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용석의 그림이 위험한 것은 '회화에 대한 고민'을 앞세워 동성 간의 밀애나 신체에 대한 은밀한 탐닉으로 유도하기 때문이다. 어두운 바탕 위에 섬세한 결을 드러낸 얇은 베일의 노랑, 흘러내린 노랑, 흩뿌려진 노랑에 홀려 무심코 따라가다 보면 우리의 눈은 어느새 나뒹구는 신체의 근육, 성기, 엉덩이, 체액에서 헤매고 있다.

 

이런 부류들이 욕망의 탐닉을 적절히 은폐하기 위해 흔히 쓰는 수법은 자신들에게 중요한 것은 대상의 재현보다는 '순수한 감각'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서동진이 오용석의 그림에 대해 쓴 글이 전형적인 예이다.. "나는 그가 선호하느 색채들이 궁금하다. 그가 집요하리만치 모든 그림 속에 집어넣고 있는 흰색과 검은색의 밀도가 아름답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것이 재현하는 대상들을 다른 감각적 체험의 대상으로 운반하는 요구 앞에 멈추어 서게 된다.[...] 그것이 그에게 검붉은 혹은 혼탁한 잿빛의 실루엣으로 등장할 때 나는 흥미롭다. 그 장면을 평범한 관능적인 쾌감에서 분리시키는 것은 바로 이러한 감각적인 자질, 혹은 이미지에 추상적인 잉여를 부여하는 힘이라고 생각한다." (1. 서동진, "당신의 아름다운 주관성", [Tu](오용석 개인전 자료집), 푸른커뮤니케이션, 2011, p139-140)

 

오용석이 즐겨 그리는 대상이 아닌 그의 색과 형태에만 관심이 있다고 말하는 것은 어리석을 뿐만 아니라 기만적인 짓이다. 마찬가지 부류인 롤랑 바르트는 바로 그런 어정쩡한 상태, 숨은이해관계가 있는 것은 알지만 노골적인 속임수라고 생각하지는 않는, 다시 말해 의미와 형식을 분리하지 않는 애매한 지점에서 비로소 이데올로기가 작동한다고 실토하지 않았던가?! (2. 롤랑 바르트, <현대의 신화>, 이화여자대학교 기호학 연구소 옮김, 동문선, 1997, p293)

 

그들은 조형에 대한 우리의 순수한 탐닉을 악용해 자신들의 변태적 탐닉으로 몰아간다. 이것이 결코 우연이 아니라는 것은 오용석이 우리를 데려가려고 설정한 목표가 얼마나 정교하고 치밀한지 보여주는 그의 글에 잘 나타나 있다. 우리를 이런 섬세함 자체에도 매혹되지 않도록 항상 경계해야 한다.

 

"페티시는 대부분의 경우 성적인 용어로 사용되곤 한다. 보통 도착적 욕망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우리는 이 단어를 언급한다. 하지만, 욕망과 도착의 범주보다 페티시의 더욱 흥미로운 부분은 표피와 경계에 대한 것이다. 경계는 대상의 본질을 통해 결정지어지는 것이 아니라, 보통 표피와 표피 사이에서 만들어진다. 옷과 살같 사이의 그 미묘한 틈을 통해 우리는 타자를 구별하려고 노력한다. 우리의 주된 욕망 중에 하나는 경계를 시각화하려는 것이다. 페티시는 경계의 문제에서 아주 흥미로운 논점을 제공한다. 본질을 덮어쓰는 표피, 레이어를 넘어서는 레이어. 일상성을 넘어서는 감각. 불완전한 경계. 경계를 통해 구분되지 않는 여분. 나의 페인팅들은 그 어는 지점에서 자신들의 자리를 잡는다." - 오용석, "옷과 살갗의 사이" (3. 오용석, "옷과 살갗의 사이", <우리를 위한 셋>, 2015, p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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