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들의 침묵 1991>으로 시작된 토마스 해리스의 모티브는 안소니 홉킨스와 조디 포스터의 인상적인 연기 이후에 <한니발 2001>, <레드 드레곤 2002>,<한니발 라이징 2007>으로 이어진다. 강렬하고 비현실적이면서 천재적인 한니발 렉터 캐릭터는 2014년에 다시 티비시리즈로 다시 태어난다. 새로운 시리즈는 <양들의 침묵>이전의 한니발과 윌에 대한 스토리를 담고 있다. <맨헌터 1989>에서 잠시 보여진 윌이 이번 시리즈에서는 주인공이다.

 

<한니발 2013> 시즌 1에서 가장 흥미로운 것은 한니발과 윌의 관계이다. 한니발은 윌의 상담의이면서 동시에, 연쇄살인범이다. 윌은 그 연쇄살인범을 쫓는 FBI를 자문한다. 조디 포스터가 FBI요원인 것에 비해 윌은 범죄심리학 박사이다. 직접 살인범을 쫓거나, 프로파일링과 다르게, 현장에서 살인범의 정신과 동일한 상태의 환각에 빠지면서 살인범의 사고를 더듬는다. 살인범의 세계를 이해하면 할수록 윌은 정신적인 혼란과 착란에 빠진다. 그 과정에서 한니발은 윌을 조심스레 관찰한다. 한니발의 욕구는 파괴적이지만, 어떤 면에서는 사랑에 근접한다. 한니발은 윌 만이 자신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는 가능성과 동시에, 윌은 절대 자신처럼 되지 않는다는 사실에 더욱 매료된다. 포식자로서 한니발은 인간에 대한 호기심과 애정을 가져본 적이 없는 인물인 까닭에, 윌에 대한 감정은 친구에 대한 우정으로 포장되지만 사실은 사랑에 가깝다. 한니발의 윌에 대한 집착은 그래서 더욱더 절실하다. 한니발은 윌을 점점 극단으로 몰아 한계점에 위치하도록 강요한다. 한니발의 가학적인 사랑은 윌의 상황이 나빠질수록 더 강해진다. 결국 시즌 1은 윌이 한니발의 살인에 대한 누명을 쓰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한니발은 절묘하고 빠져나갈 수 없는 함정에 윌을 빠뜨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니발은 윌에 대한 집착을 멈출 수 없다.


<한니발>에서 가장 흥미로운 지점은 모든 육체적인 폭력은 오히려 미학적인 것으로 승화되고, 모든 관념적인 사고는 오히려 신체적인 것으로 전이된다는 것이다. 난무하는 살인과 그 살인의 결과물들은 미학적이다 못해 초현실적이다. <한니발 2014> 시즌2 역시 그것을 반영한다. 피해자의 육체는 살인자의 관념을 위해 온전히 봉사하는 일종의 재료에 불과하다. 여기에서 피해자에 대한 연민이나 고통의 장면들은 철저히 삭제된다. 오로지 존재하는 것은 오브제로서의 인체와 그것을 만들어내는 살인자의 관념만이 존재한다. 시즌 2는 한니발의 존재를 자각한 윌의 대반격이 전체적인 주제이다. 윌 역시 한니발과 공유하는 것은 피해자가 아니라 가해자의 시각을 상상할 수 있다는 것이다. 결국 <한니발> 안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그러한 관념들의 싸움이다. 어떤 부분에서 이 드라마는 지젝이 말하는 윤리성에 가장 근접한 형태의 이미지들로 이루어져 있다. 욕망에 대한 죄의식이 없는 상태, 혹은 그것을 실현한 상태, 그 이후의 이야기들이 <한니발>이다. <한니발>은 아주 완성도 높은 화면을 제시한다. 모든 영상은 관념과 심리를 반영한다. 이 안에서 실재하는 현실이나 주관성을 벗어낸 객관적인 시각이나 앵글은 존재하지 않는다. 거의 모든 장면들은 그것을 보는 자의 관념과 상상을 반영한다. 덕분에 가끔은 구토와 현기증을 불러일으킨다. 시즌 1과 시즌 2 공히 가장 많은 장면들은 윌의 상상계에 대한 것이다. 윌의 심리와 상상을 반영하는 그 영상들은 사건의 진실에 근접한다. 시즌 2에서 역시 사건의 진실에 다가갈 수 있는 이는 오로지 한니발과 윌 두 사람 뿐이기에, 둘의 유대는 더욱 끈끈해진다. 그 사이에서 나타나는 인물들의 역할은 한니발과 윌의 체스말로서의 역할이다. 종국에 체스말은 제거될 운명이다.


