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동진(문화평론가)


어느 미술평론가는 게이미술(혹은 그의 표현을 빌자면 호모아트(homoart))을 크게 두 갈래로 나눌 수 있다고 말한다. 요컨대 그것은 프리아포스(Priapus)의 계보와 아도니스(Adonis)의 계보이다. 이 두 명의 원(原)신화적인 인물이 게이미술의 역사를 종합한다고 말하는 것은, 물론 과장이다. 그것은 몇 가지 단서가 붙은 한에서 인정될 수 있을 것이다. 근대사회에 접어들며 동성 간의 친밀성과 성애적인 관계를 별개의 종(성의 인구학)으로 묶게 되었을 때, 그리고 바로 그런 분류에 따라 자신을 인식하고 체험하고자 발버둥쳤던 이들이 등장한 연후에, 우리는 자신의 환상을 대표할 무엇을 찾게 되었다고 말해야 옳을 것이다. 


그러므로 남성적인 욕정과 강건함의 화신인 프리아포스와 양성적인 혹은 남성의 여성적 아름다음의 권화인 아도니스가 각기 동성애적인 환상이 끊임없이 회귀하는 근원적 형상이라고 말하기 위해서는, 오직 우리의 세기, 근대적인 시대가 도래 했어야 한다고 말할 수 있다. 물론 그것이 굳이 프리아포스이거나 아도니스이어야 할 필요는 없다. 우리는 그들을 대신할 수 있는 숱한 신화적인 형상을 추가할 수 있다. 또한 적어도 20세기 후반 이후 즉 근대적인 동성애자사회가 출현한 이후, 우리는 더 이상 그런 신화적 형상에 호소할 필요가 없다. 미국의 쇼핑몰이나 번화한 쇼핑가 어디에서 마주칠 수 있는 애버크롬비 앤 핏치(A & F)라는 의류 브랜드의 쇼핑백에서 우리는 브루스 웨버(Bruce Weber)의 사진들을 손쉽게 만날 수 있다. 그리고 그가 찍은 사진들은 아마 우리 시대의 호모에로틱한 도상의 표준일 것이다. 그것은 눈부시게 아름다운 캘리포니아 청년들이고, 그를 주시하는 동성애적 욕망으로 충만한 카메라의 눈길이다. 


그러나 그 사진을 관능적인 매혹으로 받아들이기 위해 우리는 1960년대의 전설적인 우편 사진 잡지들, 흔히 피지크 픽토리얼(Physique Pictorial)이라는 잡지들이 만들어놓은 이미지들을 전제해야 한다. 그 잡지들은 남성 누드 사진을 제공하였고 그 사진들은 은밀하게 고전적인 고대의 신화들을 상연하는 척 하였다. 즉 그 사진 속에 등장하는 남자들은 프리아포스이거나 아도니스를 재연하였다. 그런 작위는 동성애적 관능을 은폐하기 위한 가장의 몸짓이었을 수도 있고, 아니면 그 사진을 소비하는 이들이 공유하던 동성애적 환상의 무대를 제공하기 위하여 정교하게 연출된 미장센이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제 부르스 웨버의 사진에서 우리는 고대 신화를 참조하는 도상들의 흔적을 발견하기가 불가능하다. 


그렇지만 그것을 조금만 주의 깊게 추적하면 우리는 그 안에서 동성애적 욕망을 시각적으로 재현하는 역사적 실천들이 매개되어 있음을 찾아볼 수 있다. 웨버의 사진은 더 이상 고대의 제전과 신화에 등장하는 레슬러와 미소년의 모습이 아니라 눈부신 캘리포니아의 태양 아래에서 윈드서핑을 즐기는 서퍼의 모습을 제시할 따름이다. 그러나 웨버의 사진이 있을 수 있기 위해서는 전 시대의 남성 누드 사진의 동성애적 미장센이 불가피하다. 그런 점에서 웨버의 사진이 웃통을 벗은 관능적인 젊은 남자를 응시하는 시선을 제공하기에 동성애적인 것이 아니다. 그의 사진적 도상이 동성애적 욕망을 투사하는 장막이 될 수 있는 것은 전 시대의 남성 누드 사진의 동성애적 미장센을 모방하기 때문이다. 


