작업들이라고 볼 수 있다. 목신(木神)은 주로 남성 욕망에 대한 은유 혹은 상징으로 많이 쓰인다.(심지어는 발기가 지속되는 병적 상태(목신(木腎))를 일컫기도 한다). 물론 오용석이 사용하는 파우너스의 소재는 욕망에 관한 것이다. 게이 코드 중에서 흔히 말하는 레인보우(색깔)에 따른 일련의 상징 혹은 은유들을 그린 그림 속에서 오용석은 익숙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 사이의 어떤 경계들을 가시화시킨다. 그 속에서 사회의 익숙한 코드들, 관습들 같은 차원이 무대화되는데, 그것을 통해서 우리는 시각적, 지적, 관습적 대상에 대한 우리 자신의 폭력적 시선들을 감지하게 되고, 욕망조차도 어느 정도는 익숙함과 통제되는 것 사이에서 훈육되는 것은 아닌가에 대해서 생각하게 된다. 

   

사실, 개인적으로 더 관심이 있는 오용석의 그림은, 죽은 자들인 엘리자베스 쇼츠와 조이 스테파노를 소재로 한 일련의 채집과 추적의 과정 속에서 그려진 그림들이다. 엘리자베스 쇼츠를 소재로 한 그림들은 비교적 ‘예쁘다’. 시체 쇼츠의 도난당한 장기들은 맛깔나는 어떤 달콤한 음식물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게다가 그녀의 시체 또한 풍경속의 한 장면처럼 보인다. 조각난 그녀의 몸뚱아리는, 이제 오용석의 페인팅으로 다시 그려지고 있는 것이다. 오용석은 이미지를 제대로 소비하는 새로운 방법을 제시하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어떠한 이미지라도 향유해버리거나 심지어 쾌락의 대상으로 삼는 현대인들의 게걸스러운 습성을 그대로 재현함으로써 어떤 최소한의 자기-반성을 촉구하는 것일까? 

오용석이 조이 스테파노를 그리게 된 계기는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쾌락을 위하여 포르노 비디오를 보지만, 그것을 보는 자기 자신이 낯설게 느껴지는 그 순간, 욕구차원은 멀어지고 실재적인 인물에 대한 궁금증이 생기는 바로 그 순간, 조이 스테파노는 오용석의 소재가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게이 포르노 장면의 성기들은 지극히 물컹한 육질만 느껴진다. 과연 조이는 어떤 인물이었을까. 물론 그가 다녔던 장소들을 그린 그림은 단지 풍경화처럼 보인다. 그렇지만, 조이의 흔적들은 그 곳들 어딘가에 남아있을 것이다. 일련의 생각 속에서 그림들을 보고 있노라면, 이상하고 껄끄러운 느낌이 엄습해온다. 지극히 관객의 시선과 그것의 소비를 의식하게 하는 그림들이다. 우리는 조이가 약물과다로 죽고 난 지금에도, 다양한 매체를 통해서, 그를 소비하고 있다. 이런 소비는 도대체 무엇일까. 그 불편함과 어떤 폭력적인 느낌들 속에서 만나게 되는 오용석의 그림들은 어느 지점에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인가. 어떤 부활, 혹은 구원 즉 그 사건과의 조우 그 자체를 구원하려고 했던 것일까? 


일상에서 맞이하는 어떤 낯선 틈새들은 불쾌함을 내포한다. 그리고 이는 우리의 외설적 향유에 대한 반성의 순간이 될 수도 있다. 그리고 그러한 순간은 별안간 주체로 하여금 실재적인 것을 향하도록 하기도 한다. 그러한 제스처가 만일 정신분석적 의미에서의 ‘행위’라는 계기라면, 그것은 윤리적인 것으로서의 행위이다. 물론 오용석의 페인팅이 어떤 차원에 있는 행위인지는 다소 애매하다. 그렇지만 적어도 오용석의 페인팅이라는 행위는, 그것의 특징, 이를테면(오용석이 자주 쓰는 접속사이다) 수작업적이라든가, 상상적 개입이 가능하다던가, 색채의 표현적 상징성을 마음대로 이용할 수 있다던가, 완성과 미완성 사이에서 즐길 수 있다던가 등등의 특징들을 지극히 향유하면서, 하나의 물질로 완결시켜버리고 마는 그런 행위이다. 그것은 사진이나 비디오처럼 현실의 이미지와 구성 사이에서 노출되는 간극을 향유하는 것과 전혀 다르다. 자율성과 퍼포먼스성, 그리고 장식성과 구상-추상성 사이에서 오용석은 마음대로 페인팅을 주무르고 싶어한다. 

이번 오용석의 작업들은 어쩌면 미디어 속에서 소비되는 이미지, 그것도 잔혹하고 불쾌하고 역겨운 비체들(abject), 베르나르 마르카데가 이야기했던 바로 그러한 것들을 소비하는 행위자체에 대한 어떤 간섭들을 내포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것을 만일 페인팅이라는 행위로 구원하기라고까지 칭한다면, 오늘날의 예술이 해야하는 어떤 역할에 대해서 오용석은 감지하고 있는 것인가. 아니면, 또 다시 페인팅이라는 다른 방식으로 수집, 반복 소비하고 있는, 즉 현대인의 페티쉬적 수집과 소비를 계속하고 있을 뿐인가? 이 물음에 어떤 대답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면 그 대답을 구체화하는 일은 바로 비평과 관객의 몫으로 남아 있을 것이다. 2007


'BLOW UP' 갤러리 정미소


<[Tu] 2011>수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