<한니발> 시즌1과 시즌2 공히 죄의식의 차원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굉장히 포르노그라피적이다. 거기다 <한니발>안에서 벌어지는 모든 살인들과 피해자들은 한니발과 윌의 갈등 혹은 사랑에 봉사한다. 그 둘이 연결되는 유일한 순간은 '사건'이다. 즉 이 드라마 안에서 사건의 역할은 한니발과 윌의 관념이 만나는 장소이외의 의미가 없다. 시각적으로 자극적이고, 카니발리즘을 기반으로 하는 <한니발>은 오히려 그런 선정성을 통해서 관념성을 획득한다. 그 안에서 팩트 fact, 사실은 전혀 중요한 것이 아니다. 덕분에 다른 살인사건을 다루는 많은 드라마들과 달리, <한니발>은 사건과 그것을 추적하는 탐정을 위한 것이 아니다. 어떤 의미에서 '사건'에서 비롯된 '비극'은 사라지고 존재하지 않는다. 죽음은 이미 현실적인 삶에 발생하는 비극이 아니며, 관계를 위한 순수한 전제일 뿐이다. 죽음은 <한니발>에서 <한니발>의 세상을 구현하는 전제이다. 또한, 한니발의 식인은 일종의 현실에 머무는 의식이다. 한니발이 인간과 유일하게 접촉하는 순간은 살인과 식인의 순간이다. 한니발은 인간의 육체를 지녔지만, 개념적으로는 '죽음의 신'이다. 사라마구의 소설 <죽음의 정지>에서 나오는 신체를 지닐 수 있는 '죽음의 신'의 존재에 가깝다. 한니발에게 윌이 중요한 이유는 윌이 유일하게 살인과 식인의 과정 없이 만날 수 있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그들을 매개하는 수단은 '사건'이지만, 시즌 2에서는 시즌 1과는 전혀 다른 과정을 통해 만난다. 시즌1에서 한니발은 윌의 관심을 끌거나, 윌이 사건의 본질에 다가오지 못하게 하는 과정이었다면, 시즌2에서 윌은 한니발이 모든 사건의 중심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한니발과 윌의 대립 혹은 사랑의 무대는 그들 사이에 있는 모든 사람들로 바뀐다. '죽음의 신'을 유일하게 알고 있는 윌과, 윌을 곤궁에서 벗어나게 함(그 곤궁에 빠뜨린 것이 자신임에도 불구하고)과 동시에 자신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서 노력하는 한니발의 싸움이다(온통 너무 신화적이다).


 

죽음을 둘러싼 온갖 미학과 신화 사이에서 <한니발>이 어떤 결말을 맺게 될지는 아직 알 수 없다. 단지, <워킹테드>가 시각적인 쇼크와 함께 다가와, 시즌이 거듭할수록, 지속되는 잔혹함이 과정으로 치환되고 그 안에서 관계성이 부각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미 추상화의 단계에 이른 <한니발>을 바라보면서 여러가지 의문이 발생한다. 이러한 관념성을 지니기 위해서 꼭 이렇게 정제된 살인의 형상, 재료로 치환된 육체들이 필요한 것일까. 과도한 기괴함과 그로테스크함 없이는 우리는 이러한 이야기를 할 수 없는가. 영화가 아니라 드라마라는 연속물의 형태로 매주 관찰해야할 만큼 우리가 섭취해야할 관념성이 이 안에 존재하는 것일까. 충격에 도달하지 않는 미학적인 죽음의 형상을 매주 관찰할 필요가 있는가. 이런 불편함들의 마지막에 드는 또 한 가지 생각은, <한니발>의 세계가 죽음을 전제로 만들어져 있고, 덕분에 이 드라마를 통해 일상 속의 죽음을 지속적으로 성찰하기를 강요받기 때문에 <한니발>이 나에게 불편하게 느껴지는 것은 아닌가이다. <한니발>이 포르노그라피적이라는 것은, 보통의 이미지는 상상을 통해 환상을 도출하는데 비해, <한니발>이 제공하는 이미지는 이미 너무나 환상적인 상태를 재현해 놓아서 다른 상상을 허용하지 않는다. 극단적인 환상의 재현 덕분에, <한니발>에서는 고야의 인용구(“Fantasy, abandoned by reason, produces impossible monsters.”)의 역전이 발생한다. ‘금지되지 않는 환상은 괴물을 만들어낸다.’ ‘죽음’은 일상이 되고 그것을 운용하고 지배하는 ‘한니발’이라는 괴물이 환상 안에서 처벅처벅 걸어나온다.

 

 20140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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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mylab.nayana.kr/s1/mainissue/55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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