오용석의 페인팅 역시 바로 그런 환상의 궤적 안에 놓이지 않을까. 자신의 동성애적인 욕망은 나라는 주어에게 속한 것으로 머물 때, 즉 비규정적인 환상이 될 때 그것은 광기가 되고 만다. 따라서 동성애적 욕망을 품고 살아가는 이는 자신의 욕망을 자신이 소속된 어떤 정체성의 연장이자 표현으로 고정시키지 않고서 살아가지 않을 수 없다. 그렇지 않다면 그는 우연적으로 동성인 어떤 누구를 사랑하는 것이지 동성이 가진 일반적인 특성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동성애적 욕망을 자신의 무한한 광기 속으로 빠트리지 않고 공통된 욕망의 표현으로 길들이는 것은 모든 게이 예술의 일차적인 사명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즉 미치지 않기 위하여, 나의 이 욕망이 나의 바깥의 세계에도 존재하며 그 세계 안에서 순환하는 것임을 선언하기 위하여 게이들은 언제나 자신의 욕망을 모방된 욕망, 이미 존재하는 어떤 대상을 향한 욕망으로 만들어낸다. 


그래서 게이 미술은 언제나 모방의 욕망에 속한다는 점에서 도상적인 예술이 되어버릴 수 있다. 물론 그것을 나쁘다고 말할 수는 없다. 당신은 데이빗 호크니의 그림에서 무엇을 보는가. 우리가 그의 70년대의 대표적인 작품들, 이를테면 그의 대표적인 작품들, <비벌리 힐스의 샤워하는 사내>나 <어느 예술가의 초상>같은 작품을 볼 때, 사적인 전기를 식별하고 멜랑콜리한 동일시를 투입할 수 있다. 비록 그 그림을 보는 이가 그 그림들이 호크니의 연인이었던 피터이거나 그레고리 아니면 이언이며, 그가 사랑했던 금발의 아름다운 청년들과 맺은 사적인 관계와 감정을 서사적으로 제시하는 것임을 알고 있거나 모르거나, 그의 그림은 그를 보는 이(물론 게이)의 시선을 통해 게이화되고, 또한 도상화된다. 그렇지만 알다시피 도상적 재현의 규범으로부터 이탈하고 그것을 끊임없이 변형하려는 열정적인 현대 회화의 장인이자 연금술사야말로 호크니를 따라다니던 꼬리표 아니던가. 


그렇다면 게이적인 욕망을 도상화하는 예술가로서의 호크니와 반도상적인 나아가 반재현적인 현대 미술가로서의 호크니라는, 우리는 양립 불가능한 두 명의 호크니를 만난다. 나는 오용석의 작업에서 그런 이중화된 게이 미술가의 정체성을 찾아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가 “블로우 업”이라고 이름붙인 연작 작업이나, “파우누스” 연작, 나아가 “실마리를 찾아서” 작업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그런 게이 작가 혹은 게이적인 도상(양식화된 서구의 게이 포르노그라피, 조이 스테파노, 그리고 심지어 게이적인 욕망을 의인화하기 위한 신화적인 형상으로서 인용된 파우누스(!)에 이르기까지)을 수집하고 모방하는 관람자로서의 작가의 모습을 찾아볼 수 있다. 그렇지만 그런 도상적인 재현을 위한 충동을 조직하는 욕망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예컨대 다시 호크니로 돌아가자면 왜 그는 욕실에서 샤워를 하는 그의 연인 피터를 그와 같이 그려야 했던가. 수도꼭지에서 떨어지는 저 유명한 물줄기, 샤워를 하는 피터의 등을 굽힌 모습, 그것의 배경이 되는 타일벽면의 비원근법적인 평면화된 배치를 구성하는 그의 회화적 스타일은 과연 무엇에 의해 규정되는 것일까. 그리고 알다시피 우리는 그것에 주목함으로써만 호크니의 그림에서 얻을 수 있는 고유한 쾌락을 확보할 수 있다. 그렇지 않다면, 왜 우리가 굳이 호크니의 그림에서 눈길을 떼지 못할 것인가. 


나는 오용석의 작업에서 그런 흥미로운 역설적인 긴장을 찾아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그가 선호하는 색채들이 궁금하다. 그가 집요하리만치 모든 그림 속에 집어놓고 있는 흰색과 검은색의 밀도가 아름답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것이 재현하는 대상들을 다른 감각적 체험의 대상으로 운반하는 요구 앞에 멈추어 서게 된다. 그리고 그런 것들은 그의 그림에서 얻는 도상적인 쾌락보다 멀리 나를 나아가게 한다. 예를 들어 그가 그리는 클로즈업된 애널 섹스의 장면은 포르노그라피적인 것이면서 또한 게이 미술가들이 허다하게 반복적으로 인용하여온 지표적인 이미지이다. 그러나 그것이 그에게 검붉은 혹은 혼탁한 잿빛의 실루엣으로 등장할 때 나는 흥미롭다. 그 장면을 평범한 관능적인 쾌감에서 분리시키는 것은 바로 이러한 감각적인 자질, 혹은 이미지에 추상적인 잉여를 부여하는 힘이라고 생각한다. 그 때문에 게이적 도상을 제시하는 작품과 그로부터 벗어나 있는 대상들을 제시하는 작품들 사이를 관련지우는 방식을 궁금해 하게 된다. 나는 그의 소라 그림과 꽃 그림들이 아름답고 또 그것에서 점진적으로 매혹을 느껴간다. 그리고 나는 그것이 그의 주관성, 그가 시도하는 주관화의 몸짓에 다가서는 것이라고 믿는다.


그런데 덧붙일 점은 여기서 내가 말하는 주관성이나 주관화란 자유주의적 세계관에서 찾아볼 수 있는 사적인 인물의, 혹은 심리적 개인과는 전연 거리가 먼 것이다. 주관화한다는 것(subjectiviation)은 자아라는 환영적인 실체를 만들어내고 그것에 일관성을 부여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기존의 감각의 질서와 다툼을 벌이며 새로운 감각적인 세계가 실존함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를테면 우리가 열정적으로 사랑했던 호크니나 베이컨의 작업들은 온전히 바로 그 주관화의 영역에 놓여있다. 그들은 게이로서의 자신의 욕망을 제시하였지만 우리가 그들의 그림에서 보는 것은 그들이 창출한 새로운 미적 주관성에 있다. 우리가 오용석의 작업에 관심을 기울인다면 그 역시 바로 그것에 있을 것이다. 


따라서 그로부터 우리가 새로운 감각적 세계로 입장할 수 있기를 기대할 때 우리는 그가 제시한 혹은 훗날 우리에게 제공할 작품들이 주는 쾌락과 온전히 해후할 수 있을 것이다. 그의 작품을 게이적인 도상의 또 다른 사례로, 그리고 그 도상을 통해 자신의 사적인 이야기를 건네는 행위로 환원할 때, 우리는 금방 피곤해질 것이다. 이미 우리는 “미니홈피”를 통해, “나(Me)”-세대의 질식할 듯한 나의 이야기를 통해, 그리고 이를 반복하는 현대 미술의 또 다른 지루한 몸짓을 통해, 이미 지쳐있기 때문이다. 희귀한 것은 결국 또 한 번의 재현이 아니라 그 이야기를 전연 다르게 체험하도록 하는 감각적 충격일 것이다. 그것이 굳이 그가 여전히 회화를 통해 자신의 게이적 욕망을 다루어야 했던 이유이자, 이번 전시를 마련한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2007


'BLOW UP' 갤러리 정미소


<[Tu] 2011> 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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